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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진 도시
  • 환경과조경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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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공원은 오랜 시간 쌓여있던 선유봉과 채석장, 정수장의 기억 하나하나를 되살린다. ⓒ이형주

 

기억의 감각을 잃은 피맛길

불현듯 대학 때 먹던 빈대떡 생각이 나 종로 피맛길을 찾아 나섰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 있던 ‘열차 집’ 빈대떡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원래 나무판을 기차처럼 늘어놓고 빈대떡을 팔아서 ‘기찻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에 피맛길 초입으로 이사 오면서 정식으로 ‘열차집’이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를 지나는 고관이나 사대부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다닌 뒷길이라 하여 피맛길로 이름 붙여진 이 골목길에는 빈대떡 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술집과 국밥집 등 저렴한 먹거리가 줄줄이 늘어서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곤 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그 맛과 향과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면, 노릇노릇한 생선전들을 맛깔나게 구워주시던 시골 할머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대국밥을 시장에서 뚝배기 채로 사오신 어머니, 지글지글 구워지는 빈대떡 소리를 친구삼아 함께 떠들었던 대학 친구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 열차집은 더 이상 없다. 피맛길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 그 감각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공간에는 맛도 향도 없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 서있다. 정겨운 골목길이 있던 자리에는 번쩍거리는 상가가 대신 늘어서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에 ‘피맛골’이라는 간판이 어색하게 서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청진옥, 미진, 청일집 등 익숙한 옛 이름들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먹어보지만, 왠지 내 기억 속의 맛과 향이 아니다. 깨끗한 실내 공간에 옛날 대문처럼 가게 앞을 꾸며놓은 청진옥의 선짓국은 옛날의 향이 아니고, 새로운 가구와 깨끗한 벽으로 바뀐 청일집의 빈대떡은 무엇인가 빠진 것 같다. 미진은 그냥 동네 국수집과 다르지 않다. 같은 주인, 같은 재료, 같은 요리인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에게 피맛길의 선짓국과 빈대떡은 단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기억이자 내 감각이며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간직한 시간의 맛과 향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 음식들은 더 이상 같은 음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추억의 공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의 원천을 잃은 것이며, 그와 함께 내 몸속 감각의 기억 역시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며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기억을 넘나드는 감각의 문, 선유도공원

어느 따뜻한 봄날 선유도공원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늘어선 공원으로 들어서니 양화대교를 지나는 차 소리가 어느새 폭포 소리처럼 들린다. 봄을 맞아 여기저기서 물채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콸콸콸, 졸졸졸, 보글보글… 물 솟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어느 대중목욕탕의 기억과 함께 온 몸이 느슨해진다. 붉은 벽돌의 ‘서울이야기’관을 돌아가니 마치 고대 신전의 폐허가 막 발굴된 것 같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이곳은 원래 정수 과정을 모두 거친 물을 송수하기 전에 담아두던 지하 정수 공간이었는데, 테니스장으로 사용되던 지붕 슬래브를 걷어내고 기둥을 그대로 살려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뒤쪽의 ‘서울이야기’관은 정화된 물을 영등포 지역으로 보내는 송수펌프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경사로를 타고 ‘녹색 기둥의 정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마치 인간 군상처럼 줄 맞춰 서있는 기둥들이 나를 맞이한다. 각각의 기둥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벌거벗고 있고, 어떤 기둥은 레슬링 선수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덩굴 코트를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아랫도리만 가린 채 헐벗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상부 콘크리트 슬래브를 잘라낸 흔적은 사람의 얼굴처럼 각각의 기둥에 다른 표정으로 남아 있다. 원래 지하 정수 공간을 반으로 나누던 벽이 있던 자리에는 긴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에 앉아 기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기둥을 감싼 담쟁이의 잎사귀 하나하나가 손짓하는 듯 살랑거린다. 오랜 시간 쌓여있던 선유봉과 채석장, 정수장의 기억 하나하나가 다시살아나는 것 같다.

선유도는 옛날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하여 선유봉仙遊峯으로 불렸다. 뱃길로 연결된 양화나루 쪽 잠두봉蠶頭峯, 지금의 절두산과 함께 한강의 절경으로 유명하여, 많은 풍류객들이 선유봉을 배경으로시와 그림을 남겼다. 특히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의 ‘선유봉’ 그림을 보면, 가운데 우뚝 솟은 선유봉 자락에 소박한 초가집과 웅장한 기와집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고, 황금빛 모래사장에는 배에서 갓 내린 선비 일행이 걸어가고 있고, 저 멀리 한강에는 양화나루 쪽으로 큰 배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자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갔다. 1925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자 일본은 제방을 쌓기 위해 선유봉의 암석을 캐내더니, 1929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예 도로를 만들고 파내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본격적으로 한강 치수사업을 위한 채석장으로 활용했다. 광복 후에도 미군은 인천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골재를 채굴해갔고, 1962년 제 2 한강교(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지으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조한은 1969년 서울 생으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디자인(HAHN Design) 및 ‘생성/생태’ 건축철학연구소 대표이기도한 그는 건축, 철학, 영화, 종교에 관한 다양한 작품과 글을 통해 건축과 여러 분야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2009년 ‘젊은 건축가상’, 2010년 ‘서울특별시 건축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M+, P-House, LUMA, White Chapel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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