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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DA] 엄살
    “엄살이 심해도 너무 심해.” 내가 아플 때마다 이마를 짚어주던 그녀의 진단이다. 좀 억울한 점도 있지만, 수긍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는 계속 아프다고 징징거릴 뿐이다. 그러니 “심하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을 피우는 것”이라는 그녀의 진단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단, 투덜거리며 입술을 쭉 내민 채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두 달이 멀다 하고 병원을 들락거렸다. 먼저, 허리에 이상 신호가 왔다. 정확히는 오른쪽 허벅지 부근이었다. 잠을 잘못 자서 그러려니 했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도 통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다. 걷는 게 불편할 정도가 되니 병원을 안 갈 재간이 없었다.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도 ‘그 가기 싫어하던 병원에 왔구나’라는 생각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저 내 순서가 빨리 오기만을 바랐다. 앉거나 서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아프니, 다른 생각은 모두 사치였다. 의사는 허리 디스크가 의심된다며 물리치료와 바른 자세, 스트레칭 등의 처방을 해주었다. 허리에 문제가 생기면 허벅지나 종아리 부근이 아프다는 점을 일러주었고, 상태가 더 나빠지면 수술을 할 수도 있다며 겁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리치료를 받고 사무실로 돌아와 가장 먼저 푹신한 의자를 딱딱한 의자로 바꿨다. 1시간에 한 번 정도 잠깐이나마 일어서서 일을 보았고,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나름 자세에 신경을 썼다. 돌아가는 코스이지만 조금 더 걷는 쪽으로 출근길 노선도 바꿨다. 그렇게 허리는 안정을 찾아갔다. 두 번째 병원 방문은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이었다. 여름 휴가를 맞아 물놀이를 할 때였는데, 젖은 슬리퍼를 신은 채 계단을 내려가다가 스텝이 꼬이면서 미끄러졌다. 넘어지는 그 찰나의 짧은 순간에 ‘아, 워터 슈즈를 신고 올 걸’이라는 후회를 했다. 이미 같은 장소에서 반나절 동안 한두 번 미끄러질 뻔한 경험을 했던 터였다. 슬리퍼를 벗고 일어나서 몸 상태를 확인하니,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오른손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에 약간 피가 나고 부은 정도였다. 별로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걱정이 썰물처럼 멀어져갔지만 부끄러움이 집채만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쪽팔림은 순간일 뿐이니까.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짐짓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파라솔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밴드를 붙이고 더 놀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휴가가 끝나고도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약국에서 산 연고의 효능을 믿었고, 시간의 치유력을 신봉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 붓기가 전혀 빠지지 않고 더 심해졌다. 게다가 손가락 마디 근처가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다. 결국 나흘 째 되는 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인대 손상과 골절이라는 진단을 내린 후, 절대로 손가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반 깁스를 해주고는 붕대로 칭칭 동여맸다. 태어나 처음 해 본 깁스였다. 그 이물감과 불편함이란 상상 이상이었다. 두 달이 흐른 지금 네 번째 손가락은 완치되었는데, 다섯 번째 손가락은 여전히 붓기와 통증이 남아 있다. 깁스를 한 상태에서는 키보드 타이핑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사무실에 있는 동안 깁스를 풀고 지낸 탓이다. 세 번째 병원 방문은 고열을 동반한 몸살, 네 번째는 심한 치통 때문이었다. 작년에도 몸살을 앓은 적은 있지만 고열이 난 적은 거의 없었다. 또, 가장 가기 싫어하는 병원이 치과이지만 치통이 심해지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치아의 신경을 강제로 긁어버리는 고문이 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떠올랐다. 통증이 더 심해지자, 머리보다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여서 어느새 나는 치과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 의사와 간호사 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치과에는 앞으로 몇 번 더 가야 하지만 치통은 사라졌다. 