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광표 ([email protected])
만슈인 정원
만슈인曼殊院은 천태종天台宗의 문적사원門跡寺院1이다. 이 절은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오最澄(767~822)가 히에이잔比叡山에 지은 초당에 기원을 두는데, 그때는 헤이안平安 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그 후 947년에는 당시 주지였던 제산是算이 원래의 초당 근처로 자리를 옮겨 동미방東尾坊이라 이름을 붙였고, 헤이안 시대 후기인 1108년경에 사찰이 재흥되면서 만슈인으로 이름을 바꿨다. 시간이 흐르면서 절이 점차 융성해지자 절은 교토고쇼京都御所 근방으로 이전됐으며, 1469년부터 문적사원이 됐는데, 메이레키明曆 2년(1656)에는 29대 주지 료쇼 호신노良尙 法親王(1622~1693)가지금의 자리로 이건해 오늘날까지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호신노 료쇼는 가쓰라리큐桂離宮를 조영했던 도시히토 신노智仁親王(1579~1629)의 둘째 아들로, 문예, 화도華道(이케바나)2, 다도 등에 밝은 최고의 문화인이었다. 만슈인의 정원은 료쇼가 진행했던 절의 이건과 더불어 작정된 것으로 보이는데(小野健吉, 2004), 작정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료쇼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정원은 대서원大書院과 소서원小書院의 남쪽 마당에 만들어졌으며, 가레산스이枯山水 양식을 보인다. 이 정원은 마당 뒤편 담장 쪽으로 후퇴시켜 조성한 3개의 낮게 연결된 축산과 소서원 전면부에 조성한 또 하나의 축산 그리고 축산과 축산 사이에 깔아놓은 흰 모래밭으로 구성돼 깔끔한 작법을 보인다. 후면부에 조성한 축산 중 중앙의 축산은 출도出島 형식을 보이며, 축산의 호안부가 이루는 굴곡이 마치 리아스식 해안선을 연상케 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 정원은 배치 형식으로 볼 때 소서원 쪽으로 치우친 구성을 보이는데, 이를 미루어 보면 정원의 감상이 주로 소서원 쪽에서 이루어지도록 의도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노 겐키치는 소서원 쪽에서 감상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소서원 툇마루 난간縁の欄干의 디자인으로 입증코자 했는데(小野健吉, 2004)3, 실제로 소서원 툇마루에 앉으면 마치 배에 앉아 푸른바다의 잔잔한 물결과 그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정원의 구성을 보면, 좌측(동측) 축산과 중앙의 축산 사이에 청석으로 된 석교를 높이 걸어두어 마치 협곡을 지나는 기분을 느끼도록 했다. 다리를 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는 입석을 사용했는데, 이는 봉래석으로 신선이 사는 곳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높은 다리 밑에는 흰모래를 방향성을 가지고 깔아 놓아 강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축산의 전면부에는 흰 모래밭을 조성해 강물이 흘러드는 드넓은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중앙의 축산과 오른쪽의 축산 사이에는 좌측의 것과 다르게 청석으로 만든 다리를 낮게 걸어 두었는데, 이 다리 밑의 흰모래 역시 내를 상징한다. 오른쪽 축산은 학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소서원 전면의 구도와 더불어 이 정원이 신선이 사는 곳임을 알려준다. 왼쪽 축산에는 3층 석탑을 오른쪽 축산에는 오리베등롱織部灯籠을 세워 놓아 상호 대응하도록 했다.
한편 소서원의 툇마루 끝縁先에 놓인 ‘올빼미 쵸즈바치梟の手水鉢’는 쵸즈바치 사면에 올빼미를 새겨 놓은 명품이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 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 『한국의 전통수경관』, 『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