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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첫 번째 이야기
  • 환경과조경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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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국제설계공모 출품작 ‘트랜스 필드(Trans Field)’의 사이트 플랜. 당선권에 들지 못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협력 작업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이하 설계안 이미지는 모두 행정중심복합도시 출품작). ⓒ김아연

  

나와 설계

설계사무소에 취업할 것도 아닌데 왜 설계 과목을 들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를 일주일에도 몇 차례 듣는다.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더 이상 설계를 하기 싫다고 떠나는 젊은 친구들의 소식도 종종 듣는다. 그들은 설계사무소의 열악한 처우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등을 돌리노라고 말했다. 그들중에는 내가 설계에 대한 열정을 얘기할 때 눈을 반짝거리며 듣던 청년들도 꽤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설계하는 방법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무슨 흥이 있으며,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어 소심하게 거절도 해보고 머뭇거렸다. 설계가 뭐라고 수많은 청년들에게 또 다른 소외감과 상실감을 던지고 있는가. 그들에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빚이 있고,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있는 한 설계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말보다는 실천을 통해 내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설계에 대한 발언이 꺼려졌다.

수년 전 격월로 진행하던 연재조차도 펑크낸 적이 있는 전과범이라 더더욱 망설이다가 그래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설계에 대해 스스로 겪고 있는 진흙탕 같은 생각과 감정을 이번 기회에 빤히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조경학에서 설계는 과연 어떤 의미이며 역할인가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질문해 본 적이 없다. 대학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에서 설계가 직업 교육의 한 트랙으로 대접받는 것만 원망할 수는 없으나 설계의 근원적인 기능과 역할에 대한 성찰 없이 그 원성을 받아들이기엔 뭔가 억울하다. 내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 중 한 분은 “디자인은 좋은 생각”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하셨다. 디자인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이 형태를 만드는 일에 너무 집중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짧고 굵게 던지신 꾸짖음이었다. 좋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중요성이 사라진 설계에 대한 번잡한 논의는 소모적이다. 설계 교육의 우선적 목표가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조경학에서의 설계 교육은 그 중심적 위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설계는 직업 이전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내가 세상을 꿈꾸는 방식이다. 세상에 대해 겁이 많은 나를 세상과 분리시키면서도 이어주는 나만의 창인 셈이다. 창이 내부와 외부를 나누어주지만 동시에 이어주는 솔기 역할을 하는 것처럼, 설계는 내가 (구질구질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비밀 아지트로 들어가는 창이기도 하고 내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현실로 되돌아가는 문지방이기도 한 셈이다. 현실의 질곡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매체이기도 하고,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로소 보게 만드는 반사경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설계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자 세상에 대처하는 유일무이한 필살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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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로. 논은 밭이나 과수원과는 그 작동 방식이 다르다. 무엇보다 물과 땅의 관계가 역동적이다. 말라있는 논에 물을 대는 방식을 떠올려보라. 논의 물길에는 물을 통제할 수 있는 ‘점’적 요소인 수문이 있다. 이 점들이 열리면서 갇혀 있던 물은 농수로라는 ‘선’적인 실체로 뻗어가고, 이 선들이 논에 물을 대어 하나의 수‘면’을 형성한다. 점이 선으로 변하고 선이 면을 만드는 실제적·개념적 과정이 사회적으로 형성될 수는 없을까? 우리의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설계가의 상상

