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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자인 노트] 협업을 다시 생각하다 프로젝트 팀 Terminal 7의 작업 과정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디자인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영역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공모전 및 실무에서의 협업은 심사 기준의 충족이나 보고서 제출을 위한 형식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형식적인 협업이 아닌, 영역의 구분 없이 수평적 관계에서 세종대로 역사문화 공간 설계공모에 참여했던 플랫폼 형식의 프로젝트 팀 Terminal 7의 협업 과정을 소개한다. 이 협업에서 우리는 익숙한 사고와 디자인 방식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5명의 구성원과 5명의 리더 공모전 규모와 결과물(도판 A0 2장, 설계설명서 A3 15매 이내, 법규 검토 및 추정 공사비 내역 포함)의 양으로 미루어, 다섯 명이라는 인원은 일반 설계사무소의 인력과 비교해 다소부족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특히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기존의 설계사무소가 가지고 있는 축적된 노하우와 안정적 팀 구성은 매우 효율적이다. 우리 팀은 플랫폼 형식의 프로젝트 팀으로 5명의 전문가(뉴욕을 기반으로 한 건축가 2명, 조경가 2명, 도시설계가 1명)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원 간에 이력과 실무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경력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수평적으로 협업을 진행했다. 수평적 관계 속에서 모든 구성원은 비판적이기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공모에 임했다. 이러한 접근 태도 덕택에 5명의 구성원은 자료 취합, 현황 분석, 브레인스토밍, 디자인, 프로덕션, 내러티브 구성 등 성격이 확연히 다른 디자인의 과정에서 각각 리더가 될 수 있었다. 프로젝트 초기, 대상지의 규모는 작아도 도시 맥락적으로 서울의 거대한 지하 공간의 시점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유형typology이 되어 추후 서울의 도시개발 사업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도시설계가의 거시적 안목을 바탕으로 아이디어가 전개되었고, 그 위에 조경가와 건축가의 생각이 더해졌다. 또한 디자인 과정에서 조경가는 협의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형태의 디자인 대안들을 제안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건축가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디자인 형태를 조언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지하 공간의 건축 형태와 프로그램은 건축가들이 주도했고, 지하 공간의 정원과 벽면은 조경가와 도시설계가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반적인 그래픽 스타일과 결과물은 경험 많은 사람을 주축으로 각자 자신 있는 영역의 드로잉을 맡았다. 전반적인 과정에서, 마치 기러기의 비행과 같이 선두의 자리를 바꿔가며 모든 참여자가 유기적으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존 설계사무소의 시스템이 아닌 수평적 관계의 상호보완적인 팀원 구성이 이번 협업의 바탕이 되었다. 각자의 영역이 아닌 통합된 장소의 디자인 이번 공모전은 국내외 건축사 자격을 요구하는 공모전이고, 일반적인 건물의 매스, 입면, 프로그램 등이 아닌, 역사문화 공간(지하 공간 포함)에 대한 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디자인보다는 그 복합적인 주변 맥락(성공회성당, 덕수궁, 세종대로, 서울시청, 세실극장 등)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담긴 공간을 제안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여 디자인하기보다 하나의 장소로 대상지를 인식함으로써 초기 아이디어 협의에서부터 구체적인 디자인까지 건축가나 조경가가 아닌 통합적 디자이너로서 설계에 임했다.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아이디어에 대한 비판적 자세와 구체적인 평가를 배제하면서 다양한 관점의 아이디어를 열거하였다. 서울의 수평적 경관, 현대 도시의 수직적 경관urban depth, 유형으로서 대상지의 가능성, 역사적 층위로서 지하 공간에 대한 재해석 등을 바탕으로 우리는 서울의 다층적 경관을 더 구체적으로 해석하였고, 두 가지의 디자인 원칙을 결정하였다. 첫째, 대상지의 상부는 비우고 간결한 형태의 표면을 만든다. 둘째, 서울의 수직ㆍ수평적 층위를 공간에 담는다. 이 두 가지 원칙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지붕 형태를 도출하였다. 장단점이 명확히 다른 이 두 개의 지붕 형태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조경가와 도시계획가는 연속적인 표면의 연결과 더불어 변화감 있는 지붕 쪽을 선호하였고, 건축가는 띄운 지붕의 형태를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상부 공간과 지하 공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띄운 지붕을 선택했다. 이는 팀 구성원 모두 띄워진 표면 틈 사이로 보이는 경관 및 자연환경의 유입이 지하 공간의 다양한 경험을 유도한다는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후 작업에는 공간별로 전문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경가와 건축가가 각 영역의 디자인 주체가 되었다.