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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변개발 ; 한강 르네상스
    계획의 범위시간적 범위·계획의 기준년도 _ 2007년·계획의 목표연도 _ 2030년 공간적 범위·서울시 행정구역내의 한강권역과 한강에 인접한 강남북 1km 내외의 구간을 범위로 함·한강 주운계획의 경우, 동서방향 시계외 구간을 포함 도시공간구조 재편한강이 더 이상 강남·북의 경계가 아닌 통합의 공간이자 미래성장 동력의 기반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시의 공간구조를 한강 중심으로 재편 한강을 중심으로 한 도시공간구조의 재편 한강변 강남·북의 발전거점들 간 연계기능 강화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2008년 7월호(통권 243호) 124~133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수변개발 ; 수변개발과 예술
    흐르는 물을 관망(觀望)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존재를 맡기는 것이다. 예술은 풍류(風流)와 함께하고 삶이 한 박자 쉬어가는 물위의 향연(饗宴)은 물 위에 멈추어 선 침묵과 명상의 공간이다.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순간에 불과하며, 직선이 차원(次元) 없는 점들로 이루어 진 것처럼, 시간은 지속(遲速)이 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물줄기의 흐름보다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강변의 자동차들과 그 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그림자가 수면위로 떨어지면, 나르시즘에 우쭐한 도시문명이 강물조차 무기력하게 한다. 투명한 물은 무엇이든 집어 삼킨다. 물의 표면은 물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허상이며 반영이고 거울이다. 물의 이러한 정다운 환영은, 즐기는 상상력 또는 상상력의 인공적인 착각에 일반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즐거움을 따라 도시하천 공간을 해석하고 공동체가 더불어 쉴 수 있는 향연을 마련한다. (2006 AFI 안양 _ ‘물위의 향연’ 서문 중에서) 농경사회에서는 농업용수로, 산업사회에서는 산업용수로 공급되었던 강은 후기 산업사회에서 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수년전만 해도 산업폐수로 인하여 강 근처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강의 수질이 개선됨과 동시에 수변에 각종 사회체육 시설들이 들어서고 수변도로가 정비되고 있다. 나아가 각 지방 자치단체들은 각종 수변개발 프로젝트들을 내놓고 있다. 지난 2004년에 안양천 프로젝트를 통해서 하천을 테마로 한 예술프로젝트와 인연을 맺어 온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불과 몇 년 사이에 급변하고 있는 하천에 관한 문화적 관심의 변화를 진단하고 예술가들이 하천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안양천 프로젝트를 진행할때만 해도 안양천은 많은 환경단체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있었다. 그들은 28개 시민사회 단체와 연대하여 하천 오염 산업시설들을 고발하고 하천 생태계의 복원을 위한 지역사회의 관심을 주목시킬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당시 예술가들이 주목했던 부분은, 지역 하천 오염의 원인이 된 삼덕제지 공장에 대한 역사적 검토와, 지금은 공원으로 변화된 근대 산업시설들에 대한 수도권 인근의 위성도시 자치단체장들의 문화적 인식을 개선시킬만한 활동을 기획하는 일이었다. 환경운동은 정치적 슬로건과 프로파간다(propaganda)식의 선동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삶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총체적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동반되는 문화적 행위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경운동 단체들이 문화와 예술을 환경운동과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경험이 부족했고, 예술가들은 창작을 통해 환경문제 및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데에 서툴렀다. 그나마 이와 같은 사회문제와 예술을 결합하고 예술의 사회적 경로를 확대하리라고 기대했던 공공미술은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문화부의 아트인 씨티 사업,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사업을 비롯한 공공미술을 화두로 도시공간을 개선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프로젝트들은 예술을 철저히 물질화 시키는데에 기여하고 있다. 환경운동가들과 함께했던 안양천 프로젝트는 2006년 AFI(Artist Forum International) 안양지역행사로 ‘물위의 향연(饗宴)’이란 프로그램으로 다시 안양천에서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환경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던 하천을 문화적이고 예술적 관점으로 옮겨 오기 위한 실험이었다. 무용수들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물 위에서 춤을 추고, 시민들은 안양천을 노래하는 시와 한 페이지 문화담론을 낭독하며 지역문화의 부흥을 이야기 했다.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환경문제로 덧입혀진 하천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로서 흐르는 강에 대한 것이었다. 물과 더불어 상상하고 풍부한 은유를 찾아내는 것의 토대는 우리가 강변을 따라 걷고 그 흐름대로 사유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안양에서 진행되었던 공공미술 활동들을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순간(moment)은 물 위의 플랫폼에서 진행되었다. 지역의 환경운동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지역예술의 사회적 경로를 마련하기 위한 문화예술교육 활동, 예술가들의 예술매개활동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토론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장소마케팅 ; 지역발전의 문화적 패러다임, 장소마케팅 전략
    지역발전 전략의 흐름과 키워드: 문화, 장소성, 창조성의 시대지역발전 전략의 핵심수단으로서 ‘문화’와 ‘장소(place identity)’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글로컬(glocal) 시대의 지역발전 전략으로서, 의미있는 삶과 정체성을 추구하는 주민 욕망의 구현 전략으로서 문화지향적 지역정책이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지역경제의 기반으로서 자본과 고급노동력, 관광객의 유인력으로서, 삶의 질과 결, 독특한 라이프스타일 창출의 매개자로서, 지역발전의 핵심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화의 흐름, 즉 문화전략, 문화정책, 문화기획, 문화가치의 핵심이 ‘예술 → 산업 → 생활환경 → 도시·지역·공간’으로 확대되면서, 지역계획 및 정책 전반을 문화적 시각에서 수립하는 통합적 문화계획(cultural planning) 접근법과 그를 통한 매력적이고 가치있는 장소성 창출이 정책 목표로 급부상하고 있다.최근에는 지역의 삶 속에서 다층적인 문화적 맥락들을 짚어내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창조적인 콘텐츠와 브랜드로 변모시키는 창조문화도시(creative cultural city) 전략의 필요성이 더해지고 있다. 도시재생의 비전과 창조적인 도시행정시스템, 산업과 문화가 피드백하는 자기혁신적 도시경제시스템, 다양한 정책 영역을 통합·횡단하는 도시문화정책, 감성하는 창조하는 도시경관과 에코시스템의 지속가능도시, 사회자본을 창조자본으로 만드는 창조적 주체 만들기, 결속력과 개방성, 관용의 창조적 도시공동체 만들기 등이 창조문화도시가 표방하는 주요 내용들이다.이렇듯 현재의 지역발전 전략은 전통(original), 고유(unique), 특화(special), 감동(emotional), 맞춤(personal), 유연(flexible)을 키워드로 문화와 장소성, 창조성을 결합하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연장선 속에 장소마케팅 전략이 놓여있다. 