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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조경건축도 괜찮아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에 관한 몇 가지 소고
  • 환경과조경 2015년 1월
리서치.JPG
ⓒ박윤진·김정윤

 

 

필자의 실무 경험이 아직 깊지 않아, ‘설계하는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매우 조심스럽다. 뿐만 아니라, 제목이 갖는 어감도, 설계 방식을 한정하는 뉘앙스를 띠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꺼려진다. 오피스박김은 그간 프로젝트에서 논할만한 것을 선정하여, 이를 박윤진, 김정윤 두 대표가 대화체로 반추하는, 즉 현재의 설계적 사유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_ 글쓴이 주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

김정윤(이하 김) 2006년 가을에 서울 들어와서 몇 년 동안 설계공모 참 많이 했었는데, 한동안 뜸하다가 2013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다시 전력투구했었죠. 서소문밖 설계공모에 참여하기로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죠?


박윤진(이하 박) 첫째 이유는 ‘메모리얼’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무실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메모리얼 프로젝트(타이완 치치 지진 메모리얼)였고, 그 후 계속 메모리얼에 관심을 갖고 있었잖아요. 메모리얼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공간이 극화되고 타이폴로지상 새로운 언어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혹적인 대상입니다.


 오히려 보통 메모리얼이라는 유형은 잘 변하지 않는, 즉 티피컬(typical, 전형적인)한 언어를 가지고 지속되는 속성이 있는데(예를 들어 수직적인 기념탑 혹은 베트남전쟁 메모리얼 후 유행처럼 사용되는 검은색 석벽 등), 그에 반해서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상대로 새로운 지적 게임을 하고 싶은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언어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기념하는 대상과 주변 맥락에 따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대상지 역시, 현재 주목받지 못하는 철길 옆의 땅이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죠. 둘째는, 건물과 외부 공간, 도시와 건축, 자연과 조경, 상부와 하부, 공원과 성당 등 많은 상대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된, 혹은 연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테스트해보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즉 이 모든 것들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이죠.


김 건축과 조경간의 경계를 허문다. ‘이젠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기회가 참 드물다’,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는 것인가요? 

 

그렇죠. ‘마포석유비축기지 국제설계경기’라든지 ‘서울역 고가 공원화 사업’, 모두 좋은 기회죠. 물론 누가 그 기회에 ‘초대받을 수 있느냐’는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지만.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비록 국내 건축사사무소가 등록해야 했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한계는 설계가의 의욕과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우린 언제나 믿어왔습니다. 당선 여부를 떠나서 이 설계공모의 성과물이 그 의욕과 실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피스박김을 건축사사무소로 등록하면 쉬운 문제가 됩니다만. 마치 히데오 사사키(Hideo Sasaki)처럼 말입니다. (하하)


여기서 파생된 질문인데, 한국 도시에서 메모리얼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에는 메모리얼이 너무 없습니다. 어떠한 사건을 ‘공간’으로 기억하는 데에 익숙지 않죠. 서울은, 그 상흔으로 본다면 ‘메모리얼의 도시’입니다. 아주 작은 공간 형식으로도 수많은 집합적 기억과 장소적 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곳이죠. 과장하자면, 동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이 성지를 천주교만을 위한 메모리얼로 생각치 않았잖아요? 오히려 천주교의 도입과 박해의 모든 과정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편적 추모를 불러일으키고 싶었죠. 지나고 보면 또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너무 중립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지나치게 종교적이라면 도시 프로그램으로서의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공장소에 종교 시설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언제나 있죠. 그래서 우리는 성당을 비롯한 모든 종교 시설을 다 지하 공간 속에 제안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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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에 대한 인상

처음 사이트에 가보고 받은 인상은?


글쎄 … 난 별로 사이트에 대한 특별한 인상이 없었어요.


