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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
The Age of AI
  • 환경과조경 2016년 4월

몇 년 전 ‘디지털 미디어 시대, 전문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주제로 해외 저명잡지의 편집장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조경 문화 발전소가 될 것을 다짐하며 새로운 30년의 시작을 힘차게 준비하던 때였다. 당연히 (순진하게도 동종 업계에 몇 십 년 몸담고 있는 그였기에) 어려운 시기이지만 놀라운 혜안으로 희망 섞인 방향을 제시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문지를 매개로 활발했던 담론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종이 잡지의 미래는 불투명하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낯선 언어의 원고로 돌아왔다. 물론 담론이 사라진 것이 디지털 미디어 탓은 아니다. “다들 살기에 급급해 보인다”는 그의 관찰은 충격적이었다. 소위 디자인 선진국의 상황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데 놀랐던 것일까.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리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면서 왜 이 일이 떠올랐을까. 자신만만했던 이세돌이 1국에서 패배하면서 모두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정신노동이나 창의적 사고의 분야 역시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나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분야라고 생각했던 ‘설계’도 인공지능의 영역이 될까? “엄청나게 많은 양의 요구 조건을 넣으면, 거기에 딱 맞는 설계안을 5분 안에 뽑아낼 듯.” 누군가의 답이다. 설계를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의 설계가 인간의 설계를 대체하지 못하란 법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원리에 대해 무지한지라 알파고도 이번 달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안세헌 교수가 말했듯이 끊임없이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하면서 인간의 직관과 우연의 산물인 창의적 설계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런데 안세헌 교수는 기술의 진보와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설계하는 과정과 방법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름대로 체계가 세워졌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직관 능력이 점점 사라졌다. 항상 새로운 변화―CAD 설계, 친환경적 설계, 생태적 설계, 참여적 설계, 감성적 설계 등 수많은 패러다임―가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다.” 사실 크든 작든 기술의 진화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시나브로.


“우리 때는 기자가 도면 배달도 했어.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려진 도면을 설계사무실에서 받아와서 몇 퍼센트 축소할지 계산하는 게 기자들 일이었지. 출력소에서 축소 복사를 해 도면이 들어갈 자리를 남겨둔 필름지에 앉히는 거야. 이때 도면을 깨끗하게 쓰고 설계사무소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 관건이었어. 요즘은 이메일로 주고받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이야!”


햇병아리 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재미있게 (백 번쯤!) 들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의 잡지사 풍경이다. 요즘 같으면 클라우드와 메신저로 불과 몇 십 초 만에 자료를 받은 후 일러스트레이터와 인디자인 프로그램에서 디자이너의 마우스 클릭 몇 번에 끝날 일이다(기술은 발전하는데 야근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현실은 미스터리다). 나 역시 잡지를 인쇄하는 데 필름을 쓰지 않게 되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목도했다. 10여 년 전까지 출력소의 라이팅 박스에 필름을 올려두고 교정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간단한 수정은 고칠 부분의 필름을 칼로 오려내고 다시 그 모양대로 조각 필름을 붙이는 일명 ‘따붙이기’를 했다. 그러면 전지 사이즈의 필름을 새로 뽑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따붙이기’를 정교하게 못하면 인쇄된 잡지에 칼자국이 남기도 했다. 이런 번거롭고 추가 비용이 드는 작업을 피하기 위해 소위 ‘대세에 지장이 없는’ 실수쯤은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필름을 쓰지 않고 디지털 파일에서 바로 인쇄판을 뽑는 과정으로 넘어가게 되니 마지막 순간까지 눈치 보지 않고 교정을 볼 수 있다.


기술의 진보가 잡지 제작에 들어가는 물리적인 수고를 많이 줄여 주었다면, 기자들의 핵심 업무라고 할 수 있는 기획 및 취재와 기사 작성에는 변화가 없을까? 기획과 취재는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된다. 구글 번역기는 낯선 언어로 된 정보도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구글과 네이버는 핵심 취재원이 된 지 오래다. 동시에 종이 매체는 디지털 미디어와 경쟁하고 있다. 전문지는 실시간으로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디자인 포털 사이트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미 종이 매체는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다. 따라서 기획과 편집은 웹사이트가 제공하는 정보 이상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다.


요즘 쏟아지는 기사 가운데 상당수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향후 없어지게 될 직업군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측이다. 그리고 향후 20~30년 내에 없어질 직업 순위에 기자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 로봇 저널리즘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 시작되었는데, 알고리즘으로 기사를 생산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로봇 기사에 대한 신뢰도 가 인간이 쓴 기사에 대한 신뢰도 못지않다고 한다. 앞으로는 미모의 안드로이드 기자가 나를 대신해 조경가 인터뷰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단한 지능의 로봇이 없어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각 기관에서 배포하는 보도 자료를 가감 없이 지면에 옮겨 놓는다면 굳이 인간 기자의 손을 거칠 필요도 없다. 혹은 건강한 비판을 거부하고 유리한 기사만을 원하는 일부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기자란 직업이 필요할까?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빅데이터에 의한 통계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지난 2014년 1월, 『환경과조경』은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면서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세계적 동시대성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기지’, 이 세 가지 비전을 지향한다고 천명했다. 인공지능에 내 업무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비전이 나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음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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