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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정의로운 도시, 차별의 도시
삼(오)포세대 도시론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삼포세대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우려를 기성세대가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에게 갖는 정체 모를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 남녀가 건강하다면 만혼이면 어떻고 아이를 갖는 대신 부부만의 오롯한 삶을 꿈꾸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후 나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세 가지에서 더 나아가 ‘인간 관계’와 ‘내 집 장만’마저 포기한 오포세대를 접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서 사회적 관계와 주거 공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나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기쁨과 슬픔, 보살핌과 따스함, 붐빔과 다양성의 감각을 만끽 할 기회를 넓혀가는 것, 나아가 적정 비용의 지불을 통해 소박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거주하며 가족이나 이웃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시설계가 추구해야 할 핵심 덕목이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세대에게 좋은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종용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시에서의 삶, 특히 젊은 세대의 일상이 각박해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특히 더 힘들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관점이다. 출발 자체가 남들과 다른 이들은 자유 시장 경제 안에서 빈곤의 대물림, 교육 기회 박탈, 체력 저하나 건강 문제로 인한 사회적 격차를 극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책적 배려와 함께 지금보다 더욱 정의로운 도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저소득층 주거권 보장’, ‘다민족·다인종 사회 만들기’, ‘청년 창업 지원 센터’, ‘공동 육아방’이나 ‘폭염 쉼터’ 운영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만큼 지금의 도시를 더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도시 경쟁력 강화’, ‘혁신 도시 건설’, ‘(전략적) 불균형 성장’을 이루어 전체 파이를 키운 후, 이를 적절히 나눠 가지면 궁극적으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배-성장, 정의-효율성 관점의 대립은 시설 투자에 대한 정부 예산 분배부터 도시 공간의 이용과 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파인스타인 교수의 ‘정의로운 도시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과연 도시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방식을 통해 효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의로운 도시just city를 구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정의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이 과연 얼마나‘공간’과 관련되어 있을까? 조경·도시설계의 결과는 결국 크고 작은 도시 개발(혹은 재개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토지 매입, 보상, 착공 및 준공, 분양을 포함한 도시 개발 과정은 매 순간 돈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정의나 분배와 관련된 이슈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쉽지 않다. 나아가 개발 사업의 타당성 여부도 궁극적으로 지역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 도시 경쟁력 강화나 기업 브랜딩 효과 같은 효율성의 지표에 따라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도시 개발로 인해 토지의 잠재된 가치가 발현됨으로써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소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직접적인 개발 이익의 대부분은 투자의 불확실성을 감수한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게 된다. 더욱이 이들의 이익 추구 행위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규제하기도 쉽지 않다. 개발 사업에서 정당한 이익 추구와 지나친 탐욕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버드 대학교의 수잔 파인스타인Susan Fainstein 교수는 정의를 도시 공간과 이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목표로 본다(그림1). 그는 정의로운 도시란 “공공 투자와 정책이 이미 부유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혜택을 주는 도시”라고 정의한다.1 여기서 공정한 혜택이란 개발로 인해 도시민 전체가 골고루 부유해진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다. 도시 개발 과정의 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부와 효율성을 추구하는가를 묻고, 나아가 최소한의 ‘민주적 참여,’ 사회·경제적 ‘다양성 추구,’ 개발 혜택에 대한 ‘공정한 분배’ 원칙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고려한 도시 개발의 결과가 전혀 고려 없이 진행된 결과보다 훨씬 더 공정한 도시 공간에 가깝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뉴욕 브롱크스Bronx 지역에 2009년 완공된 양키스 구단 야구장Yankee Stadium을 정의롭지 못한 개발 사례로 손꼽는다(그림3). 비교적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총격 사건과 방화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지역에 다수의 관중이 이용하는 스포츠 경기장을 개발함으로써 지역 이미지 개선을 기대하는 정책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뉴욕 양키스라는 명망 있는 구단을 유치함으로써 지역 불균형 해소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파인스타인 교수는 과연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들과 부유한 구단주를 위해 뉴욕 시가 나서서 경기장 건립과 주차장 및 어메니티 시설 확보를 위한 대규모 공공 자금을 투자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야구장 부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브롱크스 커뮤니티가 오랫동안 이용해 온 오픈스페이스를 잃게 되는 기회 비용이 과연 정당한 비용인가에 대해 묻는다. 나아가 다수의 야구 경기 관람객, 특히 값비싼 VIP 관람석 비용을 지출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과연 브롱크스라는 낙후된 지역 사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얼마나 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2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양키스 야구장 개발 과정을 보다 정의롭게 하기 위해 민주성, 다양성, 공정성이라는 원칙이 중요하지만, 이 중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오히려 총체적인 의미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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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Do you like it?
