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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눕기의 기술
성큼, 여름의 중심이다. 이번 7월호에는 조경가들이 참여한 ‘스테이’ 외부 공간 작업 일곱 편을 모았다. 김모아 기자의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의 제목처럼 “비록 잘 세팅된 편안함을 빌리는 형식일지라도, 복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이격된 약간의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 모른다”(77쪽).
올해 초부터 편집자들이 공들여 섭외해 함께 실을 수 있게 된 얼라이브어스의 ‘롯데호텔 부산 야외수영장’, 안마당더랩의 ‘호지’, 연수당의 ‘하도문 속초’, 듀송플레이스의 ‘와온’과 ‘월령지헌’,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퍼즈 글램핑장’, 펠릭스Felixx의 ‘언바운드’는 다양한 위치만큼이나 다채로운 성격을 지니지만, 경험에 방점을 둔 공간 설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갖는다.
호텔, 모텔, 여관,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숙박 시설이 언젠가부터 ‘스테이’로 통칭되고 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건 아니다. 스테이의 유행은 ‘머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공간’의 부상을 의미한다. 스테이는 단순한 숙박을 넘어 머물며 공간을 소비하고 장소를 경험하는 일련의 활동 전체를 뜻한다. 스테이(머물다)와 베케이션(휴가)을 합성한 신조어 ‘스테이케이션(staycation)’도 요즘 휴가 트렌드를 대변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스테이 문화의 확산은 공간 경험의 맥락과 계기를 짓고 엮는 조경가의 안목과 손길을 초대하고 있다.
스테이에 그대로 스테이하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을까. 다른 경우와 달리 스테이 원고 교정지는 집중해서 살피기 어려웠다. 편집된 텍스트와 이미지의 디테일로 눈이 가지 않았다. 교정지 속 스테이 공간 한가운데 두 발 뻗고 누워 일상을 규정하는 수많은 관계와 의무를 다 내려놓고 잠에 빠져드는 장면을 계속 상상했다. 이번 여름엔 나도, 독자 여러분도 어느 안온한 곳에 한참 머물며 침대로부터 등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 완벽한 스테이케이션을 누릴 수 있기를.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다시 나른한 잠을 즐기다 후덥한 여름 정원을 산책하고, 책 몇 쪽을 읽다 다시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는 온전한 시간.
홈캉스이건 호캉스이건 책 한 권은 동반해야 와식臥食 생활이 완성된다. 『환경과조경』 신간 말고 다른 책을 가져가야 한다면, 나는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현암사, 2015)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 “침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희극 배우 그루초 막스의 말로 포문을 여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통쾌하게 눕는 자세를 옹호한다. 누운 상태만큼 편안한 자세가 어디 있겠는가. 저자 브루너의 말처럼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다. 우리는 누운 자세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슬픔이나 그리움에 잠기고, 백일몽을 꾸고 고민을 할 수도 있다.”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고 순발력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하며 성실과 근면을 입증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누운 자세는 게으름의 표상이자 무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브루너의 생각은 다르다. “누워 있는 것은 짙은 안개 속에서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할 수 있다. …… 누워 있는 행위는 목표 없이 걷는 수직적 산책의 수평적 짝꿍”이다. 눕기는 앉고 걷고 뛰는 무한 경쟁 사회에 브레이크를 거는 수평적 삶의 지표다. 비생산적이라 더욱 소중하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위쪽(실내에서는 천장, 야외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때면 움켜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며, 우리의 생각 또한 부유하기 시작한다. 몸의 자세를 바꿈으로써 마음도 따라 변하는 것이다.”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을 자임하는 『눕기의 기술』은 다양한 시각으로 눕기를 관찰한다. 7만 년 전의 침상, 수면에 혁명을 일으킨 코일스프링 매트리스의 발명과 전파,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누워서 음식을 먹기 위해 고안한 소파와 그 현대적 변용, 침실의 사회적 변천사 등 역사적 주제가 책의 뼈대를 이루는 씨실이라면, 과학과 문학, 철학은 책에 무늬를 입히는 날실이다. 누워서 눕기의 기술을 익히며 『눕기의 기술』을 읽다 보면 수평 자세와 와식 생활에 대한 묘한 자부심까지 생긴다. 눕는 행위 하나로 중력이라는 자연의 진리에 순응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경쟁에 저항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번 여름 어딘가에 머물며 오래 누워 있는 시간을 실천할 계획이라면, 생활의 수직/수평 비율을바로 잡을 생각이라면, 그 깊은 심심함과 이완의 정점을 함께할 친구로 『눕기의 기술』을 권한다. 이 책은 누워서 읽어야 제맛이다. 읽다 보면 잠이 스르르 온다. 읽다가 얼굴에 떨어뜨려도 책이 워낙 가벼워 절대 코뼈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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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길을 나선다. 삐리릭. 도어록 소리를 듣고 나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잠근다. 철컥 철컥 철컥. 세 번 손잡이를 돌려 확실히 잠겼는지 살핀다. 열쇠 꾸러미를 끌러 왼쪽 앞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다 멈춘다. 가스 밸브를 닫았는지, 창문 잠금 장치를 빼먹지 않았는지, 콘센트 전원 버튼을 껐는지 문득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나오기 전에 두어 번씩 확인했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계단을 오른다.
