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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로마, 헬레니즘을 만나다- 키케로의 증언
  • 환경과조경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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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던 킨키나투스가 로마 원로들과 만나는 장면. 후안 안토니오 리베라(Juan Antonio Ribera)의 1806년 작품,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63

농자 로마지 대본

 

중국 고사에 현인들이 농사를 짓다가 재상으로 등용된 사례가 종종 전해진다. 고대 로마에도 그런 고사가 있다. 로마의 군자軍者이자 농자였던 킨키나투스Cincinnatus(B.C. 519~430) 역시 밭을 갈던 중 로마 원로들이 모셔다가 독재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독재관이란 외침 등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임명되는 임시직으로서 절대적인 통수권이 주어졌지만 임기가 6개월로 제한되어 있었다. 킨키나투스 장군은 불과 16일 만에 외적을 물리쳐 임무를 완수했다. 시민들은 장군이 그대로 눌러앉아 권력을 휘두를까 은근히 걱정했으나 그는 곧바로 밭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후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덕목을 상징하는 인물로 길이 추앙되었다.1 킨키나투스 장군의 연대가 말해주듯 지금 우리는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가 시작되었던 무렵으로 더듬어 가고 있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도왔던 건국 공신들이 있었다. 이들이 파트리키라는 귀족층을 형성하고 원로원이 되었으나 본업은 모두 농자였다. 로마인들은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로마가 농경 사회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힘겹게 일하는 농자야말로 고귀한 로마인의 유일한 직업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 사실은 우선 원로원을 비롯하여 모든 로마의 정치가, 법관들이 녹봉 없이 근무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신흥 세력으로서 로마 토착 세력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뚫고 마침내 성공한 키케로의 경우, 로마 근교 아르피눔―지금의 아르피노(Arpino)―에 있는 자신의 빌라를 찾을 때면 가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내 선조들의 근본이 있고 그들이 찾던 성소가 있으며 곳 곳에 그들의 자취가 가득하다.”2 거대한 제국의 건설, 전쟁과 뛰어난 군사력, 엔지니어 기술, 콜로세움의 전투사들, 웅장한 건축물 등 지금 우리가 로마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로마 문화의 꽃이라면 그 뿌리는 농업이었다. 이는 로마의 유력한 사상가들이 농업에 대한 저술을 적지 않게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그 중 네 명의 작가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최초로 농업서를 집필한 인물은 ‘대大 카토Marcus Porcius Cato(B.C. 234~149)’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정확한 집필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개 기원전 170~6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로부터 백 년도 넘게 지난 기원전 37년경,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B.C. 116~27)라는 인물이 농업론 혹은 농사론De re rustica을 집필했고 그로부터 또 다시 백 년가량이 흐른 뒤 콜루멜라Columella의 방대한 농사서De re rustica libri 13권이 발표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는 팔라디우스가 14권 분량의 ‘농가월령가’3를 지었다. 그 중 처음의 두 작가, 대 카토와 바로의 작품을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 카토의 농업론의 경우, 시대적으로 보아 로마의 토지 분배에 큰 변화가 있던 때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 로물루스 왕이 국가를 세운 뒤 모든 로마인들에게 공평하게 농토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가구당 약 1,700평 정도의 규모였다.4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작은 땅이었으나 공용지가 있어 모자라는 분량은 거기서 충당했다. 이렇게 소규모 의 농토를 나눠주던 전통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과 함께 소농 기본의 원칙이 무너지고 대지주 세력이 형성되었다. 점령한 땅은 일단 국유지5로 지정되었으나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농지 시스템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유지에 대한 처분 법을 제정하고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즉 땅을 분배하고 관리·감독하기 위해 ‘감찰관’이란 직분을 만들었다. 이 감찰관이 원로원들 사이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자기들끼리 토지를 나눠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 카토는 재무관, 법무관, 원로원, 집정관을 거쳐 감찰관을 고루 지낸 정치가였다. 불어난 토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농업론은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야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제안으로 점철되어 있다. 결국 땅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자는 투자 제안서이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도시 개발로 한몫 챙겼을 터다. 서문에서 그는 농업이야말로 상업이나 금융업에 비해 유일하게 정직하고 명예로운 수입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노예 매매와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여기서 얻은 수익을 다시 토지에 투자했으니 모순될 것 없다는 주장인 듯하다. 그러므로 카토가 농업서를 집필한 진정한 이유는 투자 사업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을 농사꾼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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