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유펜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뉴욕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의 프로젝트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다. Dubai Waterfront 설계에 참여하고 있으며, Milwaukee Lakefront Gateway Plaza Competition과 China DachongVillage 설계를 이끌었다. CA조경의 창립 멤버로 7년간 여러 공모전에서 당선을 이끌었으며, 올해 초 열렸던 서울역고가 국제지명 현상설계에 CA조경과 함께 참여했다. 최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IDEAS(www.groupideas.org)라는 디자인 및 리서치 그룹을 만들어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있다. 전진현은 현재 뉴욕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New YorkCiti Bank Plaza 설계에 참여하고 있으며, China International Garden EXPO 설계를 이끌었다. 하버드 GSD 졸업에 앞서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했으며, 신화컨설팅에서 디자이너로서 실무를 쌓았다. 그는 휴먼 스케일의 디자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용자가 삼차원 공간을 지각하게하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비평] 계획가가 외면한 것 What Were Ignored by Designers
    최근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은 땅은 서울 테헤란로의 끝자락인 삼성역 주변일 것이다. 국제 수준의 복합단지인 무역센터(한국종합무역센터)는 쇼핑몰 리노베이션과 호텔 및 오피스 증축을 거듭하고 있고, 지하철 2호선과 9호선이 연결된 영동대로에는 KTX, GTX 등 광역 교통까지 추가될 예정이다. 게다가 한전 부지(구 한국전력본사)는 현대차와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의 매입 경쟁 끝에 과거 본 적이 없는 매매가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세는 탄천 건너 잠실까지 뻗어가고 있다. 서울시가 무역센터, 한전 부지, 잠실종합운동장 및 주변 지역을 국제 업무와 MICE 산업1의 중심으로 키우는 국제교류복합지구 계획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2015년 5월 무역센터와 한전 부지만 포함하던 지구단위계획구역을 잠실종합운동장까지 확장함으로써 그 의지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국제교류복합지구는 지가 총액으로 따지면 아마도 우리나라 최대의 지구단위계획구역일 것이다. 무역센터와 한전 부지는 과거 봉은사에 속한 땅이었다. 포화 상태인 서울 도심의 문제를 강남 개발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정부의 정책에 조계종이 화답함으로써 1970년대 초 이들 땅은 절 문을 나서게 되었다. 영동대로를 사이에 둔 두 땅은 이후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대로의 서편은 1979년 한국종합전시관으로 모습을 갖춘 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컨벤션센터가 된다. ASEM 정상회의, G20 정상회의, 핵안보정상회의 등 그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국제회의들은 모두 여기서 개최되었다. 대로의 동편은 1986년 한국전력공사가 자리를 잡은 이후 2014년 나주로 이전할 때까지 우리나라 전력 공급의 중심지가 된다. 지금은 발전 기능이 여러 자회사로 분산되었지만 과거에는 전력의 생산에서 판매까지 모든 기능이 한국전력공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두 땅은 그러나 다시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 같다. 한전 부지를 매입한 현대차가 이곳을 단순한 통합 사옥이 아닌 회의장, 전시장, 공연장, 호텔 및 쇼핑몰로 구성된 복합 단지로 개발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독일 자동차 회사들의 본사와 같이 테마 단지로 조성하는 것은 서울시의 국제교류복합지구 계획에도 잘 부합한다. 비록 운영 주체가 단일하고 자동차라는 주제를 가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설의 구색만 보면 대로 건너 무역센터와 매우 흡사하다. 한편 탄천 건너 잠실종합운동장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원래 강이고 섬이던 잠실은 1970년대 초 한강공유수면매립사업에 의해 육지가 된다. 같이 매립된 반포나 압구정과 같이 잠실의 땅도 대부분 택지로 매각되어 정부의 빈약한 재정을 도왔는데,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자리만은 운동장으로 남았다. 이에 대해서는 1960년대 말 국제 수준의 체육 시설이 없어 아시안게임을 반납한 아픈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이 반납한 1970년 아시안게임은 방콕에서 열렸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잠실종합운동장은 국제적인 체육 시설이 된다. 사실 두 행사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달라진 국가 위상을 만끽한 잔치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탄천 건너 두땅이 경제 성장을 견인한 곳이라면, 잠실종합운동장은 그 성과를 자랑한 곳이다. 하지만 잠실종합운동장도 앞으로 무역센터나 한전 부지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 같다. 서울시의 국제교류복합지구 계획은 이곳에도 MICE 기능을 추가하고 있기때문이다. 구체적인 시설은 회의장, 전시장, 공연장, 호텔 및 쇼핑몰이 될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서울에 국제 업무와 MICE 기능이 필요하다고 해서 비슷한 시설을 세 땅에서 세 번 반복해야만 하는지? 그래야 한다면 각 땅을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그리고 도시 전략 측면에서 이 땅이 담당해야 하는 다른기능은 없는지? 이 외에도 서울시를 괴롭혔을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가 기획되었을 것이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 민성훈[email protected] / 수원대학교 도시부동산개발학과 교수 / 2015년11월 / 331
