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토리얼] 1월 어느 날의 편집실 풍경
4호선 이수역과 7호선 내방역 사이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환경과조경』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맞은편 벽에 최근 삼사년 치 잡지와 근간 단행본들을 정면 표지 방향으로 진열해 놓은 책장이 있다. 잡지사 편집 공간다운 첫인상을 주는 이 장면을 클로즈업한 사진이 한동안 페이스북 커버에 쓰이기도 했는데, 반응이 제법 괜찮았다. 이 벽면 앞에는 꽤 넓은 중앙 공간이 있다. 편집실을 도시에 비유하자면 광장에 해당할 이곳에는 여덟 명 정도가, 끼어 앉으면 열두 명까지도 둘러앉을 수 있는 넓고 긴 회의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 왼쪽에는 에디터들이 쓰는 책상 일곱 개가, 오른쪽에는 디자이너들의 작업 공간과 마케팅팀의 책상 두 개가 있다.
이 테이블은 멀티 플레이어다. 수시로 벌어지는 브레인스토밍과 아이디어 회의, 주간과 월간 편집 회의가 이 자리에서 열린다. 디자이너가 초벌 디자인을 끝낸 1교 원고를 이 테이블 위에 놓으면 에디터가 가져가 수차례 교정을 본 후 다시 테이블에 올려 둔다. 에디터와 디자이너가 의견을 조율하는 곳도 이 테이블. 인쇄소나 출력소 직원이 방문해도 이 테이블에서 응대한다. 연재 필자나 단행본 저자와 대화하고 기획하는 곳도 이 테이블의 한 구석이다. 이 다목적 광장은 매달 열 개 넘는 표지 후보작을 펼쳐놓고 토론하고 투표하는 민주주의(!)의 현장이기도 하다.
다른 층에 사무실을 둔 발행인이 편집실에 들러 격려와 응원을 하는 공간도 이곳. 야근 때는 배달 음식을 차리는 식탁이 되고, 철야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짧은 치맥 파티의 장이 되기도 한다. 다행히 사무실 구석구석에 숨겨진 방들이 많아 이 테이블이 침대 역할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광장의 풍경은 복잡해진다. 교정지, 디자인 시안, 표지 대안, 먹다 남은 간식 부스러기, 종이컵, 페트병, 중국집 메뉴판이 뒤섞여 뒹군다. 테이블 위의 상태는 마감이 며칠 남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척도다.
오늘은 새 편집위원이 모여 첫 편집위원 회의를 여는 날. 마감이 코앞이라 광화문광장 못지않게 역동적이었던 밀도 높은 테이블이 불과 십분 만에 깔끔한 회의장으로 변신했다. 턱없이 해가 짧은 한겨울, 여섯시지만 창밖은 칠흑이다. 리뉴얼 2기 편집위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리엔디자인펌의 강연주 소장, 수원대학교 도시부동산개발학과의 민성훈 교수, 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loci)의 박승진 소장, HLD의 이호영 소장, 제대로lab.의 정귀원 대표,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의 최이규 교수, 이 여섯 분이 앞으로 2년간 『환경과조경』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편집의 방향, 내용, 형식을 자문하고 모니터링해 줄 새 편집위원이다. 김세훈, 김영민, 김진오, 박성태, 박승진, 서영애, 1기 편집위원진과 같으면서도 다른, 『환경과조경』의 새로운 ‘절친’이 되어주실 것이다.
회의장으로 변신한 테이블에서는 2017년의 구성, 편집, 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뜨겁게 오고갔다. 『환경과조경』 편집진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내용들이다. 보다 선명한 지향점과 중심성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다수. 이는 곧 2014년 리뉴얼 이후 3년간 점차 편집 방향이,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유연하게,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절충적으로 바뀌어 왔음을 뜻한다. 특히 지난 1월호부터 대폭 늘어난 행사 뉴스 지면과 단체 사진에 대한 우려가 이어졌다. 텍스트 분량을 조금 줄이고 시각 이미지의 양과 크기를 늘리고 키운 점에 대해서는 호평이 많았지만, 한 권 전체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과 디자인을 더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도시설계, 도시재생, 도시 문화 등 도시 관련 담론과 기사의 비중을 더 늘려 ‘조경과 도시설계’를 포괄하고자 했던 3년 전 리뉴얼의 방향성을 한층 가시화해야 한다는 토론이 이어졌다. 오늘 테이블의 주 메뉴 중 하나는 연간 특집 주제. 지난 1월호의 ‘용산공원, 함께 이야기하자’, 이번 2월호의 ‘차기 정부 조경 정책 어젠다’, 오는 3월호 특집으로 준비하고 있는 ‘광장의 재발견.’ 나머지 아홉 달의 주제에 관해 편집위원과 편집진은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아시아의 주거 단지, 올봄에 완공될 서울역고가와 마포석유비축기지, 정원박람회 진단, 설계공모 그 이후, 빅데이터와 도시, 구상과 계획 후 10년의 시간이 빚어낸 세종시의 도시 구조와 쟁점, 라이노(rhino)·루미온(lumion)·사물인터넷(IoT) 등의 디자인 테크놀로지가 가져올 조경 설계의 변화 등이 테이블에 올랐다. 리뉴얼 호(2014년 1월호)의 에디토리얼 한 구석에 ‘학생에겐 지적 자극을, 실무 조경가에겐 질투심을, 우연한 독자에겐 꿈을!’이라는 편집 방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한 편집의 필요충분조건은 ‘함께 만드는 잡지’라는 게 오늘 편집 테이블의 결론. 더 많은 독자 여러분의 피드백과 참여, 조언과 제안을 부탁드린다.
가지런히 놓여있던 회의 자료, 과월호, 문구류, 다과, 커피 잔이 흐트러지고 뒤섞여 마감 전날 밤의 편집실 풍경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편집실 밖에도 테이블은 많다. 이곳만 광장인 건 아니다. 칼바람 부는 1월의 어느 날, 편집회의는 방배동의 여러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계속됐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병이 수북이 쌓였다.