열세 살 때 집을 떠났고 미국 동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홀로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초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문화적·언어적·지리적 혼돈 속에 사춘기를 보냈고, 낯선 것들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강원도 속초.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어느 작은 시골에 부모님의 집이 있었다. 지붕 넘어로 설악산 미시령과 울산바위가 보이는 작은 마을인데, 학창 시절 단기간 살았던 서울과는 또 너무나도 다른 육지 위의 섬 같은 이곳을 나는 ‘내 집’이라부르며 자랐다. 막상 익숙해지려 하면 떠나게 되었고, 다시 돌아와 보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처럼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빨리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세월 속의 변화가 느껴지는 공간이라면 ‘장소’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항상 스쳐가는 방문객처럼 살다보니(뭐, 원래 다 그런 것이겠지만), 장소란 한 곳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어디든지 동행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무형적인 요소로 이루어졌을 거라 믿게 되었나보다. 그래서인지 공간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의도나 요지, 혹은 게임의 룰로서. 익숙한 것보다 생소한 것이 더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생소해서 편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물질적인 창조와 공간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조경 디자인의 일반적인 접근법에 비교하면 조금 벗어난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오히려 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해석하고 또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고방식이지 않을까.어쨌든 조경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의 눈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네 가지 설계 방식을 적어본다.
01 물어보기: Do I like it?
다루는 대상이 뭐든지 간에 조금이라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또 그러한 시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갈망과 의지가 설계하는 방법을 주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방법은 항상 바뀌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하기 때문일까. 매번 똑같지 않다. 사소한 설계 디테일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보는 시각과 디자인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자연스럽게 내가 설계하고 싶은 ‘이상’도 변화한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도하는 설계 방법도 같이 변하게 될 것이다.
큰 그림, 즉 추구하는 바가 같더라도 객관적인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다. 디자인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것. 아무리 과학적인 접근을 취하더라도―하는 척만 해도!― 결국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가 생산된다. 같은 맥락에서 사이트의 모든 챌린지를 단번에 풀어주는 디자인 전략이 있다고 해도, 내가 신나지 않으면, 즉 자신의 설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결국엔 망한 전략이다.
설계 대상의 수많은 디테일과 여러 가지 상황 안에 나를 집어넣고 그때마다 받는 느낌이 어떤지, 내가 그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가며 설계한다. 디자인 안에 들어가서 디자인하기다. 따라서 설계 중 항상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취향과 시각이다. 그것이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매체라고 생각한다. 사이트를 읽든 소재를 고르든 설계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정보를 선택하고 걸러내며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구―취향과 시각―가 빛바랬거나 너무 익숙하다거나 또는 저만의 특별함이 사라졌다면, 설계가 잘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취향과 시각에는 좋고 싫음의 잣대가 적용되어 있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 정말 많은 것을 봐야 하고 접하고 또 물어봐야 한다. 또한 피하고 싶은 디자인 종류―나는 녹색만 입혀 놓았거나, 비전이 약하거나, 오버 엔지니어링된 건축이나 조경 사례를 좋아하지 않는다―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설계 스튜디오 때 학생들의 설계 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So, do YOU like it?”
다시 말하지만, 방금 설명 받은 그 학생의 설계 안을 놓고 묻는 말이다. 설계안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던 학생들도 의외로 많이 머뭇거린다. 간단한 “Yes!”나 “No!”가 아니라, 대부분 한숨 섞인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디자인하는 데 바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눈치다.
어떤 계기로 이 질문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처음으로 던지기 시작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대학원생 시절의 나에게 한번만이라도 물어봐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남의 눈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의 것을 찾으려 의식하고 대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Do I like it?’이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지며 설계하다 보면 데드라인에 쫓겨 허겁지겁 마무리하는 식의 설계안이나, 잘 마무리된 것 같으나 어딘지 특별함이 없는 설계안을 내놓는 일이 줄어든다. 보통,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대략 네 가지 레벨로 나뉜다. 1) 숨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거나 “I didn’t do it”, 2)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부족하거나 “I don’t believe in this”, 3) 모두 별로라고 하지만 나에겐 좋아 보이거나 “I believe in it”, 4) 전체적으로 부족해도 어느 한 구석 잠재력이 보이는 “There’s something in there” 프로젝트로,언젠가 다시 제대로 써봐야 할 밑거름 같은 설계안들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설계와 감정이 많이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스스로 열심히 대화하며 설계하는 것, 나의 직감과 능력의 바로미터를 꾸준히 셀프 검진하는 것이 나의 설계 과정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방법이다.
사이트나 소재를 해석하는 것.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대상지 분석(site analysis)은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지난 몇 년간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서 대부분의 대상지 분석이 해석(interpretation)이 아닌 말 그대로 분석에서 끝난다는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석은 서술(description)이고 해석은 프로포지션(proposition), 즉 논의가 있는 개인적 편향이라는 점이다. 물론 분석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맞춰보고 들어보면 어떤 개인의 견해가 생기겠지만,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분석에서 끝나면 자기 자신만의 유일한 디자인은 나오기 쉽지 않다. 해석은 분석된 내용이 디자이너를 통해 한 번 더 걸러진 정보다. 디자이너만의 시각으로 사이트나 소재를 소화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보면 두 결과물이 비슷할 수 있으나, 창의적인 해석을 의도적으로 진행하면 설계 과정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변화는 우선 드로잉에 나타난다.
가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조경을 하는 사람으로 나무의 생물학적 특징과 습관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무를 평-단면 형태의 아웃라인으로 동그랗게만 그릴까. 물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역동적인 성질이 모두 제외된 볼륨이나 덩어리, 물을 담고 있는 컨테이너로 대신 그린다.
조경에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 묘사 기법(representational habit)때문에 보다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드로잉에 드러난 것처럼 조경다운 시각이 결여된, 어찌보면 너무나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태도로 설계하고 있는 것 같다.
