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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을 말하다(3)
디자인 文化의 시대, 조경을 넘어태풍 곤파스의 직접적 영향권에 들었던 충남과 인천의 해안 수림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곳곳에서 소나무 기둥이 부러지고, 뿌리가 깊지 않은 활엽수림은 힘없이 쓰러져 밑둥을 드러냈다. 비교적 해안에 가까운 아파트 단지 내 조경수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오래전에 지은 판상형 고층 아파트 단지 내 수목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빌딩풍 영향으로 특히 피해가 컸다.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사회의 단면이 드러난 것이다. 서해안 소나무 군락지의 심각할 정도의 피해상황을 접하면서 조림사업 이후 허술한 관리로 인한 피해가 특히 컸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고, 평소 바람 피해가 미미했던 인천 등지에서의 경관 숲 조성에 있어서도 재해안전망을 위한 보다 치밀한 계획이 수반되지 않은 채 미관지향의 식재가 되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곤파스가 할퀴고 간 도심 아파트 단지 내 조경공간은 군데군데 부러지고, 자빠진 나무를 잘라 낸 뒤 생겨난 빈자리로 인해 공간의 숨통이 트였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종전까지는 바람에 찢기고, 맥없이 쓰러진 나무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는데 어느 정도 보수가 된 후 지금은 정반대의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자연재해라기보다는 과학적이지 못한 단지계획과 방만한 조경 식재와 관리시스템에 대한 자연치유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곤파스로 인한 막대한 피해의 여파가 생활경제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종래의 도시조경을 새로이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교훈이 적지 않다.
조경분야가 디자인 지향형의 발전을 거듭해오면서 도시 내 경관을 규정짓는 중요한 장르로 급부상했다. 현대 조경사에 남을만한 의미 있는 공원설계와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 내 조경 디자인의 괄목할만한 성장으로 말미암아 적어도 외부 공간에서 만나는 조경의 실재로 인해 그곳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삶의 질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때 한평공원 조성을 범시민운동 차원에서 보급에 앞장섰던 도시연대와 같은 단체의 노력도 배가되어 우리가 사는 도시 곳곳의 버려진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생명공간으로 회복된 사례를 보았다. 이 같은 변화의 긍정적 효과로 조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도시민들에게 싹텄고, 어느덧 조경의 질이 삶의 질을 담보한다는 가치 발견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배면에는 건축과 조경의 절묘한 배합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건축의 내·외부 공간을 완성시키는 조경의 시선은 단순 시각적 장치를 넘어서 공간의 성격을 좌우하는 주연의 자리를 차지한다. 조경된 공간은 그곳을 중심으로 실내외 각급의 공간이 관계를 맺게끔 프로그램화 되면서 건축동선의 순환을 조장함과 동시에 건축된 공간의 상호 간섭을 돕는 투명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로써 건축과 조경의 경계는 사라지고 네트워크가 강조된 공간을 생성시킨다.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조경은 건축과 도시를 완성시키는 수단이자 디자인 이슈로 자리매김하였다. 조경가에 대한 사회적 지위도 한층 강화되었고, 조경이 문화의 큰 축을 담당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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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식물이야기(7): 고대 약용식물 이야기 3, 세종대왕 편
세종대왕의 유산세종대왕의 업적 중 거대한 두 개의 산맥은 한글창제와 탁월한 과학기술적 성과일 것이다. 이 두 산맥이 하도 크고 높기 때문에 그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나머지 업적들도 대단한 것들이다. 국토의 확장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화기개발에 힘썼으며 성의 수축, 병선 개량, 병서 간행 등 국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이 밖에도 아악을 정리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으며 불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단군사당을 세워 국가의 근본을 확실히 했다. 그는 심지어 처용가의 곡절을 참작하여 가사(歌辭)를 개찬하여 봉황음(鳳凰吟)이라 이름하며, 조정의의 정악(正樂)으로 삼았다고 하니 가무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음을 말해준다.이렇게 다방면에 조예가 깊던 세종대왕이었으나 정원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나보다. 만약 관심을 두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집현전 학자들을 시켜 조원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조원 관련 관직과 교육제도를 마련하고, 조원용 소재의 생산과 수급 체계도 확실히 자리 잡아 놓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그건 대왕이 다른 분야에서 보여준 철저함으로 미루어 보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취는 아쉽게도 아직 찾아지지 않는다.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관심이 없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위의 방대한 사료들을 제대로 정리하다 보면 조원에 관한 자료가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각기 전문분야의 세종 업적을 연구하고 있지만 그 학자들 자신이 조원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간과했을 확률도 없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하는 작업일 것이다.그러나 만약 세종대왕이 조원에 대한 체계를 잡았다한들 지금 우리 조경계가 달라졌을까?전통이 모자라기 때문에 맥락이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보면 그것도 해답은 되지 못한다. 사실 세종의 업적 중 한글창제만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뛰어넘어 존속하였을 뿐이다. 그 외의 것은, 특히 15세기에 이미 유럽을 능가했던 과학기술은 그 맥을 제대로 이어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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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따라 밟아본 삼국지 유적과 경관(8)
봉추선생 방통이 젊은 나이에 죽은 면죽 낙봉파낙봉파는 사천성 면죽(綿竹)을 지나 산길로 20킬로미터 들어간 곳에 있다. 이곳에는 방통묘뿐 아니라 백마파, 백마관, 방통사 등이 있다. 인근 계곡에 낙봉파 표석을 세웠고 그 옆 죽은 자리에 혈묘를 자그마하게 만들었다. 백마관(白馬關)은 본래 한나라 때부터 군사요충지로 성도와 농서 사이를 잇는 고역도(古驛道)였다. 본래 산 이름을 따서 녹두관(鹿頭關)이었으나 방통이 탔던 백마 이름을 따라 바뀌었다. 방통묘는 다른 묘와 달리 돌로 견고하게 만들었다. 큰 공적도 못 세우고 젊어서 죽은 방통에게는 과분한 것 같았다. 묘 앞에는 방통을 죽게 한 백마모형을 만들어 놓아 방통의 한을 기리게 했다. 방통사(龐統祠)는 두 채로 되어 있는데 앞의 용봉이사전은 제갈량과 방통을 같이 모셨고 뒤의 서봉전은 방통만 모셨다. 중간에 작은 사당이 있어 장비가 버티고 앉아 있는데 이렇게 장비는 어디서나 친근하고 애교스런 표정을 띠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통에 관련되는 여러 비석을 모아 놓은 봉추 비랑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100미터쯤 가면 낙봉파가 나오고 그 언덕에 방통이 피를 뿌리며 죽은 자리에 혈묘(血墓)가 있다. 묘 바로 옆에 우리와 여행을 같이 한 전한중박물관장 서홍조(徐鴻藻) 씨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삼국지에 정통한 중국인 학자로서 성도에서 한중까지 소위 ‘고촉도(古蜀道)’를 여행하는 동안 우리에게 많은 유적 현장을 안내했다. 마지막으로 작은 골짜기에 ‘낙봉파’라는 비석이 서 있다. 자그마한 언덕일 뿐이어서 삼국지를 읽으며 심산유곡의 험난한 골짜기를 상상했던 우리에게는 실망만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