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편집자의 서재] 상냥한 폭력의 시대
  • 환경과조경 2017년 4월
sang01.jpg
상냥한 폭력의 시대 | 문학과지성사 | 2016

 

 

스물여덟 살. 그중 스물다섯 해를 한 동네에서 보냈다. 몇 번 이사를 다니긴 했지만, 걸어서 십여 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덕분에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시장 한가운데 있던 교회였다. 그런 교회의 첨탑이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다른 건물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 사거리 모퉁이를 차지했고,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동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중학교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에 벽보가 붙기 시작한 때도 그 무렵이었다.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찬 벽보가 담벼락을 채웠다. 때론 붉은 스프레이로 ‘투쟁’, ‘생존’, ‘죽어도 못 나간다’ 등 뉴스에서나 볼 법한 단어와 문장들이 적히기도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무서워 혼자 골목을 지날 때면 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골목은 주기적으로 정돈되고 다시 채워졌다. 덜 떼어진 벽보 귀퉁이가 남은 자리에 다시 벽보가 붙고 붉은 글자 위에 페인트가 덧칠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뒤 골목은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벽보의 끄트머리가 헤져 팔락거리고 붉은 색 글자가 바래 흐릿해지자, 나는 혼자 골목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 풍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벽보와 골목을 메운 단어가 갖는 힘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자리에는 모양새가 제각각인 주택 대신 반듯반듯한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붉은 스프레이를 들고 숨죽여 골목을 누볐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담벼락의 주인들이 벽보를 떼어 내고 페인트칠을 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불편함은 어쩌면 정이현이 말하는 ‘상냥한 폭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진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정이현 작가가 『오늘의 거짓말』(2007)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의 제목이다. 2013년부터 2016년 5월까지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책으로, 그는 이 책을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고통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고통을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관찰해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스릴러나 험난한 인생사를 다룬 소설에 등장할 법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각종 학원 버스를 갈아타는 초등학생, 피곤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손님을 맞는 아르바이트생, 날이 갈수록 오르는 식재료 값에 한숨을 쉬며 퇴근하는 직장인, 자녀가 찾아오는 걸 본 적이 없는 이웃집 할머니 등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삶에 지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도치 않은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인 폭력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때때로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다른 이의 죽음을 외면하는 등 상냥한 외피를 뒤집어쓴 폭력은 주먹보다 서늘하고 잔인하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 속의 이야기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폭력성을 발견하게 한다.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어린 딸이 낳은 미숙아의 수술 결정을 미루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엄마의 심정에 일부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버리면 쉽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 수 있기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외면해 왔을까.

 

취재를 위해 방문한 세운상가가 어렸을 적 보았던 동네의 모습과 겹쳐 떠오른다. 재개발 논란과 몇 십 년간 계속된 상인 그리고 주민과의 갈등 끝에 거대한 주상 복합 건물은 간신히 철거를 면하게 됐다. 지난 3월 세운4구역 사업의 정상화가 발표되며 세운상가와 그 일대를 대상으로 한 각종 공모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상가의 일부는 허물어져 새롭게 태어날 것이고, 상가 곳곳에는 4차 산업혁명을 실험할 단체가 들어서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운상가를 검색하면 기존 상인의 입장과 의견을 포용하지 못해 불만을 사고 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세운상가에 상냥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운상가가 신중한 방식으로 재생되기를 기대한다. 벽보를 무시하고 붉은 아우성을 덮어버리기보다, 모든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느리게 나아가기를. 세운상가는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 갈 것”이니까.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세운상가는 세운상가의 속도로 살아가 시대에 맞추어 천천히 소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