2년 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진행한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런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막대 사탕 모양의 나무는 No’. 아이콘이 아닌, 나무의 아키텍처(architecture)를 구축하는 문화적·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고 그리기, 즉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소재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설계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가지치기’ 같은 도시 행정 속의 문화적 의도가 살아있는 소재(living material)의 형태를 어떻게 구체화시키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도시 수목의 관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스튜디오의 쟁점 중 하나였다. 나무의 캐노피를 생태적 산물이 아닌 변형 가능한 건축 구조물로 본 셈이다.
설계는 게임이나 놀이처럼 진행됐다. 우선 학생들은 자기만의 규칙으로 나무를 관찰하고 그려나가는 것 자체를 아주 재미있어 했고, 그래서인지 그 과정에서 생산된 그림들 역시 매우 신선했다. 물론 오차도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학생 14명의 14가지 규칙을 모두 기억해야 했던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개개인의 규칙을 바탕으로 ‘나무를 얼마만큼 언제 어디에 심으며 어느 부분을 관리해 주어야 원하는 형태의 도시 숲이 생성될 수 있을까’라는 렌즈를 통해, 익숙하다고 여겨왔지만 여전히 생소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03 노동하기
도면 없는 설계, 즉 노동도 설계 방법의 하나다. 물론 일시적인 설치 작품(temporary installation)이나 골목, 정원 등 작은 사이즈의 프로젝트에 해당되는 말이다.
대학원에서 건축 디자인을 가르치는 남편도 강의식 수업이 많다 보니 가끔 무작정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우선 시작하고 본다. 가벼운 스케치 몇 장과 250달러를 들고 바로 재료를 사러 나간다. 5일 만에 끝내겠다는 플랜도 짠다.
아침과 오후엔 수업과 미팅이 있어 밤 8시가 되어서야 이 게릴라 설계 노동이 시작되었다. 새벽 두세 시에 건축학교 빌딩 앞마당에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당시엔 아직 아이가 없을 때라 이런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를 발견한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뭐하냐고 물
어본다.
“We are just making! 그냥 만드는 중이야!”
“Making what?! 뭘 만드는 데요?!”
“We don’t know yet! I’m sorry! 우리도 아직 몰라! 미안해!”
그리고 5일 후, 안에선 사람들 머리만 보이고 밖에선 몸만 보이는 헤드 박스가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 할로윈 파티에 앞서 비가 너무 많이 온 것이 설계에 영향을 미쳤던 걸까. 박스 내부엔 마일라(Mylar)와 조명을 사용해 다들 물속에서 나오고 있는 듯한 (혹은 가라앉고 있는 듯한) ‘가짜 공간’을, 외부엔 본격적인 파티에 앞서 몸을 풀 수 있는 작은 에피타이저 같은 장소가 만들어졌다.
설계 과정에서 모델(physical model)을 활용해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는 것처럼, 헤드 박스를 만드는 ‘노동’은 실시간 설계다. 비용과 시간에 제한을 두고 직접 지으면서 설계 결정을 해 나간다는 것은 그리면서 하는 설계와는 다른 종류의 설계법과 디테일을 배우게 한다. 심플한 구조에도 무게가 꽤 나갔던 박스의 나무 프레임이 1인치도 안 되는 가는 막대기 네 개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지 처음엔 몰랐던 것처럼.
설계란 꾸준히 다양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에 익숙해질 때 쯤 또 다른 설계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도면 없는 설계를 한다. 헤드 박스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찾는다면 도면 베이스의 설계 시 필요한 현실적 감각을 기르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다.
04 설계 안하기
마지막으로 설계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자세도 중요한 설계 방법 중 하나다. 즉, ‘없음’이 도구다. 우리가 사이트나 소재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클라이언트와 꾸준한 대화를 하는 이유도 모두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새로 짓거나 개조한다고 해서 어떤 공간이 반드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보스턴 시청 건물과 광장에 관한 공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모 대상은 거대한 콘크리트 외부를 자랑하는 브루탈리즘(brutalism0 건축으로,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못 생긴 빌딩 중 하나로 뽑혔던 나름 역사적인 건물이다. 그만큼 이 건물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가 많았다. 아직도 수많은 설계 회사와 건축 대학원에서 스튜디오 소재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설계안이 나왔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우린 또 다른 설계안을 제안하기보다 과대 선전을 통한 이미지 개선 캠페인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시청 빌딩이 건축적으로 혹은 도시학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빌딩을 또 다른 문화를 생산하는 촉매제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사실 이 건물을 좋아해 애초부터 별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다).
행정 건물과 대중문화가 서로 어우러진 시청의 미래는 연상(association), 모사(replication), 아이콘화(iconization), 그리고 전파(dissemination)라는 전략을 통한 물질적 개조가 아닌 대중 인식의 개조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계를 하지 않았다기보다 설계의 정의를 넓힌 것이다.
