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찬 ([email protected])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늘은 그저 식재 조건이 열악한 공간 정도로 인식됐다. 그늘정원이라는 개념이 일부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소재가 빈약하고, 많은 경우 그늘에 적응력이 뛰어난 맥문동, 비비추 등의 일부 음지성 초본류들을 군식하는 정도에서 끝이 나고는 한다.
그러나 자연 숲의 생태가 기후대와 천이 과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듯 그늘정원도 그 소재와 주제가 무궁무진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의 그늘정원을 계획하고 조성해 왔으며 현재도 새로운 그늘정원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대표적인 그늘정원의 주제를 살펴보면 고요하고 깊은 사색을 주는 이끼정원(Moss Garden), 원시적 형태미와 풍성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양치식물원(Fern Garden), 화려한 색감의 만병초원(Rhododendron Garden), 여름의 꽃밭 수국원(Hydrangea Garden)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다른 계절, 다른 느낌의 그늘정원으로 각각 독립된 주제정원으로서의 역할과 가치가 확고하다.
특정 식물을 주제로 하는 경우 외에도 식물을 어떻게 조합하고 배식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분위기의 그늘 정원을 계획할 수 있다. 숲을 기반으로 하되 그 형태와 디자인은 결국 정원을 계획하고 만드는 사람의 몫 이다. 여기서는 몇 가지 대표적인 그늘정원의 사례를 통해 그늘정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생태적 접근 방법과 기본적인 조성 원리, 배식 방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끼정원
숲에는 늘 이끼가 있다. 오래된 나무기둥에도 거친 바위 위에도 이끼들은 자란다. 공중습도가 높은 숲 속은 이끼가 살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아주 오래전 꽃 피는 식물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부터 이끼는 그 빛깔과 형태로 지구 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이끼를 통해 그 영속적인 시간의 깊이를 느끼며 감탄하고 이끼가 서식하는 숲의 고즈넉함과 깊은 자연성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조용한 사색과 자기 성찰이 필요한 옛 사찰과 전통정원에는 늘 이끼정원이 함께했다.
이끼의 가장 큰 매력은 카펫처럼 낮게 깔려 군집을 이루는 형태적 단순성이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어떤 시설물이나 식물과도 쉽게 융화하게 만든다. 전통적인 양식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디자인의 주택에서도 이끼는 빛을 발한다. 그러면서도 잔디와는 달리 매우 치밀하고 촘촘하여 더없이 부드럽고 그 빛깔이 짙고 윤이 나며 촉촉하다. 또한 좁은 공간에서도 다양하게 연출이 가능하여 공간의 제약이 적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이끼정원은 어렵고 까다로운 정원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이끼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고 재배법이나 조성 방법에 대한 자료도 흔치 않다. 필자도 처음엔 막연히 어렵게 생각했으나 일본정원이나 중정 등을 조성하면서 경험을 쌓은 결과 생각보다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정원임을 알게 됐다. 기본적인 생육 조건만 맞춰주면 충분히 이끼정원을 도입할 수 있고 오히려 이끼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인 것도 알게 됐다. 식물은 재배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단지 재배 방법에 무지했던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이끼의 생활상
이끼는 꽃과 열매를 맺지 않고 포자로 번식하는 원시 식물이다. 선태식물(蘚苔植物, Bryophyte)이라고 부르는 식물군으로 분류학적으로 양치식물과 가깝지만 통도 조직이 발달해 있지 않아 물과 영양분을 온몸으로 흡수해야 한다. 엽록체가 있어 광합성을 할 수 있으며 대부분 1~10cm 정도로 키가 작다.
이끼는 일반적인 식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번식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이끼의 형태는 배우체라고 하는 것인데, 배우체는 염색체가 반수(n) 상태인 것으로 양치식물에서 포자가 발아해 생기는 전엽체와 유사하다. 이 배우체의 줄기 끝에서 장란기와 장정기가 나와 각각 난자와 정자를 만들고 이것이 수정되면 포자체(2n)가 된다. 포자체는 작은 주머니 모양의 포자낭을 만들고 포자낭에서는 감수분열이 이뤄져 포자(n)가 만들어진다. 포자는 바람에 날려 이동하며 적당한 환경을 만나면 발아해 다시 배우체, 즉 이끼가 된다.
