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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젊은 잡지가 온다
    창간 50년을 눈앞에 둔『 샘터』가 작년 말 폐간된다는 소식은 종이 잡지 시대의 폐막을 알리는 부고였다. 독자들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수명을 연장하게 됐지만 한때 50만 부를 찍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교양지’의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시대의 지성을 이끌고 전문 지식의 최전선을 걸어온 전문지들도 거의 대부분 명멸과 부침을 거듭하다 이미 기억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1966년 같은 해에 창간된 계간 『창작과 비평』과 월간 『공간(Space)』 정도가 아직 발행되고 있는 오래된 전문지로 꼽힌다. 종이 잡지가 웹진의 힘을 당해내기 힘든 현실인 건 분명하다.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이미지 위주의 가벼운 ‘스낵 콘텐츠’가 대세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별한 영역의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하거나 손에 잡히는 아날로그 감성을 앞세운 고급 종이 잡지들이 속속 창간되고 있기도 하다. 정기 간행물 등록 통계를 보면, 2000년의 등록 잡지는 6천 개 남짓한데 2019년에는 2만 개에 가깝다. 요즘 뜨고 있는 젊은 잡지들의 지형은 크게 세 가지 갈래다.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 콘텐츠를 구성하는 큐레이션 잡지, 한 권에 특정 주제나 아이템 하나만 깊게 다루는 테마 잡지, 고유한 편집 원칙과 디자인 취향을 지키며 잡지 스타일을 심화해 나가는 독립 잡지. 서울에서 태어나 밴쿠버에서 자란 로사 박이 디자이너 리치 스테이플턴을 만나 2012년 영국에서 창간한,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미학을 살린 디자인 중심 여행 잡지『시리얼(Cereal)』은 전 세계 힙스터들을 매료시켰다. 2015년부터는 한국어판도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호가 매진이며 중고 과월호는 온라인에서 두세 배 가격으로 거래된다. ‘킨포크 스타일’, ‘킨포크 라이프’, ‘킨포크스럽다’는 말을 유행시키며 하나의 문화 현상을 만들어낸『킨포크Kinfolk』는 2011년 미국 포틀랜드에서 창간된 라이프스타일 독립 잡지다. 처음엔 지역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 해에 네 번, 500부 정도 발행하는 소규모 잡지였지만 지금은 한국어를 비롯한 7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바쁘고 지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자연 친화적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며 웰빙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출판 전문가들은 국내 테마형 독립 잡지의 붐을 이끈 주역으로 『매거진 B』를 꼽는다.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을 지향하는 『매거진 B(Magazine B)』는 한 호에 한 가지 브랜드만 심층 탐구하는 전략으로 기성의 주류 잡지와 차별을 꾀했다. 프라이탁, 파타고니아, 이케아, 구글, 넷플릭스, 뉴발란스, 블루보틀 등 MZ세대에게 친숙한 브랜드를 다루면서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잡지 이미지를 굳혔다. 매호 2만 부 넘게 팔리고 있으며, 레고, 라이카, 무인양품 등을 다룬 호는 4쇄 이상 찍었다고 한다. 라이프스타일이나 디자인 쪽의 감각적인 독립 잡지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인문 잡지들도 앞다퉈 창간되면서 핵심 독자층의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인문 잡지 『한편』은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기쁨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눈다’는 모토를 지향한다. 문학지 『악스트(Axt)』, 문예지 『문학3』, 과학 잡지 『에피(Epi)』, 사진 잡지 『보스토크(Vostok)』, 철학 잡지 『뉴필로소퍼(New Philosopher)』 등 최근 창간한 종이 매체들은 잡지의 시대가 끝난 게 아니라 잡지가 젊어졌음을 보여준다. 2년 뒤면 마흔 살이 되는 1982년생 『환경과조경』의 새로운 좌표를 궁리하며 요즘 아날로그 잡지들이 뿜어내는 ‘잡지스러움’의 매력 포인트를 짚어보다가, 막 배달된 따끈따끈한 새 조경 잡지를 펼쳤다. ‘새로운 기억, 연출된 과거’라는 부제를 단 『유엘씨(ULC; Urban Landscape Catalogue)』 창간호. 아직 기성 조경(학)계 바깥에 있는 예비 연구자와 학자, 비평가들이 편집과 집필을 나눠 맡은 『유엘씨』는, “도시라는 쇼케이스에 담긴 건축과 조경을 상품으로 상정하고, 이를 소비할 도시민에게 그 기능과 특징, 디자인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잘 만든 카탈로그”를 지향한다. 창간호 발행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127명의 후원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조경 이론과 비평, 도시 에세이와 경관 영상, 레트로 도시 문화를 다룬 집담을 엮어 만든 창간호에 이어, 올 연말에는 ‘판데믹 도시 기록: 서울의 일상과 오픈스페이스 탐독’이라는 제목을 단 다음 호를 펴낸다고 한다. 『유엘씨』의 촘촘한 지면과 행간을 탐독하다가 잠시 시간 여행을 했다. “조경의 대안적 담론 공간”을 선언하며 창간했던『로커스(Locus)』 창간호(1998)의 서문을 다시 꺼내 읽었다. “조경의 실천과 소통함으로써 … 이론의 복권을 지향한”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성의 다리를 건넜다. 젊은 잡지『유엘씨』가『 환경과조경』이 놓치고 있는 지점과 조경 담론의 틈새를 잘 발견해 지속가능한 독립 잡지로 성장해가길 응원한다.
