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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먼지 쌓인 앨범 속 빛바랜 공원 사진
우연히 본 포스터 한 장에 마음이 흔들렸다. 모처럼 공모전에 나가보자. 떠들썩한 국제 설계공모가 아니라 사진을 찾아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시민 공모전이다. 서울시 공원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하나로 열린 ‘장롱 사진첩 속 남산 찾기.’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는 일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창고처럼 쓰는 수납장을 뒤져 먼지 쌓인 어릴 적 앨범들을 꺼냈다. 남산 사진이 몇 장 있을 텐데, 남산에서 열린 사생 대회에서 지금은 서울시교육청 교육정보연구원으로 쓰이는 옛 어린이회관 건물을 그려 상 탄 기념으로 찍은 사진만큼은 분명히 있을 걸로 확신했는데 도통 찾을 수 없다. 대신 어린이대공원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라는 대통령 친필이 새겨진 기념비 앞에서 찍은 사진, 정문 지나면 바로 나오는 분수대와 하얀 조각상들을 배경으로 한 사진, 국내 최초의 롤러코스터인 ‘청룡열차’에 열광하는 사진. 아마 19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세대는 다 엇비슷한 사진들을 가지고 있을 거다. 반바지 밑에 하얀 타이츠 신고 재킷을 걸치는 게 당시 어린이들의 공원 나들이 패션이었다.
어린이대공원 자리는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의 능 터였고, 1927년에는 서울컨트리구락부의 18홀 골프장이 들어섰다. 능동 골프장을 교외로 옮기고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조성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속전속결 공사로 이어졌고, 1973년 어린이날, 광활한 녹색 초원과 놀이동산을 갖춘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열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개장일 오후 세 시에 입장객이 60만 명을 넘었고 정문 옆 미아보호소는 3백 명 넘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분수대 앞의 내 사진에 새겨진 날짜도 같은 해 5월의 어느 일요일이다. 유난히 뜨거웠던 햇살과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잔뜩 겁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이었던 고 손정목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제작 비용을 줄이느라 돌을 쓰지 않고 콘크리트 위에 석고를 바른 이 분수대와 조각상은 세종로 충무공 동상의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1996년 서울을 처음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 이 조악한 분수대에 반해 똑같은 작품을 자기 집 정원에 설치하려고 작가를 수소문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이대공원은 남산공원, 삼청공원, 사직공원 같은 산지형 자연공원이 공원의 전부였던 서울에 대형 도시공원의 시대를 열었다. 1976년의 기사를 보면 서울시민이 가장 많이 놀러 가는 곳 1위가 창경원(1년에 198만 명)이고 2위는 어린이대공원(117만 명)이었다. 어린이대공원은 동부 서울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했다. 서울시내 어느 곳에서도 한 번만 갈아타면 어린이대공원에 갈 수 있도록 시내버스 노선이 개편됐고, 대공원에 가는 버스 번호는 500번대로 통일됐다. 한적한 교외였던 능동, 중곡동, 뚝섬, 화양리 일대에 개발 열풍이 불었다. 공원이 도시의 구조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한 뭉치 사진을 보며 옛 기억의 파편들을 맞춰보다 마침내 신발 끈을 묶었다. 얼마만일까. 오랜만에 다시 찾은 어린이대공원은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다. 인근의 서울숲보다 훨씬 한산해 쓸쓸하기까지 한 풍경은 수십 년 세월 동안 고치고 덧댄 시설과 공간의 콜라주다. 여러 시간대가 탈색된 채 겹쳐져 있다. 거의 50년 전의 지형과 조각품들에 불과 3년 전에 만든 ‘맘껏놀이터(김’ 아연 설계)가 병치되어 있다. 1970년에 지은 골프장 클럽하우스(나상진 설계)는 철거 직전에 살아남아 시간의 흔적을 견뎌내며 ‘꿈마루’(조성룡과 최춘웅 설계)로 부활했다. 마이클 잭슨이 사랑한 분수대는 그 시절 그대로고, 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퇴락한 놀이동산 한구석엔 1세대 청룡열차가 부식된 채 전시되어 있다.
