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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마당, 광장을 돌아봄
  • 에코스케이프 2009년 가을

길(道)

태초에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고 한다. 또 하느님께서 땅에는 푸른 싹을 돋게 하시고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땅 위에 돋게 하셨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한다. 하지만 태초의 원시 자연환경은 인간들이 살아가기에는 무척이나 척박하였을 것이다.

포장(paving)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며 원시시대로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고고학자 하웰은 스페인의 ‘암블로나’라는 협곡의 원시유적지 발굴에서 지면에 1열로 나열되어 있는 코끼리 대퇴부 뼈 화석을 발굴하였다. 조사결과 이것은 늪지에서 포획한 큰 짐승을 보다 편리하게 나르기 위한 ‘포장의 화석’으로 결론지었다. 약 30만 년 전에 조성된 포장도로인 셈이다.

동양사고의 기본 틀이 되는 고전인 「주역」(周易)이 있다. 공자(孔子)가 죽간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도 있다. 「주역」에는 삼라만상을 구성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를 8괘로 나타낸다. 이른바 소성괘로 곤(坤, ?)은 ‘땅(地)’을 의미하고 ‘유순함’을, 건(乾, ?)은 ‘하늘(天)’이며 ‘다스림’을 상징하는 등이다. 이중에서 감(坎, ?)은 ‘물(水)’을 나타내며 ‘험난함’을 상징한다. 즉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길(道)’을 가다 ‘물’을 만나는 것은 큰 ‘역경’에 직면하는 것이었다. 이는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것을 뜻한다. 길을 찾는 것은 생존의 방편이고 수단이었다.

이런 의미로 길을 찾고(求道), 길을 얻는(得道) 등 ‘길’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포함한다. 길(道)은 이치며 방법이고 사상이자 덕행을 의미한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여, 인에 의지하며, 예술의 세계에서 노닌다(志于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고 했다. 또 로드무비(road movie)는 여행길을 통해 새로운 사람과 계기를 만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형이하학적 관점에서 길은 ‘도로’다. 도로는 출발지와 목적지를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연결해 준다. 도로는 차량통행을 전제로 하는 교통시설이며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라는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반시설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에서의 ‘길’은 목적지가 로마인 ‘도로’를 의미한다.

또 하나의 길, 가로(街路)

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길을 ‘거리’ 혹은 ‘가로(街路, street)’라고 한다. ‘街(가)’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다닐 행 혹은 거닐 행(行)’의 뜻과 ‘모서리 규(圭)’의 음이 합쳐진 글자이다. 여기서 ‘행(行)’자는 잘 정리된 네거리의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도로와 달리 가로(street)는 출발지와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으며 없을 수도 있다. 도로와 마찬가지로 이동을 위한 공간이지만 효율성과 경제성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가로는 사람들의 통행과 휴식, 생활터전 등 여러 기능을 수용하며 이용에 제약이 없다. 또 도로와는 달리 가로에서는 교류라는 과정이 중시된다. 가로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담는 공간이기에 문화적이고 인간 지향적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노래, 시와 소설, 그림,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가로에서 ‘다니다’ 혹은 ‘거닐다’라는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서양문명은 아카데미(Academy) 혹은 리케이온(Lykeion)을 거닐며 사색하고 토론한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들을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etic)’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른다. 또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이마누엘 칸트(Kant)의 규칙적인 산책은 ‘철학자의 산책로’라는 이름의 거리를 탄생시켰다.

동양의 역사도시들에 있어서 가로의 쓰임새는 매우 가변적이었다. 차일을 치면 난전이 되고 이들이 여럿 모이면 시장이 되었다. 한편에서 판을 벌리면 공연장도 되고 씨름장이 되기도 했다. 또 큰 가로로 부터 이어지는 ‘골목길’도 주목할 만하다. 미로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변화가 많고 매력적이며 깊이감을 준다. 종로 거리의 경우 피맛골이라는 뒷길이 있고, 또 여러 갈래의 골목길로 이어진다. 가로와 골목길들이 이루는 형상과 체계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유기적(organ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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