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광표 ([email protected])
개요
무로마치 막부가 막을 내린 텐쇼天正 원년(1573)1부터 오사카성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가 멸망한 케이쵸慶長 20년(1615)까지의 시간적 범위를 모모야마 시대라고 한다. 모모야마 시대는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면서 고대적·중세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로의 체제 전환이 이루어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가진다. 모모야마라는 명칭은 교토 남쪽에 후시미조伏見城를 쌓고 천하를 호령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를 격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복숭아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모모야마 시대는 무로마치 시대에 비해서 불교적 색채가 옅어지고 현세 긍정의 세속적 성격이 농후해지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펼쳤던 불교 세력의 탄압과 현세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분위기였다. 노부나가는 중세적인 권위, 가치, 질서의 파괴를 자신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었으며, 이를 현실 정치에서 그대로 실천했다(구태훈,2011). 그 결과 일본인들은 중세를 지배하던 내세주의 인생관을 버리고 현실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현세주의 인생관을 신봉하게 되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유럽이나 동남아시아와 교역하던 무역상들의 풍부한 부와 세력을 잡은 무사들의 기풍이 반영되면서 웅대하고 호화로운 문화를 생성하게 된다.2 한편으로는 각지의 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지역 문화가 확산되고 민중화가 한층 더 진행되는 현상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각 지역마다 정체성이 뚜렷한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오랜 세월 지속된 전국 시대의 혼란스러웠던 사회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상황을 평정하면서 안정된다. 이러한 사회적 안정은 대규모 토목 공사로 연결되는데, 그중에서도 성곽의 축조는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역사役事였다. 성곽은 주로 영지의 중심이 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군사력과 풍부한 경제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고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성곽의 축조와 더불어 주라쿠 다이聚落第라고 부르는 대저택의 건축도 유행하게 되며, 성곽이나 저택에 부속된 정원의 조성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당시에 조성된 대표적인 정원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원하여 조성한 다이고지醍醐寺 산호인三寶院 정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머물 때의 거관居館인 니조조二条城의 니노마루二の丸에 부속된 정원이 있다. 이 두 정원은 모두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대 권력자가 주도했고, 모모야마 시대 최고의 정원예술가가 조영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이고지 산호인의 정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원의 경계를 설정하고, 설계도를 직접 검토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정원이다. 그러나 이 정원은 안타깝게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 완성되지 못하고, 그가 죽은 다음인 겐나元和 10년(1624) 당시 다이고지의 주지로 있던 기엔 쥬고義演准后에 의해서 완성된다. 니조조 니노마루 정원은 케이쵸慶長 8년
(1603)경에 조성되었으며, 칸에이寬永 3년(1626)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을 영접하게 되면서 고보리 엔슈小堀遠州에 의해서 개조된 정원이다.
이 두 정원에서는 패자覇者의 독특한 특징을 작풍으로 살필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정원석을 많이 사용하여 특이하게 꾸며 놓았다는 것과 여러 가지 수목과 이국적인 식물을 심고 연못, 폭포, 돌다리 등 모든 것을 과장되게 구성·표현했다는 점이다. 특히 산호인의 수호석인 등호석藤戶石은 지난날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니조二条 고쇼 정원에 세웠던 것이나 이것을 히데요시가 자신의 집으로 가져다 놓았고 또 다시 산호인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권력을 상징하는 명석名石 중의 명석이었다. 니조조 니노마루 정원 역시 호화로운 건축에 부수되어 조영되었다. 이 정원 역시 산호인과 마찬가지로 많은 명석을 배치했으며, 이러한 명석들을 조합한 석조石組를 통해서 작정자들이 발휘한 고차원적인 미의식을 살필 수 있다. 그밖에도 나고야 성의 니노마루 정원, 큐도쿠시마舊德島 성의 오모테고텐表御殿정원, 와카야마죠和歌山城 니시노마루西の丸 정원 역시 모모야마 시대의 정원 양식을 살필 수 있는 훌륭한 정원들이다. 이러한 모모야마 시대의 정원 양식은 겐나元和·칸에 이寬永 시대까지 지속되어 나타난다. 한편, 고카와데라粉河寺 정원이나 타이상지太山寺정원 등과 같은 사찰 정원에서는 당시의 정원 양식과는 또 다른 특별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작풍은 정원을 만든 작정자들의 특별하고 신선한 창작 의지가 있었기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다이고지 산호인 정원과 온조지 고조인園城寺 光淨院 정원에서 모모야마 시대의 호방·웅대한 특색과 대조되는 건물의 의장과 정원의 중심이 되는 못 주변에서 신덴즈쿠리寢殿造 풍의 양식이 나타난 다는 것이다. 이것은 헤이안平安 시대로의 복고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쇼인즈쿠리書院造 양식이 완성된 것도 이 무렵이고 대규모 저택이나 거성이 조영된 시기도 역시 이때다(西桂, 2005).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 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 『한국의 전통수경관』, 『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