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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텍스트와 패턴 사이, 그의 미니멀리즘
  • 환경과조경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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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힘, 남해에선 누구나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다. 쪽빛 바다에 반사되는 따뜻한 햇살이, 다도해의 훈풍이 실어 나르는 대양의 숨결이 우리를 무장 해제시킨다. 바다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열린 자유의 시선이, 부드럽고 온화한 자연과의 밀착감이 일상의 번잡함을 마취시킨다.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은 이런 축복받은 대지에 들어선 최고급 골프 리조트다. 사이트의 조건이 이처럼 완벽에 가깝다는 것은 조경가의 로망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제약일 수도 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고급과 품격, 사우스케이프를 방문하면 누구나 이 두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반발심이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호화나 사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수려한 경관 자체가 그럴 뿐 아니라, 골프장 역사상 최고의 예산으로 소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 조민석(클럽하우스)과 조병수(호텔)에게 무한의 지원을 한 클라이언트의 의지도 그렇다. 물론 두 건축가가 빚어낸 결과물도 상상 이상이다. 원경에서 보면 땅으로 포복하며 지형에 그 존재를 숨기지만, 근경에서는 질료의 물성과 양감이 구조미와 결합하여 또 하나의 자연이 오롯이 구축된다. 삼차원 곡선의 백색 콘크리트 지붕과 중후한 트래버틴 대리석 벽으로 구현된 조민석의 클럽하우스는 바닷바람과 조망을 만끽하게 한다. 노출 콘크리트 덩어리를 치즈처럼 썰어 놓은 조병수의 호텔동은 해안선의 흐름과 호흡을 맞춘다. 동과 동 사이의 캔틸레버 아래로 리아스식 해안과 쪽빛 바다가 고개를 든다. 태생부터 명품인 이런 조건 속에 던져진 조경가는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취재 첫 날, 남해의 경관에 취하고 사우스케이프의 품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조경가 박승진이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난망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건의 존중, 자연과의 조화, 건축의 해석과 수용, 이런 지고의 가치에 기대 애써 선한 척하는 것 외엔 별다른 묘수가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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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의 조경설계 서안에서 성장한 후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loci로 독립한 박승진은 실무 조경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다량의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조경론을 펼쳐왔다. 그의 글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조경이라는 행위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사고이며, 그 중심에는 ‘자연’이 놓여 있다. 그는 조경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이므로 조경 행위의 출발은 “결국은 조경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1에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답한다. “조경의 본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듬고 삶을 보살피는 것이며, 이것은 … 자연의 본성과 닿아 있다. 자연은 모성적이어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킨다. 모든것이 스스로 조화를 이루며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 자연의 본성을 닮은 ‘보살핌’의 조경을 통해 세상과 조경이 소통하는 희망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2 여기서 그는 자연을 보살피는 것이 조경의 역할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경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연의 고유한 성질처럼 무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자연과 조경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명료하다. 몇 부분만 더 인용해 보자. “조경이 다루는 소재는 대부분 자연에서 얻어 온 것들이며 그것들은 스스로 생육하고 번식해 나간다. 조경가는 이 위대한 존재들이 생육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고 보살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조경은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엮어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디자인과 다른 본질적인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3 “오늘날 도시 문명의 표상은 발기된 남성의 성기로 상징화되는 수직적 건축 구조물들이다. 이 구조물들은 도시의 풍경을 장악한다. 자연(여성)과의 정서적 결합을 외면하고 허공을 향해 욕정을 뿜어낼 태세다. 항상 어디에서나 오브제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오만하게 땅을 굽어본다.”4 반면, “조경의 공간은 땅과의 밀착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돌출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남성 성기와는 다르다. … 이렇듯 우리가 다루는 자연은 여성성 혹은 여성 그 자체이다.”5