-
[칼럼] 공원법 제정 50주년, 대선 후보들에게 제안하는 공원 정책
답답하고 우울했던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이 밝았다. 대선이 있는 2017년은 새롭고, 힘차고, 국민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시발점이기를 기대해 본다. 2017년은 1967년 3월 3일에 ‘공원법’이 제정된 이후 반세기가 지나 만 50주년이 되는 해로 조경계가 꼭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행복과 건강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 중에는 무엇보다도 공원의 푸르름과 여유로운 공간이 있다. 공원은 휴식과 건강을 제공해 주며 지구 온난화와 같은 기후 변화의 해결 방안이기도 하다. 녹색 복지, 안전, 지역 균형 발전의 수단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수명 연장뿐만 아니라 고지혈증 치료에도 효과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올 정도로 공원은 안전과 행복에 필수적 요소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공원은 단순히 도시계획 시설로서의 토지 공간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과 건강한 미래를 담보하는 중요한 녹색 인프라로서 도로, 철도, 항만과 동급의 필수적인 사회 기반 시설이며 새로운 국토 정책의 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지금 공원의 예방적 녹색 복지에 관한 대비책을 미리 확보하지 않는다면, 녹색 인프라 확보의 실패로 인해 향후 사회적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것이다. 공원이 창출하는 경제적 효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센트럴 파크의 경우 자산적 가치가 62조 원, 연간 경제적 효과가 1.2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울산대공원은 연간 713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유발한다고 한다.
2011년 국토부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 16개 광역시도의 전체 공원수는 17,311개에 1,103km2로 국토 면적의 11.1%에 달한다. 지역마다 편차가 크지만 1인당 공원 면적은 전국 평균 22m2(실제 생활권에서 체감되는 면적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로, 연간 109회 이용하고 있을 정도로 도시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특히 공원은 저소득층 환경 약자에게는 더욱 필요한 시설이며, 불평등한 환경 복지와 녹색 복지 해소에 필수적인 시설로 인식되고 있다. 일몰제 대상이 되는 미집행 공원은 352km2로 매입비가 60조 원에 달하는데, 실효될 경우 일시에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어 국토의 난개발이 우려되고 있는데도 구체적인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
공원 관련 국가 조직으로는 국토부 산하 국토도시실 내의 녹색도시과가 개발제한구역 업무와 함께 도시공원 및 녹지 관련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 업무 다음의 부수적 업무로 ‘공원 및 녹지에 관한 법률’의 개정과 해석이 주요 업무다. 공원법 제정 이래 50년이 경과했음에도 도시공원에 대한 제대로 된 국가 차원의 비전, 중장기계획, 통계도 없다. 국가 차원의 도시공원 예산은 미미할 뿐 공원 용지의 보상이나 공원 조성은 거의 개점 휴업 상태다. 현재 도시공원에 관한 예산은 지자체 부담의 원칙하에 국비 보조를 할 수 있다고는 되어있지만, 국비 지원은 거의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국토의 11%가 넘는 공원을 관할하는 부서가 모든 공원 업무를 지방에 위임한 채 국가적 정책을 제대로 펴지 못해 왔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공원 분야에 대한 국가적 정책, 관심, 대응 능력,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기재부 등과 같은 조직도 공원 정책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2년 대선에서는 후보들이 조경계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도 했다. 박근혜 후보는 공원녹지 부분에 대해 ‘2020년까지의 공원 일몰제에 따른 도시공원의 조속한 조성’이라는 공약을 걸고 국비 지원을 통한 공원 조성, 생활권 마을림 조성 등 도시공원과 녹색 인프라 확충을 약속했다. 문재인 후보는 토건형 국책 사업의 폐해를 지양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 보전을 우선하겠다고 했으며, 국가도시공원에 대해서는 관련 시민 단체에게 공식적으로 적극 수용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당선된 박 후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낙선한 문 후보는 지킬 수 없었다. 당선자의 공원 관련 공약이 지켜지지 않았음에 대해 제대로 된 목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조경계에도 반성의 여지가 있다.
이제 우리는 공원 역사 50년을 거울로 삼아 2017년 대선 후보들이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대한민국 공원 정책의 한 획을 긋는 정책을 약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은 전 국민의 공원에 대한 요구가 대단히 높고 공원이 국민의 건강과 행복을 가능하게 하며 회색 인프라에서 녹색 인프라로 패러다임이 바뀜에 따라 공원을 복지와 투자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 다음 사항이 포함될 것을 제안한다.
첫째, 국토부 내에 공원 정책을 전담할 도시공원 담당 부서(예: 공원과) 설치와 부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조경 전문직의 확보. 둘째, 단·중·장기적 공원 비전 정책의 제시. 여기에는 연차별 공원 정비 계획, 공원 일몰제에 대비한 종합 대책 마련, 공원 지표의 합리화, 지자체의 공원 조성 지원 계획 마련 등이 포함된다. 셋째, 16개 광역시도별 국가도시 공원 조성을 위한 실천 계획 마련. 임기 내 1개 이상의 국가도시공원 조성. 넷째, 각 구상을 실행할 수 있는 법령의 제·개정 및 조경진흥법에 의한 ‘조경진흥센터’의 활성화. 다섯째, 각 사업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연차별 공원 예산 확보 가이드라인 설정 및 실천 방안 마련.
대선 후보들에게 공약을 제안할 것만이 아니라 이 공약이 국민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 것이란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당선 후 공약 실행과 이행 정도에 대해 조경계의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어내야 한다.
공원 문제를 행정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은 한계를 갖는다. 공원에 대해 긴 안목으로 접근해 전문가와 지역 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지역의 변화와 함께 만들어가는 공원 미래상을 중요시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공원을 만들어가기 위해 국가, 지방 행정, 시민, 기업이 참여해 함께 만들어간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공원문화운동’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조경계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고 노력해야 한다.
김승환은 동아대학교 조경학과 명예교수로, 수영강변공원 고속도로 지하차도화 운동, 온천천의 자연형 하천화 운동, 낙동강하구 보전 활동 등 지역 하천과 공원 분야에서 실천적 시민운동을 주도해왔다. 1999년도에 100만평문화공원운동을 제창했고 그 실현을 위해 국가도시공원법 제정, 100만 명 서명운동에 앞장서 왔다. 100만평 공원 구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
[이미지 스케이프] 벤치의 배려
어린이조경학교가 있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보라매역에 내려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따뜻했던 지난 주와 다르게 오늘 아침 공기는 제법 차갑더군요. 커피 한 잔 들고 총총걸음으로 보라매공원 입구에 다다르니 느티나무 터널이 반겨줍니다.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일러서 걸음도 천천히, 커피도 한 모금씩 마시면서 느끼는 여유로운 겨울 아침의 산책. 이런 여유 덕분일까요. 초등학생들과 씨름(?)을 하러 가는 길이지만 그리 부담스럽지만은 않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운전할 때 느껴보지 못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천천히 걸으니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도 다르게 보이고, 보도 옆에 설치된 벤치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겨우 5분이 사람을 참 여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벤치를 찬찬히 살펴보니 어딘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뭐가 다를까? 벤치 중간에 보이는 동그란 구멍들, 그리고 뭔가를 떼어 낸 자국도 보이네요. 아, 팔걸이를 제거한 모양이구나!