이러한 예가 아니더라도 설계 도중 스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 상황에 따라 잠시 생략하고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아이디어가 곧 ‘설계’고 ‘방법’일 것이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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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알렉산더 가빈
AGA 공공영역전략컨설팅 설립자 겸 대표
예일대학교 건축학부에서 ‘도시연구 개론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City’이라는 인기 과목을 48년간 강의하며, 뉴욕 시 도시계획국에서 46년간 재임해 온 원로 도시계획가 알렉스 가빈을 그의 맨해튼 사무실 겸자택에서 만났다. 벽을 가득 메운 빛바랜 책과 닳은 페르시안 카펫에서 풍기는 노학자의 풍모와 달리, 장난스런 눈빛과 나비넥타이를 곧추세운 빳빳한 셔츠는 그가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장의 도시계획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필자는 더운 날씨에도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이유에 대해 먼저 물었는데, 의외로 단순히 클래식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성향이나 고집스런 직업적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건축가로서 파리에서 일하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잉크를 이용해 도면을 그리던 디자이너들에게 자칫 축늘어져 작업을 망칠 수도 있는 긴 넥타이는 절대 금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비넥타이는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발언 또한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가 되었다. 도시 분야에서 고전적 교과서가 된 『미국의 도시: 성공과 실패The American City: What Works, What Doesn’』는 이미 세 번째 개정판을 냈다. 또한 그는 『공원, 레크리에이션, 오픈스페이스: 21세기의 의제Parks, Recreation, and Open Space: A 21st Century Agenda』, 『도시 공원과 오픈스페이스Urban Parks and Open Space』, 『공원: 살기 좋은 공동체를 위한 비결Public Parks: The Key to Livable Communities』 등을 펴내며 도시계획가로서 공원에 대한 철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제공해 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시설계포럼Forum for Urban Design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공유토지신탁Trust for Public Land의 국가자문위원회, 스카이스크레이퍼 뮤지엄Skyscraper Museum 이사회, 에드먼드 베이컨 재단Ed Bacon Foundation, 미국 도시 및 지역 계획 역사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계획가로서 뉴욕의 올림픽 유치 본부를 지휘했으며, 세계무역센터 붕괴 후에는 로어 맨해튼을 재건하는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책임자로 일했다. 최근에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의 거대 오픈스페이스인 벨트라인BeltLine 계획을 수립하고 실현하는 데 노력해 왔다. 벨트라인은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의존 도시이자 스프롤 경관의 대명사인 애틀랜타를 둘러싼 35km의 환형 공원 체계로서, 전차 등 대중교통 노선이 트레일과 결합된 형태다. 20여 개의 공원이 연합해 점유하는 면적은 약 520만m2에 달한다. 도시 중심부로부터 대개 2.5 ~5km의 거리를 두고 순환하는 벨트라인은 애틀랜타의 도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으며 폭 넓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계획 발표만으로도 이미 지역 경제에 막대한 부흥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현재까지 약 3,600억원의 민관 개발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9,000여 세대의 신축 주거 개발, 8만m2의 신축 상가 개발 등 1조원 이상의 민간 부문 투자를 유도한 것으로 추산된다. 무엇보다 벨트라인은 고속도로에 의존해 온 시민의 생활권을 휴먼 스케일의 걷는 공간으로 이동시킨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벨트라인은 앞으로 약 17년에 걸쳐 완성될 예정인데, 하이라인 같은 단일 용도의 선형 공원과 달리 상업, 산업, 주거가 복합적으로 긴밀히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도시 오픈스페이스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Q. 뉴욕 태생이라는 개인적 배경과 도시계획에 대한 관심이 연관되어 있나?
A. 나는 맨해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1958년 예일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는데, 4학년 때 룸메이트로부터 갓 출간된 책한 권을 선물 받았다.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이티Haiti로 휴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읽었던 시간은 내 인생을 어디에 쏟아야 할지 깨닫게 된 전환점이었다.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책에 나온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정열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크리스토퍼 터나드Christopher Tunnard의 수업을 들었고, 점점 더 도시계획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도시계획학과장이던 터나드와 건축학과장이었던 찰스 무어Charles Moore를 찾아가 도시계획과 건축의 복수 학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멋진 생각이라며 찬성했고, 나는 예일역사상 최초로 두 가지 학위를 동시에 받게 됐다. 졸업 후 뉴욕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몇 달 후 뉴욕도시연대New York Urban Coalition에서 주거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도시연대는 1960년대 뉴욕의 폭동 이후, 노동 운동가, 사업가, 지역 사회의 리더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일 년 정도 일한 후, 당시 린지John Lindsay 시장 휘하에 있던 도시계획국 주거 부문에 합류하게 되었다. 빔Abraham Beame 시장이 부임한 후에는 주택국 부국장으로 일했고, 에드 카치Ed Koch 시장 시절에는 신설된 종합 계획comprehensive planning 팀장에 임명되어 당시 계획 국장이었던 밥 와그너Bob Wagner를 도왔다. 그러다 1980년에 공직을 그만두고,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15년간 약 1,000여 개의 임대 아파트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줄곧 예일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매년 3과목씩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동산업계에 있는 동안 쓴 책 『미국의 도시The American City』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을 가져왔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갖가지 자문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댄 독토로프Dan Doctoroff였는데, 그는 뉴욕에 올림픽을 유치하길 원했다. 우리는 1996년부터 2005년, 런던이 뉴욕을 제치고 2012년 올림픽 유치권을 따내기까지 십여 년 간 함께 일했다. 그 와중에 로어 맨해튼 개발 회사의 계획 개발 디자인 부서를 맡아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2015년07월 /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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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디테일] 잡초, 다르게 볼 줄 아는 자가 누리는 사치
