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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 일본의 명원11 에도 시대 초기의 정원(1)
  • 에코스케이프 2015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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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리큐 정원, 송금정과 천교립을 모티브로 주변 경관을 만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패하고 할복하면서 도요토미가가 멸망한 원화元和 원년(1615)부터 정덕正德 5년(1715)까지를 에도江戶 시대 초기로 편년한다.1 이 시대에는 그때까지 만들어진 지천정원과 고산수정원, 그리고 다정茶庭 등을 뭉뚱그려 총합한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정원이 완성되는 정원사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지천회유식정원은 원지園池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차정茶亭과 차 객실茶座敷을 배치하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원로를 만들어서, 그 원로를 따라가며 축산과 기복이 있는 낮은 언덕野筋, 스하마洲浜와 후미진 호안入江, 불쑥 튀어나온 출도出島 같은 것들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작정되는데, 이렇게 원로를 걸으면서 변화하는 경관을 완상하는 양식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지천회유식정원은 교토에 있는 가쓰라리큐桂離宮 정원을 필두로 다이묘大名들이 에도에 지은 거관과 자신들의 영지에 만든 정원에 앞다투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원으로는 슈가쿠인리큐修學院離宮, 고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樂園, 리쿠기엔六義園, 큐시바리큐旧芝離宮 정원, 규하마리큐旧浜離宮 정원, 미토가이라쿠엔水戶偕楽園, 아이즈와카마츠라쿠엔合津若松御楽園, 겐로쿠엔兼六園, 겐큐라쿠라쿠엔玄宮楽楽園, 오카야마고라쿠엔岡山後樂園, 슈케이엔縮景園, 리쓰린고헨栗林公園, 스이젠지죠쥬엔水前寺成就園, 가고시마센간엔鹿児島仙巌園 등이 대표적이다.


경장慶長 8년(160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에도2에 막부를 열고, 본격적으로 에도 건설에 착수한다. 에도성 건설은 덴카부신天下普請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다이묘에게 일을 할당하여 관영寬永 14년(1637)에 일단락 하였는데, 지대가 높은 곳에는 무가武家의 집을, 평평한 곳의 매립지를 중심으로 상가를, 그리고 주변부에는 신사와 사원을 배치하여 근세의 성시城市와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도쿠가와막부는 다이묘들이 모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막부에 속한 다이묘들의 처와 자녀들을 에도에 거주하도록 하였으며, 다이묘 본인도 격년으로 에도에 거주하도록 한 참근교대參勤交代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의 다이묘들은 에도에 근무할 때 머무를 수 있는 거관이 필요하였다. 이 거관은 각 번藩 별로 가미야시키上屋敷, 나카야시키中屋敷, 시모야시키下屋敷로 구분되었는데, 가미야시키는 에도 성에서 가장 근접한 곳에 지어진 번주의 일상적 거관이었고, 나카야시키는 가미야시키가 화재 등을 당했을 때 예비로 머무를 수 있는 별저로써 가미야시키가 협소할 경우에 번주의 가족들이 이곳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시모야시키는 가미야시키나 나카야시키보다 멀리 떨어진 교외에 지어진 거관으로 야시키에 여유가 있는 큰 번의 경우에는 번주의 유흥을 위한 광대한 정원이나 채원 등을 이곳에 만들었다. 이러한 야시키는 막부로부터 토지를 무상으로 받은 배영지拜領地였으며, 번에 따라서는 이러한 배영지가 부족해서 별도로 카카에야시키抱屋敷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 작정의 특징은 모모야마 시대에 출현한 다정茶庭(露地)의 영향을 받아 일반인의 정원, 특히 다이묘 정원에서 이것이 유행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서원書院 정원에도 기존의 정원에 노지의 특색을 보이는 자연주의풍을 가미하도로 옮겨갔으며, 급기야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한 문화적 경향에 따라 다이묘들은 대규모 못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는 다정茶亭과 노지露地를 두었는데, 이러한 배치 형식으로 인해서 지정池庭이 한층 더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며, 이른바 총합적 지천회유식정원이 축조되었다.


각종 사원에도 많은 정원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정원으로는 교토에 있는 곤치인金地院 정원·죠쥬엔成就園 정원·다이도쿠지大德寺 방장 정원·시센도詩仙堂 정원·쇼우덴지正伝寺 정원·고호안孤篷庵 정원·슈온안酬恩庵 정원·만슈인曼殊院 정원·렌카인蓮華院 정원, 효고兵庫 현 다카라즈카宝塚 시에 있는 칸논인觀音院 정원, 사가滋賀 현에 있는 후쿠덴지福田寺 정원·호세키인宝積院 정원·엔만인円滿院 정원,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시즈키志都岐 신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모야마 시대로부터 에도 초기에 걸쳐서 다도가 유행한 덕분으로 본래 다정에 도입되어왔던 토비이시飛石나 시키이시敷石, 석등롱과 쵸즈바치手水鉢가 일반적인 서원정원에도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서원 정원 역시 다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석등롱이 정원에 도입된 시기는 니죠죠 니노마루 정원에 천황이 행차했을 때 설치했던 것이 가장 빠른 예다. 또한 가쓰라리큐의 초기 조영 시에도 토비이시와 시키이시, 석등롱과 쵸즈바치가 도입되었으며, 오리베織部형 등롱과 토비이시를 설치하였다. 고이시카와 고라쿠엔에도 시키이시와 토비이시가 보이며, 곤치인의 정원에도 오리베형 등롱이 사용되었다. 또한 관영기에 작정된 리쓰린栗林 공원에 쵸즈바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정원 일부에 거석을 사용하고, 다수의 석조를 만든 정원도 만들어졌다. 전자의 예로는 오이타大分 현에 있는 규구루메시마씨旧久留島氏 정원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나가사키長崎 현 다이무라大村 시에 있는 규엔유지旧円融寺 정원 등이 있다. 한편, 다수의 성곽 축성 등에 의한 토목 기술이 현격히 진보되면서 전대까지는 불가능했던 거석의 운반도 가능해져서 정원에 거석을 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이 시대에 활약했던 작정가로는 고보리 엔슈가 대표적이다. 엔슈는 경장 11년(1606)에 센토고쇼를 시작으로 관영 21년(1644)까지 교토, 에도를 중심으로 나랏일에 많이 참여하였다. 다이묘에 의해 발탁되어 행정 관리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건축과 정원의 계획 시공에 발군의 재능을 발휘한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후라오카 타다시村岡 正는 『서계西桂』에서 “고보리 엔슈는 본래 건축에 적용하여 우수성을 평가받은 것과 같이 정원의 의장에도 대담한 직선을 받아들여 가공석교, 등롱, 쵸즈바치의 형태에 인공적인 곡선과 곡면을 사용하는 등 예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혁신적인 작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작정을 조직화시킨 근대성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당시까지 정원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정원 양식들이 병존했으며,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정원들이 많이 만들어진 시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에도 시대 초기는 그때까지의 정원 양식을 집대성해서 만든 새로운 개념의 지천회유식정원이 유행하였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 현재는 한국 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 『한국의 전통수경관』, 『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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