후문을 빠져나오며 통일교 재단 리틀앤젤스회관을 마주하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음을.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대공원 후문으로 몰려가 선화예고 여학생들을 훔쳐보다 공원 숲속으로 담 넘어 도망치던 한 무리의 십대가 그곳에 있었다. 공원 아카이브 프로젝트 ‘장롱 사진첩 속 남산 찾기’ 포스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 달에는 설계공모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모은 기획물 “공모의 한 수”를 특집으로 기획했다. 초대에 응한 열다섯 팀 조경가들에게 감사드린다. 유튜브로 심사 과정이 생중계됐던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의 수상작 지면에도 많은 관심 기울여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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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우듬지 산책
“매일 지나는 길가 풍경이 항상 같을 리 없다.” 일과에서 산책을 빼놓지 않는 이의 SNS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무척 동감하지만, 미세하게 달라진 풍경을 읽어내기 어려운 날도 분명 있을것이다. 이런 날의 산책에는 달콤한 바닐라 라테 한잔을 연료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매일 지나는 그 길에 늘어선 나무 위를 걸어보면 어떨까? ...(중략)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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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그래스호퍼 연대기Ⅰ
변신
다행히 변해 있었던 건 아니다. 술을 끊은 뒤에도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형편없는 껍질이 그대로 누워있을 뿐 그렇게 의미 있는 변화는 아니었다. 다들 세련된 매너를 표현하느라 분주한 나이가 됐다. 그래스호퍼 같은 기술의 향방에만 관심을 두기에는 합리적으로 소모해야 할 사회적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지나고 나서야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이제 와 누군가를 설득하려 해봤자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그렇게 나는 그래스호퍼를 배우게 됐다. 어느 날 벌레로 변해 버린 건 아니지만 자유로운 선택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코딩을 공부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경가가 그래스호퍼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오곤 했는데, 실존적인 입장에서 꺼낸 얘기는 아닌 것 같아 진지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마 나는 비교적 젠틀한 언어로 위대한 진실보다는 서로의 관계에 의미 있는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모든 미디어는 가치 중립적이고 새로운 미디어는 활용 방법이 덜 개발됐을 뿐이다. 예술가는 어떻게 사용할지만 고민하면 된다. 미지의 세계에 도착했으니 창의적 경쟁심을 잔뜩 탐닉할 기회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래서 배웠다. 인간들의 편견에서 출구를 찾으려고 조련사를 속인 것은 아니다.
미디어와 레퍼런스의 시대
내 생각은 그렇다. 패러다임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 경제나 환경 문제에 있어 지구적 재난의 시대가 도래할지언정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는 없다. 거대 서사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다.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은 기술 개발 시대의 새로운 미디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현하고 포화된 역사를 레퍼런스로 재창조의 문화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지금은 미디어의 시대이고 자기 주체의 시대이며 레퍼런스의 시대라고. 그래스호퍼, 코딩, 파이썬, 클라우드, 스위프트 같은 말들은 더 이상 기술 어휘가 아니고 가치 판단의 문제도 아니며 시대의 역할에 대한 개인의 실천일 뿐이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에 대해 보수적으로 말해 왔으며, 이형의 개인에게 집단은 불편함을 내보였다. 현재를 유지하는 것과 관성을 지속하는 것은 인류에 내재된 방어적 본능이며 돌연변이가 가져올 미래의 가능성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고, 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사람은 달라진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래스호퍼로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이후에 받는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어색한 웃음과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대화 주제를 조합해 대응해 나갈 것이다.