첫 번째 대화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임 소장(건축가)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게 된 성북동 현장을 방문했다. 성북동이라는 말에 한껏 들떴다. ‘우리도 이제 부자 동네에 한건 하는구나!’ 이렇게 혼자 헛물을 켜며 도착한 곳은 건물이 7평, 그 앞 장방형 마당 또한 무려 7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너무 넓어서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축주는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서 아파트를 처분하고 단독 주택을 짓게 되었다며 이 대저택의 출생을 설명한다. 그 분의 꿈을 이루어내야 하는 중 대한 사명을 띠게 된 것이다. 예산은 얼마냐고 물었다.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럼 어떻게’ 우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은 아이디어가 오고가는 와중에 건축주가 한마디 거든다. “성북동 언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풀을 써보면 어떨까요” 경비를 아끼자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집에 들풀이 자라는 마당이 있으면좋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과연 될까’하며 머뭇거렸지만, 현장을 나서면서 마주친 성북동의 오래된 담장 틈으로 자라고 있는 고들빼기와 민들레를 보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두 번째 대화
조경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놀러 왔다. 파주 근처에 지어지는 건물 중정에 식재 공사를 하고 있다며 현장 사진을 보여 준다. 강원도에서 멋지게 자란 흉고직경 20cm의 낙엽교목을 이식하는 이미지였다. 부러웠다. ‘우리가 만들 정원의 총공사비로는 저런 나무 한 주 밖에 못 사겠네’라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에 에둘러 흠집을 잡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만. ‘처음 태어난 땅에서 어렵사리 자리 잡고 살고 있던 나무였을 텐데…, 뿌리에 온통 칼질을 해대며 뽑아내 이 먼 거리를 싣고 와서 낯선 땅에 심는 게 마땅한 일인가…, 그것도콘크리트 바닥 위에다가….’ 그러다가 나 역시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가만히 있는 식물에게 몹쓸 짓을 해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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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알토 사옥 옥상정원
빛 공장 위에 떠있는 작은 천국
별천지라는 말이 여기만큼 딱 맞는 곳이 있을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경기도 외곽, 난개발로 이름난 용인시 한 구석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무심히 박혀있는 공장들 틈에서 밤이 되면 그 존재감을 달리하는 한 건물이 있다. 빛을 연구하고 만드는 알토 사옥이다. ‘라이트 빌딩Light Building’이라는 정직한 이름을 가진 이 건물 옥상에 아주 특별한 정원이 있다.
2013년 경기정원문화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알토 사옥 옥상정원(이하 알토 정원)은 직원과 방문객에게 휴식과 평화를, 그리고 문화 행사와 연회의 기쁨을 제공하는 열린 정원이다. 이곳은 정원의 사전적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다. 정원garden의 어원이 ‘구획을 지어gar, gher, enclosure’ ‘이상향을 만드는 것eden’이라고 한다면, 알토 정원의 단아한 외관 뒤에 숨은 구획과 위요의 기법,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장치들은 치밀하게 작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건물을 빠져나와 정원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구나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 감탄사는 건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속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극적 반전에서 비롯된다.
알토 정원의 신비함에는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건축적·구조적 장치가 숨어 있다. 주변 건물의 보기 흉한 대형 광고판이나 골프연습장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위해 옥상 파라페트와 가벽의 높이가 정확히 계산되어 설치되었다. 몇몇 나무들의 위치 역시 바깥으로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꼭 그 위치에 있어야 했다. 반면 정원은 주변의 산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다. 적절한차단과 시각적 연계를 통해 만든 위요와 차경은, 대지 경계선 안쪽의 디자인 이전에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정원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식물의 크기를 고려하여 화단의 높이가 달라지고 바닥의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 목재와 화강석으로 마감한 바닥면은 슬래브에서 띄워져 있다.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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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인재개발원
Samsung Electronics Leadership Center
삼성전자 인재개발원은 삼성전자 최초의 연수원 시설로 창립 45주년을 맞아 2014년 개원했다. 용인시 서천지구에 위치한 이 연수원의 서쪽 입구 방향에는 공동주거 단지가 위치하고, 북쪽과 남쪽으로는 서그네근린공원과 농서근린공원, 그리고 동쪽으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이 접하고 있다.
대지는 나지막한 산에 위요되어 아늑한 느낌을 주지만 주변 근린공원 산책로의 레벨이 부지 레벨보다 높아서 시민들에게 시각적으로 노출된다. 또한 연수원 내로 생태 통로가 관통하면서 구조물이 노출된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과 붙어 있어 미세한 소음이 전달되며 공장이 경관을 저해한다.
건축 설계는 ‘건축의 틀을 넘어Beyond the Frame’라는 개념으로 내부 공간에서 경관을 품을 수 있도록 유리를 많이 이용했다. 건물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러한 건축 개념은 조경 계획과도 이어진다. 한국의 전통 터 잡기 방식에 착안해 경관의 틀을 짜는 방식과 차경 기법 등을 조경 설계의 모티브로 삼고자 했다.동쪽에서 발원한 물은 대지를 관통해 서쪽으로 흘러 연못으로 이어진다. 물의 흐름에 따라 경관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도록 유도하고 이는 전체 공간이 유기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매개가 된다. 전체 공간은 크게 전정, 중정, 후정으로 구성된다.