  • [칼럼] 녹색 강박증 Column: Obsession with the Green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베스트셀러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에 매몰된 현대 사회를 비판하면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대표적인 질병으로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등을 꼽았다. 이러한 질병들은 과거 시대의 질병처럼 박테리아적이거나 바이러스적이지 않고 신경증적인 질병이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의 특징인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긍정성의 폭력을 낳았고, 이러한 유형의 폭력은 적대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내밀하게 확산되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고 한다. 짧은 에세이의 내용이 다소 무거워서 그 뜻을 잘 헤아렸는지 자신이 없지만, 무엇인가를 잘 해보려는 요즘 긍정적인 행동들이 오히려 과장되고 과잉의 양상으로 나타나면서 그것이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을 간간히 목격하면서, ‘피로사회’라는 개념으로 성과 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견해에 공감하게 된다. “강박장애는 불안장애의 하나로서, 반복적이고 원하지 않는 강박적 사고와 강박적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 질환이다. 잦은 손 씻기, 숫자 세기, 확인하기, 청소하기 등과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강박적 사고를 막거나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려고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일시적인 편안함을 제공할 뿐 결과적으로 불안을증가시킨다.” 강박증이라는 병리적인 현상이 과거 농경 사회에서부터 존재했던 질병인지 혹은 근대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한 것인지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강박증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이 증세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과잉 행동을 일삼는 경우다. 어쩌면 한병철의 지적대로 강박증도 현대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 시절이 생각난다. 이명박시장의 ‘청계천’이 대중의 히트를 친직후라서 그런지 모든 행정에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강박처럼 들어갔다. 조직이 만들어졌고, 대단한 ‘용역’이 발주되었다. 디자인을 문화적으로 차근차근 성숙시키기 이전에 홍보를 위한 전략으로 삼았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빠지면 마치 갑자기 구닥다리 꼰대가 되는 것 마냥 모든 종류의 미디어는 디자인이라는 화두를 쏟아내고 있었다.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한강의 세빛둥둥섬과 동대문의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그러한 ‘디자인 행정’의 대표적인 결과물들이다. 당시 모 교수는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현상을 ‘디자인 피로증’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그것이 과잉이 되면 사회구성원들은 피곤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진정성 없이 성과 위주로 추진되는 사업에어떤 행복과 가치가 담겨질 수 있을까. 요즘 서울시를 비롯하여 수도권, 지방의 많은 지자체에서 ‘조경’ 혹은 ‘정원’이라는 화두가 대세다. 수 많은 조경 관련 공모전이 성행하고, 박람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불과 몇 년 만에 분위기가 반전된 듯하다. 설계사무소나 일선 현장의 작업 여건과 경영 환경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데, 외형적인 분위기만 봐서는 이미 조경 선진국의 대열에 오른 느낌이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어느 조경전문가는 설익은 ‘조경대세론’을 펼치기까지 한다. 모든 도시 행정을 조경(혹은 정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도시 안에서 조경 공간을 극대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예산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식이다. 조경가 출신의 국회의원이 나와야 한다는 기대 섞인 주장도 덧붙인다. 