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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계동, 동심원조경
    시작은 용산으로 당연히 서울숲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했었다. 인터뷰 질문지의 작성이 거의 끝나가던 때여서, 출력만 해놓고 읽지 못한 라펜트 블로그의 포스트 하나만 정독한 후에 한두 가지 질문을 추가하거나 문장만 가다듬으면 ‘이제 질문지는 쫑이다’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녁 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저녁 약속 자리에서 우연히 나온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이하 용산 공모) 이야기는 첫 질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자리를 함께 했던 이는, 타분야 전문가나 일반인, 학생들은 많이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조경설계사무소에서는 용산 공모에 많이들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디어 공모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예전에 그야말로 단발적인 홍보성 이벤트에 그치고 말았던 아이디어 공모 사례들도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다. 본 게임을 위해 자신의 히든 카드를 숨겨두고 싶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억원이란 상금은 학생들이 열광할만한 금액이란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용산처럼 사회적 관심이 크고 뜨겁고 무거운 사이트라면, 제대로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할테니 말이다. 지난달 에디토리얼을 ‘조경인들에게 주어진 큰 질문인 용산공원의 미래에 대해 조경가들의 지혜로운 대답이 많이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마무리했었는데, 너무 순진했던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번달의 인터뷰이는 용산 공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래서 달라진 첫 질문은 아래와 같다. 참, 이번호 인터뷰의 주인공인 (주)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동심원)의 안계동 소장은 올 상반기에 개최된 잠실 한강공원 설계공모(동심원+경원대 최정권 교수+서울대 정욱주 교수), 동탄2 신도시 커뮤니티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현상설계공모(삼우종합건축+디에이그룹+동심원)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남기준 _ 인터뷰를 위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월간 <GQ> 잡지에 “The Seoul Builders"라는 타이틀 아래 서울숲 설계자인 안소장님을 인터뷰한 꼭지였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었다. “용산은 서울숲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다. 서울의 실제적인 심장부다. 서울의 도시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용산의 부지를 전부 공원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반대다. 용산공원이야말로 자연 위주의 공원 보다는 도시에 활력을 주는 일상적인 공간이 돼야 한다.” 환경단체도 그렇고, 몇몇 건축가나 도시 전문가들은 용산공원을 최대한 생태적인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거나, 아예 극단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두자는 의견까지 제안한 바 있는데, 그것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의견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이번 용산 공모에 참여할 계획이 있는지, 또 그 인터뷰 때 이야기했던 생각들이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안계동 _ 우선, 용산 공모에는 참여할 계획이다. 상금이 큰 것도 아니고 후속설계에 대한 메리트도 없어서 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지만, 일종의 책임감이랄까? 이번 아이디어 공모전은 조경분야 교수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경 전문가들이 이 중요한 땅의 미래에 관여하고 있는데, 정작 조경설계분야에서 외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다룰 수 있는 성격의 땅이 아니라서, 이걸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프로젝트 하나를 포기해야겠지만, 원래부터 갖고 있던 몇 가지 생각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용산은 그동안 타의에 의해 막혀 있어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고, 도시의 혈관이 제대로 흘러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도시 구조가 현대적으로 짜여지기 전부터 그 땅에 들어서서, 주변부의 원활한 연결을 가로막았고 토지이용도 왜곡되었다. 단순히 담과 막사를 헐어내고 모두 공원으로 만드는게 능사가 아니다. 서울 전체를 들여다보는 거시적인 도시계획을 통해 도로망을 짜고, 토지용도를 재정리하고 필요한 만큼만 공원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보아야 한다. 아무튼 디테일한 그림을 그리기 보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강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 몇 가지를 바탕으로 출품안을 짜볼 생각이다. 서울숲 옆 동심원 남기준 _ 일부러 서울숲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울연못 부근을 좀 둘러보고 천천히 걸어왔는데, 참 행복한 동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펴보니 동심원이 서울숲과 바로 맞닿은 이곳에 사옥을 짓고 입주한 때가 2002년 10월 25일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옆의 부지 개발계획이 문화관광타운에서 공원으로 바뀐 것이 2003년 1월이다. 서울숲 설계공모가 나왔을 때, “동심원은 현장 답사를 참 쉽게 많이도 했겠다”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대표작 바로 옆에 사옥이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일 것 같다. 완공된 지도 5년여가 지나가는데, 서울숲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안계동 _ 나는 설계자와 땅과의 만남에는 어떤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래서 새로운 땅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충실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일을 가리거나 마다하진 않는 편이지만, 막상 일을 맡게 되면 약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솔직히 “아, 하던 일이나 잘 할껄, 괜히 또 이 일을 맡는다고 했네” 싶을 때도 많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을 만진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우든, 있던 것을 없애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땅과의 운명적 만남 같을 것을 믿는 편인데, 서울숲은 정말 과분한 만남이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능력 있는 분들이 했다면 이 땅이 더 좋아졌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서, 무조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그나마 내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주변 부지여건의 정리를 꼽을 수 있다. 