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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설계 환경을 진단하다’를 읽고 Column: Review of ‘Problems of Design Environment in Landscape Architecture’
    조경설계 환경을 진단한 지난 호 특집, 반가웠다. 그 반향에 기대감도 크다. 하지만 설계 환경을 진단하려 했으나 정작 ‘설계’에 대한 이야기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인다. 설계 환경의 가장 큰 이슈를 결국 ‘기-승-전-설계비’로 맺은 점 또한 아쉽다. 그 전제인 조경설계의 ‘위축’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인데, 무엇과 비교해 위축되었는지에 대한 논의 없이 마치 한 십 년 전쯤에 비해 지금은 살기 어려워졌다는 데 초점을 맞춘 것 같아 이점 또한 아쉬웠다. 물론 합리적 계약을 통한 갑을 관계 청산과 의뢰인-설계자의 대등한 관계 재정립, 모호한 조경설계가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지위의 확립, 경쟁력 있는 공모 개최를 통한 설계 경쟁력의 제고, 현실성 있는 설계비의 기준 마련 등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조경가에게, 그리고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경영자에게 매우 중요한 제도적·사회적 환경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설계 회사의 몇 퍼센트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지난 수년간 수익 구조가 어떻게 됐는지, 유관 분야와 비교할 때 업무량 대비 설계비가 얼마나 적은지 등에 대한 개략적인 수치라도 보였어야 이해와 동의가 뒤따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또한 발주자 그룹의 의견도 함께 다루었어야 했다. 지자체나 LH 등의 발주 현황이나 입장이 함께 실려야 문제의 심각성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형편없는 설계비만 강조하다가 혹시나 반감이 생겨 계약, 공모, 자격 등의 문제까지 그 심각성이 희석될지도 모르겠다는 노파심이 들었다. 지난 호 특집에 등장한 다양한 진단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이 사회가 조경가를, 조경설계라는 일 자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단적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 조경가는 (국제 설계공모에서 외국조경가를 꺾을 정도로) 그림은 화려하게 잘 그리는데 일은 제대로 해내는 게 없고, (공모를 통해 안이 뽑혔는데도 시행 과정에서 다 바뀌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설계적 대응은 못할 정도로) 실제 설계는 잘못하며, 설계비만 늘 많이 달라고 하면서 일의 양이 얼마나 될지 어떻게 정리될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반값이고 뭐고 덤핑으로 수주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조경가나 저 조경가나 결과물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더 싼 데 줘도 되는 일이고 그만큼 별로 가치 없는 일이니 첫 번째로 삭감되는 게 설계비 예산이다, 뭐 이렇다는 이야기 아닌가. 무섭다. 이런 사회적 인식은 어제 오늘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들어 위축되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나라의 조경설계 분야는 잘나갔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회적 역할 기반이 이처럼 부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조경은 절대 권력자의 말 한마디로 탄생했다. 조경의 사회적 역할이 일상의 전통이나 문화적·사회적 필요에 바탕을 두고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회는 조경의 역할을 잘 모르거나 조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지금에서야 우리가 하는 일에 비용을 지불하라고, 자격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내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들이 밀면서 이게 앞으로 꼭 필요할 테니 사세요, 이렇게 외치면 살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기꾼으로 의심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건설 시장의 일부로서 조경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었다. 지난 특집에서도 드러나듯, 거대한 토목 공화국의 건립이라는 습관적 틀에서 잠시 벗어나게 된 어떤 낯섦이 모든 위기론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위기론의 중심에는 건설 시장의 축소로 일거리가 줄어들어 어려운 상황이고 다시 일감이 늘고 대가가 좋아지면 자연스럽게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과연 그럴까? 조경설계라는 일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보편적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극복해야할 설계의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제도와 사회 시스템은 그러한 보편적 합의와 인식을 뒷받침하고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보편적 인식과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는 일 못지않게 더 시급한 것은 조경의 사회적 역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 시점에 그 역할을 찾고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더 나아진 삶의 모습이 바로 조경가의 역할로 인한 것임을 인식하게 하는 일이다. 눈을 돌려 이 거대한 도시를 보면 조경가의 역할을 기다리는 일이 너무나 많다. 이것을 보려는 노력을 우리가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환경이 열악해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사회적 관계가 엉망으로 꼬인다. 이 난제를 풀어내는 역할을 조경가가 할 수 있다. 조경가의 역할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지금의 위기(나 위기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正道일 것이다. 지금 당장 나부터 실천해야 한다.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실천이 모여야 인식도 변하고 나아가 제도도 바뀔 수 있다.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그런 노력을 해야 우리 후배들이, 우리 자녀 세대가 이 일을 이어갈 수 있고, 그들이 이 일을 할 때쯤에는 사회가 조경가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아깝지 않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 설계 환경도 나아질 것이다. 지난 호의 특집은 진단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 다방면의 진단, 논의, 해법 제시 등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박준서는 ‘Link Landscape with Life’라는 모토로 디자인엘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조경설계가다. 조경이란 근원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해 일상에 녹여 내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조경설계의 사회적 역할을 바로세우기를 바라고, 지어지는 설계를 실천하고자 한다.