그래요? 난 너무 사이트가 복잡하고, 땅으로서의 존재감도 전혀 없었고 주변의 큰 건물과 도시 프로그램에 단지 스스로 흡수되어 있는 상태에서 양현탑과 같은 시설물이 산발적으로 존재했고, 그래서 ‘이곳의 바닥을 드러냄으로써 존재감을 만들자’, 이런 생각을 했죠.


 오히려 나는 사이트를 보기 전에 도면을 보면서 기존의 헤비(heavy)한 지하 주차장 구조가 흥미로웠죠. 이 기존 구조와 설계공모에서 요구된 프로그램 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것을 통해 굉장히 독특한 기념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로를 지나가는 기차소리의 안락함, 그것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를 끌어들여서 사이트의 주요 요소로 삼고 싶었어요. 사이트에 가봤을 때 이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었죠.


어차피 완벽 차폐도 불가능한 것이었죠. 공개발표 때도 언급했지만, 난 약현성당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설계 과정 내내 뇌리에 남아있었어요. “쓰레기 냄새 올라오고, 기차 계속 지나다니고, 차 소리도 시끄럽고. 이런 와중에 드리는 서소문밖 성지에서의 금요일 오전 10시 야외 미사가 난 제일 좋다. 왜냐면 현대인의 종교생활이란 바로 이런 혼잡 와중에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트와 관련해서 또 중요한 것은 약현성당과의 관계죠. 새로운 건축 유형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약현성당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고전적 성당이 지어지는 방식이나 구법을 이용하면 우리가 짓는 기념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바티칸을 시작으로 한 달여 동안 성당의 타이폴로지 리서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계의 전제

약현성당도 사이트의 일부로 봤었죠? 약현성당이 본래 서소문밖 성지의 기념 성당으로 만들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지를 기념하는, 땅 위로 올라와 있는 종교적 공간은 약현성당이면 충분하다고 본거죠. 그 건물을 이기려 하거나 전혀 다른 무언가가 또 생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현을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존중하고 기념하는)하면서 거기에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성당과 메모리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약현성당이 우리 사이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크게 보면, 지하 주차장 구조와 함께 기존 사이트에 있는 공간 언어로 약현성당을 봤다고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미 서소문밖 성지의 기념 성당으로 지어져 있었던 약현성당을 이 기념 공간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존재로 존중하겠다는 의미였죠. 그리고 지하 스트럭처는, 현재의 프로그램으로만 보면 상당히 오버스트럭처였지만, 새로 들어올 프로그램의 규모와 성격을 보면 오히려 그 규모가 적당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좀 더 면밀히 보자면, 우리는 설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컨텍스트(context)를 의식하기는 하지만, 모든 설계어휘가 컨텍스트로부터 파생되는(context-driven)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컨텍스트는 형태적으로 주어진 여건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그것은 동시대의 개인상, 세대적 의식, 기술적 여건, 혹은 이데올로기까지 광범위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약현성당이 보여주는 건축적 구법, 이것의 근대적 합일, 뭐 이런 이론적인 컨텍스트였죠. 예를 들어 ‘과거 지형이 이러했으니까 이를 되살리는 설계를 하자’, 이런 형태적 문맥주의는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형태(혹은 경험)의 다양한 발현을 위축시키고, 지나치게 단순한 설계 논리를 만들죠. 물론 대중을 현혹시키기에는 ‘그럴싸’하겠지만요. 우리는 본질적인 문맥 그리고 보다 확장된 문맥적 가능성을 찾고자 합니다.

 

리서치

성당의 ‘원형’에서부터 리서치를 시작했었어요. 우리가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간에 다루게 되는 프로그램의 ‘원형’에 항상 신경을 쓰지 않았나요? 

 

 원형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김 여기서 말하는 원형이란, 형상이나 형태라기보다는 그 프로그램의 본래적 기능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난 항상 그렇진 않다고 보는데요. 이번엔 오히려 여건이나 상황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더 중요했다고 봐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이번엔 천주교 신자도 아니고 성급히 설계에 뛰어들 수가 없었고, 성당의 원형에 대한 리서치부터 신중하게 시작했었던 것이 맞죠?

