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4일 타계한 소문영의 49제, 용인 평온의숲에서 돌아오는 길에 투병중인 네가 보고 싶다고 하여 부지런히 삼성의료원에 상준이와 같이 문병을 갔었지. 의식은 있었고 알아보긴 하였으나 산소호흡기에 연명하고 있는 너의 모습, 무슨 말을 하려다 답답한지 아들 연석의 손바닥에 글로 표현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어. 무슨 말인지 알지만, 너무 애처럽고 안쓰러워 나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지. 투병 중에도 문영이 걱정을 하고 대신 문상을 해 달라고 부의금도 챙겨 주었지. 너와 60년 지기의 우정은 결국 1월 22일 날, 73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저 세상으로 황망히 가고 말았구나.
아, 옛날이여!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날들…. 우리가 되돌아가고 싶은 그때는 까까머리에 교복입고 중고교 다니던 6년의 시간 속이었지.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벌레 같은 시기. 그러나 순수함, 열정, 사랑이 가득한 불덩어리였어. 어설프고 덜 익은 시기였지만 우리 인생의 좌표가 설정된 출발점이었네.
1년에 몇 번 있는 등행 경기 연습을 위해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효자동에서 버스를 타고 경무대를 지나 창의문 고갯길에 내려 걸레처럼 낡고 더러워진 군복에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모래를 넣은 5kg쯤 되는 군용배낭을 메고 세검정 길을 뛰어 북한산 문수암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뛰어 내려오기를 반복하였지. 세검정을 지나 지금의 평창동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면 자두, 능금, 복숭아꽃이 만발한 과수원이 개울 양 옆으로 오밀조밀 붙어 있었지. 수려한 자태의 북한산이 품고 있는 무릉도원이었지.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 산악반 친구들은 그 아름다운 자연의 숨결과 교감하며 꿈을 키웠지. 전문 등산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군화나 농구화를 신고 뛰었지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지.
정걸섭은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우정상 교수와 함께 1962년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70년 인하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대영상사(주) 창립 요원으로 일본 연수 후 8년간 근무했다. 1978년부터는 (주)대우건설에 입사하여1979년에 아프리카 수단 타이어 플랜트건설 과장을 지내고, ARCO사가 발주한 알래스카Prudhoe Bay 석유 개발 프로젝트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비료공장 건설, 울산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등에 소장으로 참여했다. 1997년 (주)대우건설에서 퇴임하고 (주)우주엔비텍(대우 자회사)을 창립해 대표이사로 취임, 정진공영(주) 부사장, (주)삼주플랜트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