  • [에디토리얼] 어느 광장의 추억 Editorial: A Memory of the Pershing Square
    이번 7월호에 퍼싱 스퀘어Pershing Square 지면을 기획하며 5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퍼싱 스퀘어 개조 설계공모에 대한 평문을 써준 김영민 교수가 그 당시 LA 다운타운에 살고 있었는데, 출장 중에 마침 여유 시간이 생겨 하룻밤 신세를 졌다. 이국땅에서 들이부은 소주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는 선배의 손에 그는 아파트 열쇠와 다운타운 지도 한 장을 쥐어주고 서울 출장길에 올랐다. 친절하게도 지도에는 걸어서 가볼 만한 스타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품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프랭크 게리의 디즈니콘서트홀, 톰 메인의 작업들, 이미 고전이 된 로렌스 핼프린의 광장과 공원들을 스치듯 둘러보다 어느 광장 입구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거친 X자와 함께 ‘로리 올린, 위험, 가지 마세요’라는, 굵은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김 교수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퍼싱 스퀘어였다. 올린 할아버지가 설계한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당당히, 거침없이 들어갔다. 도심의 고층 빌딩사이에 파묻힌 사각형 공간, 넓이는 오륙천 평 남짓. 주변 가로보다 높아서 계단으로 광장에 올라간다는 게 우선 생경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의 높은 콘크리트 탑 안에 오렌지색 공이 들어 있고, 같은 색의 큰 구형 오브제들이 바닥에도 있다. 루이스 바라간을 연상시키는 짙은 노란색 가벽이 광장을 가로지르고, 진분홍색 원형 기둥들이 촘촘히 늘어서서 광장과 가로의 경계를 확실하게 나눈다. 어느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작품이 나오는 강한 사진발. 셔터 누르기를 멈추고 광장 중앙의 바닥분수 곁 앉음벽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색채 때문은 아니었다. 광장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외치는 강렬한 조형미 때문도 아니었다. 까닭 없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김 교수의 경고처럼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의문이 풀렸다.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불안감의 원인은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의 광장에 나 혼자 있다는 데 있었다. 활력 있는 가로로 둘러싸인 요지에, 세상 어느 곳보다 밝을 것 같은 캘리포니아산 태양빛이 쏟아지는 매력적인 공간에 왜 아무도 없을까. 『이방인』의 뫼르소에 버금가는, 찌르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안감이 공포감으로 급변했다. 분명히 나 혼자였는데 순식간에 서른 명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둘러쌌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광장 구석구석의 그늘에 흩어져 있던 남루한 차림의 노숙인들이, 퀭한 눈빛의 마약 중독자들이 모여든 것이다. 귀까지 얼어붙어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손동작을 보고 담배를 요구하는 것임을 즉각 알아챘다. 두려웠지만 태연하게 웃으며 주머니속의 한 갑과 카메라 가방 속의 비상용 한 갑까지아낌없이 풀어 한 개피씩 나눠 피니 그들은 바로 나를 ‘브로’라 부르며 형제로 대했다. 몇 분 후 우리는 모두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난 4월 말, 인터넷 잡지에서 퍼싱 스퀘어 공모전의 결선작 선정 뉴스를 읽고 한 이방인을 강타했던 그날의 현기증을 다시 느꼈다. 누가 봐도 입지 조건이 뛰어나지만 어느 업종이 들어와도 장사가 안 되는 팔자 사나운 건물이 더러 있다. 광장이나 공원같은 도시의 공공 공간도 기구한 운명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계속 조경가를 바꿔가며 ‘다른’ 디자인으로 덧칠을 해도 공간의 성격이 바뀌지 않는 예가 많다. LA의 퍼싱 스퀘어도 그런 곳 중 하나다. 1866년에 처음 조성된 이 광장에는 150년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새로운 디자인이 투입되었다. 리차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를 걷어내고 마사슈왈츠의 자유분방한 곡선 벤치와 마운드를 얹었다가 다시 백지 위에 마이클 반 발켄버그의 얌전한 조경을 우겨넣은 뉴욕의 제이콥 자비츠 플라자Jacob Javits Plaza 못지않은 변화를 경험한 곳이 퍼싱 스퀘어다. LA 시민들이 외면하다 못해 혐오하기까지 한다는 현재의 퍼싱 스퀘어는 멕시코 출신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가 뉴욕의 골치 덩어리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를 성공적으로 개조한 조경가 로리 올린과 협력해 만든 1994년 버전이다. 퍼싱 스퀘어가 배제와 소외의 광장으로 전락한 것은 1950년대에 지하 주차장을 넣으면서 광장의 레벨을 주변 가로보다 높이고 높은 담으로 광장을 감금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여덟 번째 개조 작업인 이번 프로젝트의 당선작은 광장 외부로부터 “높게 솟은 지면을 평평하게 만들어 퍼싱 스퀘어와 주변 지역의 연계성을 회복하고 … 지속가능한 녹지 공간으로 만들어 활기 넘치는 공간이 되게 할 것”을 전면에 내세웠다. 아장스 테르 앤드 팀Agence Ter and Team의 당선작뿐만 아니라 다른 세 개의 결선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탁 트인 경관을 확보한 ‘녹색천국’이다. 나와 함께 집단 흡연을 즐겼던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이번 퍼싱 스퀘어 프로젝트의 지향점은 결국 동굴처럼 닫혀 있던 광장을 열어 노숙인과 부랑인을 도시의 또 다른 어느 동굴로 몰아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속가능한 운영과 관리를 위해 민관이 협력하여 비영리 주식회사까지 만들었으니 당분간 새로운 퍼싱 스퀘어는 안전하고 청결하고 낭만적인 녹색의 별천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호 본문의 비평에서 김영민 교수가 단언하듯,“미래의 어느 시점에 퍼싱 스퀘어는 여덟 번째 불만족을 경험할 것이고, 아홉 번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퍼싱 스퀘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두고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디자인은 도시를 구원할 수 있는가? 공원은 자본주의 도시의 면죄부인가? 녹색 공간은 도시 정치의 만병통치약인가?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6년07월 /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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