작업실로 돌아와 잠금 장치와 버튼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확인한다. 역시 다 괜찮구나. 다시 집을 나선다. 이 과정을 거치느라 3분 거리 버스 정류장 가는 데 늘 20분 정도 걸린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괜찮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번 더 온갖 버튼을 확인하는 일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깜빡 잊고 열어 둔 창문으로 누군가 들어오거나, 가스레인지나 과열된 콘센트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습관을 고칠 수 없을까 싶어서, 정말 도둑이 들거나 불이 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아깝지만 그렇다고 정말 비싸거나 다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거의 없다. 중요한 파일은 클라우드에, 그리고 돈은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컴퓨터와 태블릿 PC, 스캐너, 액정 태블릿이 없어지면 큰일이다. 당장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다시 구하기엔 가격도 만만치 않다.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지 못한 옛 작업물 파일과 종이 원화는 잃어버리면 끝이다. 작업실은 여러 가구가 사는 빌라인데, 만약 내 방에서 시작한 불이 건물을 홀랑 태운다면, 그래서 누군가 큰 해를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계단 몇 번 오르내리고, 버튼 여러 개를 다시 확인하고, 3분 거리에 20분을 쓰는 게 무슨 대수인가. 아무래도 이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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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제도, 크기를 줄일 수 있을까?
지난 글에 이어 제도가 우리가 사는 도시의 ‘크기’에 관여하는 방식과 결과를 축소도시 문제를 통해 다룬다. 대도시 원도심, 지방 중소도시의 인구 감소는 적어도 1980년대부터 나타났지만 정책적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지방 소도시들이 인구 감소를 넘어 인구 소멸의 위기에 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 것은 매우 최근이다.
그런데 인구 감소가 왜 문제일까. 더 정확히 묻자면, 도시 공간에서 인구 감소는 왜 문제인가. 세금 낼 인구가 감소하면 도시의 재정 재원도 줄어드는데 도로나 공공시설 등 이미 만들어진 도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동일하다. 늘어나는 빈집을 관리하고 운영 수입이 감소한 시설을 보조하기 위해 어쩌면 비용은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결국 지자체가 파산하거나 최소한의 유지·관리를 포기하는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다. 또한 온갖 지식과 문화를 교류하고 향유할 수 있는 도시적 기회는 물론 의료와 보살핌, 교육, 치안과 같은 기본적 사회 서비스를 누리기 어려워질 것이다(그림 2).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이 들어갈 것이고, 이는 장차 매우 큰 사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인구 감소로 인한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인구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인구가 성장하던 (또는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던) 시기에 조성된 도시의 과도한 ‘크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1 그럼에도 2022년 제정된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비롯해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정책은 인구수에만 주목하고 인구 대비 도시의 크기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 도시는 ‘몸에 맞지 않는 너무 큰 옷’이 되어버렸는지(그림 3), 줄어드는 인구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기 어려운지, 도시 제도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 도시계획의 회계분식,사회적 인구 증가
지난 연재에서 수용 인구를 기준으로 신도시의 용도별 적정 토지 면적을 ‘과학적’으로 자동 산출하는 플로 차트를 실었는데,2 이 ‘도시 면적 계산기’는 신도시 계획뿐 아니라 모든 도시계획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다소 거칠게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2000년대 중반 수립된 OO시 ‘2020 도시기본계획’에서는 2020년 OO시 인구를 15만 명으로 예측하고 이 인구를 ‘적정’하게 수용하기 위한 주거, 상업, 공업, 녹지 등 용도별 도시 지역 면적을 산출한다. 이 면적에서 기존 도시 내 각 용도별 면적을 제하면 2020년까지 이 도시에 더 필요한 도시 지역 면적이 된다. 이 필요 면적을 어디에 개발할지 정하는 것, 대표적으로는 ‘시가화 예정 용지’를 설정하는 것이 도시기본계획의 중요한 부분이다.
