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email protected])
디자이너, 저자가 되다
편집부 앞으로 온 이메일 한 통. 조경가 L이 평소에 써두었던 원고를 보내며 출판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조경 답사를 다니며 기록해둔 메모 성격의 원고로, 조경설계에 관한 전문가적 의견이 담겨 있었다. 메일을 읽고 있자니, 불황의 한복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출판 시장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아니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독자층이 옅은 전문 도서는 더더욱 출간에 이르기 어렵다. L에게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하고 고민이 이어졌다. 학자나 작가, 혹은 기자가 아니라면 대개 글쓰기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조경 동네를 둘러보아도 책을 쓰는 디자이너를 찾기 어렵다. 디자이너가 작품집이 아닌 책을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디자이너에게 책을 쓰는 일이 필요하긴 한 걸까. 디자이너는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디자이너의 책을 읽어줄 독자는 어떤 사람들 일까. 예비 저자들은 대개 그들의 첫 책의 독자로 실무자, 인접 분야 전문가, 학생 그리고 관심 있는 일반인들까지를 막연하게 함께 꼽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를 향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문체나 내용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건축 관련 글과 땅콩집으로 유명한 구본준 기자(한겨레)는 그의 저서 『한국의 글쟁이들』(2008)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부상한, 글쓰기가 삶의 중심인 ‘글쟁이’의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글쟁이들이 “전문성과 대중성의 중간,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의 최전선과 독서 대중 사이에 존재하며 양쪽을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학자가 아니더라도 준전문가로서 해당 분야의 최신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이런 글쟁이들은 분야의 대중화를 선도한다. 극도로 전문적인 내용을 소수의 전문가들과만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귀 기울여볼 만한 대목이다. 이러한 글쟁이들은 “‘전달력’을 중시하며 독자지향적인 기획 마인드를 추구한다.”
도시나 건축 동네로 고개를 돌려보면 책을 펴내는 디자이너들이 좀 더 많다. 지난 10~20년간 전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책들 그리고 전문가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의 관심을 받은 책들이 있다. 그들은 왜, 누구를 향해 책을 쓰고, 그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도시·건축 분야의 책들을 되짚어 보면서 김진애를 빼놓을 수 없다.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한 그녀는 서울포럼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꾸준히 글을 쓰기도 하고, 동료 건축가들의 책을 기획하면서 책 쓰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그런 김진애가 1999~2001년 ‘자라기 시리즈’(『매일매일 자라기』, 『프로로 자라기』, 『사람으로 자라기』)를 냈다.
그녀가 서문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듯이 이 시리즈는 건축 입문을 고민하는 사람, 관련 대학생, 젊은 실무자들, 건축팬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학교에서 잘 다루지 않는, 실무세계에서도 서로 알겠거니 하고 말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일종의 도시건축 분야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이다. (『환경과조경』 315호 특집의 제목인 ‘조경가로 자라기’는 이 시리즈에서 빌려온 것이다.) ‘탐험하기’, ‘만들기’, ‘커뮤니케이션 기’, ‘쌓아가기’, ‘감지하기’ 등과 같이 프로가 되기 위한 구체적 안내가 담겨있다. 김진애 특유의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문체와 그 시시콜콜함이 매력이다. 이 시리즈가 출간된 지 이미 15년이 지나 사회적 상황과 전문 분야의 지형도 여러모로 변했고 책의 편집도 요즘 취향과는 다르지만, “배우는 재주도 배워야 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직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의 존재가 부럽게 느껴진다.
대중을 위한 건축 입문서로는 단연 서현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1998)를 꼽을 수 있다. 서현은 “건축가가 건물을 만드는 과정을 짚어”보며 건축가들은 어떤 관점에서 건물을 바라보는지, 여기에는 어떤고려 요소가 있는지 등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후기에서 서현은 “대상의 감상과 판단은 스스로 하여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받침이 지루하게 이 책에서 서술된 것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생각은 전문가를 위해 쓴 책에서도 이어진다. 『건축을 묻다』(2009)에서 그는 ‘건축은 무엇인가’ 그리고 ‘건축은 예술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예술, 기술, 기능, 공간, 사회, 역사, 도시와 같은 연관 개념과의 관계성을 파악한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직접 확인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건축은 직접 찾아가서 보고 책은 원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다고 밝혀두고 있다. 책을 쓰는 과정이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한 치열한 여정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건축가에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필요한,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