장소마케팅의 필요성과 의의: 가치 창출을 위한 공간문화와 장소만들기장소마케팅(place marketing)은 지역의 가치를 창출하여 경쟁력을 높이는 총체적인 지역문화발전 전략이다. 이러한 지역경쟁력을 위해서는 뚜렷한 지역이미지와 정체성, 지역 고유의 자산을 바탕으로 한 자기혁신적인 도시경제시스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삶의 질, 자율과 참여의 역동적인 커뮤니티를 필요로 한다. 장소마케팅 전략의 개념과 유형장소마케팅 전략은 ‘장소 + 마케팅 + 전략계획’의 믹스 개념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즉 장소마케팅 전략은 ‘지역형성 주체들의 밀접한 파트너십을 통해, 지역의 장소성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바탕으로, 지역의 장기비전과 정체성을 수립하고, 마케팅 전략기법을 이용하여, 장소성에 기반한 고유의 상품을 개발해, 주민, 기업, 관광객에게 제공함으로써, 지역문화, 지역경제, 지역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포괄적, 체계적, 연계적, 문화적, 능동적 장소만들기 전략’이다.이러한 장소마케팅 전략의 유형은 구체적인 비전이나 테마 설정, 방식과 프로세스의 차이에 따라 ‘문화예술형’, ‘도시경영형’, ‘도시설계형’, ‘문화창조형’, ‘커뮤니티형’ 등으로 유형화하기도 한다. 장소마케팅 전략 수립 방법론장소마케팅 전략 수립은 크게 ‘장소 전략(Place Strategy)’과 ‘마케팅 전략(Marketing Strategy)’, ‘평가모니터링 전략(E&M Strategy)’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장소 전략은 ‘장소의 사명 설정 → 장소현황 평가 → 장소의 장기비전 및 정체성 설정 → 장소마케팅 목표와 유형 규정’의 절차를, 마케팅 전략은 ‘시장분석 및 목표시장 선정 → 장소마케팅 믹스 전략 수립O_IPTCR 전략 → 마케팅 실행’의 절차를, 평가모니터링 전략은 ‘반응 → 피드백 및 통제’의 프로세스를 밟는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장소마케팅 ; 도시에서의 장소 팔기 : 세 가지 기본 조건
    1. ‘공간’과 ‘장소’ 구분하기대학원에 진학한 후 맞았던 첫 3월, ‘공간’과 ‘장소’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라는 교수님의 주문에 한참 머뭇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둘에 대한 구분과 이해가 조금 뚜렷해 졌지만, 아직도 정답을 줄줄 외울 수는 없다. 다만 확연한 것은 공간은 물리적인 환경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장소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보태져야 한다는 사실이다.설계수업시간에 도시 내에 장소들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과 늘 고민을 한다. 공간에서 장소로 전환하기 위한 ‘뭔가’를 찾는 일은 항상 해 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 결론을 내려 보자면 그 뭔가의 첫 번째는 ‘사람’이다. 물론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사람도 여러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장소에 직접 들어가서 장소를 만들어 가는데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장소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즐기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또 그 장소를 기억에 담아두고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장소는 사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하고 ‘별 볼일 없는 공간’으로 전락되기도 한다.이 논리가 맞는다면 좋은 장소를 만들거나 찾는 일보다는 그 장소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사람이 그 장소에 가장 적합할까?”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공간을 장소로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과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흔하게 사용하는 ‘장소성’(場所性)이라는 말은 ‘성’(性)자가 붙어 속성을 나타내는 다른 말들과 달리 영어 표기가 ‘sense of place’다. 분명 깊은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 센스는 ‘장소가 가지는 자체의 감각’도 포함하지만 그 장소를 느끼고 그 장소에 뛰어드는 ‘사람의 지각’도 포함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장소를 가지는 일이나 공간을 장소로 바꾸는 것은 ‘사람하기 나름’인 셈이다. 2. 장소의 힘 : 도시에서의 역할2.1 장소가 갖추어야 할 것들도회지 사람들은 냉정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도시공간이 장소가 되길 기다려 주질 않는다. 좋은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일단 잡아야 한다. 잡힌 사람들이 조금씩 그곳에서 ‘긍정적 활동’을 시작하고, 이 활동이 누적되어 살을 보태면서 큰 활동으로 변하고 순환되어 결국 ‘제대로 된 도시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제대로 된 도시의 장소는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일단은 ‘물리적인 환경’은 있어야 한다. 실내든 실외든 또 양쪽에 걸쳐져 있든. 그런데 여기까지는 단지 공간일 뿐이다. 공간에서 장소로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시각은 물론, 사람의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소리, 냄새, 또 빛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런 것도 있다. 장소의 크기와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차원’(dimension)도 있고 ‘시간’도 있다. 차원이 일정한 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의 크기를 결정하여 준다면, 시간은 경험을 연속으로 일어나게 함으로서 누적되는 경험의 양을 조절해 준다.뭐니 뭐니 해도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 숨어 있거나 스며있는 ‘에너지’다. 그 에너지를 느끼고 경험하는 일은 사람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다. 나는 새벽 동이 틀 무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즐긴다. 아무 방해 없이 비릿한 냄새와 함께 붉은 색을 더하며 변해가는 바다의 모습은 분명 그 순간 나만의 장소가 된다. 항구의 활기찬 새벽 (생선)시장은 멋진 장소로 돌변한다. 시장 곳곳에서는 바삐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어부와 상인들의 에너지들이 항구의 흔적으로 스며들면서 흥미로운 장소들이 만들어지고 또 동이 트면 이내 사라져간다. 2.2 장소가 도시에 주는 것들부산에 살면서 가끔 서울에 갈 때마다 생긴 습관이 있다. 부산으로 돌아올 때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궁금해서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는 일이다. 인사동길, 청계천, 서울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내가 가장 즐기는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여행길이다. 운 좋은 날이면 곳곳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쌈지길에서 만나고, 광통교 아래 물가에서도 만나고, 청계천변 뒷골목에서도 만나고, 또 계절마다 변하는 서울광장의 잔디위에서도 만난다. 3. 장소 팔기의 최소 조건요즘 떠도는 말 중에 ‘슈머마케팅’(sumer marketing)이라는 말이 있다. ‘sumer’는 소비자라는 ‘consumer’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이런 말도 있다. ‘크리슈머’(creative+consumer), ‘트라이슈머’(try+consumer), 심지어 주부들이 스스로 자신의 생활공간이나 제품에 대해 문제를 찾아 개선한다는 ‘마담슈머’라는 말도 있다. 