이러한 박승진의 조경론을 읽으면 자칫 그의 작업이 목가적인 픽처레스크picturesque풍이거나 잡풀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연출하지만 전혀 손댄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영선식 조경invisible landscape 또는 젠스 젠슨Jens Jensen의 ‘프레리 스타일prairie style’에 경도되어 있을 것이라고 오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작업은 “흙, 풀, 물, 돌, 철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물질과 그 물성을 잘 이해하고 그 결합 관계를 해석하여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박승진식으로 표현하면 “물성과 감성 사이”의 설계다.6 그가 말하는 조경의 역할, 즉 “보살핌”은 바로 그 사이에서 작동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보살핌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조경가의 적극적 개입이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조건은 “콘텍스트”이고, 개입은 “패턴”이다. 그는 콘텍스트를 “공간을 설계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상황,” 즉 “내 책임이 아닌 모든 것들”이라고 말한다.7 콘텍스트에 대한 무한 존중을 넘어 그것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교정하는 패턴을 디자인하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조경 작업인 셈이다. 물론 자신의 패턴이 콘텍스트에 도전해야 함을 말한다기보다는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의 접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계는 더하는 작업이 아니라 빼는 작업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욕심을 부리기마련이다. 그런데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면 설계안은 복잡해진다. 복잡한 설계안이 좋은 공간으로 진화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때로는 ‘패턴’이 ‘콘텍스트’를 존중하고 스스로 몸 낮추기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이유다. 형태뿐만이 아니다.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최적의 순간까지만 적극적으로 작동해야 한다.”8 박승진의 작품에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대입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워커힐 아카디아호텔 옥상(2007), 물의 정원(풀무원 제일생면 공장 폐수처리장, 2009), 아모레퍼시픽뷰티 캠퍼스(2012) 등과 같은 그의 작업에서는 자연의 바탕을 마련하고 자연의 시간성과 물성을 살리는 “보살핌”의 조경이 미니멀한 형태와 재료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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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프로젝트는 박승진에게 쉽지 않은 도전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형용사가 필요 없는 최선의 자연 경관이, 호화롭거나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멋과 품격을 담은 최고급 건축이 그에게 조건으로 주어졌다.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최상의 콘텍스트 앞에서 그는 철저한 조연이 되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클럽하우스와 호텔동 사이의 급격한 단차를 절제된 지형설계를 통해 해결했다. 클럽하우스의 하이라이트 공간인 파티오에서 바다와 하늘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는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그의 지형 설계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정지 작업 중 드러난 거대한 암반을 호텔동에 의해 위요된 정원의 일부로 살리고 거기에 덧대어 만든 철제 수반은 복잡한 시선에 수평적 질서를 부여해 주었다. 공간감을 주기 위해 선택한 팽나무 위주의 교목 몇 그루 외에는 식물 재료로 몇 종류의 풀과 초화만 넣었다. 바다와 바람과 계절의 공감각적synaesthetic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절제된 식재 설계다. 사우스케이프에서 화려함보다 편안함을, 사치함보다 여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의 충실한 조연이 되고자 한, 건축의 지혜로운 조정자가 되고자 한 조경가의 ‘자제’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승진은 이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콘텍스트가 참 답답했을 것 같다.

강우와 폭풍이 오전 촬영을 가로막았던 취재 둘째 날, 믿기지 않는 속도로 구름이 물러가고 다시 남해의 하늘과 바다가 펼쳐졌다. 다시 둘러본 사우스케이프에서 나는 띠 형태의 긴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그제서야 마음이 확 트였다. 난데없는 현장 채집석의 띠가 주차장 쪽 마운드의 풀숲을 뚫고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클럽하우스 옆 정원을 지나 리차드 에드먼Richard Erdman의 조각 볼랑트Volate를 스치며 퍼팅 그린 쪽 아래 레벨로 연결된다. ‘카메라타’의 남해 분점인 음악감상실(클럽하우스 1층) 앞에서 돌무더기 띠가 멈춘다. 강하고 풍요로운 이 사이트의 콘텍스트에서 해방된 박승진의 패턴일거라 단정하고 나니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이 오히려 즐거워졌다. 며칠 후 그에게 확인하니 과거에 그 자리에 있던 말 훈련장의 담장 유적을 살리라는 문화재 심의에 대한 설계적 대응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돌무더기 띠는 대지미술가 리차드 롱Richard Long의 초기작들보다 울림이 있는, 날카로운 선으로 캔버스를 찢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개념 작업들보다 강한, 그의 미니멀리즘이었다. 남해로부터, 건축으로부터 자유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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