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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물을 철학하다
  • 환경과조경 2013년 3월

Water is expressed philosophically as old paintings

신화시대의 물2-
물을 흐르게 하는 자, 천하를 얻으리라

귀신과 사람이 뒤섞여 살던 신화시대에 홍수는 가장 큰 재난이었다. 적당한 물은 대지에 생명을 제공하지만 넘치는 물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음에 빠뜨린다. 홍수가 발생할 때면 물에 빠져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물을 다스리는 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태평성대의 모델로 추앙받는 요순(堯舜)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드라마틱한 치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시기가 바로 요순 임금 때다.
요순이 실존한 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역사서의 저자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은 삼황(三皇)은 빼고 다섯 명의 제왕(五帝)에서 『사기(史記)』를 시작한다. 삼황은 그 존재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 순 등 오제가 다스리는 시대 또한 역사 이전의 신화시대인 만큼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것은 사실이다. 오제 역시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옴직한 가상의 인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선정한 오제 대신 시대에 따라 다른 왕이 첨가되기도 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 요, 순이 들어가거나, 태호(太昊), 염제(炎帝), 황제, 소호씨(小昊氏), 전욱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때로 신(神)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인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마천이 중국 역사를 황제에서 시작한 것은 황제가 염제, 치우와 싸워 이긴 후 천자로 추대되어 실제적인 중국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길을 막아 치수에 실패한 곤
한나라 화상석에는 고대 전설상의 신과 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화상석 맨 위의 중앙에는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가 앉아 있고, 아랫단에는 창조신부터 하夏의 마지막 왕까지 새겨져 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에는 세상을 창조한 인면사신(人面蛇身) 여와와 복희가 서 있다. 그들은 손에 자와 컴퍼스를 들고 서 있는데 아랫부분은 서로 꼬리가 얽혀 있다. 다음에는 불의 신 축융(祝融)과 농업의 신 신농이 배치되어 있는데 두 신은 면류관을 쓰지 않은 매우 서민적인 모습이다. 아직 천자로서의 왕권이 확립된 시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황제는 이름이 헌원(軒轅)인데 전욱, 제곡, 요, 순은 모두 그의 자손들이다. 황제는 중국 최초의 시조신이면서 모든 부족의 공통 시조로 인정받고 있다. 황제 때부터 순 임금까지는 천하를 능력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는 선양(禪讓)을 선택했다. 우(禹) 임금 때부터는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부자상속이 시작된다. 우는 부자상속을 통해 왕권을 강화한 하夏나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라는 마지막 왕 걸桀에 의해 끝나고 탕(湯)왕에 의해 은(殷)이 세워진다. 화상석의 맨 끝에 걸을 새겨 넣은 이유는 하 왕조의 끝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우 임금은 부자상속을 통해 왕권을 넘겨준 왕이기 이전에 치수에 성공한 왕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치수에 성공하기까지는 아버지 곤鯀의 실패가 큰 교훈이 되었다. 요 임금 때의 일이다. 태평성대로 알려진 요 임금 때는 농경사회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황제가 싸워 진 염제는 남방을 담당하는 농업의 신인데 그가 인간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신화는 이미 황제 때 농업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염제 신농은 농사 뿐 아니라 약초로 병을 다스리는 방법까지 알려준 의약의 신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가지 풀을 씹어 풀의 효능을 확인했는데 때로 독초에 중독될 때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단장초라는 풀을 씹어서 약효를 실험하다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의약의 신으로서 염제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이미 이 시기에 풀로 약초를 쓸 만큼 농업기술이 발달했음을 말해준다.
농사지을 때 물은 매우 중요하다. 적당한 때 비가 내려야 작물이 싹이 트고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많이 내린 것이 문제였다. 세상은 홍수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백성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성을 제 몸처럼 아낀 요 임금은 홍수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 여러 제후들이 곤을 추천했다. 곤은 성격이 강하고 제멋대로였기 때문에 요 임금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제후들의 거듭되는 추천에 못 이겨 그에게 치수를 맡겼다. 그러나 7년 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가 택한 치수방법은 무작정 흙으로 물을 막고 둑을 쌓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치수 실패를 물어 우산(羽山)에서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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