작은 언덕들Wooded Knoll
연수원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건물의 입구까지 가는 동안 보안 영역과 울창하게 숲을 이룬 작은 산을 지나가게 되는데, 지면의 레벨이 3m 정도 올라간다. 이 작은 산은 정문 앞에서는 주거 단지와 연수원을 분리하는 역할을 해주며, 운동장으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한다.
이 산에는 주변 근린공원에서 자생하는 나무와 유사한 수종을 도입해 주변 자연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했다. 진입부뿐만 아니라 중정 부분에서도 작은 곡선 마운딩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주변 자연과의 연결을 위한 장치다.
기본계획 Thomas Balsley Associates
기본설계 Thomas Balsley Associates, 제일모직
실시설계 제일모직
건축설계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시공 제일모직 리조트·건설 부문
위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로 59
대지면적 57,146.80m2
조경면적 23,435.06m2
준공 2014. 5.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은 1955년 조경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산업시설, 주거 단지, 공공시설, 오피스 등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국내 조경의 역사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해 오고 있다. 전문 역량과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최대의 식물 연구소를 비롯해 디자인, 영업, 소재 조달, 시공,조경 관리 등 조경 사업 관련 전 조직이 구축되어 있어, 외부 공간의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 제일모직 / 토마스 바슬리 어소시에이츠 + 제일모직 / 2015년07월 /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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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옥상정원
Seoul National University Library Roof Garden
올해도 가문 해인 듯하다. 몇 년 전부터 정원을 짓고 관리하면서 비가 언제 오는지 예민해졌다. 걱정에 잠깐 들려 본 옥상정원에는 역시나 식물들이 축축 쳐지고 있다. 해질 무렵 다시 와서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팀워크로 가능했던 프로젝트
중앙도서관 옥상정원과 관계를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다. 2013년 6월, 도서관 측의 요청으로 관정도서관이 들어설 자리에 있던 교목의 이식 계획을 세우고 이식 공사를 감독했다. 이를 인연으로 도서관신축과 관련된 조경 컨설팅을 할 기회가 있었고, 이후도서관장의 요청으로 중앙도서관 옥상정원을 설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여걸이면서도 꽃을 사랑하는 풍부한 감성을 가진 관장은 아무런 예산이 배정되어있지 않았던 옥상정원 공사를 위해 모금을 하고, 사례가 될 만한 공간을 함께 답사하면서 의견을 교환하고,설계·시공 과정 중 행정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전방위로 노력한 세련된 클라이언트였다. 정원 조성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은 또 다른 여걸은 바인플랜의 윤미방 소장이다. 연구실에서 진행한 기본설계를 실시설계로 발전시키면서 최선의 디테일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또 함께 시공감리를 진행하면서 윤 소장은 설계 의도대로 온전히 시공될 수 있도록 매진하는 파트너십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설계 능력을 높이려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실제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팀워크를 잘짜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한 경험이었다.
설계 개념이 뭐냐고요
2014년 6월말, 뜨거운 초여름 햇살 아래 진행되었던 정원 공사가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마무리되었다. 신축 도서관이 완공되기 전이었지만 건축물과는 별도의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던 옥상정원이라 자체적인 준공식을 열게 되었다. 총장과 내빈을 수행해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설계 개념이 무엇이냐는 당연히 예상된 질문이 던져졌다. 공간 구성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했지만 인상적인 대답으로 들리지는 않은 듯했다. 뇌리에 남는 시적 감상을 전달하지도, 많은 사람이 주목할 만한 명분을 제시하지도 않았으니그럴 법 했다.
설계의 의도를 되짚어 보면, 옥상정원을 캠퍼스 다른 외부 공간과 비교해 월등히 세련된 모습으로 구현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다. 이를 설계 개념이나 의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학 구성원이 관성적이고 식상한 조경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깔려있었다. 또 다른 욕구는 옥상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어떻게 옥상정원에 투영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큰 하늘과 통쾌한 뷰, 그리고 사막 위에 서 있는 듯한 단순 거대한 공간감. 구획되고 다듬어진 이후에도 이 후련한 기분이 스미듯이 이용자에게 전달되었으면 했다. 만약 이 감각이 옥상에서 지워진다면 좋은 설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앙도서관 옥상정원
기본설계·디자인감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LUL(Landscape Urbanism Laboratory)
실시설계·디자인감리 바인플랜
설계팀 정욱주·원종호(LUL), 윤미방·박현진·양희우(바인플랜)
시공 대우건설
발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위치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면적 6,825m2
완공 2014. 6.
관정도서관 중정
기본설계·디자인감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LUL
실시설계·디자인감리 바인플랜
설계팀 정욱주·최진영·김상권(LUL), 윤미방·박현진·김재영(바인플랜)
발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위치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면적 120m2
정욱주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시에 올린 파트너십(Olin Partnership)과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조경가로 활동하면서 대규모 도시 공원, 대학 캠퍼스마스터플랜 프로젝트 등을 수행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이며, 도시 정원과 대형 공원, 문화적 장소 구성에 대한 디자인 리서치와 실천을 행하고 있다.
- 정욱주 /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LUL / 2015년07월 /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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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
1.