대규모 마스터플랜 설계공모의 연이은 당선은 결국 내게 의미 있는 성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의 첫 설계사무소는 현장을 기반으로 한 중소 규모 프로젝트가 많았다. 상상이 현실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매료되었다. 두 번째 설계사무소는 큰 규모의 회사였는데, 내게 덩그러니 주어진 ‘설계공모 담당’이라는 암묵적 직위가 버거웠다. 현장이 큰 의미가 없는 택지개발 설계공모, 등고선이 사라진 측량 도면, 당선되면 모든 아이디어와 도면을 ‘실시 담당’에게 시집보내야 하는 기이한 일들에 차츰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설계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공과대학이나 자연대학의 교수들에게 그들만의 실험실이 있듯이, 설계를 가르치는 사람도 그만의 실험실 혹은 실천의 현장이 있어야 했다. 이런저런 차가운 눈총과 루머 속에서도 꾸역꾸역 설계 일을 해오고 있는 이유다. 내게 설계는 소위 대학의 3대 기능인 교육, 연구, 봉사를 실천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계약 선수’인 내게 선뜻 실험을 부탁하는 클라이언트는 없었다. 그런 내게 설계공모는 정말 중요한 기회였다. 비록 준공현장에서 설계의 개념과 공간의 디테일이 교차하는 짜릿한 감동의 기회는 얻지 못하였지만, 일련의 설계공모를 통해 평생에 걸쳐 풀어나가야 할 무한한 생각과 질문의 실뭉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설계가에게 도면을 비평해주는 것은 또 다른 도면이 아니라 현장이듯, 시공 과정에서 검토되지 못하고 거듭되는 도면 작업은 제 아무리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개념이 탄탄하고 디자인이 아름다워도 실제적인 전투력 상승으로 쉽게 이어지지 못한다. 설계가에게 있어서 자기 성찰적 과정은 도면과 실제 만들어진 공간과의 설레면서도 낯 뜨거운 조우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실험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똑 떨어진 어느 신도시 공원 설계공모를 마지막으로 마모적인 공모 작업을 잠정적으로 그만두었다. 그 열정의 흔적들은 철지난 컴퓨터 외장 하드의 아카이브 폴더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설계가 덧없다고 생각할 무렵, 손끝에 만져지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 무렵 격려의 뜻을 담아 한 친구가 한 권의 책을 전했다. 미술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진송이 목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무라는 질료를 통해 펼친 상상의 결과물을 모은 책 『상상목공소』.

창작 활동은 어쨌든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니, 그 내용과 결과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떠나 상상력은 창작 활동의 핵심적인 역량이자 원천이다. 김진송은 상상력에 대해 얘기하면서 서사적 상상력, 시각적 상상력, 논리적 상상력이 거의 모든 생산과 창작에 관여한다고 얘기하였는데, 억울하게도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바와 지나치게 비슷하다. 나는 조경과 관련된 상상력을 소설적 상상력, 조형적 상상력, 기술적 상상력, 그리고 하나 더 보태어 생태적 상상력이라고 믿어왔다. 앞의 세 가지는 의미하는 바가 김진송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네 가지의 상상력이 연금술사의 마법 같은 화학작용을 통해 다양한 도면 정보로 표현되는 것을 설계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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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변화에 대한 직관적 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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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변화에 대한 개념적 스터디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상상력의 범주를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처럼 설계에도 어떠한 이야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도 단편, 중편, 장편소설이 있고, 대하소설, 추리소설, SF소설, 연애소설도 있듯, 내가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세부 장르가 제각각이다. 굳이 ‘서사적’이라는 단어보다 ‘소설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큰 줄거리뿐만 아니라 찌질하게 느껴질 만한 소소한 이야기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과 시의 작법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작업이 설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적 감흥에 대한 얘기는 이 코너를 열어준 박승진 소장의 탁월한 표현에 공감한다. 나의 경우는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관찰하고 머리와 가슴으로 이야기를 상상하는 능력이 선행할 뿐이다. 소설적 상상력이 시로 표현될 때, 시로 표현된 것을 논문처럼 구체화할 때,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설계 과정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멋쩍게 몇 번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필연적으로 설계를 하게 된 이유, 혹은 설계를 정말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첫 사랑과 첫 설계가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우연의 새들이 내 어깨 위에 날아 앉았던 것처럼”1 

태어나서 처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마침 이듬해 학기에 정원 설계라는 첫 설계 수업을 듣게 되었다. 주택 정원을 설계하는 개인별 프로젝트였는데, 그 정원의 주인은 자기가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물론 젊은 부부를 위한 정원을 만들었다. 그가 매일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작은 돌길 옆으로는 소박한 꽃을 심었다. 그 길은 굽어져서 집에 들어왔을 때 건물보다는 정원의 전경이 펼쳐지고 그 길의 끝에 그를 기다릴 벤치가 놓여져야 했다. 저녁에 같이 지는 해를 보면서 앉아있을 언덕 위의 그네를 그려 넣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만들어갈 행복한 삶을 설계했다. 나의 첫 설계는 또 다른 연애질이었다.

