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그림만 그리기 2
  • 환경과조경 2014년 7월

그림72.png

 

단면도는 구축의 해설서다

자동차를 사용할 때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외관과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진과 동력 전달장치의 구조를 본 적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동차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엔지니어에게는 자동차 외피 너머에서 작동하는 기계들의 구조와 관계가 더 중요하다. 바로 이들이 자동차 본연의 특성과 기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공간을 이용할 때 우리는 벽의 두께가 얼마여야 하는지, 벽에 철근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전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공간을 만드는 이들은 대상의 숨겨진 본성과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설계가의 그림이 공간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공간의 구축을 목적으로 한다면 단면도는 모든 도면 중에서 가장 중요해진다.

디자인 의도의 전달 측면만 본다면 대개 단면도는 참조의 역할을 할 뿐이다. 설계가의 의도와 표현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체는 역시 평면도와 입면도다. 그래서 도면집을 보면 단면도는 대부분 뒷부분에 등장한다. 앞선 도면들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단면도는 읽을 수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1 그런데 한번 도면집에 실린 그림 중 어떠한 형식의 그림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지 세어보자. 단면도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공간이 복잡하면 할수록, 설계에 다양한 생각이 담길수록 단면도의 수는 더욱 증가한다. 왜냐하면 단면도는 구축을 위한 해설적 도면이기 때문이다. 구축의 과정이 까다로울수록 설명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단면도는 클라이언트나 동료, 혹은 대중에게 디자인을 친절하게 이야기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의 고도로 엄격하고, 기술적이며, 세심한 설계의 대화를 위한 그림이다. 단면도를 통해서 비로소 이차원의 그림에 불과한 도면은 현실의 삼차원적인 공간과 사물을 구현하는 마법의 주문서가 된다(그림1).

그런데 이러한 단면도의 특성 때문에 학생들의 오해가 생긴다. 학생들의 설계가 실제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구축을 위한 그림인 단면도는 설계 시간에 인기가 없다. 단면도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시간은 설계보다는 오히려 시공이나 구조 수업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설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계는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한 행위로서 의미를 지닌다. 설계의 결과물이 현실로 구현되지 못할지라도 설계는 그 대상이 실제로 만들어짐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래서 비록 지금 그 역할이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단면을 통한 설계의 사고를 익히고 훈련해야 한다. 공간과 대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표면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설계는 껍데기만 포장하는 설계와 분명 다르다.

참조적이며 기술적인 단면도는 다른 도면과 결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설계의 매체가 되기도 한다(그림2). 이러한 결합은 도면의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설계 매체의 형식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입면도와 투시도가 디자인의 표면적인 효과를 전달하는 매체라면 단면도는 그 표면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매체다. 특히 조경에서 단면도는 주로 지형의 논리와 공간과 지형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구조적인 지형의 단면도와 대지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보여주는 입면도나 투시도가 만날 때 그 어떠한 도면도 보여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야기해 준다. 입단면도나 단면투시도를 통해서 설계가는 지형의 논리와 생태계의 변화가 연관이 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발생하며, 경험의 감각이 어떻게 연출되는지 시각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그림3).


투시도는 진실한 왜곡이다

시골의 어르신들도 투시도를 보여드리면 누구나 쉽게 공간을 이해하신다. 그만큼 보는 이의 입장에서 투시도는 쉽고 편안하다. 왜냐하면 투시도는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풍경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시도를 제대로 그리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도법에 따른 정확한 투시도는 기하학 문제 풀이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작업이 까다롭고 시간도 무자비할 정도로 소요된다.

도학 교과서를 보면 투시도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원래 투시도는 도면보다는 회화를 위해 발전된 기법이다(그림4). 1413년 경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공학자인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선형투시도법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이 표현 방식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2 곧 이탈리아 지역 대부분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부르넬레스키가 개발한 투시도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435년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미술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회화론De pictura』을 펴낸다. 이 책에서 알베르티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응용하여 더욱 발전된 투시도법을 이론적으로 정리한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건축가가 투시도법을 발명해냈지만, 도면의 발전 과정은 투시도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애커먼James S. Ackerman은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의 건축 도면에는 투시도의 흔적이 나타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평행투상도법을 따르는 도면의 체계가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3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를 그리려면 투시도법이 아닌 평행투상도법을 사용해야 한다. 실제로 그려보면 알겠지만 투시도법이 평행투상도법보다 더 까다롭고 복잡하다. 애커먼에 따르면 도면의 형식은 역설적으로 고도로 정교한 투시도법에서 더욱 일반화되고 단순화된 투상도법을 발전시키면서 형성되었다. 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회화와 현실을 정확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도면이 전혀 다른 의도와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그림5).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장 현실과 유사하며 과학적으로 먼저 증명된 투시도법을 놔두고 왜 도면에서는 굳이 어딘가 어색해보이며 한참 뒤에나 수학적으로 정리가 되는 투상도법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사용해야만 했을 까?4 그것은 바로 왜곡의 문제 때문이었다. 투시도법의 핵심은 단축법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동일한 크기의 사물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커 보이고 멀리 있으면 작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가들은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시각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왜곡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투시도법의 발명은 과학과 수학적 연구의 성과물이다. 그리고 수학적 성과를 응용함으로써 서양의 회화는 놀라울 정도의 정교함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왜곡은 오히려 도면에서는 문제가 되었다. 화가의 투시도는 현실의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도면은 설계가의 추상적인 형태와 개념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 설계의 그림은 정보의 체계여야하며 왜곡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 어떠한 도면에서도 10m 높이의 기둥은 거리에 관계없이 10m로 표현되어야한다. 진실한 왜곡을 표현하고자 하는 투시도는 도면을 그리기에 부적합한 도법이었다. 도면집에서 투시도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콜라주는 감각을 종합하는 창발적 이미지다

설계에서 투시도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검증의 도구다. 아마 투시도를 그릴 때 즈음이면 대부분의 그림은 완성된 상태이며 설계도 막바지일 것이다. 그런데 설계의 결과물이 실제로 만들어지면 과연 좋은 공간일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지는 않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도 설계안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려면 현실과 가장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투시도로 설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물론 이러한 투시도의 역할이 설계의 마지막 단계에서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투시도는 의사소통 과정에서 수시로 그려지며 설계의 각 단계에서 설계의 과정과 방향을 검증하기도 한다(그림6).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했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