마침 방금 전 전철에서 읽은 블로그 글이 생각납니다. 이 벤치를 보려고 그랬는지 ‘거리의 벤치에 팔걸이가 생긴 진짜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었지요. 눈치 채셨겠지만 노숙자가 벤치에 눕지 못하게 하려고 중간에 팔걸이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노숙자들이 경찰이 보는 앞에서 벤치 팔걸이를 자르는 시위를 했다는 내용도 소개하면서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글이었습니다. 공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노숙자가 많아 지는 게 골칫거리일 겁니다. 노숙자들이 벤치를 다 차지해버리면 다른 이용자들이 많이 불편해 할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벤치의 팔걸이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습니다. 왜 우리 사회는 그 정도의 배려도 못할까. ...(중략)...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그려도 그려벌레는 정말 그립기만 해
그려벌레, 다른 말로 설계충(設計蟲). 종이에 감광(感光)된 그려벌레의 궤적은 생각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흔적이자 시간의 단면이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이 단속적(斷續的) 반투명 막을 통과하면서 생각은 우회하거나 비틀어졌고, 궤적 또한 수레바퀴가 굴러간 대로 남지 않았다. 자신의 몸으로 기어왔던 벌레가 생각도 바퀴도 궤적도 모두 부정해버리는 굴절된 상을 거울 보드키 들여다보고 있을 때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觸診)……하고 손이 갈 때 지문(指紋)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라 했던 시인의 전언(傳言)은 말 그대로 선뜩하다.
2014 0327
함께 있는 건축가 윤이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공모’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사무실에서 일하는 정과 사무실 팀장이 붙기로 하고, 인터커드의 윤 소장에게 함께 설계공모를 하지 못하게 됐다고 전화를 넣었다. 섭섭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순간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2014 0405
사월 초하루, 서소문공원. 현양탑, 윤관장군동상, 분수, 지압 보도와 운동 시설, 재활용 처리장과 지하 주차장, 꽃시장 그리고 노숙자와 왼갖 나무들. 서울역, 경의선 철로, 건널목, 서소문 고가도로, 주상 복합 건물, 약현성당, 염천교, 제화점, 남대문, 호암아트홀이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서소문은 없었다. 소덕문이라 불렸
고,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기도 했다. 문밖은 조선시대 때 형장이면서 성 밖 시장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네 번의 박해로 형장은 성지가 됐다. 지금의 서울은 오백 년 도읍의 구조 안에서 내재적인 필요에 의해 점진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에 의한 폭력적 계획으로 변형되었고, 이 폭력적 계획을 내면화하면서 ‘서소문밖’의 무질서한 풍경과 같은 도시를 만들어냈다.
이곳에선 시각적 혼란과 역사적 혼란이 동시에 일어난다. 형장이 과거 한양의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순교성지는 전복된, 도시의 구조와 아무런 상관없이 들어온 사건이다. 이 관계. 그러니까 성지가 도시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생겨났다면, 도시 맥락 속에서 그것을 놓아야 하나, 사건 속에 놓아야 하나. 장소 자체는 어쨌든 도시의 맥락과 구조 속에 놓이게 되는데. 이곳이 다른 곳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어지럽다. ...(중략)...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목재 데크를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목재 데크를 사용한 벤치의 클로즈업 사진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높은 등받이가 있는 목재 널빤지(wood plank) 마감의 벤치다. 등받이의 널빤지는 일반적으로 설계와 시공에서 사용하는 종방향 또는 횡방향의 레이아웃이 아닌 사선 방향으로 배열했다. 더 나아가 재료의 이음매에서 사선 방향의 배열을 90도로 틀어 V자 형태(chevron)의 패턴을 만들어냈다. 시공과 유지 관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계를 하는 데도 손이 많이 가는 디테일이다. 번거롭게도 좌우 등받이는 평평하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 둔각으로 미세하게 꺾여서 만나고 있다. 이 경우 입면에서 목재 널빤지 끝을 모두 동일한 예각으로 재단해야 함은 물론, 평면과 단면에서도 좌우 등받이가 만나는 둔각과 동일하게 모서리를 다듬어야 이음매가 뜨지 않고 깨끗하게 마무리된다. 목재 널 한장 한장을 현장에서 일일이 대 보고 맞추어 가며 재단, 배열, 세부 조정 및 고정이라는 많은 품을 팔지 않으면, 이와 같이 정교하고 날카로운 디테일이 완성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걸음 물러나서 관찰해 보자. 이 높은 등받이의 벤치는 약 1m 남짓 높이에 위치 한 잔디밭과 아래 단의 목재 데크 산책로(boardwalk)를 중재하는 옹벽의 일부다.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 사람들 너머로 경치를 감상하고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높은 단에 잔디밭을 제안했고, 높이 차이를 처리하기 위한 콘크리트 옹벽을 목재 널빤지로 마감하여 등받이를 세웠다. 벽을 따라 연속적인 벤치를 제안했는데, 마치 얇은 목재 널빤지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간결한 스테인리스 스틸 지지대를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아래 단의 목재 데크는 벤치 등받이와 동일한 패턴의 사선으로 배열했는데, V자 패턴을 만드는 이음매를 정확히 일치시켜 수직면과 바닥면이 연속되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홍정완 상화원 원장
서해의 비원, 보령 상화원
여기 어떤 이가 만든 비밀의 정원이 있다. 처음엔 그저 홀로 즐기기 위해 시작됐지만, 어느덧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누구나 찾아가 쉬며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정원의 둘레를 휘감는 1km 넘는 지붕 회랑을 만든 수고로움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섬을 찾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보다 근사하고 편안하게 정원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고된 시간과 예사롭지 않은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젝트다. 게다가 급히 완성할 목적으로 효율성만 추구하지도 않았다. 원래 살던 죽도 주민의 발자국이 겹쳐져 생긴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틀어지면 틀어지는 대로, 땅의 흐름과 박자를 맞추며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지었기에 3년 넘게 걸렸다고 한다. 도중에 만나는 나무는 하나라도 베는 일없이 곁을 돌아가거나, 아예 회랑 바닥과 천정에 구멍을 내는 식으로 품어버렸다.
