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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이탈리안 잡An Italian Job
  • 환경과조경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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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달(Michael Dahl)이 1727년경에 그린 알렉산더 포프의 초상화. 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포프의 초상화가 상당히 많이 그려졌다. 포프는 살아생전 이미 전설이었던 남자였다. 어려서 척추 결핵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아름다운 정신이 얼굴에 총집결된 것 같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소장

 

 

#33

알렉산더 포프 - 고대 시에서 영감을 얻다

 

영국에서 마침내 ‘사라와지’를 찾았다고 해서 그 말이 곧 중국의 조원 양식을 본뜨는 데 성공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와지는 본래 중국풍의 정원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지만 중국의 양식을 본뜨겠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은 ‘무질서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흥미를 느끼고 일종의 암호처럼 사라와지라는 개념을 차용했을 뿐이다. 실제로는 지난 9월호에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베르길리우스의 목가 등 고대 문학에서 해법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1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사실이 입증된다. 포프의 행적을 따라가 봐야 하는 이유는 그가 1718년경부터 자신의 트위큰햄(Twickenham) 저택에 조성한 정원이 영국 풍경화식 정원의 출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2 그렇다면 포프야말로 사라와지를 발견한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그의 행적을 추적해야 우리도 사라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포프는 18세기 영국 최고의 고전주의 시인이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아 고대 문화에 깊이 심취해서 살았다. 비단 포프뿐 아니라 그 시대의 엘리트들은 모두 고대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문학도 고전주의, 건축도 고전주의 양식, 음악의 주제 역시 고대 신화나 역사에서 빌려 왔다. 당시는 헨델이 런던의 음악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메시아’는 후기 작품이다. 초기에 그는 오페라만 작곡했는데 모두 고대 이야기였다.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다.

 

포프는 수많은 창작시를 남겼지만 그 외에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영어로 번역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보면 포프는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며 그 안에서 정원에 대한 묘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베르길리우스의 ‘아르카디아’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정원을 만들려고 보니 너무 막연했다.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외에도 올림포스에 사는 한 노인의 정원을 노래한 적이 있다.3 호메로스 역시 오디세이아에서 알키노오스(Alchinoos) 왕의 정원을 묘사했다. 포프는 1713년 『가디언』에 정원 칼럼을 쓰면서 정원이란 모름지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것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 올림포스 어느 노인의 정원이나 알키노오스 왕의 정원은 분위기가 비슷하다. 온갖 과실수가 자라고 허브원에는 화초가 흐드러지며 나무는 자유롭게 자라고 그 사이로 계류가 자유롭게 흐른다. 분명 사람이 만든 정원이지만 자연과 같은 곳. 그런 정원이 알렉산더 포프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이 정원들도 역시 막연했다. 과실나무, 계류, 꽃, 이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베르길리우스도 호메로스도 말해주지 않았다. 방황 끝에 찾은 것이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BC 65~8)의 별장 정원이었다.

베르길리우스와 쌍벽을 이루었던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글 속에서 자신의 정원을 여러 번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별장은 사비나의 산 속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별장에 사비눔(Sabinum)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기원전 30년 경에 지어진 별장이었다. 16세기에 호라티우스의 작품이 재발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 많은 독자들이 사비눔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천오백 년 전에 지은 빌라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마치 오늘날 연개소문의 저택을 찾겠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 1761년, 사비눔이 있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고 건물의 기초도 발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초 위에 중세의 수도원이 떡하니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발굴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작업 끝에 현재는 집터 관람이 가능하다.

 

알렉산더 포프의 시대에는 아직 사비눔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호라티우스의 글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글에 따르면 사비눔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지어졌으며 소작인과 노예의 숫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순수한 주거형의 별장이 아니라 농장을 겸하고 있던 곳이었다. 대략 81헥타르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로마의 농장 중에서는 중상급에 해당했다.5 집 뒤에는 숲이 있어 그늘지고 집 앞으로는 샘이 솟아 여름이면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했다. 집 근처에는 바쿠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나 호메로스의 묘사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포프의 시대에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연극과 오페라였다. TV도 영화도 없던 세상이었으니 사람들은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오페라 극장을 찾았다. 1705년 런던 헤이마켓 거리에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이 세워졌고,6 1732년에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개장했다. 모두 포프 시대의 일이었다. 더욱이 헨델이 런던에 나타난 이후로 오페라 계에 활기가 넘쳤고 헨델은 포프가 속했던 엘리트 계층이었으므로 그들은 극장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오페라에서는 물론 음악이 중요하지만 포프의 경우 무대 장치를 유심히 관찰하며 자신의 풀리지 않는 숙제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정원 전체를 저렇게 연극 무대처럼 꾸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 같다.

 

포프의 저택은 템스 강가에 근사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햄프턴 궁전으로 가는 길이 집 바로 뒤로 지나갔다. 그 길을 건너 포프의 땅이 계속되었다. 그곳에 그는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것처럼 포도밭을 가꾸고 정원을 조성하고자했다. 그러자면 정원과 집 사이를 연결해야 했으므로 터널을 뚫었다. 집 앞마당 정원에서 지하로 내려가 한참을 걷다보면 지상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세를의 도면 3번). 이때 터널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문틀에 의해 템스 강변의 정경이 마치 액자 속의 그림처럼 담겨져 보였다. 그가 만든 첫 번째 무대 장치였다.

 

도로 우측에 있는 긴 형상의 정원은 제대로 된 풍경화식 정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무질서해 보인다. 우선 기존 정원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중앙축이 사라졌다. 여기저기 언덕을 쌓았다거나 길의 흐름이 제멋대로라는 점등에서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후 풍경화식 정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수목 배치를 통한 장면 연출과 공간 조성 기법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원형의 ‘조개껍질 신전(Shell Temple)’일 것이다(세를의 도면 5번). 현재 포프의 정원은 그로토의 일부를 제외하곤 남아있는 것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조개껍질을 붙여 만든신전 모양의 소건축이었을 것이다. 비록 신전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특별한 용도가 없는 건축물로서 종교적인 용도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연극 무대 위의 장치처럼 배경을 연출하기 위해 세워졌을 뿐이다. 기존 바로크식 정원에도 물론 건축물과 조형물이 있지만 그들은 막중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뜻과 상징성이 강했다. 반면 포프의 정원에 세워진 신전은 뜻이 아니라 느낌을 담았다. 이런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스타파주(staffage)’라고 한다. 본래 스타파주는 미술에서 쓰는 용어였다. 클로드 로랭이나 카날레토 등의 풍경화가들이 쓰던 기법으로서 그림에 인물이나 동물, 건축물 등을 자그맣게 그려 넣어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림에 깊이를 더했다. 그야말로 첨가물일 뿐 그 자체로 의미는 없다.

 

이로서 포프는 풍경화 기법과 무대 장치의 원칙을 정원에 적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큰 차이가 있다. 정원에 무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정원 그 자체가 무대가 된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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