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광표 ([email protected])
무로마치시대 말기는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무로마치막부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폐하고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옹립한 메이오明応 2년(1493년)부터 무로마치막부가 멸망한 겐키元龜 4년(1573년)까지의 시간적 범위를 가진다. 이 시대를 이른바 전국시대라고도 한다.
‘오닌의 난’ 이후 선찰의 정원에는 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물이 있다는 느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 방식이 적용된다. 가레산스이라는 말은 이미 헤이안平安 시대의 저술인 『사쿠테이키作庭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그 당시에 사용했던 가레산스이라는 말의 의미는 ‘못이나 야리미즈遣水가 없는 곳에 돌을 놓는 일’이었다. 이러한 양식에 해당하는 정원은 모쓰지毛越寺의 정원에서 못 서남쪽 호안의 축산에서 볼 수 있는 석조와 사이호지西芳寺 홍은산洪隱山의 석조가 대표적이고, 조에이지常榮寺와 기타바타케北畠 씨의 관적館跡에서 볼 수 있는 지천 정원 안의 일부 의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들 정원에서 보여지는 가레산스이 양식들은 무로마치 중기 이후 조성되기 시작한 본격적인 가레산스이 양식과 비교해서 ‘전기前期 가레산스이 양식’ 혹은 ‘고식古式 가레산스이 양식’이라 부른다.1
가레산스이 정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으로 출현하게 된다. 첫째는 경제적인 문제다. 오닌의 난 이후 사원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본사나 말사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가레산스이 정원을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수원水源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지천정원을 조영하려면 수원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것이 용이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물이 필요하지 않은 가레산스이 정원을 만듦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셋째로는 선의 정신성과 수묵 산수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군더더기가 없는 간소한 생략, 높은 정신적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조형성 그리고 산수의 세계를 가까운 뜰에 가져다 놓으려는 수묵 산수화적 조형성이 가레산스이 정원의 감각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네 번째는 선찰의 건축 양식, 특히 선원의 발달과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방장과 서원이 발달하면서 서원에서 바라다 볼 수 있는 정원이 요구된 것이다. 이전에는 방장 건물 정면2에 담장과 문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무로마치시대부터는 방장 건물과 마주하는 곳에 별도의 현관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양식으로 바뀐다. 그 결과 방장 전면 공간이 의식을 치르던 공적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버리고 선의 정신과 대치되는 가레산스이 정원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가레산스이 정원의 최초 작품은 교토의 료안지龍安寺 방장 정원과 다이센인大仙院 서원 정원 그리고 료겐인龍源院 정원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가레산스이 정원들은 문화의 전파와 함께 지방에서도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후겐지普賢寺 정원과 나라의 치쿠린지竹林寺 정원, 히로시마의 안코쿠지安國寺 정원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지방에 조영된 본격적인 가레산스이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료안지 정원으로 대표되는 평정식 가레산스이 정원은 풍경이나 사물의 상징을 초월한 추상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어 일본 정원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러한 정원 양식은 료겐인 정원을 비롯해 에도시대에 조성된 다이도쿠지大德寺방장 정원, 신쥬안眞珠庵 정원, 엔츠우지圓通寺 정원, 난젠지南禪寺 방장 정원 등으로 계승된다. 평정식 말고도 고류식枯流式이나 가레이케식枯池式(모래를 쓰지 않고 돌로만 표현) 같은 보다 독특한 양식이 출현하기도 하고, 심지어 백사를 깔지 않고 이끼로만 조성한 정원도 나타난다. 일본의 정원은 다양한 양식으로 진화하는 양태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다이센인 서원 정원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지형에 어울리게 축산을 한 다음 가레이케枯池3와 가레타키枯滝4를 만들고 마치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사실적인 구성을 한 정원도 만들어졌다. 더불어 추상적이고 사실적인 양식을 절충한 타이조인退蔵院 정원과 같은 가레산스이 정원도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료안지 방장 정원, 다이센인 서원정원으로 대표되는 가레산스이 정원은 입지와 면적에 문제되지 않고 관리도 용이하며 관념적인 조형도 가능했던 까닭에 무로마치시대 이후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일본 각지에 많은 수의 정원이 만들어졌다. 급기야 일본 정원의 대표적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무로마치막부의 수호 체제 붕괴와 반비례하여 각 지방에 독자적 세력을 가지고 영주화한 다이묘大名들의 권력이 발흥한 전국시대에는, 다이묘와 무장들이 성안팎의 거관이나 저택에 정원을 만드는 사례가 많았다. 분메이文明 3년(1471년)에치고越後의 수호자가 된 이치조다니 아사쿠라一乘谷朝倉 씨의 성에는 여러 곳에 정원이 만들어졌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정원의 작풍은 무장의 강건함과 교토풍 문화가 뒤섞인 특별한 것이었다.
쿄로쿠享禄 원년(1528년) 미요시 모토나가三好元長가 일으킨 병란으로 일시 피신한 아시카가 12대 쇼군 요시마사足利義政의 거관에 조성된 정원인 큐수린지旧秀隣寺정원과 이세 국伊勢國(현재 미에 현) 기타바타케 씨의 관적 정원에서는, 지할地割(연못의 모양이나 섬의 배치 방법)이나 석조에서 세련된 맛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이 남아 있어 무로마치시대의 정원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 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 『한국의 전통수경관』, 『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