 

 그렇습니다. 한 한 달 정도 했죠? 먼저 바티칸에 대해 했습니다. 놀랍게도 바티칸은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 지고 없어지는 과정이 쌓이면서 이뤄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형식과 구법들이 계속 등장했고, 이것들이 중첩되어 표현된, 이칭(itching)된 아름다운 도면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바티칸의 역사적 레이어가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두 번째는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 교회들을 들여다봤었는데, 특히 약현성당이 흥미로웠어요. 설계는 프랑스 신부가 했고, 당시 우리한테 조적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 기술자를 데려왔고 목조는 일본 기술자가 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스위스 목수가 목구조를 세우고, 남미의 기술자가 노동요를 부르며 콘크리트 포장을 마감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약현의 아치(arch)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리서치를 통해 약현성당의 아치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는데 아치는 전통적으로 종교적 상징성을 가짐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전근대 사회가 근대로 넘어 오는 과정도 건축적으로 의미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아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항상 그랬듯이, 먼저 빈 종이를 펴놓고 손끝에서부터 바로 시작하는 것을 매우 경계합니다. 충분한 리서치와 생각을 통해 대상지와 프로그램에 익숙해 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난 돌아보면 이번에 리서치 할 때 정말 좋았어요. 왜냐면 전혀 몰랐거나 관심 없던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어떤 긴장감까지 더해져서, 바티칸 대성당의 가로, 세로, 높이의 비율도 재보면서 과연 어떤 공간이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현대의 성당들에서는 과연 이런 원형의 공간을 어떻게 발전시키거나 차용했는지 들여다보는 것도 정말 흥미로웠어요.

 

박 맞아요. 예배할 땐 최소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동네 성당도 가보고 경동교회도 가보고. 새로운 공간을 학습하며 설계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어찌 보면 우리가 천주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상과의 거리를 일정히 유지하며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리서치 중 가장 좋았던 건, 초기 순교자의 순교 과정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엮은 책을 읽었을 때에요. 과연 종교의 힘은 이렇게 양반 아녀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순교하는 날만 기다리며 살 정도로 대단했구나, 특히 그 시대의 서학(가톨릭)이라는 것의 존재가. 손에서 책을 놓기가 힘들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성지가 천주교에서 의미하는 바를 (특히 우리나라 천주교에 있어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비단 천주교 신자들만이 감동을 느끼는 공간이 아니라, 180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겪었던 혼란스러운 근대화 과정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어 보편적인 기념 및 역사 공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공고해졌죠.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당선은 안됐지만 이러한 과정 자체에서 얻은 것이 정말 많아요.

 

여담이지만 난 당선되면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했었으니까. (하하) 그만큼 천주교 자체에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어요. 종교적 공간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형식이 있고, 그것들이 또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우리가 설계를 하면서 차용과 변형을 시도하게 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좋았죠. 설계를 하는 동안 주변의 성당과 천주교 신자 등 평소엔 신경 잘 안 쓰였던 사항들을 예민하게 보게 되었어요.

 

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설계 과정과 달랐던 것은, 마감 전에 설계를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설계를 굉장히 많이 보여준 거죠. 부모님, 우리 재인이 친구 엄마들, 내 친구들, 천주교 집안 며느리인 동생 등,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혹시 우리가 설계한 공간이나 사용한 언어 등이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어색한 부분이 있을까 상당히 조심했었어요. 성당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공간의 양식은 갖되, 보편적인 역사·기념 공간 또한 만들려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보는 사람마다 완전 극찬하여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하하)

 

설계 콘셉트

 콘셉트를 위해 제일 중요했던 건 리서치였고, 그 후엔 성당을 어떤 레벨에 위치시킬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봐요. 결국 요구된 건축 프로그램은 모두 지하로 넣기로 했는데,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빛을 어떻게 불러들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연구했죠. 더 넓은 스케일에서는, 공간 배치에 있어서 기념 성당과 소성당만을 약현성당과 같은 축에 위치시켜서 동질성을 유지하고 나머지 프로그램은 기존 지하 주자창이 지배하는 기존 그리드 위에 위치시켜서 공간의 위계를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했고요.

