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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하우젠 정원의 라 그로테
  • 환경과조경 2003년 9월
 이번 여름 필자는 모든 것에 우선해서 그녀의 마지막 영혼을 보기위해 조금은 무거운 마음과 조금은 설레는 맘으로 하노버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유리 진열장에 담겨 있는 듯 했고 햇살이 좋았다. 끝없이 길게 늘어선 알레를 뒤로하고 들어선 곳. 써프라이즈 ! 거기에는 괴암도 없었고, 동굴도 없었다. 그대신 바로크 양식의 매우 조화롭고, 완벽한 비율로 세워진 자그마한 건물이 잘 가꾸어진 정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는 마치 하나의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이태리의 타롯정원을 연상케 했으며, 특히 내용을 감히 추측할 수도 없는 외형디자인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타롯정원의 정문을 떠오르게 했다.
  니키의 오랜 동료이자 협력자였던 건축가 마리오 보타는 타롯정원 정문을 설계하면서 정원의 비범한 마술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정원은 하나의 고립된 섬으로 남아주길 원했고 정원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외부의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의도했었다. 가로로 길게 늘어선 거대하고 육중한 벽사이로 둥근 입구만 있을 뿐이었다. 기대에 차서 바라본 동굴이라는 곳은 타롯공원의 입구 이상의 실망감을 주는 듯 했지만 이는 잠시, 작지만 결코 작지않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스미는 것을 느끼면서 조심스레 다가 갔다. 탄탄한 구성과 니키의 특허품격인 유리 창틀이 니키임을 말해주었고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입구의 첫 번째 공간을 들어서면서 난 한번 더 숨을 들이쉬며 이내 쓰러질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타롯정원에서 느꼈던 거대함과 웅장함, 화려함과는 또 다른 삶의 깊이와 니키의 영혼이 그곳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니키는 이곳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아니면 무엇을 가지고 가고 싶었을까.
 La Grotte - 동굴 헤른하우젠에 위치한 정원과 역사적 동굴인 라 그로테는 1638년 백작 게오르그가 궁전 살림용으로 농장을 건설하게 되고 이후 백작 요한 프리드리히가 이 건물을 1666년에 여름궁전으로 증축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큰 정원 "그로센 가르텐"의 시초였다. 이후 궁전을 확대하면서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그로테(동굴)와 그러쎄 카스카데(큰 폭포)가 건축되었다. 이후 백작이 사망하자 그의 아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정권을 물려 받게되었고 아우구스트와 그의 아내 소피는 정원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들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이때 세워진 건축물들이 정원극장, 누보 쟈르뎅, 큰 지하궁의 조형장식, 남쪽끝에 위치한 파빌리온, 그리고 갤러리 건물들이었다. 소피는 그의 글에서" 헤른하우젠 정원만이 우리가 자랑할만한 것이며, 이 정원이야 말로 실로 아름답게 잘꾸며져 있다"라고 남겼다. 그후 그녀의 아들 하노버 공작 게오르그 누드비히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 정원은 정기적으로 여름 궁전으로서 화려한 축제행사를 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불가피한 긴축재정과 관리소홀로 점차 몰락하게 되었는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오히려 잘된 운명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새로운 취향에 따라 바로크풍 정원을 풍경정원으로 리모델링하였는데, 이를 피해갈 수 있었고 이로인해 원래 바로크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인플레이션, 자금의 가치 하락 등으로 정원은 몰락하게 되고 결국 하노버시는 1936년에 정원을 구입하여 복구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창조적인 기념물 보존"이라는 이념에 따라 현존하는 것들을 다시 복구하여 원상태로 다시 되돌리는 것 뿐만 아니라 정원에 다른 여러 가지 추가장식 요소들을 첨가하여 개선하였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전망 테라스, 미로정원, 특별정원들은 복구공사에 보여준 도시민들의 열정과 역사적인 헤 른하우젠 정원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영송
(주)소토대표(구송앤주)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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