엄청난 양의 유치찬란한 핑크빛 이야기를 그 설계 도면이 보장해줘야 했다.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아우성쳤고, 스무 살의 나는 그중 핵심적인 이야기를 엄선하여 선으로 꼭꼭 눌러 담았다. 상상이 선으로 이어졌다. 행복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그녀는 자신을 위해 그가 설계한 집을 평생의 추억으로 가지고 살지만, 이 경우 그녀의 정원 설계도는 그에게 가지 못했다. 학기 말이 되기 전에 그가 떠났기 때문이다. 결말이야 비참하더라도, 난 당시에 설계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했다. 첫 스튜디오를 통해 설계에 대한 평생의 문신 같은 기억을 갖게 되었다. 찌질한 연애소설적 상상력이 설계를 하고 가르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겐 설계가 그 공간 안에서 장차 일어날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는 일에서 시작하게 되었나보다. 어찌 설계가 가슴 설레지 않겠는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

상상에도 스케일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사극 드라마처럼 나라를 만드는 역사적 상상에서부터 주말엔 무엇을 할까라는 일상의 상상까지. 스케일이 크다고 더 중요하고 스케일이 작다고 하찮아지지 않는다. 그저 다를 뿐이다.

우리 시대의 특혜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새로운 도시가 백지에서 탄생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리나라 땅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바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의 얘기다. 조경이 다루는 영역이야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는 일은 하워드(Ebenezer Howard)의 전원도시(Garden City)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디 가능이나 했겠는가. 

행정중심복합도시는 도시 개념에 대한 공모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공모전을 통해 전 세계적인 아이디어와 지혜를 모아 탄생했다. 특히 중앙이 비워진 이 새로운 개념의 도시 속 중앙녹지공간은 여느 공원이 허락하는 일반적인 상상 그 이상을 요구하였다. 비록 우리가 제출한 안이 당선작 그룹에 꼽히지는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들과 진행한 도시에 대한 토론은 현실적인 업역 구분의 좁은 한계에 부딪쳐 답답했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였다. 규모가 커질수록 협업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집단의 협력 작업은 그 이후 내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의 도시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경지를 중앙에 품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논은 밭이나 과수원에 비해 그 작동 방식이 다르다. 땅과 물의 적절한 치고 빠짐이, 즉 물이 땅과 맺는 역동적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는 우선 논농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말라있는 논에 물을 대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논의 물길에는 물을 통제할 수 있는 ‘점’적 요소가 있다. 수많은 수문들이 그것이다. 이 점들이 열리면서 갇혀 있던 물은 농수로라는 ‘선’적인 실체로 뻗어간다. 이 선들이 논에 물을 공급하여 하나의 수‘면’을 형성한다. 우리는 점이 선으로 변하고 선이 면을 만드는 실제적·개념적 과정이 사회적으로도 형성되길 바랐다. 가장 작게는 새로운 도시의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를 상상했다. 제도화된 문화 공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들이 자기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평생에 걸쳐 모아온 수집품이 있다면 쉽게 임대하여 일정 시간 동안 자기만의 갤러리를 꾸밀 수 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년들은 자기만의 뮤직 갤러리를 열어 소규모 연습 공연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설 구조물 단위를 ‘퍼스널 쇼케이스(personal showcase)’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소규모 점적 시설들이 활성화되어 늘어선다면 느닷없이 새로운 거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풀뿌리식 문화 시설을 조직하고 도시와 공원의 게이트 역할을 할 문화 콤플렉스는 ‘큰 점’으로 자리 잡는다. 점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많아지면 선으로 변하듯, 참여하는 사람들과 문화 시설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가로가 형성될 것이다. 길을 먼저 내는 방식보다 백지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흔적이 모여 길이 생기는 방식에 더 가깝다. 이 길들로 다니는 사람들이 기존의 논둑길을 통해 녹지 공간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당연하게도 결국 이 엄청난 ‘면’을 어떤 개념을 가지고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도시의 공공 공간의 역할에 대한 질문들, 공간의 스케일과 그 역할, 조성 프로세스에 대한 질문들, 시민의 개인성과 집단적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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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 뱅크(Field Bank)의 다양한 통화 유형