2023년 5월 기준 OO시 인구는 9만 6,700명으로 ‘2020 도시기본계획’의 계획 인구 15만 명은 고사하고 계획을 수립하던 당시 인구 10만 9,400명에서 12%나 감소했다. 반면, 도시 면적은 30km2에서 35km2까지 늘었다.3 ‘2020 도시기본계획’은 2020년쯤에는 15만 명이 적정하게 살기 위한 도시 면적을 38km2라고 했는데, 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도 15만 명을 목표로 하는 도시계획이 꽤나 착실하게 실행된 것이다. 그러나 인구는 오히려 줄어든 탓에 결과적으로, 숫자로만 보자면 그 적정하다는 수준보다 1.2배 큰 도시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적정 도시 크기 설정의 오차는 인구 예측에서 비롯된다. 도시기본계획의 목표 년도 계획 인구는 해당 도시의 인구 구조(성별, 연령)를 기초로 산출되는 인구의 자연 증감과 도시 간 이주 예측에 따른 인구의 사회적 증감을 합산해 산출된다. 여기서 많은 지자체는 ‘희망’일 뿐인 사회적 인구 증가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도시 면적 계산기’를 돌려 도시계획을 수립한다. OO시는 ‘2020 도시기본계획’ 수립 당시에도 이미 1980년대 중반 인구 정점을 지나 20년 간 지속적으로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당시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의 외부 인구 유입이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시나리오를 채택하고 미래의 도시 크기를 재단했다.
인구는 감소함에도 도시의 크기를 더 크게 만들 ‘과학적’ 근거로서 도시계획 계산기의 산출값을 인정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도시 제도다. 도시기본계획에서 목표 년도의 인구를 추정하는 기준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도시·군기본계획 수립지침’에 근거하는데, OO시처럼 사회적 증가를 부풀려 도시 지역 면적을 과도하게 계획하는 폐해가 만연해왔다.4 최근에야 인구 추정에서 사회적 증가를 보조적으로 적용하라는 지침 개정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국내외 여러 연구는 축소도시 또는 도시축소를 쇠퇴 도시, 도시 쇠퇴와 구분해 정의한다. 대체로 축소도시란 인구와 사회경제적 활동의 쇠퇴로 주택, 공공시설 및 도시 기반 시설의 실질적 이용이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과거 성장기에 공급한 도시의 물적 자원이 과잉인 상태에 이른 도시를 말한다(구형수 외, 『저성장 시대의 축소도시 실태와 정책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2016). 이 글에서는 도시의 ‘크기’를 단순히 도시의 면적, 즉 시가화 면적만이 아니라 그 안의 도로와 공공시설, 주택을 비롯한 민간 건축물 등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물적 자원의 규모로 규정하고자 한다.
2. 유영수, “제도, 도시의 크기를 정하다 1”, 『환경과조경』 2023년 5월호, p.104, 그림 1.
3. OO시 통계연보, 인구 및 용도지역 면적 통계
4. 구형수 외, 『저성장 시대의 축소도시 실태와 정책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2016.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 및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 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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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디자인 엘
요즘 우리는
편안해졌다.
