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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메디치가의 정원들
  • 환경과조경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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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근교 피에솔레에 있는 조반니 메디치의 빌라와 정원의 전경 ⓒSail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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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솔레 정원이 과연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정원의 원형이었을까?

 

니콜로 니콜리NiccolòNiccoli(1364~1437)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래 피렌체 대상의 자손으로 태어나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고대 문학에 심취하여 전 재산을 고서적 수집하는 데 탕진했다. 고서적 수집에 방해된다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니 마니아 수준도 훨씬 넘어섰던 것 같다.1 물론 고서적을 수집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번역하고 정성스레 필사하여 복사본을 뜨고 주석을 달았다. 고서적 수집은 14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의 ‘인문주의자humanist’라면 누구나 앓았던 열병이었다. 인문주의자, 즉 휴머니스트라는 용어 자체가 고서적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는데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휴머니스트와는 뜻이 좀 다르다. 일찍이 키케로 등 고대 사상가들이 설명한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2 ‘후마니타스’의 요점은 ‘인간됨’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물이므로 인간됨이란 곧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기독교 교리와는 전혀 다른 관점, 즉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됨을 정의했던 키케로 등의 고대 사상은 충격이었으며 교리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기원전 1세기를 살았던 키케로의 명성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지만 시인 페트라르카가 그를 다시 유명하게 만들었다. 1345년 베로나의 대성당 도서관에서 키케로의 친필 서신 수백 점을 발견하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온 듯하다.

너도나도 혈안이 되어 고대 시인들과 사상가들의 책을 찾아다녔다.3 대학에 그전에 없었던 언어학, 수사학, 문학, 윤리학 등의 과목을 새로 개설하고 이를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이라고 칭했으며 이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들을 일컬어 ‘후마니스타humanista(humanist)’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휴머니스트는 곧 인문학 교수라는 뜻이었는데, 나중에는 꼭 교수가 아니더라도 인문학에 심취한 사람들을 모두 휴머니스트라고 했으므로 피렌체는 휴머니스트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자유로워진 정신으로 바라보니 사람과 세상이 아름다웠고 새로운 자유는 엄청난 창의력의 원천이 되었다. “천년간 갇혀있던 아름다운 정신이 이렇게 활짝 피어나는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4고 말하며 사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듀런트는 “문화의 뿌리는 경제력이다. 상인, 금융인과 교회가 돈을 벌어 그것으고서적들을 수집해 고대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라고 시원하게 지적한 바 있다.5 아닌 게 아니라 니콜로 니콜리가 재산을 다 쓰고 빈털터리가 되자 그의 친구였던 코시모 메디치가 자신의 은행에 무한도의 계좌를 만들어 주었다. 옛날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던 니콜리가 평생 수집하여 남긴 필사본은 모두 800점이었고 남긴 빚 또한 산더미였다. 그는 제발 이 서적들이 사방으로 팔려나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자 시에서 니콜리 채무 위원회를 조직했고 다시 코시모가 나섰다. 그의 빚을 다 갚아줄 테니 그 대신 고서적을 모두 자기한테 넘기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중 200점은 자신이 소장하고 나머지는 산마르코 수도원 도서관에 보관하여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것이 현재 피렌체 메디치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시작이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서적 수집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고대 조각상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니콜리에게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hiolini라는 절친한 후배가 있었다.

그 역시 고서적 수집가이자 인문주의자였다. 말년을 시골에서 조용히 보내려고 근교에 빌라를 하나 샀다. 그런데 정원을 만들려고 땅을 파니 고대 대리석 조각상들이 나왔다. 문득 키케로가 묘사한 고대 빌라의 조각 정원이 생각나 정원에 세워두었더니 그 소문을 듣고 인근의 농부들이 조각상들을 주섬주섬 들고 나타났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는 땅만 파면 대리석 조각상들이 나타났다는데, 그때까지는 이를 구워서 석회로 만들어 쓰거나 깨서 건축 소재로 쓰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잖은 학자가 정원에 세워놓는 것을 보고 혹시 돈이 될까 하여 팔러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브라촐리니의 조각 수집이 시작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친구들도 따라 했고 코시모는 이때도 편리한 방법을 썼다. 니콜리와 브라촐리니의 조각 수집품도 모두 사들인 것이다. 이것이 메디치 가문의 유명한 고대 조각 컬렉션의 시작이 되었다.

이 시기에 코시모는 피렌체 근교에 네 개의 빌라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세 개는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넓은 포도밭, 올리브 밭, 경작지와 숲이 딸려있어 가족들의 먹거리, 마실 거리를 직접 생산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말년, 1451년경에 둘째 아들 조반니에게 주기 위해 산 것이다. 피에솔레Fiesole라는 도시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중세의 작은 성을 하나 사서 주고 마음에 맞게 고쳐 지으라고 했다. 여기엔 농장이 딸려있지 않았다. 구세대의 코시모에게 시골 별장은 ‘농사도 짓는 곳’이라는 인식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으나 그의 아들 세대에서는 이미 개념이 달라진 듯했다. 인문학에 심취한 아들은 오로지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고 곡을 연주하며 소일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포도나무 접붙이기 등의 농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름다운 레몬 나무와 붉은 꽃을 보고자 했다. 공기 좋은 피에 솔레는 이런 허약한 책벌레 아들이 지내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미켈레초Michelezzo 8라는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구식의 성을 철거하고 신개념의 빌라를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정사각형의 단정한 건축에 삼단의 테라스 정원이 나왔다. 바로 이 빌라와 정원으로 인해 ‘초기 르네상스 빌라 건축과 정원의 원형’이 탄생했다고들 한다.9 그러나 여기 문제가 좀 있다. 건축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므로 신개념의 디자인이었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정원은 20세기 초에 신르네상스 개념으로 복원한 것이어서 조반니 시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삼단 테라스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정원의 원형’이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기는 하다. 제일 상층 테라스에 보면 낮은 장식벽 일부가 남아있다. 이 장식벽 양쪽에 기둥이 서 있고 그 위에 로마의 흉상들이 올라앉아 있다. 벽의 모자이크 문양도 옛 로마의 것을 그대로 닮았다. 공사가 한창이던 1453년 조반니가 로마에 있는 친구로부터 옛 황제들의 흉상 열두 점을 구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 흉상들을 담장이나 옹벽에 배치해 두면 멋질 것 같지 않느냐고 묻는 편지도 전해진다.10 이런 정황으로 보아 조반니는 아마도 그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키케로나 플리니우스 등 먼 선조들의 빌라 정원을 재현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정원의 주인공은 레몬 나무도, 붉은 꽃도 아닌 선조들의 흉상이었다. 이는 우리가 전통 정원을 짓고 꽃담을 세우고 문인석과 무인석을 구해 세워놓는 것과 같은 욕구였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정원은 이렇게 책에서만 접한 선조들의 정원을 재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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