 

 나중에 다른 엔트리와 비교했을 때 모든 건축 프로그램을 지하로 넣은 건 결국 우리 팀 밖에 없었죠? 근데 이걸 우리가 ‘조경’ 오피스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걸 몇 번 들었는데, 난 그 말을 그다지 부인하고 싶진 않은 것이, 꼭 뭔가 건축적 정면성이나 상징성을 만들어 넣고 싶은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할까요?

 

 글쎄요. 저는 다른 생각입니다만. 만약 이 프로젝트가 건물 입면이 정말 중요한 경우였다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입면 설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 땅이 가지는 가치와 힘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건축 프로그램은 다 지하로 넣기로 한 거죠, 도시에서 건축의 정면성(frontality)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도시 공간에서 지나치게 대형화되고 상업화되는 종교 시설에 대 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특히 이 장소에 지나치게 종교적 상징이 땅 위에 만들어질 때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힘들 것이고 결국 우리가 원했던 보편적 역사 기념 공간으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였죠. 무엇보다 교회의 원형을 보면, 처음에 동굴에서 시작했잖아요. 박해받던 시대의 성당과 교회들은 말 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마침 지하에 있던 구조물을 이용하면 공사비 절감과 함께 빛의 극적인 관입을 통해 정말 흥미롭고 아름다운 상하 관계를 만들 수 있었지요. 우리는 지난하게도 라이노를 통해 무수히 많은 입체적 모델을 만들어가며 건축 프로그램 배치 대안을 만들었죠. 그렇게 많은 아이디어 테스트를 통해 19세기 도시 구조와의 관계, 현재 도시와의 비례, 약현성당과의 균형 등 모든 것을 고려했었죠.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도면은 우리의 첫 번째 도판이었어요. 약현성당과의 관계, 주변 맥락과의 관계, 비워야 하는 당위성 등이 다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조경’ 오피스라서 건물을 지하로 넣었다고 말한다면, 이 모든 노력에 대해 한 번에 눈감고 등 돌려 버리는 형국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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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건축도 괜찮아

 그런 의미에서 조경건축이란 표현도 괜찮다고 봅니다. 기존의 학제적 구분으로는 동시대의 새로운 설계 수요를 충족시키거나 창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의 최근 소견이기도 합니다. 물론 각 분야의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요. 또한 서울에서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는 당연히 다분야적이어야 하고 멀티 포지셔닝 해야 한다고 봐요. 왜냐면 우리가 다룰수 있는 땅이나 지리학적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수평적이기보다 수직적이어야 하고, 낭만적이기보다 구축적이어야 해요. 또한 ‘잘 짓기’까지의 과정 중 돌출되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구상적이기보다 시스템적이어야 합니다.

 

 ‘조경가’라는 표현 대신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물론 김대표께서는 ‘조경가’라는 표현을 거부하시지 않지만, 저는 그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왠지 조경가라는 표현은 ‘아키텍트’가 아닌 것처럼 들리니까요. 또한 너무 이데올로기적 입니다. 지금의 건축은 모든 아키텍처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는다면, 조경건축이라는 경계적인 표현은 오피스박김의 작업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에 반론을 위한 반론을 하자면, 물론 경계에 서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왔던 것이 사실이죠. 그렇지만 반대로 한쪽 ‘편’에 확실히 속해 있음으로서 부여되는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런 힘을 받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어떤 집단이나 그룹에 귀속되는 건 설계가 혹은 아키텍트의 정치적인 선택인데, 우리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이타적인 태도는 좋은 프로젝트를 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잘 짓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봐요. 과연 정치적으로 특정 집단에 스스로 귀속되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 앞으로 점점 이런 그룹핑은 느슨해질 것이고 새로운 시대에 전반적으로 어울리지 않을 거에요. 개개인과 각자의 선택이 훨씬 중요한 세상이 되어 가니까요.