설계에 들어가 보니, 이 땅은 용도가 다른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도로와 관련된 도시계획사업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또 부지 중 일부를 떼어내서 2만여평의 상업용지를 분할해야 했고, 정수장 개방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조경가로서 주어진 땅만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큰 요지의 땅을, 주변을 포함해서 모두 정리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주변 정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기존에 계획되어있던 40미터 도로를 25미터로 축소할 것을 제안했고, 그 도로 중에서 200미터 정도는 복개해서 터널화를 유도했다. 조각난 땅을 조금이나마 밀접하고 원활하게 접속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외곽 강변북로의 연결도로 선형을 조정하여 정했고, 떨어져 있던 유수지와 서울숲을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수중학교의 일부 토지를 공원부지와 교환하여 30미터 폭의 연결녹지를 확보했다. 원래 설계공모 때의 제안사항이기도 했지만, 막상 실시설계 단계에서 추진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몇 차례 서울시 교육청과의 협의를 통해 중학교 건물의 두 칸을 잘라내고 직사각형이던 학교 부지를 정사각형으로 모양으로 바꾸어냈다. 또 정수장도 남북을 가로 막고 있어서, 분할을 해서 중앙부를 개방해야 공원이 제대로 기능하리란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정수장은 1급 보안시설이라 학교보다 설득하기가 더 어려웠다. 결국 부시장님을 직접 현장에 모셔서 정수장 분할의 필요성을 설명 드린 후에 추진할 수 있었다. 대신 전자동 리모컨 시스템을 설치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양쪽 정수장을 오갈 수 있도록 해주어, 정수장 직원들의 불편함을 최소화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땅을 다루는 조경가로서, 수동적으로 제한된 부지 내부만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큰 시야에서 땅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주어진 시간의 반 정도는 각종 관련 협의, 공청회, 자문회의, 보고, 시민행사 지원 등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더 밤을 새워서라도 지금보다 더 세련되고 인상적인 공간을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 우연한 풍경은 없다(7): 신내동의 한평공원, 의식과 절차가 있었던 풍경
    첫 번째 사례의 사진 두 장은 2008년 만들어진 영구임대아파트단지 신내 10단지에 있는 한평공원의 조성 전과 후의 모습이다. 이곳은 아파트단지 입구에 있는 작은 쉼터임에도 세력다툼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술 마시는 남자들이 자리를 점령하기도 하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차지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밝은 공간도 아니어서, 술 마시는 곳, 그러다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었다.공사가 시작되자 주민들은 하나둘씩 모여서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술 먹기 더 좋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먹는 통에 다른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곳을 예쁘게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그래도 묵묵히 아이들과 주민들이 참여해서 퍼골라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했고 나무도 함께 심었다. 밝은 활동을 쌓아가기 위함이었다. 이곳은 술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하는 밝은 공간이라는 인식. 작은 개장식에는 돼지머리 대신 돼지저금통을 놓고 잔칫상을 벌였다. 동네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장비와 관우, 조자룡도 모두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평공원에서 술은 사라졌다. 밝은 공간이 되었다. 두번째 사례. 고양시 시청의 한 회의실, 고양시 경관계획 서포터즈(supporters)와 연구자들이 함께한 워크숍의 시작 직후와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의 장면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연구소는 고양시 경관계획 연구를 수행하면서 서포터즈를 모집했다. 일반적인 설문조사에서 벗어나 다른 조사활동을 해보자는 의도였다. 인터넷 한 사이트에 공고문을 내었고, 자신이 사는 고장에 대해 할 말이 있는 몇몇 주민들이 신청을 했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평일 오후에 열린 워크숍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런데 처음 시작 할 때의 어색함이란. 이미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서로 떨어져 앉아서는 자신의 손톱에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표한다던가, 핸드폰을 점검했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에서 어떤 이가 ‘오늘 모인 이들이 모두 내 애인 같다’라고 표현할 만큼 몇 시간 만에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조를 짜고, 조의 이름을 만들고, 조장을 정하고, 좀 남세스럽지만 조마다 구호도 만들고 외치면서 이들은 잠시나마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조마다 고양시 지도를 앞에 두고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자신이 속한 조를 위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의견을 내놓고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위의 두 사례의 풍경과 풍경 사이에는 공동의 리듬을 찾기 위한 의식이, 절차가 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주변에 사는 이들을 불러, 지나는 이들을 붙들어 그림을 그리는 의식, 나무를 심는 의식, 돼지저금통이라도 앞에 두고 막걸리를 따르는 의식을 치렀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쑥스럽지만 서로 인사를 하고 조의 이름을 짓고 구호를 외치는 의식을 거쳤다. 전시용이나 관료적 과정이 아니라 이곳이 밝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로간의 어색함을 떨치고 허심탄회하게 의사소통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의식. 그러한 의식은 그 공간에 대해, 그러한 시간에 대해 공동체적 의미를, 의도치 않은 애정을 부여했다.