파라메트릭 선언
목록을 나열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선언을 하겠다. 파라메트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스호퍼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코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코딩은 1940년대에 시작됐다. 파라메트릭은 변수를 활용하는 지극히 보편적 개념이며 세상 어디에라도 이미 적용되어 있다. 가치 판단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일렉트로닉 음악이 비틀즈를 대체한 것이 아니지 않나. 비틀즈는 비틀즈고 다프트 펑크(Daft Funk)는 다프트 펑크고, 톰 미쉬(Tom Misch)나 FKJ(French Kiwi Juice)같은 지금 세대의 뮤지션들은 심지어 비틀즈이고 다프트 펑크이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다. ‘대체’가 아니라 ‘확장’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다. 세상에는 아날로그로 설계하는 사람, 아날로그와 컴퓨터로 설계하는 사람, 그리고 아날로그와 컴퓨터와 파라메트릭으로 설계하는 사람이 있게 된 것이다. 그뿐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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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잇기] 마을 기억지도로 찾은 잊힌 공간
기억이 나요
철원에서 아홉 세대를 거치며 대대로 살아온 이근회 어르신이 가만히 앉아 있다 한마디 거든다. “여기 요 옆에 감나무가 있었고 그 옆으로 냇물이 졸졸 흘렀어요.” 각자의 기억을 더듬으며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열 명 남짓 주민들이 일제히 어르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이랑 이 감나무에 올라가 감도 따고 옆 냇물에서 첨벙첨벙 놀고…그러던 곳이에요. 한참 뛰어놀다 목마르면 요 개울 아래 우물에서 물 한 모금씩 마시기도 했죠.” 어르신은 테이블에 펼쳐 놓은 지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천진한 미소를 띠며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 ‘천 년의 철원 토박이’라 불리는 어르신은 지역에서 공무원 생활도 오래 한 터라 누구보다 철원이 변해온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도 어르신이 가리키는 지도의 위치를 열심히 따라가 본다. 하지만 주거지가 들어선 현지도 어디에도 물길과 우물은 보이지 않는다.
“시공간의 이야기를 한 장에 담은 지도를 우리 지역에서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세요. ‘계동100년, 시간을 품은 지도’처럼”(4월호 참조). 지방의 한 연구소에서 ‘일상 공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강연을 마친 내게 누군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철원군청 소속 공무원인 그는 철원에도 잊힌 공간들이 많아 안타깝다며 지역의 사라진 공간을 찾고 싶다고 했다. 주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진행 과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며 말을 이어간 그는 철원이 고향이라고 했다. 짧게 나눈 대화였지만 진정성 담긴 눈빛에서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애틋함이 느껴져 강한 여운이 남았다. 이런 인연으로 시작된 신철원 일대의 ‘시간을 품은 지도’1 프로젝트는 초반에는 순조로운 항해를 할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곳, 신철원
철원에는 새 도읍이 필요했다. 구舊철원이라 불리는 화려한 명성의 옛 도읍은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군청, 경찰서, 법원, 우체국 등 주요 관공서가 있던 자리는 치열한 전쟁의 상흔으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초토화돼 한때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새로운 중심지가 필요했다.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끝에 위치한 갈말읍이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듬해 새 도읍지로 선정됐다. 1950년대판 신도시였다. ‘칡뿌리의 끝’이라는 뜻의 갈말葛末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척박해 아무도살지 않던 땅이었다. 전쟁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된 남쪽 끝에 새 터를 정한 것이다. 비옥한 구철원 땅을 뒤로하고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지 않았을까.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와 지포리 일대에 조성된 신도시는 신철원이라 불렸다. 구시가지에 있던 철원군청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와 학교 등의 공공 시설을 새 중심지로 옮겼고, 철원군민, 실향민, 외지인이 함께 정착할 환경을 하나둘 만들어갔다. 사람이 산 흔적이라고는 없던 허허벌판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철원의 신도시, 신철원의 70년 역사가 시작됐다. “죄송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습니다.” 신철원 주민들과 초기 워크숍을 통해 알아낸 1차 자료를 모아 문헌 조사를 시작할 단계였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곳들을 파악하고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던 참이었다. 관련 관공서, 교육 기관, 문화 시설을 모두 찾아다녔지만 돌아오는 답은 자료가 없어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채 창고에 쌓여 있던 옛 자료를 최근 새 건물을 짓고 이전하면서 모두 불태웠다는 설명이었다. 전쟁으로 불에 탄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십여 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그 자료들을 임의로 없앴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그 자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확인을 할 사료가 없다는 점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수로 지역의 사라진 공간들을 연구할 것인가.