사무실 시작할 때 꿈에 부풀어 온갖 열정을 쏟아 내던 때가 있었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 들어갈 정도로 말야. 하지만 그 열정으로 타오르던 때조차 늘 마음 한구석엔 불안이 숨겨져 있었어. 이러다 내가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마치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 같은 내 모습을 마주한 거지. 정말 열심히 하고 주변에서 잘한다고 해주는데도 계속 헛디디며 한 계단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듯한 허망함과 절망감이 들었지. 와, 정말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니까. 아마 그때 우리를 본 사람들은 엘이 이제 막을 내리겠구나 싶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말야.
하지만 우린 막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훌쩍 담을 넘어버린 듯 여유 있게 지내고 있어.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야. 기적이 일어났냐고? 그런 건 없어. 기적 같은 거. 그런 건 방관자처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비치는 불연속적 이벤트의 자기 해석일 뿐. 우린 우리의 힘으로 지금에 이르렀어. 사실은 특별한 힘 같은 것도 없었어. 그저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켰을 뿐, 그리고 주변의 관심에 대한 기대를 접어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었지.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 화려하지도, 근사하지도 않지만 꾸준한 근면함이 만들어 놓은,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함에 다다른 이야기.
엘을 성장시킨 프로젝트
석정과 노을
2016년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은 기획이 좋았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방관만 하다 참가하게 된 거야. 정원박람회라는 게 여기저기 생기더니 듣도 보도 못한 쇼 가든–전시정원이란 게 심심찮게 보이는데, 그게 뭔가 싶었어. 정원이란 공간도 낯선데 그걸 전시용으로 만든다고? 나처럼 앞뒤 꽉 막힌 사람에게 그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 근데 그때 비슷한 고민을 하던 기획자가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에서 골목길을 전시 공간으로 삼고, 골목길 곳곳의 빈 땅을 찾아내 그걸 쇼 가든 대상지로 준 거야. 이건 말이 된다 싶었지. 이건 맥락이란 게 있잖아. 난 그중 서쪽 입구에 있는 빈 땅에 ‘석정’이란 걸 만들었어. 노을을 등지고 집으로 오다 잠시 걸터앉을 정원이었어. 반응이 괜찮았어. 근데 대상을 받을 줄은 몰랐지. 이후 이렇게 삶이 영위되고 있는 공간을 쇼 가든의 대상으로 삼는 정원박람회가 몇 번 더 기획되더라. 2019년에 참여한 서울정원박람회 동네정원도 비슷한 기획 의도로 구성된 경우였어.
하지만 이때는 사실 쇼 가든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간 것이었어. 그때 난 지독한 암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거든.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멍하기 일쑤고, 시간을 보내는데 일은 진척되지 않고, 밤이면 잠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어. 사람들과의 연락도 거의 끊고 지냈지. 뭐라도 해야 살겠다 싶었고, 몸을 움직여야겠다 싶었고, 땀을 흠뻑 흘려야겠다 싶었으며 ‘도전’이라는 불구덩이 속에 날 던져 넣어야겠다 싶었지. 내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친구가 심사위원으로 있던 자리에서 머리 숙여 프레젠테이션하고,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이랑 같은 조건에서 땀을 흘리며 작업했었어. 다행히 그 일을 마칠 즈음 난 웃을 수 있었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정원도 ‘노을’이 주제였다. 어쩌겠어. 이젠 뜨는 태양에 대한 희망보단 지는 노을에 묻은 땀이 더 끌리는 나이인걸.
트렌덱스 정원
어느 날 소식이 없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자기네 회사에 있는 데크가 낡아서 수리했으면 하는데 조언 좀 해달라며. 말만 들어서 알 수 있나. 현장 한번 보자고 했지. 가서 봤더니 물류 창고들 한편에 지어 둔 3층짜리 낡은 사무실 건물, 그리고 옆에 향나무, 소나무가 잔뜩 심긴 손바닥만 한 정원이 늙어 가고 있었어. ‘친구야, 이게 데크가 문제가 아닌 거 같다’라고 한 게 내 조언이었어. 그 일이 인연이 된 건지 새로 온 그 회사의 대표가 정원을 ‘이번 참에 잘 만들어 봅시다’고 하길래 열심히 그림을 그려 드렸는데, 자꾸 사무실 건물을 맘에 안 들어 하시는 거야. 그러더니 한 일년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며 연락이 왔더라. 정원만 잘 손봐도 좋았을 텐데 건물마저 새로 짓고 정원도 새로 짓게 된 거지.