 

‘필드 뱅크(Field Bank)’라고 명명한 이 공간의 핵심은 도시의 비워진 중앙부가 서로 다른 단위의 가치들을 축적하고 생산하고 증식하고 교환하고 분배하는 사회적 은행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의 증식을 욕망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공원이라는 공공재이자 공공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재정의해보자는 시도다. 가치의 생산, 교환, 증식이라는 현대 사회의 작동성에 기반하되 그 체계 내에서의 공공성을 고민해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규모 공원은 도시에서 생산한 것들을 맡아서 보관해주고, 그것의 가치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증식시키고, 동시에 도시에서 필요한 것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공급해주고, 서로 이질적인 화폐 단위를 중재해주어 문화나 기억 등 도시의 무형 자산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돈이 아닌 다른 교환 가치로 돌려주는 시스템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주거래 은행이 있듯이, 개개인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을 맡기고 관리하는 사회적 은행으로서 존재하는 공원 혹은 공공 녹지를 상상한 것이다. 시민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모아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도시에 대한 상상이 필드 뱅크라는 개념과 결과를 만들었다.

필드 뱅크는 다양한 개별 은행의 연합체인데, 잉여 식량 자원을 맡아 재분배하고 건강한 농업 문화를 관장하는 곡물 은행(crop bank), 우리나라 토종 종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종자 은행(seed bank), 개인, 커뮤니티, 집단 등의 문화적 활동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문화 은행(culture bank), 도시의 건설에 따라 필요한 나무를 재배하고 도시의 변화에 따라 자리를 옮겨야하는 식물 자원의 보관과 재배치를 담당하는 나무 은행(tree bank), 지역 생태계의 동물에 대한 관리뿐만 아니라 도시화에 불가피한 반려견과 유기견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건강한 동물복지 문화를 담당하게 될 동물 은행(fauna bank), 친환경 에너지의 생산과 보급, 탄소발자국 등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에너지 은행(energy bank),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라는 말처럼 전문 지식뿐만 아니라 제도권의 지식 체계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들의 ‘암묵지’를 권장하고 조직화하여 사회적으로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지식 은행(knowledge bank), 시민 개인과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고 찾아볼 수 있는 기억 은행(memory bank), 제방을 허물고 하천의 범람과 도시의 우수를 관리하여 물을 저류하고 처리하는 물 은행(water bank), 그리고 조금은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농작물을 발효 가공하여 먹는 우리나라 음식 문화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발효 은행(condiment bank) 등을 상상하였다. 그 외에도 공원이 성장하면서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은행이 생기고 진화할 것이다. 이 모든 은행은 마치 다른 나라의 화폐 단위를 일정 환율에 의해 바꿀 수 있는 외화 거래처럼 서로 교환된다.

곡물 창고, 종자 연구소, 문화 시설, 수목원, 동물원, 발전소, 저류조 등 기존에 있는 시설을 말장난하듯 바꾸어 불렀다고 누군가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지금까지 분리되어 존재했던 도시의 각 부분이 모두 공공의 영역에서, 도시의 가치를 생산하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그 관계성이다. 개인과 도시의 관계성, 도시의 부분들 간의 관계성, 자연과 문화의 관계성, 가치들 사이의 관계성. 