마을 기억 더듬기
신철원은 조직적으로 계획된 요즘 신도시와 확연히 다르다. 전쟁의 폐해를 피해 급하게 만든 만큼 민관의 소통과 협업이 필수였다. 주민들은 사람이 살 만한 땅이라 생각되면 힘을 합쳐 그곳에 마을을 만들어나갔다. 땅을 다져 집을 짓고 농사지을 땅을 다듬었다. 신철원 일대를 가로지르는 용화천은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다. 인근 명성산과 각흘산에서 삼부연폭포의 절경을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물은 신철원의 젖줄이었다. 용화천의 맑고 힘찬 물은 신철원 일대 크고 작은 물길과 우물의 생성에 영향을 미쳤다. 척박한 땅에서 물은 삶의 원천이었다. 신철원의 마을들은 실개천과 우물을 빼면 이야기할 수 없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삶도 이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1960년대 관이 지은 철원 최초의 대중목욕탕이 있던 곳이에요.” 80대 이근회 어르신은 지도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용화천 물을 수동식 펌프로 끌어와 시작한 목욕탕은 당시 철원 사람들이 우물에서 길은 물로 고무 대야 목욕을 하던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지금은 한무관이라는 태권도장이 있던 흔적만 남아 있다. “나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어머니께 여쭤보니 사람들이 빨래를 한 바구니씩 들고 와 빨래를 그렇게 했대요. 물이 펑펑 나오니까. 그래서 주인이 그거 단속한다고 들어갈 때 짐 검사하고 사람들은 안 보여주려고 하고. 그런 시절이 있었대요.” 함께 있던 조금 젊은 60대 주민이 거든다. “지포리에도 목욕탕이 있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1960년대에는 5원짜리 지폐 내고 들어갔죠.” 당시 입장료를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85원 정도로 저렴했다. 목욕탕은 1971년 문을 닫을 때까지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목욕탕 있던 자리 옆이 지금 폐가로 남아 있는 양조장이에요.” 현장 조사 때 본 폐공장 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제법 큰 우물이 있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으로, 한 동짜리 공장 내부 숙직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달력과 관리 일지 등이 무심한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벽에 걸려 있다. 물이 좋아 막걸리 맛도 일품이던 이곳에서 생산된 막걸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단연 인기였다. 말통(20리터 플라스틱 통) 단위로 판매하던 막걸리는 자전거 리어카에 실려 신철원 일대 주점에 배달됐다. “이쪽으로 좀 와보세요. 여기 막걸리 통이 있어요.” 함께 조사 나간 30대 주민이 반가운 듯 소리친다. 오래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폐가 마당에서 버려진 막걸리 통을 발견한 것이다. 술에 취해 아무데나 막걸리 통을 버렸을 누군가에게 순간 고마웠다. ...(중략)
각주 1.‘시간을 품은 지도’는 특허청의 인증을 받았다(상표등록 제40-1454765호).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주거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생활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수료했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 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생활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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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정원, 보다 더 위대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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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학기가 끝나간다. 매주 온라인 강의 준비에 허우적대다 보니 어느새 종강이 코앞이다. 마스크 너머로나마 회색의 인물 아이콘이 아니라 실재하는 수강생들을 만날 기대에 기말고사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재택 근무 모드로 지내다 보니 일상의 모든 경계가 자꾸 흐려지는데, 이럴 때일수록 방학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어수선한 책장을 정리하고, 아래쪽에 내려놨던 탐구 생활용 책과 몇 년째 지지부진한 번역 초고를 담은 두툼한 링 바인더의 먼지를 털어 잘 보이는 곳에 꽂는다. 이 책의 제목은 존 딕슨 헌트(John Dixon Hunt)의 『그레이터 퍼펙션즈(Greater Perfections)』다.1
정원 이론을 공부하면서 헌트의 연구를 피해가긴 어렵다. 그런데 그의 글을 단박에 이해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유려하지만 번역은커녕 해석도 잘 안 되는 문어체 영어 문장은 그렇다 치고, 인문학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 누비는 방대한 지식을 대할 때면 도대체 나는 학부와 석박사 과정에서 뭘 했나 하는 좌절감마저 든다. 하지만 의지할 만한 선학이 있음에 안도할 때가 더 많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치는 그는 대개 조경사학자(landscape historian)로 소개된다. 그의 학문적 경력은 영문학에서 시작하여 미술 이론과 비평으로, 이어 정원 역사와 이론, 비평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작업이 주로 18세기 영국 풍경화식 정원 관련 연구였다면,2 보다 더 포괄적인 정원 이론 연구는 『그레이터 퍼펙션즈』에서 시작된다. ...(중략)
각주 1. John Dixon Hunt, Greater Perfections: The Practice of Garden Theory, Thames &Hudson, 2000, 2004.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