열도 내렸고 몸살도 나았고 허리도 괜찮아졌다. 네 군데 병원을 찾은 덕분에, 지금은 다섯 번째 손가락에 만 통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올해는 잔소리를 안 해도 알아서 병원을 찾자, 그녀가 한 마디 한다. “진짜 아프긴 아픈가 보네.” 물론 한 소리 덧붙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건강할 때 운동을 하고, 좀 이상하다 싶으면 미리 미리 병원에도 가야지.” 결국, 엄살과 진짜 몸살의 차이는 아픈 ‘정도’에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안부 인사로 이야기의 물꼬를 트게 된다. 그 날의 날씨가 가장 만만한 소재이기 마련이다. ‘요즘 갑자기 쌀쌀해졌죠? 작년부터는 가을이 사라진 것 같아요.’ 같은 업종이라면, 업계의 동향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면서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이쪽 경기는 왜 갈수록 어려워지죠’ 질문을 던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여전히 많이 바쁘시죠’ 내가 잡지사에 다니고 단행본도 만드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은 첫인사로 이런 말들을 건네곤 한다. ‘요즘 잡지사(혹은 출판사)는 사정이 좀 어때요?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않죠. 종이책 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어서 걱정이 많겠어요.’ 이런 염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종이책 시장은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을 경신하고 있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엄살을 떨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엄살이었지만 어느 시기부터는 엄살의 수준을 넘어섰다. 슬슬 정말로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종이책의 쇠락에 대한 체감의 ‘정도’가 그만큼 달라진 것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써내려가다가, 우선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든 종이 잡지가 동일하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달 한 달 정해진 지면을 채우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종이 잡지의 역할과 지향점에 대한 고민이 느슨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읍소보다는 냉철한 ‘진단’이 먼저 이루어져야 효과적인 ‘처방’도 가능할 터. 독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얼마나 시의 적절하게 제공하고 있는지, 독자가 기꺼이 지갑을 열고 싶도록 매력적인 잡지를 만들고 있는지를 먼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등등의 고민이 이어졌다. 엄살로 치부하면 많이 억울하겠지만, 고열을 동반한 몸살과 극심한 치통이 마감 기간에 나란히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번 달 ‘코다’가 이렇게 뒤죽박죽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병원 방문기 내지는 질병 치유기로 점철된 까닭은….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여튼 엄살이 심해도 너무 심해.”
  • [편집자의 서재] 맛 Editor’s Library: Une Gourmandise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고 혀를 천장에 갖다대며 “맛”이라고 발음하는 짧은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는가. 쓴맛, 단맛, 신맛, 짠맛 등 네 가지 기본 맛에서부터 19금의 불온한 이미지까지. 고백하건대 이 책을 사게 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이 책이 어떤 상을 받았는 지, 작가가 누구인지, 언제 나온 소설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표지의 덜 떨어져 보이는 인상의 젖소 쿠키가 잠깐 구입을 망설이게 했지만 결국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인 제목에 끌려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146쪽 밖에 되지 않는 소설쯤이야 ‘호로록’ 읽어버려야지’하는 생각으로 야심차게 책의 첫 장을 폈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방구석 양지바른 한 편에 고이 모셔두게 되었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맛』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음식 평론가가 인생의 마지막 48시간 동안 그동안 경험했던 수많은 음식 중 최고의 맛을 찾는 미식 여정을 묘사한 소설이다. 