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데 있어 소위 말하는 ‘큰 선’ 그리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규모에 맞는 시스템에 대한 생각 없이 지르는 큰 선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큰 선은 우선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직설적으로 옮겨 그린 것이다. 스케일이 작든 크든, 공간의 구조 혹은 뼈대를 만드는 작업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어서 공간의 작동 시스템에 대한 생각이 먼저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이 조형적이고 감각적인 도형적 퇴고 과정이다. 논리성 자체만으로는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경관의 체험은 기본적으로는 감성적 체험이다. 공간의 규모에 맞는 감성적 체험을 상상하고 재현할 수 있는 설계가의 역량은 훈련 없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아름다운 조형은 디자인의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다. 물론 무엇을 아름다움이라고 규정하고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는 시대적으로 상황적으로 매우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상대적인 어려움을 뚫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과정이 설계라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조경 설계에 대한 논의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부재하다는 사실이 몹시 불안하다. 여기에 기술적 상상력은 ‘큰 선’을 현실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뉴욕 센트럴 파크의 목가적 풍경은 ‘기술의 향연’에 가까운 엄청난 기술적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논리적, 조형적, 감성적, 기술적, 미적인 상상들이 반죽되어 도면화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그 선들을 검증하게 된다.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시 이야기로. 그래서 ‘이곳은 어떠한 삶을 꿈꾸는가’라는 질문으로.

그래서 아무리 큰 규모의 설계도 내겐 그 공간을 이용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 따져보는 게 중요한가 보다. 그렇지만 큰 규모의 땅이 작은 규모로 단절되어 큰 땅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관적, 체계적, 활동적 잠재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일 역시 대규모 설계에 있어서 중요하다. 나라는 작은 개체가 더 큰 세상을 만나는 곳이 결국 공공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일 테니. 

 

세상에 대한 상상이 꼭 거대 담론이나 거창한 이슈를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따듯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현대의 도시적 삶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커뮤니티가 정답이라고 단정 짓는 일은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커뮤니티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집단이다. 커뮤니티는 동시에 내부인과 외부인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2라고 얘기하던데, 커뮤니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섣부르게 강제된 커뮤니티가 그것에 쉽게 끼지 못하는 새로운 유형의 소외를 만들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설계에서 사람을 다루는 일이 제일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섬세하고 깊은 고민 없이 만병통치약처럼 커뮤니티가 제시되는 풍토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그 흔한 ‘엄마들 커뮤니티’에조차 끼지 못하는 내 성격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탓인지 나는 타인들과 훨씬 더 느슨하고 느리게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아다닌다. 목표가 있더라도 그곳에 이르는 방법이 훨씬 더 유희적이었으면 한다. 타인과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즐겁게 교류하는 것 자체가 공공 공간의 사회적 기능 중 하나라고 믿는다. ‘놀이’는 공공 공간의 큰 작동 방식 중 하나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빈둥거리는 것부터 축제에 이르기까지 놀이의 가짓수는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 수에 버금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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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은 ‘어딘가에 앉아있었던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서로 공유하며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팀원의 상당수는 어렸을 때 물가의 작은 목교나 어른에게 맞춰진 큰 벤치에 앉아 바닥에 발이 닿을락 말락한 상태에서 다리를 흔들거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72시간 프로젝트에 출품한 ‘희망물고기 낚시터’는 도시의 공공 공간에 유머와 놀이를 통해 펼쳐질 재미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우선 ‘의자를 만들라’는 대 전제가 주어졌다. 우리는 의자라는 시설물보다는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앉아있었던 즐거운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지금까지의 삶에서 각자 가장 소중한 ‘어딘가에 앉아있었던 기억’을 꺼내어 공유하였다. 놀랍게도 많은 친구들이 어렸을 때 물가의 작은 목교나 어딘가 어른 규격의 벤치에서 바닥에 발이 닿을락 말락한 상태에서 다리를 흔들거렸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때 바라봤던 풍경을 끄집어냈다. 우리는 한편 이렇게 만드는 임시적인 공공 공간이 그 동네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앉아서 쉰다’라는 의자 본연의 기능보다는 하나의 공간이 담을 수 있는 메시지와 사회적 기능을 꿈꾸는 일이 더 중요했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보편화되고, 내가 올라가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일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에서 ‘우연히’ 내게 전해진 희망의 메시지는 어떻게 다가올까. 어딘가에 앉아있던 즐거운 기억을 공유하는 임시적인 커뮤니티가 가능할까. 반으로 가르면 행운의 쪽지가 나오는 행운 쿠키(fortune cookie)처럼 우연히 뽑게 된 쪽지에 적힌 누군가의 흔적을 통해 세상의 나 아닌 누군가와 잠시 이어질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꼭 1:1로 만나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망과 타인의 격려가 ‘우연’을 통해 교차하는 체험을 디자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망물고기 낚시터는 이렇게 작동된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미리 잘라놓은 ‘백지 상태’의 물고기를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다. 물고기 뒷면에 나만의 소원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덕담 등 희망의 메시지를 쓰고 낚시터에 방생한다. 이곳에 쉬러 온 사람들은 심심할 때 구비된 낚싯대로 낚시질을 할 수 있다(물고기의 눈과 낚싯대의 끝이 자석으로 되어 있다). ‘우연히’ 낚은 물고기의 메시지를 보고 난 이후의 반응은 자유다. 어떤 사람의 소원을 함께 기원해 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보낸 따뜻한 말 한마디에 웃고 잊어버릴 수도 있고, 그저 낚는 행위 자체만 즐겨도 그만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바보짓을 보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누군가가 공유하고 싶은 소원과 누가 될지 모르는 사람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낚고 만들고 놓아주는 놀이의 과정이 앉아있는 행위와 겹쳐지길 바랐다. 모든 물고기들이 저마다의 개성이 있지만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원이 똑같이 소중하게 여겨지길 바랐다.