모두 다 상품을 잘 팔기 위해 고객들의 긍정적인 참여와의 세밀한 접목을 의미하는 개념들이다.도시의 상품은 ‘장소’다. 고객은 ‘지역민이고 방문객’이다. ‘장소마케팅’은 슈머마케팅과 똑 같은 이치다. 좋은 상품을 팔기 위해 고객에 초점을 둔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고객에 해당하는 사람에 의해 장소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고, 장소라고 열심히 만든 곳이 도시의 흔하디 흔한 공간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방문객의 생각과 정서에 잘 맞아 떨어지며 엉뚱하게 보석 같은 장소가 되는 곳들도 있다. 4. 마치며도시의 한 공간이 원래 그 자리에서 제 모습만 갖고 있다면 약간의 양념만 쳐도 좋은 장소로 바꿀 수 있다.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일에 앞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또 사라질 수 있는 도시의 (가능)장소들을 찾아 치유하고 지켜가는 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모든 이들이 열심히 외치고 있는 ‘문화의 시대’에 살면서, 모두가 찾고 염원하는 새로운 도시의 신(新)문화를 우리 동네 뒷골목에서도 우연히 만나고 싶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장소마케팅 ; 장소마케팅과 지역축제
    지역축제의 의의축제란 종교, 사회, 문화 등의 어떤 사건이나 절기를 기념하여 일정한 날이나 기간에 의례적으로 축하하는 행위이다. 전통적으로 축제는 노동 및 일상생활의 희로애락과 관련된 공동체적 결집의 발로였다. 노동의 수고를 풀고 집단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공동체의 재생산이 가능해진다. 축제를 통해 지역주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축제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첫째, 축제는 문화적이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해 제물을 바치고 순종과 감사, 기원을 나타내는 종교적 의식에서 사람들은 심신에 정성을 다하게 된다. 좋은 음식을 만들고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고 집과 거리를 장식한다.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맞추어 춤추고 행진한다. 기념물을 만들고 특별한 행사를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축제는 문화의 정수이며, 예술의 종합이 되는 것이다.둘째, 축제는 공동체적이다. 공동체가 다 같이 기릴만한 시기와 날을 잡아 함께 모여 의례를 치른다. 이러한 행사를 같이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연대의식을 강화하여 구성원간 결속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셋째, 축제는 지역적이다. 농촌은 추수에 감사하고 어촌은 풍어를 기원하며, 전후에는 개선을 경축하고 평시에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옛 전설과 풍속을 이어가는 것이 축제다. 따라서 축제는 지역의 일상을 농축한 생활의 단면이자 삶의 다른 모습이다. 자연과 삶의 방식이 곳에 따라 다르므로 축제도 당연히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다.따라서 축제는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응축되어 외화한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축제는 지역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지역의 장소성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축제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고, 또한 지역의 개성 및 문화적 특성을 응집하여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한편, 문화예술 향유와 그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현대사회에서 축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더 이상 순수하지만은 않다. 현대사회에서 축제는 도시 이미지 향상을 통하여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지역주민의 자긍심 및 애향심을 고취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축제는 장소마케팅의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축제를 둘러싼 제집단의 이해관계를 통해 전략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역축제들도 장소마케팅의 논리에 깊숙이 젖어 있다. 우리나라 지역축제의 성장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지역축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여년 남짓한 일이지만, 그 축제들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연중 개최되는 축제 수가 공식, 비공식을 합하면 천여 개가 훌쩍 넘는다고 하니, 산술적으로만 따져도 매일 3개 정도의 축제가 전국 어딘가에서 열리고 있다는 계산이다. 게다가 동네 백일장으로부터 역사재현까지 다양한 행사들 중 어느 범위까지를 축제라고 할 것이냐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없는 실정이다.그럼에도 현재 가장 공신력을 갖고 있는 축제관련 통계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공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해마다 각 시·도에서 개최되는 축제현황을 제출하도록 하여 이를 자료로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전국 각 시 · 도에서 934개의 축제가 개최(예정)되고 있다. 장소마케팅의 수단으로서 지역축제의 문제점과 발전가능성/ 지역축제 전략의 문제점과 발전가능성현재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축제들이 개최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장소마케팅의 효과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둔 축제들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지역축제들이 비판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지역축제가 양적 팽창에 어울리는 질적 성장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지역축제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지역문화 활성화의 입장에서 제기된 비판을 들 수 있다. 이 입장에서는 비판의 초점을 주민의 소외나 지역정체성의 손상 등 축제 개최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심화나 문화의 왜곡, 문화적 진정성 파괴 등과 같은 문화적 측면에 두고 있다.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지역의 공동체문화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품화되고 왜곡되며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이미지 고양과 경제적 파급효과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파악한다.반면, 지역축제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연구들도 있다(장경석, 2001). 비록 축제가 도시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지역주민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등의 무형의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관광과 문화산업 육성, 외부로부터의 투자유치 증대와 같은 경제적 효과를 실제로 낳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장소마케팅 ; 해외의 장소마케팅 우수사례