 

 우리가 스스로 경계에 서 있다고 말함으로써 양쪽에서 받게 되는 견제라든지 편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그야말로 편견이죠. 우리가 ‘난 꼭 건축을 할꺼야’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서소문밖 설계경기에 참여한 것이 아니잖아요. 대상지를 하나의 집합체로 인식하고 그 안에 흔히들 건축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대상지와 프로그램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기둥과 지붕을 설계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분야보다 중요한 건 ‘어떤 문화권과 관계하고 있는것인가’라고 생각해요. 인테리어 건축가 중에서 ‘조경’을 굉장히 잘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들의 정원은 도시의 입면과 가로를 바꿉니다. 인테리어 어바니즘이라고 할까요? (하하) 일단 재료와 식물 소재에 대해 박식하고 내·외부 공간의 연결에 대해 유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마치 패션처럼, 인테리어라는 트렌디한 문화가 조경과 건축 그리고 도시를 넘나들게 만들어요. 물론 가볍지만 가벼운 것도 괜찮은 세상 아닌가요?

 

대안들

 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해서, 각주가 본론이 된 것 같네요. (하하) 다시 서소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서소문에서 워낙 대안을 많이 만들었지요? 약현성당 축과의 관계, 대성당과 소성당의 관계, 상부 메모리얼들의 관계 등을 다양한 변수로 삼아서 말이에요. 나왔던 대안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약현성당의 축과 지하 구조물 그리드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가 중요했었는데, 여러 부분이 선큰되며 뚫려있는 공간을 만드는 안을 담은 콜라주형 플랜이 참 좋았어요. 수많은 홀들이 지상과 지하를 만들고 그것이 곧 빛의 통로가 되며 지형을 이끌었고요. 거기서부터 최종 안이 정리되어 나왔죠. 수십 개의 대안과 도시 맥락에서 오는 데이터, 이런 것들이 층층이 쌓이며 나온 것이 바로 우리의 파이널 안이었죠. 결코 손끝에서 나온 선들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설계 과정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그동안 우리가 해온 모든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구요. 결국 우리가 설계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설계 시작 시점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물을 얻었을 때의 그 흥분. 그거죠.

 

건축 프로그램간의 위계

 우리가 전제한 것은 건축 프로그램을 모두 지하로 넣고, 기존의 주차장 스트럭처는 모두 유지하는 대신 기념 성당과 소성당이 관입되는 부분만 약현성당의 축에 따라 달라지도록 한다는 것이었죠.

 

 기존 스트럭처가 갖는 그리드와 약현성당으로부터 오는 그리드를 중첩시킴으로써 구조적으로도 안정을 꾀하고 또한 두 개의 그리드가 틀어지면서 생기는 공간적 효과를 노렸죠. 제일 중요한 건 그런 관계를 만들되 지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동선을 설계함에 있어, 최대한 밀도 있게 공간을 이용하도록 한 거에요. 그리고 지하 공간에서는 전시 공간을 성당을 한 바퀴 돌며 배치함으로써 성당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죠.

 

 평면적으로는 그렇고, 사실 단면에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의 등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죠. 평면적으로는 구조 그리드와 약현 그리드를 본 것이지만, 단면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공간인 기념 성당이 가장 깊은 공간(3층 깊이, 약 14m)이고 소성당이 그 다음의 깊이(2층 깊이), 그리고 나머지 전시 등의 모든 공간은 1층 높이로 놓아서 층고에 따라 공간의 위계를 두었죠. 이러한 깊이와 층고는 빛과도 큰 연관이 있는데, 상부의 빛을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끌어내릴 수 있느냐가 달려있었죠.

