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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그 가벼움에 대하여
  • 환경과조경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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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 그리고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들, 『빅 픽처』, 『더 잡』,

『행복의 추구』, 『위험한 관계』, 『템테이션』, 『리빙 더 월드』, 『모멘트』, 

『파이브 데이즈』

 

과잉의 시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점점 가벼워진다. 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은 우리의 ‘선택’이 심각함을 수반하지 않는 다는 것일 게다. 심각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사로 잡지 못한다. 우리의 선택이 깃털만큼이나 가벼워지고 있다. 그 가벼움은 ‘선택할 것이 많아졌음’에서 온다. 선택할 것이 왜 많아졌는가? 한병철1은 이를 규제, 억압, 규율, 복종 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자기주도, 성과, 능력 등 ‘긍정성’의 패러다임이 차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긍정성이 산업화, 권위화, 규범화 등의 모던 사회를 다양성, 탈권위, 탈중심, 개인 욕망의 긍정 등 후기 모던late modern 혹은 포스트모던postmodern 사회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더글라스 케네디Douglas Kennedy의 소설2은 존 그리샴John Grisham이나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류의 소설과 달리, 철저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미국 중산층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대하소설 같은 웅장함도, 스릴과 서스펜스가 가득하지도 않다. 분량이 적지도 않다. 처음 접한 『템테이션Temptation』(2006)부터 『빅 픽처Big Picture』(1997), 『파이브 데이즈Five days』(2013), 『더 잡The Job』(1998), 『모멘트The moment』(2011), 『리빙 더 월드Leaving the world』(2009), 『위험한 관계A special relationship』(2003), 『행복의 추구 1, 2The Pursuit of Happiness』(2001)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른 장르로, 다른 소재로 이탈하지 않고 주인공만 바꾸어 한결같은 형식으로 여러 유형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 속 미국 중산층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쉼 없이 앞으로 달려야만 한다. 잠시라도 삐끗하면 그가 누리던 일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들에게 국가, 정의, 인생 등과 같은 거대 담론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들은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지적하듯 철저히 자기 착취를 통해 ‘성과’를 내야만 하는 시스템에 내던져져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 자기 자신 이외에 믿을 것은 없다. 이들은 이제 ‘타자’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심을 더 갖는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성과는 ‘차이’로 평가된다. 차이는 서로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차이는 본질적으로 같음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이는 심각하지 않고 가볍다. 작은 차이를 가진 성과들은 곧 ‘과잉’을 불러 일으킨다. 서점에 쏟아지는,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알려준다는 자기계발 서적, 구석구석 자리잡은 피트니스센터, 본질은 바뀌지 않은 채 패션화된 상품 등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매개로 넘쳐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속한이 작가의 소설 쓰기는 소재부터 가볍다. 그는 소설을 통해 ‘삶이 이렇다’는 식의 심각한 교훈을 말하려 하지않는다. 그저 재미있게 기술할 뿐이다. 그에게는 앞으로도 또 다른 주인공의, 또 다른 일상이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는 아마도 계속 이렇게 쓸 것이다. 이 방법이 이 시대에 부합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으니까…. 맘대로 몇 개의 키워드를 추출해 본다, 그 첫 번째.


우연

“불어에 ‘A chacun son destin(아 샤캥 송 데스탱)’이라는 말이 있지. 모두들 운명대로 살아가는 거야.”

- 리빙 더 월드, 16쪽


“운명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들었다.”

- 행복의 추구 1, 131쪽


“인간 존재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 우연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우연히 어떤 때에 어떤 장소에 있게 되었다가 그 우연이 그 사람의 존재를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이라는 우연한 리듬에 묶인 포로이다.”

- 모멘트, 58쪽

 

일상 속에서 우연을 만난다. 매일이 변함없는 일상 같지만 사실 매 순간 똑같지는 않다. 일상 속에 우연이 생기는 것은 매 순간에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는 순간은 순간이 아니다. 그냥 ‘길이’만 있을 뿐이다. “길이 있다. 새로운 날이 있다. 눈앞에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깨달음을 줄 심오한 무엇을 바라는 희망, 다시는 못 느낄 생각.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 인간실존의 중심에 있는 고독.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 타인과 연결될 때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순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순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얻을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는 순간. 우리는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주 짧은 찰나라도 순간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 모멘트, 592쪽

 

 

김용규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생태 기술 개발과 관련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로 참여했으며, 현재는 생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하는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일송환경복원과 Ecoid Corporation, USA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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