수많은 보고야 뭐 당연한 절차였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건 시공 막바지 한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5월 햇살 아래서 땀 뻘뻘 흘리며 꽃 심은 일이었어. 어찌나 몸 쓰는 게 좋던지. 순간 내가 농부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거 아닌가 싶었다니까. 이 일도 마무리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내 친구는 지금도 가끔 나한테 전화해서 얘기한다. 새로 지은 건물보다 이 조그만 정원이 더 좋다고. 직원들도 이 정원이 해마다 더 좋아지는 게 참 신기하다며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말야. 진짜겠지?
용인공원
내겐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마누라 같은 곳이 바로 이곳 용인공원이야. 벌써 10년 넘게 (가만있자 내가 처음 여길 드나들기 시작한 게 2009년이니 벌써 14년이네) 이곳의 일을 해오고 있으니 참 오랜 인연이지. 이곳은 공동묘지야. 말이 공원이지 사실은 공동묘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공원이라는 법정 명칭을 달게 된 곳이지. 공원이란 말도 어쩌면 ‘공동묘지’의 낯설고 어두운 느낌을 조금이라도 중화시켜 보려는 노력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 이곳이 좋았어. 처음 소개를 받았을 때는 그냥 내 포트폴리오에 넣을 독특한 프로젝트를 하나 하는구나 싶었거든. 근데 첫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기야말로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명분에 잘 맞는 곳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여기가 그럴 수 있는 곳 아닌가 말이야. 마치 죽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처럼 생각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남아 활발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아닌가 말이야. 어쩌면 내 평생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쫓겨나지만 않으면.
첫 작업은 낡은 사무실 건물과 폐허 같은 식당을 헐어 내고 방문객과 유족을 위한 건물과 그 주변을 구상하는 거였어. 조경가에게 건물을 포함한 경관을 구상해 봐 달라고 부탁한 거지. 우리가 제안한 것은 용인공원의 풍경을 거스르지 않는 투과성 높은 단층의 낮은 건물과 그 앞뒤 너머를 활용한 공간들이었어. 좋아해 주더라. 그게 모티프가 되어서 실제 건축가가 디자인을 이어가며 진행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와 긴 인연이 시작된 거야.
그 후 우리는 용인공원의 많은 일을 수행했지. 짓다가 중간에 설계하게 된 봉안담 영역인 하늘담재, 박목월 선생의 묘를 기점으로 만든 박목월 문학정원, 용인공원 환경계획 등등. 게다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묘 디자인과 묘역 디자인 등등. 그러면서 이 공동묘지를 조금씩 조금씩 용인공원으로 변모시켜 오고 있었어.
처음에 지으려고 했던 사무 및 문화 공간은 갑자기 변한 장묘 문화, 그러니까 매장 문화에서 화장 및 납골 문화로의 변화를 대비한 봉안당 건립 사업으로 바뀌었어. 하지만 풍경을 담으려는 원래의 제안은 그대로 유지했어. 모두 그 점에 동의가 됐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봉안당은 짓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건물 공간과 다양한 정원 공간이 하나의 긴 경험의 과정에 묶여 들어가도록 계획·설계하는 아너스톤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거야.
기획에서부터 문을 열 때까지 꼬박 십여 년이 걸렸어. 건축가는 중간에 더는 못하겠다며 손절했지만 난 끝까지 남아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 정원 공간들은 우리가 하자는 대로 충실히 만들어졌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는 많이 바뀌긴 했지만 우리를 통해 조금씩 구현되어 갔다는 게 맞겠네. 그거 아나? 한국에서는 설계가가 그린 대로 시공되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은 거. 물론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현장에 가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 더 많아. 그나마 여기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꼈던지.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오랫동안 쌓인 설계가에 대한 신뢰 때문 아니었을까 싶어.
아너스톤 테라스 정원
10여 년의 시간이 걸려 드디어 준공하고 오픈한 날. 마음 한구석에 담아 뒀던 찜찜한 부분을 이사장에게 털어놨어. 아너스톤에는 테라스가 있거든. 독특한 테라스 구조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 정원을 만들기로 했지만, 결국엔 데크만 깐 채 덮어 둔 상태였거든. 이거 제대로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이사장도 좀 맘에 걸렸던 건지 ‘한번 그려 보시죠’ 하는 거야.