책의 주인공이 음식 평론가이다 보니 원초적이고 간결한 제목과 달리 소설의 문장은 너무 길고 화려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도 많이 등장해서 읽다보면 ‘내가 지금 같은 구간을 계속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몽롱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콩을 뿌려 장식한 수척한 마들렌 몇 개를 접시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르케의 디저트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페이스트리는 하나의 구실, 즉 설탕과 꿀이 들어간 살살 녹고 크림이 발린 시편時篇을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케이크, 설탕에 절인 과일, 글라사주,1 크레프, 초콜릿, 사바용,2 붉은 열매, 아이스크림, 소르베에 대한 광기 속에서 뜨거움과 차가움의 점진적인 변화가 연주되고 있었고 내 숙련된 혀는 강박적인 만족으로 지친 채 엄청난 희열의 무도를, 격렬한 지그를 추고 있었다. 번역이 썩 매끄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아이스크림에 대한 위의 묘사는 화려한 수식어를 너무 진지하게 구사하는 바람에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 나는 성급하게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책의 프랑스어원제목 ‘Une Gourmandise’는 직역하면 ‘맛’보다는 ‘진미’라는 뜻에 가까운, 상당히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단어라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음식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취향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하게 고집이 세서 조금 부끄럽지만 편식이 심한 편이다. 책이나 글을 읽을 땐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를 사랑한다. 특히 화려한 수식어나 관념어가 많고 길게 늘어지는 문장은 싹둑 잘라 깔끔하게 다듬어주고 싶다. 확고했던 나의 취향이 조금 바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편집 일을 하고부터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가차 없이 재단하고 마름질해 ‘읽기 편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어쩐지 글을 고쳐놓고 읽어보면 입에 잘 붙지 않았고 개성 없는 문장이 되어 버렸다. 담당한 연재 원고를 매달 꼼꼼히 읽다보니 꼭지마다 필자의 특색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읽기 불편하고 어딘가 투박하더라도 글쓴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글이 내가 고친 무미건조한 글보다 친근하게 읽혔다. 익숙한 ‘맛’에 길들여져서 시간을 들여 읽으면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을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맛』을 다시 읽었다. 처음 책을 읽을 땐 그토록 정신 사납게 느껴지던 문장이 이번에는 감칠맛 나게 느껴졌다. 질색을 했던 모호한 관념어와 화려한 수식어도 어느 정도 참을만 했다(솔직히 아직 극복하지는 못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동안 경험했던 황홀한 맛을 묘사할 때면 죽어가는 시한부임에도 과도(?)하게 흥분하는 주인공의 어투마저 왠지 모르게 유쾌하게 느껴졌다. 생야채를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행위의 관능성을 묘사하는 부분은 어찌나 아찔하던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설 속에서 식탁 위의 군주로 군림하던 음식 평론가의 미식 여정은 슈퍼마켓의 싸구려 슈케트4를 맛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어릴 적엔 몰랐던 양파의 달짝지근함, 가지의 고소함, 고추의 풋풋함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처럼 확고하고 뚜렷했던 취향도 삶의 경험이 쌓이고 보는 시각이 넓어짐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 마련이다. 사실 편식은 편견과 무지로 비롯되는 것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호에는 조경, 도시, 건축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3개의 공모전이 연달아 실린다. 공모전이 많이 실린 잡지는 독자들에겐 다양한 유형의 설계 해법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만 편집자에겐 설계자의 의도와 전략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설계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려워서, 이미지가 별로라서 등 수많은 핑계를 대며 설계안과의 정면 승부를 피한적이 없었을까? 뒤돌아보니 성미가 급한 나는 맛을 보기도 전에 삼키려고 한 적이 너무 많다.