  • 박병주 도시스케치전
    “도시계획가가 그리는 문화경관” 시각은 사물을 관찰하는 기본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각은 주체마다 각각 다르다. 경험과 지식의 산물로 파생된 가치관은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 도시스케치를 주제로 지난 6월 중순 인사동에서 작품전시회를 가졌던 도시계획가가 있다. 그는 도시계획 분야의 초석을 다져온 장본인이다. 홍익대 초대 도시계획학과장, 정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국토연구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박병주 교수(홍익대 명예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도시계획가와 화가라는 두 개의 직함을 가지고 계신데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저는 여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6년 동안 매일 아침 부친의 엄격한 지도 아래 붓글씨 훈련을 받았습니다. 창호지 한 장에 붓글씨를 완성해야지 그 날의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결국 그러한 경험이 해서(楷書, 일점일획(一點一畵)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서체)의 기본을 익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긴장감 속에서 수없이 선을 반복해 그리며 강한 선, 부드러운 선, 살아있는 선에 대해 고찰하게 된 것이지요. 선에 대한 이러한 공부는 도시계획가로서, 생동감있는 선을 긋는, 그런 선이 모여진 작품을 완성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스케치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고베의 공업전문학교시절부터입니다. 당시 미술개론 담당교수는 토목설계도도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형태미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유명한 다리를 순례하며 스케치북 속에 수많은 경관을 담아내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7년에 홍익대 전임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며, 펜화와 수묵화가 융합된 지금의 화풍을 정립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홍익대는 미술로서 명성을 떨쳤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저의 그림수업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이듬해 동대학에서 도시계획과를 창설하게 되는데(참고로 홍익대 도시계획과는 국내 최초의 도시계획과다), 교재를 집필하며 그림이 풍부한 참고서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국내에 관련서적이 전무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해외의 참고서적을 탐색하던 중 미국에서 출간된『Urban Design』이란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페이지에서 세로로 반을 나누어, 반면은 텍스트로 또 나머지 반은 그림으로 페이지를 구성하며 정보전달을 극대화시킨 도서였지요. 그 책을 접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림이 풍부한 살아있는 교재를 만들어야 겠구나’라고 말이죠. 정보전달에 있어 텍스트가 충당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 존재하며, 그것은 이미지로 보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해도 높은 교과서를 제작하기 위한 공부로서도 도시스케치는 필연적 선택이었습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이러한 경험과 기회는 지금의 도시스케치를 탄생시키는 밑바탕이 된 것이지요. 이번이 다섯 번째 도시스케치전입니다. 도시경관에 대한 철학도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순수미술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경관을 그리는 것을 풍경화라고 부르죠. 풍경화는 인간이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그 동경이 미술의 한 갈래로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지요. 문화는 변화하고, 또 장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러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연을 중심으로 한 문화경관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사이엔가 도시가 풍경 속으로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경관이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도시화의 진전은 오히려 사람들 마음속에 녹색 심상을 갈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관 속 문화와 역사가 담긴다는 이야기에 설득력이 생기는 거겠지요. 이러한 문화경관의 흐름은 조경이 추구하는 풍경과도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초로 도시스케치라는 이름을 걸고 전시회를 개최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중앙도시계획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한국의 국토개발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른바 산업화·도시화의 고도성장기에 처한 개발연대로서, 울산공업도시를 비롯하여, 경주, 마산, 구미 등의 도시계획, 그리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이어진 여의도, 잠실, 강남개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굵직굵직한 도시계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쾌적한 국토환경 창출을 위해서는 보는 안목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그래서 해외의 선진도시를 견학하며 각종 도시경관을 스케치로 담아, 국내 도시계획의 기초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이 바로 첫 번째 도시스케치전에 내놓은 작품들입니다. 그때가 1985년, 제 회갑 때 일입니다. 정년을 즈음해선 시선을 우리나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때는『도시건설』이란 잡지의 한 꼭지를 맡아, 연재를 하던 시기였어요. 월간으로 발행되던 것이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도시를 방문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한 페이지에 스케치 한 장과 그 도시공간에 대한 코멘트를 구성요소로 총 4페이지를 작성했어요. 한 도시에 4페이지란 제약은 방문도시의 4개의 핵심경관을 담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보이는 경관 외에도 보이지 않는 역사와 문화를 압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것이 1990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개최된 제2회 도시스케치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입니다. 국내 도시경관을 담기 위한 노력은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결국 1996년『한국의 도시 박병주 도시순례 스케치』의 출판기념회와 겸하여 열린 제3회 도시스케치전에서는 당시 국내 53개시를 대상으로 작업한 약 300여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 결과를 낳았지요. 1990년부터 1995년 3월까지 약 5년 3개월간의 대장정이었지만, 당시 국내의 모든 도시를 답사하여 작품을 만든 의미 있는 전시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후 2002년에는 국토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국토지의 표지그림 60회분을 원화전으로 가지게 되었고, 이번 2009년에 근작을 모아 이곳 인사동에서 다섯 번째 도시스케치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