작년 가을, 박원순 서울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선포했다. “서울역 고가는 도시 인프라 이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므로 “원형을 보전하면서…하이라인 파크를 뛰어넘는 녹색 공간으로 재생시켜 시민에게 돌려드리겠다.…서울역 고가가 관광 명소가 되면 침체에 빠진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다. 산업 유산이므로 남겨서 하이라인처럼 명소로 만든다는 낭만적 논리는 국제 설계공모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졌다. 논란과 우려 속에서 강행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초청사에서 박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역 고가는 근대 서울의 얼굴을 담고 있는 역사 유산이자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서울…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추억의 공간입니다.…서울역 고가를 무조건 철거하기보다는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하고…사람 중심의 보행 거리로 탈바꿈시키고자 합니다.…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조성해 도심의 문화 유산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주변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계 지침서에 활자화된 공모의 목적은 “보존을 통해 도시 기억과 시민 공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서울역 고가는 한국의 근대사를 대표하는 산업 유산이므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공공의 보행로로 재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쟁점은 결국 서울역 고가를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볼 수 있는가로 수렴된다. 이번 공모전은 이 이슈에 대한 해석과 해법을 중심에 놓았어야 한다. 서울역 고가는 196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인구 집중과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한 서울 입체 도시화 사업의 산물이다. 그 직전에 도쿄에서 진행된 파괴적 입체 개발의 모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울역 고가를 비롯한 당시의 고가 도로들은 개발의 상징이자 근대화를 과시하는 경관적 표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교통 정체를 유발하고 안전을 위협하며 시민의 보행권과 조망권에 장애가 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서울에서만 16개의 고가가 철거되었다. 서울의 관문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서울역 고가는 철거해야 할 위험 시설로 이미 2007년에 진단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서울역 고가는 과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산업 유산인가1 옛 것이면 가치를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재활용의 ‘착한’ 이미지에 편승한 포퓰리즘적 논리는 아닌가?
공모전에 초청된 일곱 명의 조경가와 건축가에게는 바로 이 핵심 쟁점을 탐구하는 작품을 요청했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 도시 개발의 산물인 고가도로를 산업 유산의 하나로 재평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과거를 지워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쓰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디자인적 해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철거하여 기형적 경관을 바로잡고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선을 그어 기록할 수도 있다. 구조체와 재료의 일부만을 살려 전망대로 쓰는 방법도 있다. 철로로 단절된 구역의 고가만 남겨 보행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한’ 조건의 설계 지침은 설계의 창의적 스펙트럼을 좁힐 수밖에 없다. 강한 지침을 따르며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938m의 긴 고가를 본래의 선형대로 유지하면서 고가 주변의 도시 조직과 적절히 연계되는 보행 위주의 공원을 제안하는 일뿐이다. 서울역 고가―그것이 근대 산업 유산이든 아니든― 자체에 대한 해석을 봉쇄당한 디자이너, 그는 고가 상부의 미려한 포장, 시각적 부담이 없고 동시에 안전에도 문제가 없는 난간, 보행의 원활한 흐름과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장치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화장술이 관건인 것이다. 결국 서울판 하이라인이 요구된 셈인데, 역설적이게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하이라인을 재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기 쉽지 않은 설계 과제다. 다음에서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제출작들은 기초화장, 네일아트, 원더브라 정도의 제한적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데 고심했다.
2.
제목을 달지 않은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Topotek 1)의 제출작은 ‘강한’ 설계 조건에 역으로 대응해 서울역 고가를 화려한 주연보다는 충실한 조연으로 규정한다. 가장 ‘약한’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설계적 개입을 전략적으로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비움과 개방을 통해 역동적인 유연성을 꾀한 이 작품에는 아무런 구조물이 없다. 고가 전체를 하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단순한 공간미를 주고 고가 가장자리에 선형의 벤치를 겸할 수 있는 목재 데크의 선큰 플랫폼을 놓는 게 전부다. 프로그램별로 공간을 구획하지도 않는다(그림1). 거의 전 구간이 동질적이고, 그 위에서 일상적 이용과 계절별 이벤트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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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제대로 된 쇼를 하라
서울역 고가 공모, 진화인가 퇴보인가?
흔히 부정적으로 얘기할 때 쓰는 ‘쇼를 하고 있네’의 천박한 의미의 ‘쇼’가 아니다. 멋지고 유려하며 감동을 주는,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브로드웨이의 공연과 같은 ‘쇼’. 뉴욕의 더 로케츠나 파리의 물랭루즈와 같은 볼거리가 화려한 ‘쇼’. 수를 부리고 허를 찌르는, 짜임새가 탄탄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정치적 ‘쇼’. 무엇이든 간에 ‘쇼’의 핵심은 흡입력, 구성, 그리고 명분이다. 이 세 가지가 잘 갖춰지면 관객은 몰두한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는 흡입력도 없었고 구성도 빈약했으며 명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물론 멋진 쇼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역 고가는 장소적 특성으로 인해 그 이전의 마포석유비축기지, 그리고 그 이후의 세운상가 공모전보다 훨씬 더 주목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서울의 대표 프로젝트로 청계천과 한강 르네상스가 있었다면 이번 시장에게 서울역 고가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제대로 인정받는 쇼를 통해 명분도 얻고 무얼 하든 따라붙는 정치색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라인으로 갔다.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먼저 하이라인은 서울역 고가처럼 철거 논의가 많았지만 결국 공공 공간으로 지켜낸 프로젝트다. 그리고 성공 사례다. 드러내 놓고 얘기할 순 없었겠지만, 서양의 것이라면 그저 좋다고 여기는 천박한 시민 의식도 살짝 건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해도 될 것을 굳이 멀리 뉴욕까지 갔다. 파란하늘, 선명한 색감, 하이라인의 시크하면서도 야생적인 느낌, 고풍스러워 보이면서도 현대미가 물씬 풍기는,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It’s show time! 여기까지만 보면 쇼의 시작은 성공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이라인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라인의 빼어남이 서울역 고가의 잠재력을 잠식했다. 많은 논란 끝에 고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 왜 그것이 하이라인과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장소를 표방할 순 없었을까? 하이라인이 생기기 전의 성공 사례로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가 있었다. 그러나 하이라인은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냈다. 정말 쇼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면 서울역 고가에 올라가서 해야 했다. 하이라인 위에 올라 서울역 고가를 얘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본편이 아닌,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쇼를 보는 관객은 혼란스럽다. 하이라인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서울역 고가는 어떻게 된다는 건가?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이지만 실상은 정체성의 ‘카피’와 무엇이 다른가? 관객은 본 공연을 보기도 전에 김이 샌다.
