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보문단지 조경공사
1976년 경주보문단지 개발사업 프로젝트를 이끌어야 할 조경차장으로 임명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공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약 10여년을 서울의 집안 식구들과 만나기 어려웠다. 이에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참고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집사람을 비롯한 모든 식구가 따르겠다하여, 무리한 다짐을 받은 비정한 나의 가슴을 억제 할 수 없었다. 자식들 모두 고등학교 이상을 서울에서 진학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용서를 구한다.
가족회의를 마치고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임을 결단하고 조경업무에 심혈을 기우렸다. 새벽 6시 30분은 일과를 시작하는 첫 신호였으며, 하루 약 200~500명의 인원을 동원해 나무를 심으며 별을 보고야 돌아가는 것이 하루를 마칠 수 있는 일과이었다. 황무지인 벌판을 다듬어 나무를 심고 경관을 새롭게 조성해 가면서, 나는 이렇게 버려진 지역을 단지화해 먼 날의 아름다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긴 안목이 그 어른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 어른을 다시 존경하게 되었다. 주어진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국토 개발이란 길고 먼 그 어른의 안목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기도 했다.
수경과 점경, 군식 등 수목간의 어울림, 프르키니(purkinje.s phenomenon)의 현상을 마음속에 새기며 그를 고려해 가면서 나무를 심다보니 심을 나무의 소재가 없었다. 빨리 나무를 구해 오라고 하니 수형도 보지 않고 나무를 굴취해 오는 분들이 너무 많았다. 부득이 현지에서 되돌려 보내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상황을 돌아보면 너무했구나하고 깊이 뉘우치며 한편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넓은 가로변 점찍듯 심어놓은 나무가 이제는 고목이 되어 그림자를 넓게 지우는 정자로 사람의 발걸음을 끌어드려 멈춰가게 한다. 130여종 47만 여주의 나무를 심어 오늘의 보문단지를 이루어 낸 것이 직간접적으로 밀어주시고 당겨주신 많은 분들의 노고와 땀의 결실이라고 말씀들이고 싶다.
특히 1978년도에 있었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보문단지를 순찰하다가 경북지사를 보고 미분양된 호텔 부지가 너무 보기 싫으니 이것을 어떻게 잘 다듬을 수 없냐고 하였다. 이에 돌무더기 가시밭 수만평을 정리정지하고 잔디 씨를 파종해 싹이 잘 돋아나 성공사례가 되어 청와대까지 보고되기도 했다 .
그리고 제주도 중문단지 공사를 맞아 80만평에 관목을 포함한 교목 13만 여주를 식재해 명실공히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조경을 하기도 하였다. 그 이듬해 경주 골프장 조성사업을 해야 했다. 종래에는 줄떼를 입혀 골프장을 필드로 조성하던 것을, 새롭게 씨뿌리기 공법으로 바꾸어 성공함으로써 그 사례가 보고되어 일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내가 그때 조성해 놓은 잔디를 밟고 다닐 때마다 그 감회를 어찌 붓끝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절로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슬며시 짓기도 한다.
<본 원고는 요약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