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웃거리는 편집자] 지구 위험 경보, 지속 발령 중
1999년, 2012년. 이 해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1999년은 한 세기를 끝낸다고 분주했다(어려서 명확한 기억은 없지만 커서 본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 그 분위기를 알았다). 2012년은 런던올림픽으로 응원 열기가 가득했다. 오심으로 분노를 샀던 한 경기가 기억난다. ‘멈춘 1초’의 펜싱 경기다. 신아람은 개인전 4강에서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으나, 마지막 1초가 오랫동안 지나지 않으면서 끝내 패배해 국민들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낮 바꿔가며 올림픽을 보고 선수들과 같이 환호하고 화낸 해였다.
이 두 해가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건 누군가 지구 멸망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며 1999년을 지구 종말의 해로 예언했다. 그는 히틀러 출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일본 원자 폭탄 투하, 1963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등을 예언했다고 주장(각주 1)한 사람이기에 많은 이의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한 세기가 끝나는 해라 각종 종말론과 가설이 극성했다. 이로 인해 사기, 살인 등의 다양한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흉흉했던 분위기를 뒤로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2000년, 21세기를 맞이했다.
잠잠하던 종말론은 2012년에 다시 들끓었다. 2012년 12월 21일까지 표기된 고대 마야인의 달력과 “2012년 지구는 종말을 맞이한다”는 글귀는 지구 종말론을 다시 부상시켰다. 특히 2009년에 개봉한 영화 ‘2012’는 이 가설을 더 믿게 했다. 영화는 고대 마야 문명에서부터 회자되어 온 인류 멸망의 해인 2012년을 배경으로 한다. 전세계 곳곳에서 지진, 화산 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망의 2012년, 런던올림픽과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 열풍에 휩싸여 지구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2012년이라 이 영화가 방영됐던 것 같다) 덕에 지구 종말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학생이었던 나에겐 2012년의 종말론은 공포감보단 억울함을 안겼다. 공부만 하다 죽을 순 없다. 종말 전에 무얼 해야 기똥찰까 고민하며 (그래도 살고 싶었는지) 비상시 행동 요령을 습득하기도 했다. 다양한 망상을 안겼던 2012년도 안전하게 잘 지나갔다.
지구 종말하면 영화처럼 진도 1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고, 100m 이상의 해일이 육지로 밀어닥친 풍경을 떠올린다. 소설 『달의 아이』(포레스트북스, 2023)는 지구 멸망의 원인이 기후 말고 우주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했다. 어린 딸의 생일날 밤에 벌어진 사건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슈퍼문을 보기 위해 산책을 나간 부부와 딸은 어떤 힘에 의해 몸이 뜨기 시작한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아이가 먼저 하늘로 떠오른다. 엄마는 두둥실 떠 있는 딸을 잡기 위해 손을 뻗지만 아이의 손이 닿지 않고, 아이는 계속해서 떠오르며 밤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는데, 한발 늦게 온 긴급 재난 문자. “관측 이래 달의 크기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평상시보다 1.27배 큰 상태이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시민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달의 크기가 커지면서 중력이 약해져 일정 무게 이하의 것들이 우주로 올라간 것이다. 달이 점차 커져 이 세상 모든 것이 떠오르게 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종말 원인. 우주로 간 아이의 생사도 궁금했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뜨는 범위가 어린 아이에서 초등학생까지 넓어지는 걸 보니 무서워졌다. 언젠가 나도 달의 힘에 못 이겨 몸이 뜨고 우주로 날아가겠지? 우주에서는 얼마나 살아남을수 있을까?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처서와 보름달에 소원을 비는 추석이 지났지만, 폭염 경보 재난 문자가 아침마다 날라 온다. 최장 기간 폭염이다. 누군가의 예언, 과거의 글귀가 아니라 지구가 직접 자기가 많이 위험하다는 걸 기나긴 무더위로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말로만 지구를 구하자고 할 때가 아니라 이제 진짜로 더 큰 기후 위기가 오기 전에, 달이 더 커지기 전에 지구의 아픔을 보살펴 줘야할 때다.
