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영국의 건축 비평가인 레이너 벤험Reyner Banham은 그의 마지막 에세이 “블랙박스: 건축의 비밀 직업A Black Box: The Secret Profession of Architecture” (1990)에서 건축architecture과 건물building의 차이는 ‘무엇what’이 아닌 ‘어떻게how’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건축 행위가 건물을 짓는 것과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 문화인 도제식 작가주의에서 비롯된 ‘블랙박스’의 신비로움을 좇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게 되는recognised by its output though unknown in its contents” 텅 빈 블랙박스와 같은 건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행위적 가능성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도시설계 등 스튜디오 문화에 기반한 모든 설계교육에 여전히 적용할 수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강사와 학생간의 심도 있는 교류, 경쟁과 팀워크의 시너지, 다양한 미디엄의 활용, 그리고 생산적 비평과 담론을 기반으로 하는 설계 교육의 스튜디오 문화는 타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강력한 행위력을 내재하고 있다. 지식의 전수라는 위계적 관계 대신 상호 협력의 수평적 공동체가 주가 되는 스튜디오 문화는 예상할 수 있는 ‘결과’보다는 미지를 지향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설계 스튜디오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 초점을 두게 되며, 결과 대신 탐구적 실험의 과정을 통해 공간 및 환경 분야의 창의성과 실천적 행위성을 함께 모색하고 축적해 나가는 기반을 제공한다. 나아가 설계 교육은 학교 내에서 소진되는 일시적 교육이기보다는 사회 진출 후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될 수 있는 지식과 행위 생산의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행위 구조가 상호 유동적으로 얽혀 있는 글로벌 사회에서 다양한 미디엄을 통해 공간과 환경을 다룰 수 있는 건축·조경·도시설계 전문가들은 스페셜리스트이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로서 강력한 행위 능력을 지닌다. 이들은 좋은 디자이너인 동시에 연구자·교육자·코디네이터·시민운동가·회계사·컨설턴트·선동가·사업가·정치인·공무원의 역할을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트릭스터trickster가 되어야 하며, 설계 교육은 이러한 다각적 행위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생성적 방법론을 고민하고 실험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