우리의 ‘너무 앞서가는 혹은 막나가는’ 아이디어는 처음 이틀 동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펼쳐졌다. 참여했던 학생들이 시간을 정해 낚시터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물고기 기부를 진행했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 어느 날 아침에 가보니 밤새 누군가가 ‘붕어빵’을 물고기 사이에 곱게 놓아두고 갔다. 수능을 앞둔 시기여서 모두의 수능 시험을 격려하는 물고기를 누군가가 기둥에 박아놓고 갔다. 그러나 함께 낚시터를 만든 친구들이 각자의 수업과 시험으로 현장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비가 많이 오고 날씨는 몹시 추웠다. 아름다운 꽃밭의 꽃은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사라졌다. 따뜻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은 누군가가 훔쳐가 버린 수많은 꽃 화분처럼 냉정한 현실 앞에 사라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설계가가 무엇을 디자인해야 하는가에 대한 열린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도둑조차 탐내지 않았던, 꽃과 잎이 다 떨어져 버린 볼품없는 다년생 식물은 무료급식소 ‘밥퍼의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곧 들이닥칠 겨울의 칼바람을 이기고 다시 새싹을 틔우게 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으로 느껴질 테니. 설계가는 물리적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문화적 행위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설계가는 경관을 디자인하는 동시에 체험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설계가는 결과물을 디자인하는 동시에 프로세스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결국이 모든 것이 ‘좋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니 설계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바닥에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기초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상세 도면과 내역 작업의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지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즉 설계가의 꿈과 상상이 현실 속의 지긋지긋한 도면 작업과 이어지는 창을 갖지 못한다면, 설계는 더 이상 생산적인 창작이 아닌 허드렛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다. 설계에 대해 환상‘만’ 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설계를 통해 ‘꿈꾸는 일’을 무의미하다고 다그치는 순간 우리의 젊은 청년들은 계속해서 설계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

모든 설계 프로젝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 과정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꼭 그만큼 세상을 더 잘 보게 된다. 서울에서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경험의 폭이 넓을 리 만무하다. 모든 설계 과정은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두려움과 공존할 수밖에 없나 보다. 설계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설계 작품이 하나 끝나면 그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는 나를 확장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설계적 측면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궁리 중이다.

 

각주 1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볍게 빌려왔다.

 

각주 2

칼 슈미트 저, 김효전 역, 『정치적인 것의 개념』, 법문사, 1992.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 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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