    장소마케팅은 특정한 장소의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모든 활동을 뜻하며 이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들어 장소마케팅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해 각 지방 자치 단체들은 지역 축제나 이벤트와 같은 문화행사 개최 및 홍보, 국제행사 유치, 캠페인 등과 같은 방법으로 지역의 특성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는 곧 지역의 이미지제고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와 연결됨으로써 향후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해외 선진지들의 사례를 보면 오래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장소마케팅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으며,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는 각 국가와 도시들은 자신들의 강점과 특성을 내세우며 세계를 향한 마케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성공한 사례도 있고 실패한 사례도 있다. 본고에서는 장소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의 지역축제와 도시개발을 통한 몇몇 장소마케팅의 성공사례들에 대해 관광청으로부터 자료를 협조받아 수록하였다. 국내 장소마케팅 전략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캐나다 빅토리아 ‘꽃송이 세기 축제(Blooming in Canada)’‘정원의 도시(City of Garden)’라고 불리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빅토리아시에서는 매년 2월부터 3월 약 한 달간 봄을 알리는 ‘꽃송이 세기 축제’가 열린다.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브리티시컬럼비아는 태평양과 인접해 있는 주로서 장엄한 산, 맑은 호수, 아름다운 태평양 해안, 울창한 숲, 언제나 눈으로 덮여 있는 만년설 등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550개의 국립, 주립공원과 훼손되지 않은 순수 자연환경을 이용한 골프, 스키, 하이킹, 캠핑 등의 다양한 즐길 거리로 관광객을 유도하고 있다. 2010년 동계올림픽과 장애인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이기도 한 이곳은 캐나다 최남단에 자리한 지리적 여건과 주변을 흐르는 난류의 영향으로 짧은 겨울을 제외한 거의 1년 내내 푸른 초목과 갖가지 원색의 꽃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배경으로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남다른 관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빅토리아 시민들은 ‘꽃송이 세기 축제’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이 행사는 빅토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부차드 가든(Butchard Garden)을 비롯한 곳곳의 정원에서 펼쳐진다. 이 기간 동안에, 빅토리아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저마다 손에 계산기를 쥐고 몸을 구부려 꽃송이 수를 센다. 이렇게 세어진 꽃송이 수는 전화로 집계되는데 최종적으로 집계된 꽃송이 수를 발표하며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경축하는 것이다.1976년에는 13억송이가 넘는 꽃송이가 집계 되었지만, 1996년부터 늘어나는 인구와 더 많은 지역 주민들의 참여로 인해 40억송이까지 집계되었으며, 20주년 축제에서 집계된 꽃송이 수는 무려 42억송이에 달했다. 물의 성지 프랑스 ‘에비앙’에비앙은 프랑스 남부 론알프스 지방의 휴양도시 이름이며, 생수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비앙은 에비앙에서 생산된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시가지에는 에비앙을 몸에 뿌려 치료하는 수(水)치료 센터가 있고, 에비앙 기념관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도 에비앙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에비앙 스킨 · 로션에 에비앙 에센스도 판다. 또한 에비앙 로고를 붙인 파라솔들이 세워져 있고 호텔 객실의 무료로 제공되는 물도 모두 에비앙이다. 태국 물의 축제 ‘쏭크란(Songkran)’ ‘쏭크란(Songkran)’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새해’란 뜻으로써 팔리어의 ‘산카라’와 산스크리트어 ‘산크라티’에서 유래되었다. 태국인에게 새해는 현재의 유럽인들을 위한 양력 1월 1일과 중국인들을 위한 음력 1월 1일, 그리고 수세기 동안 환경에 적응하면서 만들어진 타이 양력에 1월 1일로 표기했던 4월 15일경과 같이 세 개가 존재한다. ‘쏭크란(Songkran)’과 관련된 새해란 세 번째 타이 양력의 설에 해당하는 시기를 의미하며 이 시기는 건기에서 우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건기의 나쁜 세균들이 절정을 이루는 때이며 동시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시기이다. 타이 민족이 남하하기 전부터 농업을 한 타이민족에게 쏭크란은 단순히 놀이를 넘어서 그들의 정신적인 축제로써 자리잡게 되었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정원과 식물 ; 꽃, 영원한 사랑의 테마 : 꽃과 나무에 깃든 신화와 전설
    꽃은 민속이요 문화꽃을 인간 생활로 보면 가장 화려한 청춘기요, 꽃의 절정기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향기로운 때이다. 꽃은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어서 아무리 무딘 감정을 가진 사람도 금방 시인으로 만드는 마술 같은 존재다. 입학과 졸업식 같이 즐거운 때는 밝은 빛깔의 꽃을 전하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는 흰색 국화를 전해 고인을 추모한다. 꽃은 부활이다. 효녀 심청도 연꽃을 타고 인당수에서 되살아났다. 내세관을 믿었던 옛 사람들은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을 통해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었다. 꽃의 대명사가 된 장미역사 속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기술돼 있는 꽃들이 많다. 동양에서는 모란을 꽃의 왕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 했다거나 장미를 ‘요염한 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 장미야말로 ‘꽃의 여왕’ 대접을 받는다.장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색이 다양하고 모양도 여러 가지이며 게다가 향기까지 좋으니 이 보다 좋은 꽃이 어디 있겠는가. 장미는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낙엽관목 또는 덩굴식물이다. 장미와 근연종 식물에는 월계화, 사계화, 해당화, 인가목, 생열귀나무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종은 꽃봉오리가 매우 크고 또 어떤 종은 향기가 아주 좋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은 색깔이 아주 화려하다. 그래서 장미 육종가들은 이들 꽃의 장점을 모두 합한 새로운 꽃을 만들어냈다. 그 꽃은 탐스러운 꽃봉오리와 짙은 향기를 갖고 있으며 항상 꽃이 피고 매우 아름답다. 그 꽃이 바로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꽃이다. 아프로디테를 위해 피어난 장미아프로디테는 장미를 좋아했다. 그래서 정원의 곳곳에 장미를 심고 가꾸었다. 어느 날 아프로디테의 아들 큐피드가 정원의 장미 밭에서 놀고 있을 때 장미꽃이 하도 고와 코를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으려 했다. 그 때 꽃 속에 숨어 있던 벌 한 마리가 큐피드의 콧등을 쏘았다.“앗! 따거!”큐피드는 너무나 아파 어머니 아프로디테에게 달려갔다. 아프로디테는 벌들을 모두 잡아 침을 뺏다. 어린 큐피드가 장미를 쉽게 만질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벌들에게서 뽑은 침을 줄기에 하나씩 붙였다. 그 때부터 장미 줄기에 가시가 돋아나게 되었다.아프로디테에게는 미남 애인이 있었다. 사냥꾼인 아도니스는 씩씩하고 용감한 젊은이였다. 