조화를 숭상한다는 이름에 걸맞은 회랑이다. 그러기에 상화원은 비단 아름다운 풍광뿐만 아니라 시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고 뜻과 의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경치를 가진 이곳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감정적으로 진한 무언가를 느끼며 또 존경스런 마음으로 거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급조된 것만 성행하는 우리 사회에서 뭔가 다른 내면의 성숙과 정직한 부지런함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상화원에는 복원된 아홉 채의 한옥이 있는데, 특히 행랑채들이 두드러진다. 『한옥의 섬』이란 책에도 표현되었듯, 행랑이란 여러 사람이 드나들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사랑채보다 훨씬 자유롭게 열린 공간이다. 상화원 자체가 하나의 푸근한 행랑채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상화원의 시설은 과하지 않고 약간 부족하게 비어있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필요한 것을 간소하게 갖추어 놓았다. 카페나 식당이 없고, 식사는 외부에 있는 음식점을 이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비지터 센터에 해당하는 의곡당에서 간단한 커피와 차를 제공하고 있으며, 한옥 복원 지역 내의 한옥은 모두 개방되어 있어 들어가면 셀프서비스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회랑길에는 무인 생수 판매대가 있어 물을 사먹을 수 있는 정도다.
산과 계곡에서 시끌벅적 배불리 먹고 마시고 취하는 우리네 풍조에 대한 주인장의 사뭇 정갈한 대안인 듯하다. 대신 해변독서실, 해변연못, 조각정원, 해송의 숲, 하늘정원 등 책과 예술, 물과 생명, 하늘과 바다처럼 보다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섬을 즐기라는 메시지를 뚜렷이 읽을 수 있다.
상화원의 또 하나 우수한 점은 한국적 미를 표방한 정원임을 강조하면서도 한옥과 전통 정원의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을 바탕으로 부지 상황에 맞는 배치를 융통성 있게 전개한 점, 그리고 실제 이용 측면에서 실용성을 중시한 점이다. 전국 각지에서 값비싼 세금으로 조성된 진정성(authenticity) 없는 재현 한옥 시설이 문을 걸어 잠근 채 비바람을 맞으며 낡아가는 가운데, 상화원은 한옥의 보존과 재사용에 대한 탁월한 선례를 제시하고 있다. 유물로서의 한옥이 아니라 현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하는 한옥의 복원. 오래된 원 재료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이건과 복원이라는 힘들고 의미 있고 비싼 길을 택해 세워진 소중한 한옥이라 더욱 더 철저한 보존과 갖가지 금지 목록이 나열될 법하지만, 상화원을 만든 분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과감하게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이 마음 가는 대로 드나들도록 한옥을 열어두었다. 그만큼 관람객들을 믿는다는 뜻이겠다. 관람객 또한 그런 의중을 알기에 경우 있는 사람이라면 사뭇 몸가짐을 살피며 고맙게 이용할 것이다. 그런 한옥에는 그저 얼마간 앉아만 있어도 좋다. 수백 년 세월의 때가 묻은 대청마루에서 옥빛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의 감동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 캐나다산 소나무로 새로 지은 한옥이나 콘크리트 건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감동이다. 섬의 원주민들이 일구던 계단식 밭에 심겨진 한옥들이라 흡사 지중해의 해안 마을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대 주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워터프런트 조망과 고전적 한옥이 합쳐진 느낌이 묘하다. 먼 길을 이사 온 한옥들이지만, 여기 상화원에서 제대로 된 고향을 찾은 듯하다.
전국의 많은 한옥이 거주자의 노령화와 관리 비용 및 수리의 난항으로 인해 사라져 가고 있다. 목재와 기와처럼 쉽게 구하기 힘든 재료, 기술자의 부족 등 한옥을 고쳐가며 사는 일에는 상당한 고충이 따른다. 교통이 불편한 산간벽지일수록 사정은 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옥을 적절히 관리하고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에 집결시켜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대책이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또는 한국 정원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상화원은 현실에서 명쾌히 해결하고 있다. 김치와 된장 맛을 아는 사람이 만든 정원은 한국 정원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상화원에서 느낄 수 있다. 이건 중국식이네, 저건 일본풍이네 하는 분류는 더 이상 논쟁의 가치가 없다. 아무리 다양한 문화적 힌트를 섞어놓았다 할지라도 한국 정원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손상된 느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상화원이라는 한국 정원은 우리가 그동안 해외에서 보고 배운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소화해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이가 편협한 순수주의에 갇혀 그러한 절충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만이 한국 정원의 진수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에 불과할 것이다.
늦가을임에도 상화원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여름 성수기에는 하루에 약 천여 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대천과 무창포 해수욕장으로 제법 알려진 보령이라 해도 먼 길을 달려 웬만한 미술관이나 박물관보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이곳 정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꽤나 인상적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정원이란 분명한데, 조경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상념이 들기도 한다. 이른바 창조적 자본주의의 시대.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한 몇몇 제조업의 전국적 파급 효과를 주장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 각 지자체가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다. 상화원은 분명 훌륭한 자원이다. 보령과 충청남도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려 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상화원을 이해하고 상화원의 창조자 홍상화 선생의 뜻을 과연 깊이 이해했을지는 의문스럽다. 개인이 사비를 들여 정성껏 가꾸어 온 섬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면, 공적 영역은 그러한 노력에 맞는 화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입구에 상화원의 콘셉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물섬이라는 이름의 게이트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나, 관에서 조성한 티가 역력한 주차장과 안내도, 화장실 등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상화원 외부의 난잡한 상업 시설과 경관, 도로, 공적 공간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상화원을 조성한 분의 안목에 걸맞은 장기적이고 통합적이며 섬세한 계획과 설계가 뒷받침되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큰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앞서 지난 달에 밝힌 대로, 이번 인터뷰 시리즈의 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장소, 다른 하나는 인물. 빼어난 장소는 결코 쉽게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 한 인물의 착상과 고통이 동반된 실천이 시간에 녹아들어 농축된 산물이다. 따라서 장소의 핵심을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피상적 이해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가 실제 공간보다 더 흥미로울 가능성도 많다. 설계자의 입장에서 상화원을 둘러보면서 아무도 모르게 서해의 비원을 가꾸어온 홍상화 선생에 대해 사뭇 궁금한 감정이 생겼다. 가우디의 구엘 공원이 연상되기도 했는데, 일견 그로테스크하고 절충적(eclectic)인 스타일 때문일 수도 있고 가우디의 정열이 공명되어서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환상적인 섬을 만든 분은 가우디와 같은 기인의 범주에 포함됨이 분명해 보였다. 사정상 이번 인터뷰에서는 홍상화 선생을 대신해 현재 상화원 원장이자 모 회사인 ㈜한국컴퓨터지주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는 홍정완 씨를 만났다. 바쁜 일정 가운데 시간을 내준 홍정완 대표에게 감사드린다.