크레디트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아직 공모전은 시작도 안 했다고. 재미있는 쇼는 이제부터 보여주겠지. 그런데 웬걸. 본격적인 쇼 타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또 한 번 실망한다. 주최 측은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심사숙고해 공정하게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디션이 없다. 오디션이 없었는데 어떻게 공정하게 뽑은 걸까?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디자이너들로 구성해 놓았으니 주최 측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까? 그런데 선발의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최혜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AECOM(전 EDAW)을 거쳐 West 8 뉴욕 오피스에서 거버너스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2012년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서 West 8 + 이로재 팀의 당선을 이끌면서 현재 서울과 로테르담을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 및 조성계획 수립 프로젝트 리더로 일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 친환경건축물 인증제 공인 전문가(LEED A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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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상상적 시민들의 공모전
설계 교육의 단면들
어째서 모두는 이 프로젝트의 주인을 박원순 시장으로 전제하고 있는가?
공론화는 시민의 몫이 아닌 서울시의 책임인가?
과연 서울역 고가에서 지역 전문가와 시민들의 내부 성찰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서 시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축제의 끝에서 남은 질문들
또 하나의 축제가 끝났다. 공모전 때문에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는 누군가나 당선작의 선정 결과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모전이 축제라는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모전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진지한 고민을 할 기회는 없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공모전은 우리 도시와 공간의 담론을 풍성하게 해주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축제에 누가 참여했는지 주인공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지만, 정작 축제의 성공 여부는 어떻게 축제를 기획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모전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의 방식과 절차에 대해 공모전 기획을 지휘한 김영준 전문위원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우선 굳이 소수의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는 초청공모 방식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프로젝트 특성과 작품의 질을 고려할 때, 응모작 수는 많지만 정작 좋은 안들은 소수에 그치는 공개공모보다는 초청공모 방식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지명초청 방식이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유리하다. 물론 저명한 작가의 안이 반드시 좋은 안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공개공모의 방식일 경우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들이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며, 국내의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마저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서울역 고가 공모전이 서울시가 추진하는 유일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구상의 일부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서소문밖 역사유적지’와 ‘마포석유비축기지’가 공개공모 방식으로 치러졌다. 서울역 고가에 이은 ‘세운상가 활성화’와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역시 공개공모로 진행된다. 따라서 이 많은 공모전 중에 하나쯤은 확실히 흥행을 보장할 주연 배우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으로나 화제성에 있어서나 서울역 고가를 초청공모로 진행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은 폐쇄적으로 진행된 지명 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의 구성은 꽤 흥미롭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든 작가들이 명단에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장들이 국내 무대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를 보았을 때 차라리 국내의 여건을 충분히 존중해줄 만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공모전에 참여한 국내외의 작가들이 지명도가 낮다는 말은 아니다. 선정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다는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어도 초청받은 작가들이 자격 미달이거나 특정한 분야나 국가에 편중되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지난 공모전의 참여 자격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공모전의 조건으로 건축, 조경, 구조의 협업을 전제했고, 그 때문인지 염려되었던 특정 분야의 독단과 독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간과된 성급한 진행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장황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인 논란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비판적 견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작 설계공모의 기획책임자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는 공모전의 방식과 절차 이전에 이 프로젝트의 당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의 주인
2014년 9월 미국을 순방 중이던 박원순 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을 시찰한 뒤기자간담회를 열어 서울역 고가를 재생하는 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발표 직후 호평보다는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일간지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의견이 담긴 칼럼들이 실리기 시작했으며,2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은 공원화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시 의회에서도 시장이 절차를 무시했다며 일부 의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공모전이 끝나고 당선안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역 고가 공원화는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서울역 고가는 이제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도시의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이명박 전 시장에게 청계천과 서울숲이 그러했고 오세훈 전 시장에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한강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서울역 고가는 박원순 시장의 미학적인 정치 도구라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서울역 고가에 대한 모든 평가는 아무리 신중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더라도 어떤 지점에서 반드시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함의 속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은 결국 서울시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고, 상찬 역시 박원순 시장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는 묘한 동조 현상이 나타났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