**각주 정리
1. 이광표, ‘노스트라다무스 ‘1999년 지구종말’ 예언’, 「동아일보」 2009년 9월 24일.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아무튼 너무 심심하니까 세상이 다 자세히 보이는 거야
대부분의 물건과 공간이 막 만들어졌을 때 가장 윤이 나는 반면, 조경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식물 때문이다. 채 자라지 못한 그라스가 맨땅을 다 가릴 정도로 풍성해질 때까지, 앙상해서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무들이 잎을 틔우고 줄기를 단단하게 키울 때까지. 그래서인지 갓 태어난 조경 공간, 특히 식물이 두드러지는 곳에서는 허전함을 느끼기도 한다. 식물이 주인공인 정원에서는 그 영향이 더 커진다.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이하 정원박람회)의 본행사가 끝나고 상설전시가 진행 중이다. 뚝섬한강공원에 갈 때면 그 사이 확연히 달라진 정원의 모습에 놀라곤 한다. 궁금했다. 과연 심사위원들은 정원이 이렇게 변할 거라는 걸 알았을까. 정원의 만듦새를 평가해야 한다면 그 시기는 언제가 되어야 적절할까.
정원박람회 작가정원 설계안들이 발표되었을때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아슈라 풀 아자드(Md Ashraful Azad)의 ‘심심해지다 | 명상하다 | 고마워하다(Be Bored|Meditate|Appreciate)’(2024년 6월호 78~81쪽)가 그것. 맥락을 알 수 없는 형용사와 동사의 나열이 궁금해 들여다봤는데 내용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항상 디지털 기기에 사로잡힌 채 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심심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심심함은 정신 건강에 필수적입니다. …… 정원을 통해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앉으면 스크린이 시야를 가리며 나뭇잎, 하늘 또는 땅만 볼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땅에는 검정개관중만을 식재합니다. 여러 식물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는 각각의 식물에 집중하기 어려워 모두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식물로 구성된 정원을 만들고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특정 식물의 아름다움을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자드는 적당히 심심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명상하게 하고 이로써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는 목표를 단순하지만 명쾌한 형태의 정원으로 이루려 했다. 정원 바깥의 것들을 잊게 만드는 띠 형태의 스크린이 타원형의 영역을 형성하고, 내부에는 곡선형 벤치를 놓는다. 동그란 디딤돌이 벤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나머지 땅에는 한 종류의 식물만이 심긴다. 망망대해 위 쪽배에 탄 것처럼 벤치에 앉아, 파도처럼 일렁이는 식물의 바다에 발을 담근 내 모습을 상상했다. 아직까지 그런 정원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조성 과정에서 검정개관중이 수크령 ‘하멜른’으로 바뀌었지만, 주제를 뒤흔들 만한 변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하나의 식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 검정개관중보다 크게 자라는 하멜른이 더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 것 같아서 오히려 좋았다.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정원을 찾았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초록으로 넘실거리는 풍경은커녕 뙤약볕에 노출된 땅이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하멜른이 충분히 자라기에는 정원 조성 기간이 턱도 없이 짧다는 걸 잊고 있었다. 허옇게 드러난 맨땅에 괜히 내가 머쓱했다.
하지만 9월 중순 방문한 아자드의 정원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벤치가 잠긴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하멜른이 풍성하게 자랐다. 벤치에 앉았을 때의 시야만 가리도록 스크린을 공중에 띄워 설치했기에 그 아래로 넘실거리는 하멜른을 본 사람들은 호기심을 못 이기고 빨려 들어가듯이 정원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벤치에 앉았다. 기분 좋은 따분함에 젖어 그 감각을 즐겼다. 아자드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 같았지만 정말 자꾸만 하멜른을 뜯어보게 됐다. 지루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너무 심심해서 세상이 자세히 보였고, 그러다 보니 시를 쓰게 됐다(각주 1)는 김용택 시인이 아자드와 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간의 정원박람회가 지나온 도시와 공원의 정원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안부가 궁금해졌다.
**각주 정리
1. 김용택의 에세이 “심심해서 그랬어”(『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 예담, 2014)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심심해서 그랬어. 공부를 하다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마루에 혼자 앉아 있으면 너무 심심한 거야. 봐라, 시골이 참 심심하지. 나무도 강물도 하늘도 구름도 풀잎들도 다 심심해 보이지. …… 아무튼 너무 심심하니까 세상이 다 자세히 보이는 거야. 자세히 보니까 생각이 일어났다. 그 생각들이 내 마음의 곡식 같아서 버리기가 아까운 거야. 그래서 그냥 글로 옮겨 써봤어. 그랬더니 시가 되었어.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어서 나도 놀랐다니까. 정말 심심해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