  • [시네마 스케이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반복과 차이
    어느 봄날, 첫 아이 낳은 후 정신없이 살던 두 아줌마가 어렵사리 저녁 나들이를 하게 됐다. 홍상수라는 신인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근처 맥줏집으로 향했다. 종로 연타운은 대학 시절과 변함없이 성업 중이었다. 마침 그날은 성년의 날이어서 그곳은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대학 시절의 추억과 오랜만의 밤 문화에 살짝 들뜬 우리는 맥주를 빨리 많이 마셨다. 그것도 모자라 검정 봉지에 캔 맥주를 넣어 극장에 들어갔다. 시네코아라는 극장은 그런 짓이 살짝 용인되는(물론 근거 없는 주장이다), 소위 ‘아트 무비’로 분류되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몰래 마시기 위해 객석 가운데 있는 기둥 근처에 자리 잡았다. 관객은 몇 명 되지 않았고 영화는 소문대로 충분히 낯설었다. 맥주 탓에 둘 다 화장실을 들락거려서 가뜩이나 낯선 영화의 집중도는 현격히 떨어졌다. 영화가 끝날 때쯤 또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 장면을 보고 누가 왜 죽인 거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 후 내게 홍상수의 영화는 얼마 동안 ‘잘 모르겠는’ 영화였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국내외 비평가들은 엄청난 찬사를 보냈으며 논문 주제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영화는 점점 단순해지는데 평론은 더 어려워지고 심오해졌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첫날 달려가서 봤다. 기존 상업 영화들이 식상해서였는지 ‘아트 무비보기’라는 허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찌질한 남자가 등장했고, 그들은 항상 술을 마시며 남자는 여자와 자거나 혹은 자고 싶어 했다. 더는 극장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로마, 헬레니즘을 만나다- 키케로의 증언
    #63 농자 로마지 대본 중국 고사에 현인들이 농사를 짓다가 재상으로 등용된 사례가 종종 전해진다. 고대 로마에도 그런 고사가 있다. 로마의 군자軍者이자 농자였던 킨키나투스Cincinnatus(B.C. 519~430) 역시 밭을 갈던 중 로마 원로들이 모셔다가 독재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독재관이란 외침 등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임명되는 임시직으로서 절대적인 통수권이 주어졌지만 임기가 6개월로 제한되어 있었다. 킨키나투스 장군은 불과 16일 만에 외적을 물리쳐 임무를 완수했다. 시민들은 장군이 그대로 눌러앉아 권력을 휘두를까 은근히 걱정했으나 그는 곧바로 밭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후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덕목을 상징하는 인물로 길이 추앙되었다.1 킨키나투스 장군의 연대가 말해주듯 지금 우리는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가 시작되었던 무렵으로 더듬어 가고 있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도왔던 건국 공신들이 있었다. 이들이 파트리키라는 귀족층을 형성하고 원로원이 되었으나 본업은 모두 농자였다. 로마인들은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로마가 농경 사회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힘겹게 일하는 농자야말로 고귀한 로마인의 유일한 직업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 사실은 우선 원로원을 비롯하여 모든 로마의 정치가, 법관들이 녹봉 없이 근무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신흥 세력으로서 로마 토착 세력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뚫고 마침내 성공한 키케로의 경우, 로마 근교 아르피눔―지금의 아르피노(Arpino)―에 있는 자신의 빌라를 찾을 때면 가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내 선조들의 근본이 있고 그들이 찾던 성소가 있으며 곳 곳에 그들의 자취가 가득하다.”2 거대한 제국의 건설, 전쟁과 뛰어난 군사력, 엔지니어 기술, 콜로세움의 전투사들, 웅장한 건축물 등 지금 우리가 로마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로마 문화의 꽃이라면 그 뿌리는 농업이었다. 이는 로마의 유력한 사상가들이 농업에 대한 저술을 적지 않게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그 중 네 명의 작가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최초로농업서를 집필한 인물은 ‘대大 카토Marcus Porcius Cato(B.C. 234~149)’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정확한 집필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개 기원전 170~6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로부터 백 년도 넘게 지난 기원전 37년경,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B.C. 116~27)라는 인물이 농업론 혹은 농사론De re rustica을 집필했고 그로부터 또 다시 백 년가량이 흐른 뒤 콜루멜라Columella의 방대한 농사서De re rustica libri 13권이 발표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는 팔라디우스가 14권 분량의 ‘농가월령가’3를 지었다. 그 중 처음의 두 작가, 대 카토와 바로의 작품을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 카토의 농업론의 경우, 시대적으로 보아 로마의 토지 분배에 큰 변화가 있던 때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 로물루스 왕이 국가를 세운 뒤 모든 로마인들에게 공평하게 농토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가구당 약 1,700평 정도의 규모였다.4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작은 땅이었으나 공용지가 있어 모자라는 분량은 거기서 충당했다. 