이끼는 유성생식과 더불어 무성생식도 하는데 줄기 조각이 지면에 떨어졌을 때 생육 조건이 맞으면 가근과 새로운 줄기가 나와 다른 개체로 성장한다. 일반적으로 정원에서는 영양번식을 통해 이끼를 증식하는데, 잔디 뗏장처럼 지면 위에 일정 간격으로 이끼를 붙이거나 이끼를 분쇄해 토양 위에 뿌린 후 모래로 가볍게 묻어주는 방식을 이용한다.
이끼는 건조한 환경에서는 모든 대사를 멈추고 휴면에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 보통 이끼는 공중습도가 높은 곳에 서식하는데, 기상의 변화로 비가 오지 않거나 건조한 조건이 되면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휴면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다시 비가 와서 적절한 생육 조건이 갖춰지면 곧바로 물을 흡수해 생육을 시작한다.
이끼의 종류
지구상에는 약 2만3000여 종의 이끼가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500여 종의 이끼가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종이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끼는 크기가 매우 작고 변이가 심해 분류하는 일이 어렵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이끼정원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이끼에 대한 공부를 포기하거나 손 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 또한 이끼의 종류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이끼를 모두 구분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이끼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구분법이 있다. 이끼는 크게 직립형 이끼와 포복형 이끼로 나뉘는데, 이 단순한 분류 방법이 정원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 의외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1) 직립형 이끼(Acrocarpous mosses): 솔이끼 등 줄기는 직립하고 옆으로 뻗는 측지를 만들지 않는다. 줄기 끝에 포자낭이 달리며 사진에서 보듯이 둥근 모양으로 모여 난다. 여러 개체가 군집해 하나의 생물체처럼 모여 나는 것을 콜로니(Colony)라고 하는데 직립형 이끼는 둥근 형태의 콜로니를 형성하며 자란다.
포복형 이끼에 비해 다소 천천히 자라지만 단단하게 밀착해 콜로니를 형성하는 특징 때문에 잡초에는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직립형 이끼는 포복형 이끼보다 훨씬 건조에 강한 이끼다. 비가 오지 않아 건조해 지면 휴면에 들어가 생육을 멈추고 있다가 비가 내릴 때 다시 생육한다. 건조에 강한 특성으로 인해 시설물과 인접한 그늘정원에 도입이 용이하다. 돌담, 건물의 북면에 놓인 화단, 중정 등에 사용하기 좋다. 같은 공간 내에서도 수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면의 상부 쪽으로 번성한다.
2) 포복형 이끼(Pleurocapous mosses): 털깃털이끼 등 줄기가 포복형으로 자라고 포자낭은 가지 끝이 아닌 측지에 달린다. 카펫처럼 펼쳐 자라는 경향이 있다.
가지는 자유롭게 분지한다. 포자낭은 배우체 줄기의 가지 사이에서 나온다. 직립형 이끼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부서진 줄기 조각의 재생 역시 빠르다. 고목이나 돌 등에도 쉽게 번성할 수 있다.
직립형 이끼에 비해 더 습하고 공중습도가 높은 곳에 서식한다. 연중 비가 내리거나 깊은 숲 속의 계곡 근처, 습지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성장과 재생이 빠른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포복형 이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정원 식물의 생육 조건보다 더욱 물기가 많은 습한 조건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식물들과 함께 쓰기가 어려울 수 있다. 단 빨리 생육하는 특징을 활용해 초기에 포복형 이끼를 피복하고 물을 조절해 중장기적으로 직립형 이끼를 유도하는 방법도 사용해 볼 수 있다.
김봉찬은 1965년 태어나, 제주대학교에서 식물생태학을 전공하였다. 제주여미지식물원 식물 과장을 거쳐 평강식물원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식물원 기획, 설계, 시공 및 유지관리와 관련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2007년 조경 업체인 주식회사 더가든을 설립하였다. 생태학을 바탕으로 한 암석원과 고층습원 조성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 이사, 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 제주여미지식물원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조성 사례는 평강식물원 암석원 및 습지원(2003), 제주도 비오토피아 생태공원(2006), 상남수목원 암석원(2009),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원(2010),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암석원(2012) 및 고층습원(201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