  •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그래스호퍼 연대기 Ⅲ
    나쁜 피 살충제가 개발되기 전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메뚜기 떼는 언제나 저항할 수 없는 재앙의 상징으로 묘사됐다. 그야말로 나쁜 피. 모든 의미를 잿더미로 만드는 무력과 무의미의 상징. 뉘앙스만 다를 뿐 사람들이 말하는 진심은 늘 순간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익숙해지면 모든 게 한없이 옅어졌다. 마치 이별을 말하는 데 소질이 없는 연인이 지난날의 의미를 돌아볼 때 밀려오는 짜증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 무거운 연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련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래스호퍼의 의미를 말해야 하는 변하지 않을 꿈에 갇혀버렸다. 네가 대체 뭐라고 ‘그래스호퍼의 쓸모’에 대해 말하고 있나. 내가 대체 뭐라고 ‘파라메트릭의 비밀’을 밝히려 하나. 서로 거짓말들을 소리 내서 반복할 뿐 역병이 지나간 자리에 메마른 기억만 남기고 있다. 나쁜 꿈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말은 정말 이기적인 표현일 것이다. 누가 누구를 교란하나.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의미 없는 것들에 환상을 부여하며 동등하게 경쟁해왔다. 교란당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나쁜 꿈을 꾸는 것이다. 그래서 경쟁자들을 죽이기 위해 숨 막히는 이유를 지어내는 것이다. 나는 벌써 두 달이나 거짓말을 해왔다. 오늘, 아니 어쩌면 어제 죽었을지도 모르는 많은 생명체에게 오직 내가 돋보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스호퍼에 대한 연극을 한 것이다. 이제 슬픈 막을 내린다. 아무래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나쁜 꿈에서 말없이 깨어난다. 단지 미련이 남을 뿐이다. 오늘 같은 날은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기에 이미 끝난 것을 알면서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렇게나 얘기할 것이다. 목록도, 목적도, 고통 뒤에 감춰둔 거짓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모두를 교란할 것이다. 삶을 간단하게 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사형 선고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지면의 마지막까지 그래스호퍼로 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또 얘기할 것이다. BIG 서펜타인 파빌리온(유선형 디자인+매크로 디자인+커브 어트랙터) 하이드 파크의 서펜타인 갤러리는 매년 영향력 있는 건축가를 초청해 파빌리온 디자인을 의뢰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000년 자하 하디드를 시작으로 2002년 토요 이토, 2006년 렘 콜하스, 2008년 프랭크 게리 등 스타 건축가들의 자유로운 디자인과 동시대 건축의 트렌드를 즐길 수 있는 행사다. 그림 1은 BIG의 비야케 잉겔스가 2016년에 디자인한 파빌리온을 그래스호퍼로 모델링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투명과 불투명’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래스호퍼 키드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온전한 파라메트릭 디자인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89호(2020년 9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 [공간잇기] 담장 안 사람들의 이야기
    용산은 제 고향이에요 오클라호마 주에서 태어난 금발 머리 푸른 눈의 조는 거리낌없이 용산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그렇게 말한 게 짐짓 놀라운 듯 살짝 상기된 표정이다. 의아한 마음에 묻는다. “조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는 초등학교 때 와서 고등학교 때까지 8년만 살았는데 왜 용산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나요?” 엄마 리사와 아빠 브라이언도 딸의 답변을 궁금해한다. “정체성이 형성되던 중요한 시기인 십대를 한국에서 보냈어요. 한국의 생활과 문화가 제 DNA 깊숙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용산 미8군부대 안에 있는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평생 함께할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를 간직한 공간들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인이 됐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오클라호마도 좋지만, 제게 더 의미 있는 곳은 학창 시절 추억이 담긴 여기, 용산이에요.” 조의 어머니인 리사 홀(Lisa Hall)은 용산 미8군 기지 안에 있는 서울미국인초등학교(Seoul American Elementary School)(SAES) 교사였다. 지난해 한국 부임 8년째를 맞은 리사는 특별 수업 교사로서 전 학년(유치원생부터 5학년까지)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워주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뒤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기지 내 학교에서 공부했다. 미국 소재의 대학생이 되어 더 이상 한국에 살지 않지만, 길에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포근해진다고 했다. 담장 너머 금단의 땅 한국인에게 애환의 공간이자 금지된 땅인 용산 기지에는 역사적 아픔이 깊게 서려있다. 1882년 청과 불평등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용산에 청군이 상주한 것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 점령을 목적으로 일본 군대가 주둔했다. 1945년광복 후에는 미국이 일본의 군사 시설을 접수해 사령부로 사용했으며 한국전쟁을 거치며 정착한 뒤에는 미국 제8군이 2019년 말까지 주둔했다. 이곳은 한양으로의 진입부이자 한강과 맞닿은 군사 물자 수송의 허브로서, 외국 군대가 주둔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땅이었다. 국운이 쇠퇴하던 조선 시대 말기 및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 식민지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외세 침략과 간섭의 전초 기지였던 용산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이 역사적인 땅은 한 세기를 돌고 돌아 용산공원으로 재탄생하여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될 예정이다. 리사와의 인연이 닿은 것은 서울미국인초등학교가 문을 닫기 전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서였다. 