 

김 빛으로 인해 위와 아래의 관계가 설정되기 시작하는 거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건물을 밑으로 짓는 형식이 되는 거였죠. 

 

 위아래의 관계라는 게, 사실은 굉장히 티피컬한 경우가 많잖아요? 땅과 건물의 관계, 건축과 조경의 관계라고도 보는데, 우리는 건물을 밑으로 지으며 위아래의 관계가 생겼다고 볼 수 있는데, 소성당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건축 프로그램은 지하에 있었고 윗공간은 메모리얼에 할애했죠. 여기에 덧붙여 ‘홍예’에 주목하게 되었던 과정을 좀 얘기해보죠.

 

홍예

 약현성당의 아치가 당시 서구의 것이었고 중국과 일본의 기술에 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홍예는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옛부터 성문이나 교량을 만들 때 썼던 형식이거든요. 위아래의 관계를 설정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아치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건축 양식이라 생각한 거예요. 우리의 근대가 꼭 서구나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재된 씨앗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합일점’을 찾아낸 것이었다고 할까. 천주교 역시 선교사들로부터 먼저 소개된 것

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학문으로 공부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고요.

 

 우리가 아치나 홍예에 주목하게 된 것이 기존의 지하 주차장 기둥을 그대로 지키되 성지의 기념 공간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넣으려다 보니 자연히 ‘얹혀 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거죠. 그렇게 찾아낸 것이 기둥에 아치를 얹는 거였고요. 

 

 그렇죠, 지붕만 디자인 한 거였고, 그 지붕이 곧 메모리얼의 바닥이기도 했어요. 또 이 사이트와 연계해 보면 성인들이 처형장으로 향하며 지나갔을 때 서소문의 홍예를 분명히 쳐다보았을 거고요.

 

 자평한다면, 그 홍예 구조를 새로운 공간 언어로 불러와서 위아래 프로그램의 중추 역할이 되도록 했던 것이 상당히 적절하지 않았나 싶어요. 홍예가 랜드스케이프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이렇게 드러나게 된 과정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여러 유형의 홍예를 3D로 실험해보고 프로그램과의 관계를 살펴보던 중 마치 매트리스처럼 올록볼록한 형태가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아 이게 그대로 지형으로 드러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박 일반적으로 경관 설계는 그 속성상, 이미지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는 구축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 질서를 가지는 것 혹은 구조적인 것이라는 시스템에서 시작해서 랜드스케이프로 발현되도록 하는 방식을 매우 존중하는 편입니다. 즉, 자연의 현상을 모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입체적이고 다변화된 랜드스케이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를 찾는 것 자체가 매우 도전적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설계 자세가 비단 서소문밖 설계공모 사이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

라, 우리나라처럼 매우 밀도가 높아서 뭔가 새로운 자연 혹은 대체 자연을 만들어 내야하는 경우 의미 있는 랜드스케이프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믿죠.

 

리프리젠테이션

 결국 우리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엘리먼트는 ‘홍예’와 ‘빛’이었고 제목과 부제목에도 그게 드러나게 되는데,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에서도 이를 가장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었죠?

 

 우리 사무실이 늘 해왔던 방식이지만, 우리가 임프레션(impression)을 만들 때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잡아 내려 하고, 공간을 잘 설명할 뿐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행위를 지시하려 하죠. 또한 임프레션 자체가 최종 성과물이 아니라, 그걸 만드는 과정이 설계를 계속 진행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실제 공간감을 봤을 때 어떤 일상적 혹은 찰나적인 경험을 하게 될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약현과 메모리얼의 관계를 보여주는 두 개의 단면과 평면이 가장 중요한 전달 방식이었다고 봐요. 도시 전체와 메모리얼의 관계를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아치가 동서양의 합일적 구조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가 말해온 ‘산수전략(山水戰略)’을 통해서 추구하고 전달하려는 것은, 동양의 특이성이 아니에요. 그보다 서울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동서구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쉽게 얘기하면 코스모폴리탄적 접근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좀 더 구축적이고 구조적이고 통합적인 면이 필요하다는 거죠. 잘 아시겠지만, 자연은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만 봐도 로맨티사이즈(romanticized)되는 것이지요.