Q. 상화원 조성의 시작이 궁금하다.
A. 부친이 죽도의 상화원 부지를 구입하신 건 1973년 무렵이다. 그 후 1974년 한국컴퓨터지주를 설립하고 사업에 매진하시면서 섬에 큰 관심을 가지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 1988년에 회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시면서 소설가로서 활동하시게 되었는데, 1993~1994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 ‘거품시대’ 집필을 위해 섬에 머무르신 것이 죽도를 정원으로 가꾸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인 듯하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섬이 상화원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라 하겠다.
Q. 초기에는 집필 장소로 쓰려는 소박한 뜻이었던 것 같다.
A. 보령에 연고는 없다. 무창포에 가족의 작은 별장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서를 오곤 했고, 부친이 섬을 구입하게 된 건 누군가의 부탁에 의해서라고 들었다.
Q.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현지인 소유였다면 죽도는 간척지의 일부가 되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방파제 후면 도로 덕분에 섬이 육지에서 매우 가깝다. 접근성 측면에서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
A. 현재 죽도와 육지를 잇는 남포방파제는 간척 사업의 일부로 1980년대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행히 죽도를 바다 쪽으로 보존한 채 진행되었다. 방파제 후면 도로가 완료되면서 원래는 뭍에서 한 4.5km 떨어져 있던 섬이 육지와 이어지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정원 조성을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1997년 IMF 사태로 모든 것이 중단되게 된다. 한때 경제적 이유로 호텔과 대규모 콘도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착공 직전 부친이 “이곳은 후손에게 정원의 형태로, 자연 그대로 남겨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셔서 애초의 정원 계획으로 돌아가 현재 한국식 전통 정원인 ‘상화원’에 이르렀다.
Q. 한국 정원으로서 상화원의 주요 요소는 무엇인가?
A. 상화원 한국 정원 조성의 축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섬의 남쪽 사면, 기존 주민 10여 가구가 거주하던 훼손된 임야에 전국 각지의 전통 한옥을 옮겨와 복원했다. 고려 말기 건축물로 추정되는 경기도 화성 관아였던 ‘의곡당’, 전북 고창군 아산면 구암리 ‘홍씨 가옥’을 비롯해 충남 홍성군 행정리 ‘오흥천씨 가옥’, 충남 청양군 남양면 대봉리 ‘이대청씨 가옥’, 충남 보령시 주산면 야룡리 ‘상씨 가옥’ 등 일부 붕괴됐거나 폐가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집주인이 사실상 보수·유지를 포기한 한옥들을 사들여 이건 후 복원했다. 의곡당은 발견 당시 화성 시내 재래시장 내의 다방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훼손이 너무 심했지만 기둥과 대들보가 남아있었기에 300만 원에 매입한 후 옮겨서 복원했다. 손상된 부분의 복원에 쓸 자재를 찾기 위해 강원도 삼척부터 전국 각지를 조사하기도 했다.
둘째, 섬의 북측 지역에는 수목 사이로 방갈로를 앉히고 건물 위를 이어 송림을 즐길 수 있는 옥상 정원을 마련했다. 원래 숲이었던 지역이라 나무를 베지 않고 숙박 시설을 만드는 게 매우 힘들었다. 숙박 시설은 상화원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지켜야 할 의무 사항이다. 나무 사이로 건물을 앉히고 지붕 층을 모두 목재 데크로 이어 하늘정원이 되도록 했다. 현재 방갈로는 25인 이상의 단체에게만 예약을 받고 있지만, 상화원의 모든 관람객이 하늘정원을 통해 전망과 솔숲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셋째, 해안가를 따라 돌담을 쌓고 서로 이어진 33개의 연못을 조성했다. 2만 평 남짓한 작은 섬이다 보니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많지 않다. 산 중심에서 흘러온 계류가 차례차례 연못들을 채우고 캐스케이드 형식으로 아래로 흘러가는 구상이었지만, 갈수기에는 인공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다.
이 세 곳을 연결하는 것이 회랑이다. 1km가 넘는 지붕 회랑은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다. 약간의 높낮이 변화가 있어 유모차를 끌 수는 없지만, 섬의 대표적인 풍광과 장소를 하나로 이어주는 대표적 요소로서 상화원의 상징이 되었다.
Q. 특별한 외부 전문가의 개입 없이 홍상화 선생이 거의 독자적으로 상화원을 조성해 오신 까닭에 상당히 강한 개성이 곳곳에 배게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언뜻 이해하기 힘든 모습들도 있다. 가령 섬 둘레를 따라 해변연못을 조성한 점이 그렇다. 보통 바다를 낀 곳은 바다를 바라보는 조망에 집중하게 되지 않나?
A. 해변연못에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든 게 사실이다. 보령은 예로부터 벼루를 만드는 오석으로 유명한데, 여기서 채석된 돌을 섬으로 옮긴 후 사람이 일일이 맞춰 쌓아가며 연못을 만들었다. 인력과 시간이 많이 들었다. 부친은 정원 내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연못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각 연못에 서로 다른 수생 생물의 고유한 특성을 담아내기 위한 의도도 있다. 약간의 종교적 의미도 있다. 천주교 신자인 부친은 예수가 살았던 33년을 상징해 서른세 곳의 연못을 조성한 것이다. 실용적인 의도는 없다고 본다. 순전히 미학적인 이유다.
Q. 인력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서인지 연못 돌담의 손맛이 참 좋다. 바다를 향한 큰 경치와 동시에 갖가지 작은 풀과 햇빛이 어우러지는 아기자기한 연못이 있어 자칫 삭막해질 수 있는 해안가에 생명의 풍부함이 더해진 듯하다. 섬이란 원래 물이 부족한 곳이기 마련인데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어 풍성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지 않나 짐작된다. 그 연못을 따라 회랑이 이어진다. 섬을 둘러서 조성된 회랑은 편하게 한 바퀴 일주를 할 수 있게 하는 멋진 설계다.
A. 원래 섬 주민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난 길을 따라 만든 것이다. 날씨가 궂은 날 하이힐을 신고도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회랑은 섬 둘레를 포괄하는 동시에 주요 시설인 한옥 지구와 빌라 단지를 연결해주는 네트워크 역할을 한다. 회랑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해변연못과 개울을 만날 수 있으며, 바닷가 쪽으로 이어지는 해변 테라스로 내려가면 암반과 파도를 마주할 수 있다. 회랑에 설치된 벤치와 앉음벽은 낙조를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다.