이렇게 소규모 의 농토를 나눠주던 전통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과 함께 소농 기본의 원칙이 무너지고 대지주 세력이 형성되었다. 점령한 땅은 일단 국유지5로 지정되었으나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농지 시스템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유지에 대한 처분 법을 제정하고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즉 땅을 분배하고 관리·감독하기 위해 ‘감찰관’이란 직분을 만들었다. 이 감찰관이 원로원들 사이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자기들끼리 토지를 나눠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 카토는 재무관, 법무관, 원로원, 집정관을 거쳐 감찰관을 고루 지낸 정치가였다. 불어난 토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농업론은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야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제안으로 점철되어 있다. 결국 땅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자는 투자 제안서이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도시 개발로 한몫 챙겼을 터다. 서문에서 그는 농업이야말로 상업이나 금융업에 비해 유일하게 정직하고 명예로운 수입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노예 매매와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여기서 얻은 수익을 다시 토지에 투자했으니 모순될 것 없다는 주장인 듯하다. 그러므로 카토가 농업서를 집필한 진정한 이유는 투자 사업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을 농사꾼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email protected]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2015년11월 / 331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쾌락의 도시, 절제의 도시
    도시와 쾌락 1990년대 대한민국은 여러 측면에서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겪었다. 나라 밖에서는 냉전과 이념 대립의 시대가 저물어 갔고, 안에서는 정치 민주화를 향한 힘겨운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체제의 정당성 확보보다는 폭등하는 집값 안정이,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재건보다는 개인의 정체성 발견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이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놀이 문화에 대한 갈망, 때로는 억눌린 욕망의 분출과 퇴폐적인 즐거움에 대한 추구가 도시 공간 깊숙이 파고들었다. 1990년대 초 부산에서 첫선을 보인 ‘노래방’이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국민 유흥의 장소로 자리매김했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로 대표되는 야하거나 관능적인 여자(혹은 남자)―나아가 이들을 향한 시선―에 대한 재발견이 ‘압구정 오렌지족’으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거침없는 자기표현과 향락적 판타지 위에 묘하게 포개지곤했다. 그뿐인가. 각종 ‘러브 호텔’과 ‘변종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도시 경관을 잠식했고, 재벌 2세와 유명 연예인들이 환각 상태에서 벌인 ‘마약 파티’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것도 1990년대에 일어난 현상이다.1 각종 즐거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도시 공간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 자체가 이상할 까닭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를 도는 존재 아니었던가2 소득 수준이 높아지거나 과거 갈망했던 즐거움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종류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계속 쳇바퀴를 돌리고, 때로는 사회적 금기로부터의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이러한 일탈적 도시 경험에는 국경이 없다. 16세기 후반으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쿠바 하바나의 칼레 오비스포Calle Obispo 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라틴 음악과 술,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수도이자 카지노의 본산인 라스베이거스의 쇼와 도박, 그리고 필리핀 앙헬레스와 같은 ‘죄악의 도시Sin City’에서 벌어지는 퇴폐적 밤 문화와 이를 향한 어른들의 낯뜨거운 호기심도 여기에 포함된다(그림1). 쾌락의 쳇바퀴가 굴러감에 따라 각종 유희는 때로는 합법적으로, 때로는 느슨한 규제를 틈타 도시 공간에 침투하게 되며, 익숙함과 일탈이라는 두 경험의 축은 도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방, -룸, -탕, -텔, -장 적어도 지난 20여 년간 각종 ‘-방’, ‘-룸’, ‘-탕’, ‘-텔’, ‘-장’은 한국 도시에서의 밤 문화를 바꾸는 데 공헌한 단역 배우들이다(그림2). 그 기원은 다르지만 이들 공간은 다양한 종류의 술과 음료, 음식과 노래, 춤과 휴식, 게임과 스포츠, 때로는 낯선 타인과의 교류 혹은 은밀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20세기 초 서울에 등장한 유곽이나 1960~70년대 무교동을 비롯한 각종 유흥가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방’, ‘-룸’, ‘-탕’, ‘-텔’, ‘-장’은 그 가벼운 몸집과 다채로운 서비스를 무기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이들은 한때 심각한 사회적 유해성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터키탕’처럼 한 국가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항의가 제기될 만큼 불명예스러운 서비스 공간이기도 했다.3 그럼에도 적어도 일부 용도에 대해서는 그 규제가 완화되거나 때로는 적법한 시설로 전환되는 데 성공했다. 