그런데, 아니 이 쬐그만 공간 하나 구상하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10년 전 설계 초반부터 이 테라스는 사실 내게 숙제 같은 공간이었어. 얼른 해야 하는데 안 풀리고 질질 미루고 있던 숙제. 너무 진지해도 너무 발랄해도 안 되고, 쓰임이 있으면서도 쓰임을 너무 강조해도 안 되고, 식물이 있지만 없는 듯해야 하고. 안을 닮았지만, 바깥도 담아야 하고 등등. 정말 수도 없이 많이 그리고 수도 없이 보고하고 수도 없이 다시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어. 그걸 덮어 두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다시 꺼낸 거야. 어쩌려고……. 증말. 내 발등 내가 찍은 거지 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거 다 꺼내 놓은 거 같았거든. 술 많이 처먹고 토하다보면 더 이상 토할 게 없어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아나? 머릿속이 약간 그런 상태가 되어 가는 거 같았어. 그러면서 난 왜 이렇게 설계를 못 하냐부터 딴 놈이었으면 어떻게 풀었을까까지 오만 욕설과 울부짖음을 반복하고 있었어.
어느 날 또 퇴짜를 맞고 돌아와 가만히 눈을 감고 제발 이제는 좀 답을 찾자며 생각에 잠겼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이 먼저 떠올랐으나 이미 접었거나, 그건 아닌 거 같다는 반응을 받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뿐이었어. 그러다가 말이야. 신기하게도 하나 집히는 게 있었다. 그게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나의 뾰족한 드러냄의 태도였다. 뭔 소리냐면 난 이 공간을 디자인하려는 노력보다는 이 공간을 어떻게 하면 돋보이게 할까를 더 앞에다 두고 있었다는 거야. 어떻게 디자인해야 이 공간이 더 두드러져 보일지, 어떻게 하면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 한 조형적 모양을 그려낼지, 누구도 발견 못 한 독특한 재료와 질감을 집어넣어서 감탄을 끌어낼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구상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며 쉽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어. 그건 아무것도 두드러지지 않고, 그냥 무덤덤한 하지만 오래된 듯한 느낌을 지닌 무심한 정원이었어. 이 그림은 모두 다 좋다고 했어. 근데 그게 정말 그림이 좋아서 그런 건지 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그 힘으로 끝내 이렇게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비로소 10여 년의 설계 역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가 설계한 서울대공원 동물원 정문 광장을 다녀왔어. 내가 자랑했었거든. ‘이런 거 제가 설계했어요, 공모에도 당선했고요’ 하며. 개념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무엇보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개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이젠 시간이 충분히 개입할 수 있는 곳으로 변한 이곳에 나름 자부심도 느꼈어. 숲이 많이 생겨서 부모님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을까 했지.
부모님은 연신 ‘우리 아들이 참 대견하구나, 이렇게 큰 공간을 설계하다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 하지만 우리가 내세운 시간이 어쩌구, 풍경이 어쩌구, 전후가 어쩌구 하는 얘기는 못 알아들으셨어. 아들이 했다니 좋다고 조건 반사처럼 칭찬하신 거지 뭐. 하지만 그 건너편 장미가 잔뜩 핀 테마정원에 가서 보여주신 그 환한 미소와 귀여운 포즈 등은 온몸으로 이 공간이 훨씬 더 좋음을 말해 주고 있었지. 그야말로 찐 표정이었어.
백 마디 말로 설명되어야만 하는 공간 말고 직감적으로 좋음을 알 수 있는 공간, 세상을 뒤바꿀 만한 대단한 개념 아니어도 거기에 딱 맞춤한 공간, 있는 듯 없는 듯한데 좋은 공간, 지친 하루를 돌아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오래된 카페 정원 같은 공간. 좀 모자라도 꽃 하나 더 심을 여지가 떠오르는 그런 공간. 이런 공간을 찾는 일을 혹시 나를 드러내려는 뾰족한 태도 때문에 뒷전으로 미뤄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뾰족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앞에 놓인 빈 공간을 들여다본다. 부디 이 빈 공간에 꼭 맞는 공간을 디자인하자며. 삶에 꼭 들어맞는 공간을 만들어 내자며.