부분적으로 만들어졌던 걸 모두 이은 것은 2013년 3월이다. 조성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유지도 쉽지 않다. 상화원의 회랑은 근본적으로 설계도에 따른 공사가 힘들다. 다양하고 미세하게 변화하는 현장 여건 때문이다. 길이 오르락내리락 함에 따라 적당한 구배와 적절한 폭의 계단이 필요하며, 기존 수목을 옮기지 않고 피하거나 회랑 바닥과 천장에 구멍을 내어 나무를 품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해서 부친이 고집스럽게 직접 나서 공사를 돌보셨다. 장소에 따라 그 자리에서 결정할 일이 많다. 혹시 한옥 지구 사이로 배치된 회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변 한옥과 이질적이지는 않나?
Q. 일단 회랑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각기 다른 지방에서 모인 다른 시기의 한옥들이 한 곳에 밀집하면서, 금방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규모나 스타일이 사뭇 달라서 전체적으로 절충적 성격을 띠는 게 사실이다. 그러기에 섬을 둘러싸는 회랑이 한옥촌을 따라 이어지면서 통일감을 주는 것도 좋다고 본다. 아스팔트 싱글은 사실 가장 미국적인 재료 중 하나인데, 패턴과 색의 사용에 따라 시각적 효과에 큰 차이가 난다. 회랑의 느낌이 무겁지 않고 흐르는 느낌을 주는 점은 큰 장점이다.
A. 아스팔트 싱글을 사용한 건 물론 비용 측면 때문이다. 또 염분이 많은 해안 지역이기 때문에 내구성도 좋고 설치 면에서 상당히 간단하다는 장점도 있다. 계획했던 회랑의 길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기와나 초가를 썼다면 공사 기간도 연장 됐을 것이고, 정기적인 수리에 많은 비용과 에너지가 소요됐을 것이다. 지적하신 대로 부분적으로 회랑의 지붕 색상이 밝은 갈색 톤이라 한옥 지붕에 비해 튀는 면이 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톤다운 되면서 나아지리라 예상한다.
Q. 자연스럽게 이끼라도 끼게 되면 멋질 것 같다. 섬 북서쪽의 빌라(방갈로)에는
모던한 스타일을 택했는데?
A. 빌라의 건축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린다고 본다. 모양이 비행선 같다는 사람도 있다(웃음). 하지만 1990년대 당시 빌라 계획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그곳 솔숲에 있던 나무들을 해치지 않고 건물을 배치한다는 생각이었다. 1층 평면이 2층에 비해 작은 것도 최대한 지면에 대한 훼손을 줄이겠다는 의도다. 숙박을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효율적인 평면이 나와야 했기에 쉽지는 않았다. 각각의 유닛은 실내 계단으로 이어진 복층 구조이며, 숲과 해변연못, 바다를 향한 전망을 위해 통창을 채용했다. 기본적인 숙식 시설 외에 옥상으로 통하는 원형 계단이 특징이고, 낮에는 선탠을 즐기고 밤에는 별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방과 노천탕을 갖추고 있다.
부친은 빌라 또한 숙박객만을 위한 배타적 공간으로 두지 않고, 20여 동의 옥상을 데크로 이음으로써 일반 방문객도 경치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하늘정원을 배려했다. 옥상에 큰 면적의 데크를 설치하는 건 습기 배출 등 여러 면에서 어려운 작업이고 건물에 무리를 줄 수 있다. 하지만 빌라 지구 또한 개방하고 나눈다는 취지가 더 중요했다.
관광특구로 지정 받고 나서 호텔과 리조트를 짓겠다는 투자자가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대규모 호텔이 들어설 경우 건물뿐만 아니라 소방도로, 수로 등 부대시설로 인해 숲의 훼손이 불가피하다. 때문에 어느 정도 추진을 하다가 비전문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공사를 하자는 쪽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부친이 스스로 계획했던 대로 나무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땅에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이도록 설계했고, 건물도 2층으로 제한해 숲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상이다. 외부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나무가 건물의 가운데를 관통하며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자연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Q. 대기업이 관행적인 평면에 따라 만들었다면 현재와 같은 소박한 맛은 없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섬과 한옥,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과정 자체도 매우 까다로웠을 것이다. 차량 접근도 쉽지 않았을 것이며, 경사지이고, 한정된 부지에 상당한 수의 한옥을 복원하는 것도.
A. 한옥 이건이 가장 힘들었다. 입구의 정자 의곡당을 포함해 총 9채. 2002년에서 2004년 사이에 전국의 쓰러져가는 한옥들을 구입해 섬에 보관했다. 하나하나 분리하고 번호를 매겨 보관하던 한옥 자재를 이용해 2009에서 2012년 사이에 복원 작업을 했다. 대목부터 시작해 전문가들의 정성이 상당했다. 상당 부분 소실되고 허물어진 가옥들이었기에 매입 비용은 300만~1,000만 원 정도였지만, 이건 비용은 2~4억 원대에 달했다.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구입 당시 한옥은 훼손이 매우 심한 상태였다.
Q. 그런 수고로운 복원의 과정을 거친 한옥을 박제처럼 보존하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차를 마시고 누구나 이용하는 공간으로 개방한 점이 인상적이다.
A. 관광특구로 지정되고 나서 한동안은 회사와 자회사, 주요 고객들의 연수 장소로만 활용되었다. 기업 고객만을 위한 휴양지였다가 상화원을 대대적으로 개방하게 된 건, 지자체의 요청도 있었지만 결국 부친의 뚜렷한 뜻이었다. 우리만 즐기는 곳이 아니라,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보다 여러 사람이 출입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부족한 예산은 모 기업인 한국컴퓨터지주가 지원하는 방식이다. 일반인 대상의 개방에 처음에는 우려도 많았다. 그러나 부친이 워낙 의지를 갖고 실행하셨고, 2016년 4월부터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상화원은 지키는 사람이 없다. 방문하는 이가 스스로 돌아보고 차를 만들어 마시고 뒷정리도 알아서 하는 방식이다.
한옥을 복원할 때 일화도 많다. 한옥 배치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셨다. 한 번은 거의 다 지은 한옥을, 옆 건물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허물고 위치를 옮겨 다시 지으라고 지시하셔서 내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부친은 책 몇 권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애정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말씀하신다. 상화원이라는 소설이다.