노래방이 그 좋은 예다. 등장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노래방의 인기에 다소 놀란 듯 정부는 1992년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노래방 심야 영업과 미성년자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4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 규제는 불필요하게 국민 생활을 구속하는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곧이어 영업 시간 규제가 철폐되었고, 청소년 출입은 심야 이전에 한해 전면 허용되었다. 노래방에 대한 유해성 논란은 채 10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2015년11월 / 331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경관편집자는 발견하고 엮는다
    2014년, 부천의 한 공단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경관에디터’라는 단어를 조어했다. 잡지 편집자가 여러 저자의 글로 하나의 잡지를 만들어내듯이 내 스스로 새로운 경관을 창조하기보다는 편집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역할에 대한 설명을 위해 ‘경관(혹은 landscape)’이라는 단어와 ‘편집(혹은 editing)’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놓고 경관편집자, 경관에디터, 랜드스케이프에디터 등 이런 저런 조합을 해보았는데 어떠한 것도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고들 했다. 그러다 경관을 영어인 ‘랜드스케이프’로 쓰면 너무 길어 ‘경관’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니 뒤의 단어도 같은 한글인 ‘편집자’가 적당했다. 작가로서 작업해 주세요? 그리고 경관편집자 경관편집자라는 단어를 조어하도록 한 프로젝트의 명칭은 ‘예술이 흐르는 공단 공공미술(이하 예술 공단 프로젝트)’이다. 경기문화재단과 부천테크노파크가 3년 동안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2014년이 마지막 해였다. 첫 해에는 최정화 작가와 조민석 건축가, 김형관 미술가가 참여했다. 최정화는 공단에서 나온 고철을 이어 붙여 ‘당신은 꽃입니다’라는 조형물을 만들었고, 조민석은 조형물이 놓이는 꽃방석을 만들어 공단 외부 공간한쪽에 설치했다. 김형관은 ‘달리는 파사드’라는 제목으로 건물 내부 공간을 벽화로 연출했다. 두 번째 해에는 박은선 작가가 참여했다. 그는 공단 내 건물 외벽을 대상으로 ‘유기적 공간’이라는 이름의 벽화 작업을 했다. 이 작품에는 ‘가로 24m, 높이 36m로, 작업 기간만약 2개월 이상 소요된 국내 최대의 공공미술 벽화’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마지막 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작가’로서 그동안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조경 분야에서의 작가라? 작가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경기도 문화재단과도 이 작가라는 단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조경’이라는 분야는 낯설었고, 특히나 나는 한평공원처럼 개인의 감성이나 조형적 감각을 표현하기보다는 주민들의 의견에 좌지우지 된다고 여겨지는 참여 디자인 작업을 많이 해왔기에 그들의 우려는 더욱 컸다. 조경 분야에서의 작가? 조경가? 작가의 자의식? 그리고 이용자? 같은 단어들 사이를 오고가다, 큰 개념 정리는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이 프로젝트에서의 나의 역할을 앞서 언급한 ‘경관편집자’로 스스로 규정했다. 지난 2년 동안 조성된 조형물과 벽화, 광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연못, 여러 조각상 등, 이미 많은 조형적 요소들로 꽉 차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이 요소들을 엮어주는 역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연금은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디자인 센터의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커뮤니티 디자인, 마을만들기를 일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 일상의 경관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요소와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고 기록한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 등의 저서가 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무나 안드라오스 데일리 뚜레쥬르 창립자 및 대표
    ‘매일’이라는 뜻을 가진 ‘데일리 뚜레쥬르’(캐나다에서 영어와 불어를 병기하는 문화를 표현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별난 디자인 회사다. 특별히 어떤 일을 한다고 정의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작업을 해 온 집단. 굳이 말하자면 인터랙션interaction 디자인을 이용해 도시 공간(주로 외부 공간)에 공공 설치예술 작품을 해온 아티스트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부드러우면서도 감동적인 사회적 아젠다, 즉 ‘함께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메시지를 매우 세련되고 참신한 방식으로 전한다는 특징이 있다. 하나로서는 지극히 단순한 소리일 뿐이지만 여러 개가 어울렸을 때에는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해 내는 ‘21개의 그네21 Balançoires’, 한 명이 부르는 노래는 그저 음치일 뿐이지만 수십 명이 함께 부르면 그 어떤 합창보다도 멋진 감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거대한 합동 노래방Giant Sing Along’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공동의 삶,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전이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공감empathy이 화두가 되는 시대에 과연 조경과 도시설계가 만드는 공간은 충분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일까? 