디자인 엘은 2005년 처음 문을 열었다. 사무실 열 때 내세운 모토가 Link Landscapewith Life다. 그래서 첫 글자들인 L을 사무실 이름으로 내세웠고. 거창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자는 생각이었다. 잘 지은 거 같은데, 잘 실천하고 있는 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저 삶이 뭔지도, 공간을 그 잘 모르는 삶에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그 마음만 가지고 겸손하게, 성실하게 설계하려 한다. www.desig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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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1960년대와 아동공원
수년 전, 서울 남산공원의 기록물을 수집하면서 새삼 느낀 점은 사람들은 남산 자락에 무언가를 만들었다 부수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지역은 숭례문 또는 서울역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한 북서 사면의 회현자락이다.
남산의 예장자락이 일본인이 한성부에 합법적으로 거류하게 되면서 조선의 도시적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지역이라면, 조선신궁이 있던 회현자락은 남산을 식민 통치의 폭력과 억압의 상징 경관으로 전복시킨 장소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그 터만 남게 되었고,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의 각종 집회 장소로 쓰이면서 이데올로기 갈등이 첨예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국회의사당 조성을 위해 기공식까지 했지만 결국 취소하는 전무후무한 전력까지 세우게 되면서, 한동안은 여론몰이가 필요한 각종 집회의 장소로 이용됐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권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시는 국회의사당 부지를 중심으로 종합미화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곳은 비로소 ‘중앙광장’(최상단)과 ‘야외음악당’(2단), ‘아동공원’(1단)으로 대변신한다. 남산이 비로소 서울 시민의 이용 공간으로 전용된 것이다. 특히 대규모 공간을 할애한 아동공원은 이후 서울과 전국의 주요 도시에 제2, 제3의 아동공원을 조성하게 하는 전향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1963년 4월 6일에 착공해 8월 10일에 준공, 8월 25일 개장한 남산의 어린이 놀이터를 두고 각종 신문 매체는 한국 최대 규모, 아동 낙원, 꿈의 낙원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다소 과장된 것 같지만, 변변한 놀이 시설 없이 골목길을 전전하며 노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에 한 번에 1,500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면적에 90여 종의 놀이 기구를 설치해 무료 이용하도록 했다는 점을 확인하면, 그러한 표현에 충분히 수긍이 된다.
남산 아동공원은 ‘남산공원 설계현상모집’(1962년 1~2월 진행)을 통해 구현됐다. 현상공모에 관한 서울시 공문 서류에 아동공원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당선작의 아이디어를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건축가 안병의(1927~2005)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채택됐는데, 기하학의 패턴과 유연한 곡선을 절충해 건축과 녹지 공간을 적절히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최상단에 야외음악당과 시민 광장, 기념물을 두고 2단에는 미술관 건물을, 가장 낮은 1단에는 아동공원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야외음악당은 최상단에서 2단 부지로 이동하고 건물 형태도 곡선으로 바뀌는 등 대폭 조정됐지만, 그가 제안한 아동공원만큼은 그대로 수용됐다. 놀이 시설은 오히려 대폭 늘어서 회전 그네, 달팽이 미끄럼틀, 미궁(迷宮), 구름다리, 분수, 원형 철봉대, 여우굴 등각양각색의 놀이 시설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선보였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이해수, “1960~1973년 동심의 낙원, 남산공원의 문화정치: 공간을 둘러싼 권력과 공간 이용자의 의미
생산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문화』 33(4), 2018, pp.5~53.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설계현상모집, 서울기록원 소장(기록건 ID: 20150000081393), 1962.
서울특별시, 공원 기록 인프라 및 협력 네트워크 구축, 2020.
“꿈의 낙원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조선일보」 1963년 1월 12일.
“어린이 놀이터”, 「동아일보」 1963년 8월 17일.
“한국 최대 규모의 아동낙원 서울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마련”, 「동아일보」 1963년 8월 24일.
“인왕산에 어린이공원”, 「매일경제」 1969년 8월 19일.
그림 출처
그림 2. e영상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