Q. 바닷가 비탈 곳곳에 해변독서실이라는 이름으로 책상과 오두막을 설치한 게 이채롭다. 단순히 바다를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서 좋다. 블로그를 보면, 여기서 오래 머물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서실이라는 콘셉트가 상당히 친근감을 주는 것 같다.
A. 네 곳의 해변독서실은 상화원에서 해변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파도와 바람 소리를 벗 삼아 조용히 책을 읽는 초가지붕 정자들이다. 세월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이 해변연못과 회랑 근처에 각자의 돌을 쌓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만들었던 사람과의 교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사람들 마음이 어려 있는 모습이다.
Q. 기분 좋은 장소에 가면 거기에 무언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성향일 것이다. 상화원은 다섯 곳의 노천 해수탕이나 동굴 와인 카페 등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힐링 장소도 갖추고 있다. 관리에 상당한 비용이 들 것 같다.
A. 현재 죽도상역개발이 관리하고 있다. 현재나 앞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입장료는 유지관리를 하기에도 부족하다. 일반 관람객을 받고 나서부터 필요한 인력이 더 늘었다. 어차피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유지만 가능하게끔 하는 게 목표다. 정원은 시간이 드는 만큼 좋아지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보셨다시피 상화원은 지금도 계속 공사 중이다. 빌라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몇 채만 옥상이 서로 이어져 있었는데, 최근에 모두 이어지게 되었다. 빌라 이용객만 소나무숲 경관을 즐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기에도 적당한 장소가 되게 하고 관람객들도 옥상 정원을 통해 함께 즐기게 하자는 의미다.
Q. 정원에 대한 관심, 한옥, 자연 보존, 수집한 조각, 와인 등 다방면에 걸친 홍상화 선생의 관심을 알 수 있다.
A. 워낙 여행을 많이 다니셔서 해외에서 구입하신 것들이 곳곳에 있다. 와인 저장고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복분자로 만든 와인을 숙성하는데, 맛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Q. 식재에 관한 전체적 콘셉트가 있다면?
A. 기본적으로 상화원의 모든 수목은 원래 있던 것을 보존한 거다. 한옥을 이건하다가 어느 때인가 향나무를 같이 가져가라 해서 입구 근처에 심었는데, 부친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인위적인 일본 정원 풍의 향나무는 상화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셨다. 그만큼 자생하는 식물을 정성껏 돌보는 게 식재 콘셉트다. 너무 귀한 해송이라 하나라도 베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따로 식재한 것은 없고 모두 원래 있던 것을 보존한 것이다. 다만 한옥지구의 경우에는 한옥을 이건하면서 근처에 있던 나무들도 함께 옮겨와 심었다.
회랑을 걷다 보면 곳곳에 콘크리트 펜스가 보일 것이다. 낡고 허물어지기도 해서 실제 쓰임새는 없고 보기에 싫을 수도 있지만, 부친이 섬에 처음 만드신 작업이라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콘크리트 펜스라도 시간이 켜켜이 쌓인, 역사를 볼 수 있는 것들은 그대로 놔두었다.
Q. 개방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호응이 높다. 11월까지 개방하는데, 실제로 설경이 매우 아름다울 것 같다.
A. 안타깝지만 겨울에는 안전을 고려해서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다. 부지가 넓기 때문에 제한된 인력으로 겨울철 준비와 방문객이 편히 돌아볼 수 있도록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
Q. 아너 시스템, 양심과 자율에 따른 이용은 우리네 관광 문화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가치다. 또 제한된 인원으로 큰 정원의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안일 수도 있다. 보령시나 충청남도의 지원은 없나?
A. 그렇게 이해해 주신다면 고마운 일이다. 보령시가 상하수도, 하수처리장 등 기반 시설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시설이 없이 자체적으로 처리하려 했다면 많은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Q. 상화원 주변으로 상가들이 정비되지 못한 점이 좀 아쉽다. 상화원의 분위기와 어울릴 수 있는 전체적 계획이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A. 상화원이 세계 100대 정원에 오를 수 있도록 발전, 확대시켜 나갈 계획이며, 수준 높은 예술품을 확보해 회랑을 따라 비치해 나갈 것이다. 또 복원된 한옥을 본격적인 정주를 위한 공간으로 개조하기 위해 화장실과 욕실 등 필요한 시설을 어떻게 갖추느냐는 앞으로 현명하게 해결해 가야 할 숙제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
[명사들의 정원 생활] 삶의 두께와 정원
1.
“… 석문(石門) 안 넓게 펼쳐진 곳, 산을 낀 물가 요지에 초가 서너 채를 짓는다. 앞마당엔 가림벽을 치고 온갖 화분을 놓되 국화는 적어도 48종을 구비하도록 한다. 그 옆으로는 뒷산에서 대나무 홈통으로 끌어 온 물을 모아 작은 못을 파고서 연과 붕어를 기른다. 연못물은 인접한 남새밭으로 흐르게 하는데, 잘 구획된 그곳엔 여러 가지 채소 원예들이 물결치듯 무늬를 이룬 채 심겨져 있다. 텃밭 주위는 찔레꽃으로 둘러서 오뉴월 뜨거운 햇볕 아래 밭일하려는 이의 코를 즐겁게 해준다. 사립문 밖 산기슭 바위에 작은 초정을 두어 무성한 숲과 맑은 계류가 이루는 빼어난 경치를 즐긴다. 초정은 대나무로 난간을 둘러 소박한 운치를 더한다. 시내 옆에는 넓은 전답을 두어 굳이 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 살만한 터전을 확보한다. 그 너머로는 넓은 호수가 있어 연, 토란, 마름, 가시연 등이 가득한데, 달 밝은 밤이면 작은 배를 타면서 친구들과 시와 음악, 그리고 술로 흥취를 즐긴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상적인 집의 면모를 설명한 글이다. 선비로서 본분을 지키며 살아갈 거처가 어떠해야 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답한 편지에 실린 내용이다. 이상적인 주거지의 면모를 상상으로 그려본 것이니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바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람직한 집을 설명하면서 건물보다 정원과 주변 환경 설명에 훨씬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물은 초가 서너 채와 초정만 등장할 뿐이다. 산과 계류, 바위와 숲 등 자연 환경 요소가 더 중시되고 있다. 집안 가구로도 책장, 책상, 탁자 정도만 언급될 뿐이고 1,400여 권의 책과 향로가 오히려 더 강조된다. 너른 호수의 뱃놀이와 음악, 술을 함께할 친구, 참선과 설법, 시와 술로 가슴속 생각을 기꺼이 나눌 스님, 차와 누에를 함께 치며 미소를 주고받는 부인도 등장한다. 결국 다산이 그린 이상적인 주거는 크고 화려한 집이 아니라 산과 물이 잘 어울린 경승지에서 연못과 꽃이 있는 정원과 텃밭, 너른 호수 등을 잘 갖추고서 친구, 승려, 부인 등 마음 맞는 이들과 시와 음악, 술, 뱃놀이 등으로 운치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러한 정경이 근사한 곳 중 하나가 ‘다산초당’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비록 귀양처이긴 했지만 자신이 그린 이상적 거처에 가까웠다 하니 다산초당에서의 삶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있다. 연구소와 설계사무소에서 기획부터 설계, 감리에 이르는 실무를두루 익힌 후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93 대전세계엑스포 조경계획 및 설계, 인사동길 재설계,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조경설계, 신라호텔 전정 설계 및 감리, 선유도공원 계획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
[시네마 스케이프] 시티 오브 하이웨이
라라랜드
만약에 말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LA가 아니라 뉴욕이었다면 어땠을까.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리피스 공원은 센트럴 파크로 바뀔 테다. 늘 막히는 도로 사정과 자동차 때문에 생기는 우연과 사건은 걷는 도시 뉴욕이라면 어떻게 변주될까. 무명의 재즈 피아니스트와 배우 지망생 이야기라면 뉴욕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라라랜드’는 LA를 배경으로 한 달콤하고 아름다운 뮤지컬 영화다. 춤과 노래, 환상과 시공간의 압축으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마법을 펼쳐 보인다. 전통 재즈를 추구하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과 배우가 되기 위해 꿈의 도시로 온 미아(엠마 스톤 분)가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고, 꿈으로 인해 좌절하며 방황하는 이야기다.