이용자의 마음과 시대적 성향, 사회적 요구를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디자인은 진정 창의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멜리사 몽지아Melissa Mongiat와 함께 데일리 뚜레쥬르를 창립해 이끌어 온 공동 대표 무나 안드라오스를 만나 확인해 보자. Q. 데일리 뚜레쥬르의 작업 영역은 매우 넓은 것 같다. 여러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프로젝트를 해왔는데 당신의 일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A. 우리 회사에서 주로 다루는 일은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의 경험에 집중하며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중간에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이어주는 매체medium 자체가 우리의 프로젝트가 다루는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대부분의 작업은 공적 장소나 대중과의 직접적인 상호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에 설치되었다. Q. 데일리 뚜레쥬르의 사명이 있는가?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를 밝힌다면? A. 우리의 관심은 ‘대화’와 ‘교류’다. 우리 회사의 핵심 멤버들은 최근 몇 년간 건강한 시민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유 공간shared space과 공유하는 삶shared common life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글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 프로젝트를 통해좀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궁극적으로 진심이 담긴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Q. 무척이나 도시적urbanistic이고 공적인 사업 목표인 듯하다. 이런 회사를 운영하게 된 개인적 배경과 회사를 설립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면? A. 원래 전공은 인문학과 영화학이다. 2000년대 초반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영화학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매체로서의 웹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인터넷엔 그 어떤 규율도 없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통해 인터랙션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는데 초반에는 주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을 연구하다가 점차 물리적 형태를 가진 것들로 옮겨갔다. 가상 공간에서 실험한 아이디어를 현실의 3차원 공간에 적용하면서 공동 창업자인 멜리사를 만났다. 멜리사의 전공은 환경 그래픽 디자인이고 주로 전시 디자인narrative environments쪽의 일을 해왔다. 그녀는 런던에서, 나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몬트리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함께 회사를 창업하게 되었다. Q. 데일리 뚜레쥬르의 프로젝트는 음악, 무용, 시를 매우 빈번히 사용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프로젝트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인가? A. 직원 중 아무도 직업적인 예술 교육을 받은 경우가 없다. 우리는 이용자와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이러한 예술적 매체를 활용한다. 예술은 시공간과 언어를 초월해 모두를 묶을 수 있는 만국 공통어이기 때문이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 [재료와 디테일] 속도를 만드는 경계석
    도시의 가로를 걸으며 보게 되는 가장 흔한 풍경은 무엇일까. 가로수, 건물, 도로 등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바닥의 포장과 그 영역을 엄정하게 규정하는 경계석들이 눈에 쉽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직업의 특성도 있지만 늘 장소가 바뀔 때마다 바닥의 포장 재질이나 패턴은 변해도 경계석만은 고정된 모습으로 영역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도시를 논할때 늘 빼놓지 않고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누적된 시간의 모습이다. 이때 시간의 적층은 단순히 옛것의 낡음이 겹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다양한 방식으로 적층되며 표출되는 다양성의 아름다움이다. 때로는 세련된 모습으로 혹은 투박하지만 두텁고 견고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의 양태야말로 열린 민주 도시가 갖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경계석은 근대 도시에 가로 경관을 형성하게 한 가장 대표적인 소재이며 명확하게 공간을 구분하는 가장 기능적인 재료다. 도시의 근간을 차지하는 도로의 기초가 되는 작업이고 각각의 소유 관계를 분명하게 하여 분쟁을 억제하는 자본주의 세상에 없어선 안 될 존재다. 또 그것은 속도와 관련이 있다. 속도는 우리가 빠르게 도시를 발전시키고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경계석은 이를 가능하게 만든 기본 소재이며 흐름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통한 물류, 사람의 이동, 도시의 가로 구조를 형성하는 도로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빗물의 운반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물의 흐름을 통제하는 도시 인프라의 기능도 수행한다. 경계석의 모양을 보면 돌이 적층된 면적인 이미지보다 턱을 만들어 분리하고 개발을 촉진하는 가속도와 어울리는 선적인 이미지로 읽힌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팽창과 산업화는 세분화된 소유의 개념을 발생시켰고 그에 따라 도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이대영[email protected] /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 엘 소장 / 2015년11월 / 331