 

 얘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설계 과정에서 너무 천주교적 어휘라든지 종교적 색채가 강한 것은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런 것도 보편적 정서에의 호소나 도시 맥락에서의 메모리얼의 장소성 등을, 성인에 대한 추모 공간 못지않게 중요시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좀 의외였던 것이, 우리 임프레션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들은 기념 성당의 임프레션을 두고 ‘모스크(mosque, 이슬람교의 예배당)같다’는 의견을 낸 분들이 있단 말이었어요.

 

 (하하) 재미있습니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모스크가 성당으로 전용된 경우도 있었고, 돔과 서구 성당의 아치는 혼용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코멘트로 해석하자면, 우리 설계를 우호적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나올 수 있는 반응인 것 같은데요. 아이러니 하게도 일반 대중이나 신자들이 봤을 때는 아주 훌륭한 성당으로 보이는데, 건축 전문가가 ‘모스크 같다’고 해버린다면… 마치 “저게 산이냐 신사냐”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까. 사실 ‘○○처럼 보인다’는 코멘트는 비평에 있어서 가장 일차원적인 비평입니다. 일반 대중이 모르는 새로운 것을 봤을 때, 설명하기는 어렵고, 결국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무엇과 일치시키려는 손쉬운 표현, ‘미메시스(mimesis)’의 수준이죠.

 

 그런 코멘트는 참, 설계자의 그동안의 수많은 리서치와 노력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거죠.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공간 경험

우리가 이 설계를 통해 정말 전달하고 싶었던 공간적 경험은 뭐였나요?

 

빛이 만들어내는 공간감,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 아치가 주는 위아래 공간의 다양성 등등이라고 볼 수 있죠. 

 

저 같은 경우는, 기념 성당의 상부가 지상에서는 다시 장방형으로 규정된 메모리얼 공간이에요. 같은 레벨의 도로와 철로, 인도로 여전히 분주하게 도시의 일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 야외 미사를 올리게 되면, 바로 드러나 있는 메모리얼 공간 자체가 우리 도시에 없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봤어요. 넓게 보면, 성지 순례의 루트상에서 북동쪽의 철로 변을 지나 공원으로 들어와 숲을 지나고 갑자기 확 열리며 홍예의 구조가 지형으로 드러나 있는 메모리얼을 만나게 되는데,이러한 시퀀스가 단순히 슬픔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밝음, 기쁨, 존경 등을 느끼도록 할 것이라고 봤어요. 그리고 지상에서 시작해서 기념 성당의 윤곽을 돌아 지하 3층의 성당 입구까지 연결된 램프인 ‘십자가의 길’도 일반 신도들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길일 것이라고 믿었고요.

 

저도 역시, 성당의 지붕을 야외 미사나 행사시 개방해서 미사집전 제대로 쓰이게 하는 것이었어요. 마치 사직단처럼, 성당의 지붕이 곧 단이 되는 거죠. 보통 서구의 성당들에서 볼 수 있는 오브제로서의 성당과 열린 광장의 관계가 아닌, 성당의 지붕이 곧 광장의 역할을 하는, 새로운 수직적 관계를 만들었죠. 꼭 우리가 ‘서구와 달라야 해’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기보다는, 이 사이트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최대한 존중하다 보니 나오게 된 원형의 재해석이었어요.

 

끝내는 심정

이 설계공모 마감일이 6월 23일이었는데, 마침 그 새벽에 월드컵 2차전 경기가 있었죠. 그래서 사무실에서 다 같이 밤을 샜는데. 어떠셨어요. 끝냈을 때의 느낌은?

 

느낌은 딱 치치 메모리얼(Chichi Earthquake Memorial International Competition, Taiwan)을 끝냈을 때의 느낌?