아도니스가 멧돼지 사냥에 나갔다가 멧돼지에게 받쳐 죽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프로디테는 너무 다급하게 달려갔으므로 자신이 심어 놓은 장미 가시를 스스로 밟아 버리고 말았다. 발바닥을 찔린 아프로디테는 피를 흘리며 흰 장미꽃 밭을 뛰어갔으므로 흰 장미가 붉은 핏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 때부터 장미는 붉은 색과 흰색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아프로디테의 남편인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아내가 장미만 좋아하고 젊은 사냥꾼 아도니스와 놀아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가 가꾼 장미를 뜨겁게 달군 대장간의 불구덩이 속에 던졌다. 이것을 알고 뛰어온 아프로디테는 타다 남은 장미 다발을 끄집어내어 물에 담가 놓았다. 이 장미가 다시 살아나 꽃이 피었는데 그 때부터는 황금색 꽃으로 바뀌어 피어났다. 갈대밭에 묻어둔 왕의 비밀힘이 있는 자는 약자를 함부로 대해도 되고 힘으로 빼앗아도 된다는 묵인 아래 신화는 시작된다. 꽃에 얽힌 신화를 듣고 자란 유럽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무지함에서 깨우치게 한다는 구실로 대륙을 침략하여 잠재적으로 기독교를 포교하려고 한다. 기독교의 포교 방식이 공격적인 포교를 지향하는 것도 서양의 가치관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탈환하겠다는 구실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미개한 이교도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진출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으로 식민지를 넓혀 갔다.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전설과 신화를 굳게 믿었던 유럽인들은 아직도 약소국가를 함부로 생각하고 경제적 대국임을 내세워 자본주의적 침략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유럽의 신화가 언제나 폭력 앞에서 굴복으로 일관하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이든 예외는 있게 마련이다. 미다스왕의 갈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품고 있다. 미다스왕은 유난히 큰 귀를 갖고 있어서 늘 모자를 눌러 쓰고 다녔다. 그러나 왕도 이발을 할 때가 되면 큰 귀를 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다스왕은 전속 이발사에게 왕의 신체적 비밀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받았다.그러나 이발사는 혼자 고민하다가 강가의 갈대밭으로 나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는 구덩이 속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미다스왕의 귀는 당나귀 귀야! 미다스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구.”이렇게 말한 뒤 재빨리 구덩이를 메웠다. 그러나 비밀은 그렇게 굳게 지켜지는 법이 아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갈대밭에서는“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갈대밭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속삭인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도 절대 권력자에 저항하는 약자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교감들이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오늘의 유럽을 만들고 또한 민주주의를 꽃 피웠는지 모른다. 유럽인들은 영웅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큰 능력을 가진 절대자를 내세워 그 속에서 무리를 지어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만들어 나가기를 좋아한다. 며느리의 서러운 애환이 깃든 꽃동양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는 꽃이 한 많은 삶을 누리다 떠난 외로운 영혼들로 표현되는 게 보통이다. 언제나 가신 자의 횡포로 사랑하는 님을 빼앗기고 눈물짓다 숨을 거두는 여인들로 새겨진다. 꽃이 대부분 여인들로 표현되는데 비해 남성은 나무에 비유하여 나타난다.동양에서는 운명에 대해 저항하며 헤쳐 나가기보다 그 운명에 순응하는 쪽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국화에 얽힌 전설이다.옛날 중국에 항경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예언자가 말하기를 9월 9일 중구절에는 집을 비우고 들놀이라도 갔다 오기를 권했다. 그래서 항경은 가족들을 이끌고 들놀이를 즐긴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가축이 모두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부터 중구절이면 가족들과 함께 들놀이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를 다시 음미해 보면 언제나 약자는 변명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외부의 힘에 굴복하는 쪽으로 지쳐지고 있다. 서양에서 사뭇 침략적이며 공격적이고 미지를 향해 개척하려는 의지를 보이는데 비해 동양은 그렇지 못하다. 순종적이고 사건을 내면에서 스스로 해결하려 하고 끝내 굴복 당하고 마는 슬픈 이야기로 전개된다. 동양과 서양이 꽃을 두고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 의상대사와 관음송(觀音松)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나무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에 솔가지를 달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죽어서 소나무 관에 누워 영면한다. 그만큼 소나무가 우리 정서 깊숙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리라.낙산사에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를 할 때였다. 원효대사도 관음보살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낙산사로 가던 중이었다.어느 마을의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우물 옆 개울에서는 한 여인이 생리대를 빨고 있었다. 목이 마른 대사는 그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여인은 아무 말도 없이 샘물을 퍼 주는 대신 피가 섞인 더러운 물을 퍼 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그 물을 마실 수 없어 버렸다.“원 고약한 인심도 다 있군.”그리고 스스로 샘물을 떠서 목을 축였다. 실로 상쾌한 물맛이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늙은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휴제호화상, 휴제호화상 (休醍?和尙. 休醍?和尙)”고운 목소리로 울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 여겨 소나무 곁으로 가까이 갔더니 그 곳에서는 여인의 고운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원효대사는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갈 길이 바빴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낙산사에 이르렀다. 관세음 보살상을 찾았으나 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음상 연화 좌대 앞에는 소나무 밑에서 본 것과 같은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대사는 비로소 깨달았다. 더러운 물을 퍼 주던 그 여인이 바로 관음보살이었다는 것을. 대사는 다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토굴 속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풍랑이 일어 다시는 들어갈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관음보살이 현신한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렀다.하필이면 소나무였을까. 예로부터 소나무는 불변의 상징처럼 돼 있다. 