  • [공간 공감] 홍익대학교 중앙광장
    2006년 홍대 인근에 사무실을 연 후 점심시간이면 가끔 직원들과 함께 건축학과 졸업전시회나 강연을 보러 다니며 홍대 캠퍼스 진입 공간인 중앙광장을 만나게 되었다. 이곳은 폭이 30m쯤 되고 길이가 300m 정도인 좁고 긴 형태이지만 홍대 내에서는 가장 넓은 오픈스페이스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고목 플라타너스와 양버들 그리고 느티나무 몇 주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대학교 캠퍼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2007년부터 이 공간의 리노베이션이 시작됐고 1년 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앙광장이 다시 태어났다. 변신과정 내내 이 광장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완공 후의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원래 있던 나무 사이에 1~3m 키의 갖가지 나무를 두서없이 식재하여 마치 서울 근교의 그렇고 그런 수목 농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인 공간의 스케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한창 조경 설계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절, 나는 왜 멀쩡한 광장을 이렇게 만들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공간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계기가 몇 년 후 찾아왔다. 2010년부터 홍대 건축학과 4학년의 조경 과목을 맡게 되면서부터 나는 광장을 매주 자연스럽게 지나다니며 변신을 거듭하는 이 광장의 매력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 심은 수목들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광장은 계속 변해갔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디자인 노트] 국가라는 그릇 김영민 1등작 ‘세종상징광장’ 디자인 노트
    언제부턴가 나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표면적인 요구사항들이 언제나 내가 진정 해주기를 바라는 일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더 난감한 사실은 그들도 대부분 정확히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요청된 다른 이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 욕망을 다시 정의해야만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욕망은 결국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모호한 요구 사항들을 쏟아내지만 정작 본질은 어디론가 미끄러져서 혀끝에서만 맴도는 지침서를 두어 번 읽어보았다. 이 공모전이 요구하는 바는 세 가지라고 결론 내렸다. 광장, 상징, 현실. 그리고 실상 별다른 연관성도, 인과 관계도 없는 이 세 가지를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엮을 것. 첫째,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광장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에 어려운 공간이다. 우리는 광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서구의 전통에서 광장은 도시의 정체성, 또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권력의 가장 설득력 있는 자기표현의 공간이었다.1 반면 수도 외에는 어떠한 도시적 정체성도 용납하지 않았던 우리의 중앙집권적 유교 문화에서는 광장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2 그래서 우리의 도시에서 광장은 어색한 공간이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종류의 공간으로 대체되기를 요구받는 공간이다. 다른 한편으로 광장은 비어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어려운 공간이다. 우리는 디자인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는 행위라고 교육받고 그러한 실천을 해왔다. 공간을 채우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에게 채우지 않아야 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이다.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팀이 모여 미팅을 했을 때 판이하게 다른 디자인과 생각들이 나왔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있었다. 채워진 생각과 안.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데 모두가 속이 꽉 찬 입방체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광장의 본질은 비움이며, 채움의 논리가 비움을 압도하는 순간 더 이상 광장은 광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자명한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도 자명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김영민[email protected]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 2015년11월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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