빵빵, 요란한 자동차 경적 소리로 영화가 시작한다. 자동차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꼬리를 물고 정체된 채 하이웨이를 채우고 있다. 겨울임에도 28도까지 오른다는 라디오 방송이 흐르고, 형형색색 갖가지 자동차에서는 서로 다른 음악이 터져 나온다. 한 여자가 자동차 밖으로 나오며 노래를 시작하자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와 도로와 자동차를 무대로 한바탕 신나는 군무를 펼친다. 실제 도로에서 촬영한 이 경이로운 오프닝 시퀀스가 끝날 즈음 하이웨이 뒤로 광활하게 펼쳐진 LA 시가지가 보인다. 일반적인 화면보다 가로가 더 넓은 시네마스코프 방식(2.35:1)은 수평적인 도시 LA를 효과적으로 전시한다. 온화한 기후 조건, 다양성, 가변성, 수평성, 열정, 자동차 그리고 하이웨이. 첫 시퀀스에서 LA의 도시 성격을 요약하는 셈이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도시 이론가 에드워드 소자의 책들은 LA에 어떤 특별함이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앙리 르페브르의 계보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즘 도시 담론에 빠져보실 독자는 번역서 『공간과 비판사회이론』, 그리고 『Postmetropolis: Critical Studies of Cities and Regions』와『My Los Angeles: From Urban Restructuring to Regional Urbanization』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리슨투더시티
언어를 가지는 일, 언어를 부여하는 일, ‘명명’하는 일, ‘명명’되는 일은 그 자체로 희미하던 어떤 것이 드러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동시에 임의적 구분과 분절이란 언어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그 자체로 폭력이 되기도 하고, 실상 단 한 번도 합의되거나 그 의미가 완연하게 공유된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묵적 합의를 상정한다는 특성으로 인해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단어, 한 항목을 그 자체로서 논하고 규정하고자 하는 일에는 무수한 반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무엇이다’라고 언명하기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19세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역시 어쩌면 자기 참조적 표현 때문에 ‘그럼 예술이란 대체 무엇이냐’ 하는 끝나지 않는 질문,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있는 어떤 벌레’가 되는 문제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다만 후대의 우리는 이 명제가 도덕이라는 이름의 해당 시공간의 일상적 사회 가치를 기반으로 한 판단과 검열, 수단적 가치의 강요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것임을 고려하여, 시공간의 맥락을 상상하고 그려보며 왜 그런 표현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예술을 예술로만 말할 수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어떤 단어도 자기 참조만으로 정의될 수 없듯 삶도, 예술도, 예술가도, 어떤 존재도, 온전히 자기 스스로 설 수는 없다.
이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같은 논제를 시작으로 글을 여는 이유는 본 연재에 앞서 최근 몇 년간 맞닥뜨리게 되었던 몇몇 예술이란 이름 아래에 행해진 치명적인 독가스와 그에 대한 작가주의식 변명에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마치 예술이 사회와 분리된 어떤 것이라는 믿음, 거기에서 비롯한 예술의 성역화 내지는 주변화, 그 변두리를 대충 묶어 퉁치듯 우리 사회가 ‘예체능’을 다루고 그마저도 ‘문화체육관광’으로 묶어버린 와중에 일부 세력이 호구 주머니 털듯 휘두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블랙리스트로 대변되는 검열과 통제,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미 예술계에 포지셔닝(positioning: 위치 짓기)하고 있는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잣대로 모든 예술을 재단할 수 있는 듯이 사회 참여적 색이 있는 활동에 ‘그런 건 예술이 아니지’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던 일부 지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경우, 예술과 사회가 분리되지 않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분노 한편에 일정 부분 도리어 반가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건축 그리고 여느 장소-‘곳’이 맥락을 가지듯 우리의 모든 발화,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산물은 시공간적 맥락과 위치에 따라 의미를 생성한다. 수신 대상자 혹은 관계되는 수많은 이들 그리고 발화-행위자 스스로의 시간적·공간적 맥락 및 위치, 즉 사회와 연계되어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예술 역시 예외가 아니며 그렇기에 예술을 그것이 이루어지는 사회와 장소, 맥락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에 더해 예술은 사회를 소재로 하거나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에 개입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사회이자 삶의 실천일 수 있다. 곧 예술은 사회의 반영이자 사회를 보는 렌즈이기도 하며, 개입과 변화의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11개월 동안 계속될 본 연재에서는 시각 예술 및 소위 다원 예술계를 중심으로 특히 예술의 정치적-비정치적 사회 개입 또는 반영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술인의 활동을 조망한다. 우리 사회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 도시와 지역에서 예술인이 어떻게 새로운 얼개를 엮어 내는지를 통해 도시와 지역, 장소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해보고자 한다.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환경과조경346호(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