그래야 ‘업계’와 ‘분야’가 살아나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행복지수도 수직상승한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십년 넘게 조경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런 식의 강박이 정당한 것일까. 며칠 전 서울 외곽의 도시공원으로 산행을 가게 되었다.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인지라 최근에 계단을 보수하고 안전 펜스까지 정비한 모양이다. 그런데 등산로를 따라 나무 그늘에 야생초화를 잔뜩 심어놓았다. 공원의 양지바른 산책로도 아니고 숲이 우거진 등산로에까지 가로수를 심고 야생화를 줄지어 심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냥 놔두어야 더 좋은 자연을 왜 자꾸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덧칠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조경 사업은 성과주의 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를 저렴한 예산으로 치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녹색의 치장과 품격 있는 조경 행위는 당연히 구분되어야 할 것인데, 표피적인 것들만 난무한다. 자칫 ‘조경 피로증’이라는 말도 생겨날지 걱정이다. 조경은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행위다. 과잉 진료와 과잉 처방은 환자에게 독이 된다. 진료와 처방 이전에 정말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연대감과 존중감이라고 한다. 녹색에 대한 강박은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는 조경의 본질을 간과하고 현상에만 집착하는, 그래서 과잉 처방전만남발하고 있는 의료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모든 것을 자기가 속한 전문 분야의 틀을 통해서만 해석하려는 강박증은 현대 사회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분야는 늘 대결하고 있으며, 이 살벌한 경쟁 구도를 곧바로 자신들의 이익과 연결시킨다. 여유와 관용, 깊이 있는 성찰과 소통은 사라지고 가장 익숙한 세계 속으로 스스로를 유배시킨다. 그리고 그 깊은 유배지에서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군림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조경이 최고의 선이고, 어떤 것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다 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녹색에 가려진 삶의 이면을 살펴야 한다. 비록 한그루의 나무를 포기하더라도 우리 주변에 더 이상 가난하다는 이유로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멋진 공원 몇 개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힘없는 서민들의 소중한 주거 공간을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멋진 조경가이기 이전에 누군가와 마음을 나눠야 하는 평범한 시민이고 이웃이기 때문이다. 박승진은 아직까지 조경 설계라는 마당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마당에 맞닿아 살고 있는 다양한 이웃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조경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고 정교한작업을 늘 꿈꾸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1965년 서울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에서의 설계 실무를 거쳐,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맥도날드화 배정한 Editorial: The McDonadization of Design Competition
    10월호 마감이 한창이던 9월 중하순, 유럽조경학교협의회ECLAS가 주최한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목적지는 머릿속 지도에 위치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였지만, 내심 이 미지의 중세도시보다 더 궁금했던 곳은 경유지로 삼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도시다. 러시아를 유럽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야망에 불탄 표트르 대제의 계획 도시, 발트 해를 향한 연안의 늪지대와 네바 강 하구의 100개 섬을 365개의 다리로 이어 건설한 북쪽의 베니스다. 러시아의 심장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작곡가 차이콥스키, 극작가 안톤 체호프, 시인 푸슈킨,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레닌그라드가 아닌가. 굴절 많은 이 역사 도시의 2015년 풍경과 만나기 위해 목적지가 아니었음에도 닷새라는 넉넉한 일정을 잡았다. 낭만과 환상에 부푼 초행길 이방인의 기대와 달리, 표트르의 도시는 피로감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 탓일까, 여느 유럽과는 다른 대규모 계획 도시의 웅장한 스케일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주의 도시 경관의 생경한 질서 탓일까. 일행은 여러 가지 진단을 내려 보았지만, 이틀째 여정이 끝나갈 무렵 시각적 당혹감의 가장 큰 원인은 아마 거리를 뒤덮고 있는 러시아어 알파벳에 있을 것 같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영어 알파벳을 마차에 싣고 가다가 떨어뜨려 뒤죽박죽이 된 문자라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키릴 문자(러시아어 알파벳)는 형태뿐 아니라 발음에서도 상식을 초월했다. 