사철 푸른 잎을 하고 모진 풍상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것에서 진리의 참 모습으로 비유되곤 했다.원효대사와 관련된 이 설화 속에서도 소나무는 진리의 불변을 설파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한 마리의 파랑새로 변신한 관음보살이야말로 언제 어디든 일반 대중과 불자들의 마음에 복음을 던져 줄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이리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법의 진리를 소나무로, 언제 어디든, 누구의 마음속에도 관음보살의 가피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제각기 민족의 성정을 간직한 꽃과 나무나무에서도 서양과 동양에서 보고 생각하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노거수에 얽힌 전설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마을마다 동신목이라 하여 신앙적 대상으로까지 나무를 받들어 모신다. 대게 그 마을의 인물과 함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글·그림 _ 오병훈 Oh, Byoung Hoon(한국식물연구회 회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정원과 식물 ; 정원속의 이끼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이끼가 정원을 구성하는 주요 식물로서 등장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정원이 단순히 식물을 모아놓은 덩어리가 아니라 의미 맥락(meaning context) 속에서 구성되어짐을 감안할 때 우리의 정원 속에 이끼가 주요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았음은 다른 식물에 비해 볼품이 없어 관상 가치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습하고 그늘진 곳이라면 으레 생육하는 흔한 식물이었기 때문이거나, 백보를 양보하여 관상 가치를 가진 이끼가 있었어도 인위적으로 재배하기가 쉽지 않았음에서도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그늘지고 습한 곳은 선호되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이곳에 거주하는 생물들 역시 비호감(非好感)의 대상이기 십상이었고 경우에 따라 제거의 대상되기도 하였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 조상들과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끼란 식물은 낯선 식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반면 이웃 일본 정원에서 이끼는 중요한 식물 소재로 아주 오래전부터, 의도적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오래된 궁이나 절, 숲에 가면 이끼가 지피식물로서 정원의 중요한 요소로서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어 왔다. 일본의 정원에서 이끼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이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이끼를 보면서 ‘생명체의 근원’, ‘장수’, ‘변함없음’, ‘강인한 생명력’ 등의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 일본의 절이나 고궁에서 보는 이끼 정원은 이 곳 승려들이, 관리인들이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곳에 날아들어 온 각종 식물 종자들을 종교적 의식을 행하듯 동트는 새벽녘에 하나하나 뽑는 수고를 통해 유지된다. 무엇이든 의미 있는 것을 신성시 하는 일본사람들이 이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이끼는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대부분의 관속식물이 토양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리고 이와 통도조직을 이용하여 수분과 양분을 이동시킴으로서 생명을 영위한다. 그러나 이끼는 토양층이 없는 콘크리트, 돌과 같은 무기물 표면에 붙어 생명을 영위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지구라는 환경에 던져진 생명체가 살기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모시켜 온 진화의 역사를 보면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4억 5천만 년 전 육지에 처음 출현한 이끼가 생육한 토양은 무기물만 있는 환경이었다. 이끼가 뿌리라는 기관을 발달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이용가능한 양분이 없는 토양에 발을 담그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끼는 부착기능만 갖는 가근(假根)만 발달시켰다. 뿌리가 없으면 신진대사에 필요한 수분과 양분을 어떻게 취했을까? 뿌리가 없으니 직접 몸을 통해 대기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는 방편밖에 남은 게 없다. 그래서 몸으로 대기 중의 수분과 양분이 쉽게 직접 침투되도록 관속식물과 달리 표피에 큐티클(cuticle)층이 없다. 그러나 대기에서 취하는 수분과 양분이 일정하거나 충분하지 않기에 개체는 될 수 있는 한 작게, 또 서로 뭉치도록 함으로써(콜로니 형태 colony) 개체사이의 빈 공간에 수분을 최대로 저장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분이 건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삼을 포장할 때 이끼로 감싸주는 이유는 이끼의 조직이 거대한 물 저장고처럼 생겨 수분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끼를 주목하는가?우리에게 낯선 이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관상가치가 낮음, 축축하고 어둠의 공간에 서식하는 식물, 재배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우리네 정원에서 다만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끼는 없었을 수가 없다. 전술하였듯 이끼는 다른 식물이 살 수 없는 곳에, 고등 식물이 적응하기엔 가혹한 환경에서 생존해 온 식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끼를 정원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다. 정원의 소재로서 뿐 만 아니라 환경재(environmental medium)로 사용코자 하는 시도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점점 늘고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생활하고 있는 도시는 콘크리트, 철, 유리 등 무기물 덩어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효율’과 ‘속도’로 우리를 몰아붙이는 도시를 보면서 아득한 옛날, 이끼가 출현한 그 시기를 떠올리는 것은 비약일까? 이럴수록 뒤 돌아 보자고, 느리게 가자고 외칠 수 있는 것 또한 우리가 가진 특권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끼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네 삶의 환경이 점점 생명체가 살기에 녹록치 않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머니의 품 같은 넉넉함을 잃어버린 우리네 삶에서 이끼를 통해 이를 보상받으려는 무의식의 발로는 아닌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쩌든 보잘 것 없지만 이끼에서 유추되는 의미들을 되새김하면서 정원 한구석에 이끼로 정원을 만들어 관찰하는 것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편은 아닐런지…. 글 _ 김용규 Kim, Yong Kyu (일송환경복원(주) 대표)
  • 정원과 식물 ; Being itself : 식물과 디자인