주한미군의 용산 기지 반환 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기지에 담긴 역사·문화유산을 기록하자는 취지로 모인 ‘용산레거시(Yongsan Legacy)’라는 전문가 그룹을 통해 만남이 성사됐다. 리사는 첫 만남부터 학교에 대한 아쉽고 복잡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용산 기지가 한국 땅인 것을 잊은 적이 없어요. 오랫동안 잘 빌려 썼고, 당연히 한국에 다시 돌려줘야죠. 그런데 사용하는 동안 이 땅에 정이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우리의 많은 이야기가 이곳에 녹아 있죠.”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 60년간 우리 학교를 거쳐 간 수많은 학생과 선생님, 학부모들이 아주 특별한 의미와 추억을 지닌 곳이기도 해요.” 몇 개월 후 학교가 문을 닫고 공원화가 시작되면 학교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리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용산 기지는 군인들만 있던 곳이 아니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한국인들과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어요.” 십 년 뒤 혹은 이십 년 뒤 다시 한국을 찾은 제자들이 유년의 추억이 담긴 이 땅의 역사와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주고 싶다는 눈빛이 간절했다. 게이티드 커뮤니티, 용산 기지 한 세기 넘게 들어갈 수 없던 높은 담장 안 금단의 땅에서도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은 이어지고 있었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공간은 인간의 친구”라고 했다. 사람은 공간 없이는 삶을 이어갈 수 없고, 공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군부대로만 보였던 용산 기지가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보낸 삶의 터전이라는 관점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베일에 싸인 시간 동안 어떤 사람들이 누구와 함께 어떤 일상을 누리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살아왔는지, 흔적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하나라도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곳, 평범한 일상 공간으로서 용산 기지, 그곳이 궁금해졌다. ...(중략) *환경과조경389호(2020년 9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10년간 생활했다.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주거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한국인의 생활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수료했다. SOM뉴욕 지사, HLW한국 지사, GS건설,한옥문화원,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한국인의 참다운 생활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 [북 스케이프] 르네상스 정원의 시원,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
    정원을 설명할 때마다 정원은 인류가 꿈꿔온 이상향을 표현하는 곳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이상향은 시기와 지역, 종교와 문화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도 여럿이다. 가령 르네상스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흔히 『데카메론(Decameron)』을 예로 든다(4월호 참조). 그런데 정원 이론서에는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Hypnerotomachia Poliphili)』라는 복잡하고 낯선 이름의 문헌이 더 자주 등장한다. 제목과 삽화 한두 점은 꼭 나오고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하다고 하니 대충 넘어가기도 찝찝하다. 검색해보면 아름다운 이미지가 쏟아지나 연구는 많지 않다. 원전이 당시 속어로 분류됐던 이탈리아어와 라틴어, 여러 고대 언어가 뒤죽박죽 섞인 이른바 ‘마카로니(macaroni)’ 문학이라 해독이 어려운 탓일까. 출판된 지 500년이 지난 1999년에야 영어 완역본이 출간됐다.1 고전이란 “누구나 읽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읽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책이 아닐까. 그러나 박사 과정 중 순전히 호기심과 호기로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를 학기 과제로 택했고,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2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소설이다. 님프 폴리아를 연모하는 주인공 폴리필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 간신히 잠이 든다. 꿈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폴리아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듯하나 입맞춤을 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제목, ‘힙네로토마키아’는 힙노스hypnos(잠), 에로스eros(사랑), 마케mache(투쟁)라는 세 개의 그리스어 단어가 합쳐진 말, 즉 주인공이자 화자인 폴리필로가 꿈속에서 겪는 사랑의 여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줄거리도 단순하고 플롯도 엉성한 연애 소설이 어떻게 르네상스 정원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까? ...(중략) 각주 정리 1. 1499년 당시 유럽 최고의 인문학 출판사 중 하나인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에서 처음 출판됐고, 1592년에 영국에서 『The Strife of Love in a Dream(꿈에서의 사랑의 투쟁)』이라는 축약된 해적판 번역본이 출간됐다. 프랑스에서는 1546년 『Le Songe de Poliphile(폴리필로의 꿈)』이라는 번역본이 새로 제작한 판화와 함께 발간됐다. 이는 『Le Songe de Poliphile』(Paris: Imprimerie nationale, 1994)로 복간됐고, 『Hypnerotomachia Poliphili: The Strife of Love in a Dream』(Thames & Hudson, 1999)가 최초의 영어 완역본이다. 2. 황주영, “16.17세기 이탈리아 프랑스 정원과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 『미술사학보』 36, 2011, pp.179~214. *환경과조경389호(2020년 9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