낯선 글자의 정체를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대조하며 시내를 답사하던 중 우리는 뜻밖의 계기를 통해 긴장감을 풀게 되었다. MaKДoHaлдc라는 해독하기 힘든 간판을 단 매장, 그러나 누가 봐도 맥도날드였다. 늘어나는 뱃살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맥도날드이지만, 우리는 낯선 도시에서 M자의 익숙한 간판만 보고서도 무장 해제됐다. 눈앞의 경관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섞인 건물들의 1층에 서울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CTAPБAKC KOФE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커피, 평소처럼 그란데 사이즈의 핫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해서 들이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소라는 다른 어떤 카페보다 만족스러웠다. 도시를 뒤덮고 있던 먹구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독자 여러분도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 같다. 낯선 외국 도시에서 낯익은 프랜차이즈 체인점을 마주하면 심지어 고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낀다. 고민과 두려움이 한 번에 해결된다. 뉴욕의 빅맥은 서울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빅맥과 똑같다. 맛도 의외일리 없고 가격도 당황스러울 가능성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편안함을 느낀다. 맥도날드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현대도시에서 거의 유일하게 확실성을 보장해 주는 예측 가능한 장소인 셈이다. 우리는 맛도 뻔하고 건강에는 오히려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으며 맥도날드를 주저함 없이 선택한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시유시, 2003)의 저자인 사회학자 조지 리처George Ritzer는 현대 사회가 종교처럼 신봉하는 합리성의 이면을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체인망에서 발견한다. 리처가 통찰하는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더욱 더 많은 부문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맥도날드 모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건 합리성이라는 신화의 네 가지 매혹적 특성 때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효율성, 계산 가능성, 예측 가능성, 통제라는 특성이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업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의료, 여행, 여가, 다이어트, 정치, 가정, 그리고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효율과 표준을 앞세운 합리성의 신화는 획일과 몰개성을 낳는다. 도시도, 경관도 마찬가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만의 개성과 매력에 불안해하고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의 표준화된 예측 가능성에 안도한 앞의 사례는 합리성의 추구가 비합리성을 연출하는 모순을 예증해 준다. 도시의 다양성, 지역성, 장소성은 발붙일 곳이 없다. 11월호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주목할 만한 공모전세 편을 싣는다. 이번 기획과 편집 과정에서 금년에 실었던 다른 설계공모들을 새삼 들춰보았다. 지난 호까지 잡지에 다룬 열개의 국내 공모, 두 개의 국외 공모를 다시 넘기다보니 엉뚱하게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맥도날드가 떠올랐다. 아마다수의 독자들은 (서울역 고가처럼 정치적·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경우는 예외였겠지만) 설계공모를 다룬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겨버렸을 것 같다. 낯익고 익숙한 이미지, 텍스트, 다이어그램으로 표준화된 작품들에서 적절하게 구운 패티, 얇은 토마토 한 장, 슬라이스 치즈, 약간의 오이 피클로 구성된 맥도날드 햄버거의 예측 가능한 맛을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제출작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최자의 의도를 대변하는 설계 지침서는 언제나 예외 없이 공모의 목적을 “ㅇㅇ를 ㅇㅇ할 수 있는 ‘독창적’인아이디어와 디자인을 구한다”고 밝히지만, 말 그대로 독창적인 작업은 당선되기 쉽지 않다. 최근의 설계공모 대부분은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안을 뽑는 합리성의 경쟁 과정이기 때문이다. 표준화와 효율성의 상징 맥도날드를 선택하곤 하는 우리의 일상과 다를 바 없다. 맥도날드화에 비판적 거리를 두며 이번 호의 세 공모전을 꼼꼼히 살펴보시면 어떨까 한다. 기회와 쟁점이 교차하는 땅 잠실종합운동장에 던진 비전과 상상력에서, 근대 서울의 시간과 사건들이 묻힌 옛국세청 자리 작은 공간에 펼친 조경가와 건축가의 협력에서, 막막한 빈 땅에 무언가를 상징해야만 한 세종시의 백지 광장 프로젝트에서 ‘탈맥도날드화’의 일면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5년11월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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