    식물과 디자인이라는 테마는 두 개의 독립된 주제들의 병렬일 수도 있고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관계로 파악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의 여러 분야에서 식물을 대상화하고, 그 특성을 이용하거나 식물의 이미지를 디자인에 응용하는 사례는 매우 많다. 인간이 주변의 환경에서 빈번하게 접하는 식물이라는 시각적 대상은 이미지화되었을 때 보다 친근하며 아름답게 보인다. 뿐만아니라 식물은 스스로 외부의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능력이 있는 데, 본고에서는 식물과 디자인을 대상화하지 않고 식물이 가진 특성으로서의 디자인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고자 한다. 이는 식물의 미적 관점이라기보다는 생존, 즉 존재를 위한 필요 혹은 욕구로서의 디자인이라는 적극적인 식물의 특징으로 살펴보고자 함이다.필자는 작품 디자인에 있어 식물에 내재한 이러한 디자인적 욕구, 즉 자연이 세상에 존재하고 교류하는 방식의 표현으로 바라보고 있다. 본 고에서는 몇 개의 작품사례를 통해 자연과 식물을 바라보는 필자의 관점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존재에 대한 사색(Being itself) “존재에 대한 사색은 오랜 화두이다. 존재라는 철학적 화두를 붙잡고 있는 동안 몰아, 내지는 무아를 겪어낸 듯 그의 작품은 소리가 없고 울림만 있다.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울림만이 작가의 외침의 흔적을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한다. 그에게 외침은 과거이며, 존재(Being-itself)는 잠재적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운동이며 질량이며 위치라는 과학적 명제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에너지는 형태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그 공간에 따라 다른 작용을 유도하는 그야말로 거침없고 종잡을 수없는 힘이다. 그의 사색이 깊어질수록 작품은 그 힘을 고요함 속에 담는다. 작가의 작품들은 제목을 달리하지 않는다. 모두 Being itself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작품의 부제에 의존하여 작품을 구분하고 있다.” _ 조소영(미술평론가) 식물은 자신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식물에게 있어서 그 생명의 원천은 뿌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뭇잎은 햇빛과 증기의 도움을 얻어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한 뒤 다시 나무로 돌려보내 충분한 자양분을 얻게 하므로 잎이 나무의 어머니”란 탁닛한 스님의 말처럼 잎사귀는 나무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 뿌리 못지않은 중요한 일을 한다. 그것은 바로 광합성이라는 화학적 작용으로 식물이 햇빛에너지를 자신이 가진 탄소와 결합시켜 양분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이러한 나뭇잎의 가치와 자유로우면서도 규칙적인 일련의 형태는 작품소재로서 충분하다. 글 _ 심 부 섭 Shim, Bu Seop(조각가)(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정원과 식물 ; 자연을 닮아가면서 사는 사람들 _ 그림 속의 식물들
    자연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나라마다 다르다. 서양에서 자연은 인간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정복의 대상이었고 동양에서 자연은 찬탄의 대상이었다. 동양인들에게 자연이 찬탄의 대상이었다는 전제는 동일하지만 찬탄을 표현하는 형식은 또한 제각각이다. 중국 사람들이 과장적인 몸짓으로 드러냈다면 일본 사람들은 인공적이고 정교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중국 미술은 필요이상으로 장식적이고, 일본 미술은 공예품처럼 인위적이다. 중국의 천안문이 그 크기와 현란함으로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면 일본의 히메이지성은 잘 만든 블록인형처럼 인공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어떠했을까. 1. 손질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한국의 미한국의 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미’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손을 빌어 아름다움을 표현하되 손질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은 마치 화장은 하되 전혀 화장한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그런 자연스러운 한국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삼척에 있는 <죽서루>이다. 관동8경 중의 하나인 죽서루는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고 기둥의 배열도 서로 다르다. 또한 기둥의 높이도 제각각이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죽서루>는 오십천 하구의 낭떠러지에 자리잡고 있다. 누각에 앉아 낭떠러지 바로 아래의 시퍼런 물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높이가 서로 다른 바위 끝에 건물을 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누각을 짓는 솜씨가 참으로 절묘하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평평하게 밀어버리는 대신 각각의 바위에 맞게 기둥의 길이를 다르게 자른 것이다. 기둥의 하단부는 그랭이질하여 기둥과 바위가 서로 한 몸처럼 맞물리도록 배려했다. 이런 건축법은 바닥을 일자로 밀어버린 후 기둥을 똑같은 높이로 잘라서 마름질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서 살겠다는 의지는 다양한 예술 형식을 낳게 되었다. 경주 남산 꼭대기 옛 용장사터에 있는 <용장사삼층석탑>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동일한 조건 속에서 얼마나 기발하게 그 조건을 변형시킬 줄 알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다.우선 탑을 먼저 확인해보자. 탑은 맨 아래의 기단부와 중간의 탑신부, 그리고 맨 위의 상륜부로 구성된다. 이 구조가 우리나라 석탑의 기본골격이다. <용장사삼층석탑>도 이 규정을 토대로 세워져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올려졌고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그런데 <용장사삼층석탑>의 매력은 기단부에 있다. 기단부의 하대석을 잘 다듬은 판석대신 산꼭대기의 자연암반으로 대신한 것이다.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이 탑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탑이다. 통일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은 ‘한 집 건너 절이 들어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던 시대였다. 그런 도시를 지키고 있는 산이 바로 남산이다. 그러니까 남산은 불국토를 지키는 주산인 셈이다.이 우주에 수많은 부처님이 계시듯 경주 남산에는 곳곳에 부처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부처상이 많다고 해서 남산 자체가 불국토가 되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를 간단히 뛰어 넘어버린 발상이 바로 ‘탑’이었다. 남산의 바위를 탑의 기단부로 함으로써 남산 전체를 탑이 되게 한 것이다.인간이 만드는 예술작품이나 조형물이 꼭 인공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손을 빌리더라도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야한다는 철저함이 <죽서루>와 <용장사탑>같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어떤 경우라도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지키겠다는 이 땅의 사람들의 바람이자 생활방식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다. 자연을 삶 속에 끌어 들여 자연을 닮아가면서 살고자했던 사람들 속에 꽃과 나무가 자라고 새가 울었던 것이다. 이제 그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로 내려가 보자. 2. 꽃을 상처내지 않는 꿀벌처럼김홍도(1745~1806?)가 그림을 그리고 그의 동갑내기 친구인 이인문(1745~1824)이 화제를 쓴 <마상청앵도>는 사대부의 여유와 시정을 통해 봄날의 서정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선비의 풍류와 봄날의 서정. 