 

우리가 된다? (하하)

 

뭐. 된다… 라기 보단 (하하) 되고 안 되고야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깐. 그땐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이미 굉장히 흐뭇했었죠. 이번에도 역시 ‘당선과 상관없이 꽤 훌륭한 프로젝트가 나왔다’라고 자평할 수 있을만큼 과정도 정말 좋았고요. 그 안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선입견 없이 봐주기만 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안되더라도 뭐 우리 자체의 의미 체계를 세운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죠. 치치-홀로코스트메모리얼-그리고 서소문밖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메모리얼 계보라고 생각하는데….

 

그 셋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쉽지는 않지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역시 하나의 큰 할로우 스페이스(hollow space)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공간을 넘나드는 빛과의 관계. 거기서 오는 소피스티케이션(sophistication, 섬세하면서 정교하고 우아한). 우리가 그 계보를 의식하며 설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세 프로젝트는 서로 비슷하지만 매번 다른 진전이 있지 않았나. 

 

항상 우리는 그런 기념 공간을 만들 때 현상학적인(phenomenological)공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나 싶어요.

 

 맞아요.

 

규정하거나, 쉽게 연상하거나 연결시킬 수 있는 형상의 사용을 지양하면서, 시스템으로부터 도출된 최소한의 프레임 내에서 이용자가 빛, 소리, 새 등 찰나의 여러 현상을 통해 경험을 증폭시키기를 원했어요. 기회 되면 이걸 주제로 한 글을 써도 재밌겠네요.

 

 우리가 89개 팀 중 7팀의 파이널리스트 안에 포함되었잖아요. 그래서 공개 발표 전날 오후 늦게 연락을 받고 준비를 해서 다음날 발표를 했죠. 제가 했었는데 어떠셨어요?

 

 아 뭐, 발표는 잘 했고요. 다만 질의응답을 통해 우리 안의 또 다른 면들이 좀 더 노출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해요. 발표에서 지붕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굉장히 자세하게 설명을 했는데도 심사위원들로부터 지붕이 과연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만 계속 받았죠. 우리가 구조 전문가와 협업을 통해 충분히 설계를 했고, 충분히 지을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 지붕이 새로운 형태의 구조도 아니었잖아요. 개인적인 판단보다는 차라리 지붕에 대한 토론이 있었

다면 우리의 당선 여부를 떠나 뭔가 얘기거리가 남는 건강한 방식이 아니었겠나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설계공모에 있어서 당선의 의미(서소문밖의 경우)

우리에게 설계공모 당선의 의미는?

 

당선은 ‘또 다른 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설계공모란 새로운 어젠다를 만들고 클라이언트와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 설계 조건을 해석하고 공간 어휘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기회인 거죠. 만약 금전적인 어려움만 없다면 난 당선이 되든, 되지 않든 상관은 정말 없어요. 다만 당선까지 된다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잘 반영해서 또 잘 만들어야죠. 갈수록 드는 생각은, 당선은 우리가 힘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당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모의 성격과심사위원, 진행 방식 등을 잘 살펴서 참여할 게임과 안 할 것을 잘 선택하는 일이지 않나 생각해요. 이것이 잘 준비된 공모인가. 클라이언트는 잘 지을 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심사위원과 진행 주체들은 비교적 공정한가. 혹은 우리한테 유리한지 등을 이제 고려하게 되었죠. 우리가 서울에 처음 들어와서 무작정 모든 공모에 달려들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적어도 이러한 ‘판단’의 단계를 거쳐 참여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난 8년 동안의 성장이라고 할까요(하하).

 

박윤진은 하버드 대학교 GSD를 졸업하고 Sasaki Associates, West 8등에서 실무를 쌓고 치치 지진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 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 대학교(2008, 2010), 오하이오 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 대학교(2012)등에서 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GSD 졸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았다.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놀튼 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온 글림처특훈교수(2011)로 임명되어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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