이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김홍도는 구도를 아주 단순화시켰다. 선비와 하인의 옷은 철선묘로 단순화시킨 반면 말과 갓과 풀과 버드나무잎은 선없이 담묵으로만 처리하여 대조를 이루게 했다.여기서 선비가 봄을 즐기는 모습은 그저 바라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꽃을 아름답다하여 꺾는다거나 꾀꼬리 소리가 청아하다하여 새장 속에 잡아 가두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변형시키지 않고 즐길 뿐이다. 꿀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에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처럼 선비 또한 봄을 즐기되 버드나무와 꾀꼬리에게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자연을 즐기는 방법이었다.우리 나라 사람들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사계절이 뚜렷한만큼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찾아 짚신이 닳아지도록 돌아다녔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와 김매순이 지은 『열양세시기』를 보면 상춘객들이 앞다투어 꽃구경을 떠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 또한 꽃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꿀벌처럼 꽃만 감상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풍란이 예쁘다면 통째로 캐다 자기 집 화단에 심어놓는 오늘날의 우리하고는 다른 모습이었다. 3. 우리의 삶 곁에서 꽃은 피었다 진다꽃과 나비를 생각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신사임당일 것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더 잘 알려진 신사임당은 시서화에 두루 능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의 섬세함을 잘 살려서 그린 <초충도>는 그림의 소재가 꼭 명산대천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삶 곁에서 피었다 지는 꽃과 풀도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수박과 들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재이다. 한창 맛이 들기 시작한 수박을 두 마리 들쥐가 파먹고 있는 그림이다. 소재를 찾아 멀리 떠나지 않아도 눈을 들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발견할 수 있다. 무덤가에나 야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패랭이꽃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여성이 자신의 한계 내에서 어떻게 자신의 꽃을 피워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 꽃같이 소중한 그림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4. 꽃에 담은 축복과 바람붉은 태양이 떠 있는 산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흐르고, 기암괴석이 멋드러진 계곡 옆에는 새와 동물이 평화롭게 놀고 있다. 화려한 오방색이 주가 되는 10폭 병풍에는 우람한 소나무 그늘 아래서 학과 사슴과 거북이가 한가롭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이 그림은 <십장생도 10폭 병풍>이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불로장생’의 염원과 바람을 담은 그림이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더해 자손도 많고 잘 살고 건강하면 좋을 것이다. 자식들이 높은 벼슬과 명예까지 얻어 번창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십장생’ 그림이다. 이런 바람은 왕에서부터 헐벗은 서민들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바라던 사항이었다. 그래서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그림은 해가 바뀔 때 ‘세화’로 그려져 임금이 신하들에게 내려주곤 했다.<십장생도 10폭 병풍>이 불로장생을 위한 총체적인 소원이 담겨 있다면 <모란도 10폭 병풍>은 단일 주제만을 강조해서 그린 예라 하겠다. 모란은 일시에 피었다 일시에 떨어지는 꽃이다. 유난히 풍성한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풍성함으로 그득해진다.그래서 모란꽃은 부와 재물을 상징하게 되었다. 모란꽃처럼 풍성하게 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비꽃이나 민들레꽃처럼 작고 여리여리한 꽃이 아니라 꽃잎도 크고 고혹적이어서 귀부인처럼 화려하게 피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매난국죽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하여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에 비해 십장생도와 모란도같은 ‘염원화’는 남녀노소와 계급을 떠나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데올로기나 이념보다 사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이념보다는 감성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5. 세상에 못난 사람이 어디 있으랴개심사의 종루는 한 눈에 봐도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날렵한 맵시를 자랑해야 할 처마선은 균형이 맞지 않고, 아무렇게나 휘어져 있는 기둥은 네 개가 전부 제멋대로이다. 휘어지고 비틀어지고 상처의 흔적까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몰골을 하고 절의 맨 앞자리에서 당당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는 건물이 바로 종루이다. 기둥이 비뚤어졌던 휘어졌던 상관없이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바로 그것이다. 못났으면 못난대로 비틀어졌으면 비틀어진 대로 감추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세상.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나가 아름다운 기둥이고 꽃이다.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잠시동안 내가 사는 공간을 빌려 쓰고 갈 뿐이다. 그 공간에 몸담고 있는 동안 내가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빌려 쓴 공간을 손상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삼척 죽서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꽃이 아름답다하여 꺾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 꽃을 보며 나와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남겨두어야 한다. 김홍도의 <마상청앵>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살아가면서 어떤 바람이 있다면 소박하게 기도해 볼 일이다. 그 기도가 장독대 위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다 놓고 손을 비비던 우리네 할머니들의 기도여도 좋다. 혹은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한 건물에 들어가서 고개를 수그리는 기도여도 상관없다. 건강하게 살아가게 해달라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기도여도 좋다. 단 그 기도 속에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그 자세를 <개심사 종루>의 기둥이 보여주고 있다.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이 봄에 피어나는 꽃을 보며 우리 모두가 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기도여야 할 것이다. 글 _ 조 정 육 cho, cheong yook(미술사, 목원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