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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조경가, 당신은 희망입니다
  • 환경과조경 2003년 9월

비개인 후, 강 건너 북한산을 바라보며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햇살을 봅니다. 며칠 전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햇살 볼 틈도 없었나 봅니다. 비개인 후의 하늘은 청명하고 그 하늘 자락 끝, 저 멀리 북한산도 가깝게 보입니다. 평소에는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북한산이 한 눈에 잡힐 듯 보이는 비개인 하늘을 보며 글을 씁니다.
어쩌면 곁에 늘 존재하는데도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북한산의 모습이 조경설계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설계란 작업은 비개인 후 문뜩 보여지는 북한산만큼이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 흐린 날 속에서 빛을 내는 잠깐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고생하는 이런 모습들은, 그 희열(?)감에 앞서 어쩌면 바보스러운 선택이 아닌지 모릅니다. 조경학과를 다니면서의 미래에 대한 염려나 갈등은 조경설계를 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계속되고 소위 소장이라는 이름의 대표자가 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강약이 다르고 내용의 정도만 다를 뿐.

조화로운 삶보다 특별한 것을 위해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조경설계를 계속해온 이유, 그리고 계속하는 이유는 거창한 내용도 아닌 조금은 우직하고 소박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조경을 시작할 단계의 업계 상황은 지금보다도 열악하여 조경설계란 식재설계가 전부인 것처럼 오식되어 소위 뺑뺑이 그리기를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배울 때의 거창한 미사여구와 치장과는 달리...
그래서 오기가 생겼었습니다. ‘조경의 본때를 보여주자’ 라고.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터를 닦아 놓고 밑바탕이 되게 하리라고...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땐 작은 소망도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도심지에 조그만 땅이라도 사서 멋들어지게 설계하고 멋들어지게 시공하여 조경가의 손으로 만든 작은 공원을 기증하여 조경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용하게 하는 그런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것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바다가 거기 있어서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는 시공 위주의 회사였고, 설계실이라는 이름속의 설계쟁이는 많은 생각을 담아 표현해내고, 멋이라는 것과 씨름을 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습니다.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도 싫고 그런 풍토에 안주하려는 모습도 싫어 이런저런 것을 핑계 삼아 편하고 인정받을 만한 곳을 과감히 떠나기로 했습니다.
주머니 돈을 탈탈 털어 사무실을 차린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사무실을 부산에 차렸느냐고. 내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바다가 거기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고 그 외엔 별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연고가 없었지만 부산의 생활은 멋보다는 맛을 느낄 수 있었고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일의 재미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기로 시작한 도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너의 무지에 대한 설득, 토목 전문가나 건축가와의 싸움(?), 공무원과의 한판(?), 직원들에게는 그들과의 싸움에서 절대 지지 말라고 호통도 치고 격려도 하고, 그 속에서 그래도 재미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어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설계사무소 대표로 살아가기
새삼스럽게 설계사무소를 내고 엔지니어링 협회에 등록하고 직원들과 토론하고 일을 하며 일과 연관된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가기. 좋은 결과물이 나오면 기분이 좋기 마련이지만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혼자서 판단해야 하고, 모두가 퇴근한 후 홀로 앉아 구상을 하기도 하고, 다 못한 일을 집에 가서 마져 하려고(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도면을 둘둘 말아 들고 가기도 하고, 이번일 끝나면 어디 여행이나 가야지 하는 생각이 일에 치여 매번 밀리고.... 그리고 이러한 싫은 일들도 있고...

싫은 일 힘들게 하는 상황
·이렇게 그려주십시오 하는 건축가의 주문
·옥외 공간에 공간 이름 작명을 요구하는 주문
·무슨 설계비가 그리 비싸냐며 경비도 안 되는 설계비 주는 이들
·도면 납품 후 코딱지만한 설계비 반쯤 깍자는 이들
·지난번 설계비 지금 줄테니 급히 도면 그려달라는 이들
·저 이번달까지만 일하겠습니다 라는 젊은 조경가(?)
·다시 일 할테니 월급 올려달라는 협상
·다시는 조경안하겠다며 홀연히 떠나 숨어 살 듯 다시 조경하는 젊은 조경가(?)
·이 회사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배우겠다고 하며 꼭 뽑아달라고 하더니 1년쯤 후 그냥 그렇게 직장인이 되어가고 있는 이들
·건축설계나 토목설계가들이 무진장 월급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매월 한차례 모여 자기 사장 소장 헐뜯고 욕하는 이상한 젊은 모임
·자기 자신의 실력 향상을 위해 절대 투자를 안 하는 이
·할일이 많은데 어쩔 수 없이 의뢰받은 일을 직원들에게 작업 설명하기
·평소에 바쁘다고 전화조차 못한 채 지내다가 심의 교수명단 보고 찾아가야 할 때

그렇지만 묵묵히 자기일하고 밤일하며 힘들어도 내색 안하는 젊은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입니다. 격주휴무하자 해놓고 그것을 빼앗는 내 자신이 밉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조경설계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조경일을 미워하기보다 사랑했고 힘들어하기보다 재미있어했고 벽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벽을 넘어보거나 뚫어 버리고자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언제나 자리를 펴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스스로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경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의 풍경
어느 날 작업 중인 프로젝트의 디테일 때문에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쉘터의 낙수물을 조절하는 레인체인과 배수구의 디자인이 필요했습니다. 레인체인(Rain Chain)은 낙수물이 물홈통 대신 낙수구에 걸어놓은 사슬을 말합니다. 물홈통을 따라 흘러내린 물은 보이지 않지만 의뢰인은 비오는 날 처마를 따라 흐르는 물이 눈에 보여지는 풍경을 원했습니다. 보통은 쇠사슬을 매달아 물 흐름을 유도하는데 기존의 레인체인은 그에 장식성을 더해 물이 흐르지 않는 경우에도 경관성이 있게 보여지는 제품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품 자체가 무겁고 물 흐름에 대한 저항이 커서 주변으로 물이 튀어나가는 문제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 흐름과 경관성을 고려하여 심플한 형태를 선택하고 시제품보다 굵기를 더해 심플한 형태로 제작 의뢰한 후 레인 체인과 바닥이 만나는 퇴수구의 디테일을 매만져야 했습니다.
레인체인에 연결되는 경우 퇴수구 위에 작은 자갈을 깔거나 트렌치에 직접 연결하거나 또는 물확을 놓아 물고임이 있게 하는 방법이 있지만 의뢰인의 대상지는 화강석으로 포장된 자리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모임공간이기 때문에 돌출된 물확의 설정은 어렵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마련된 일은 화강석 통돌에 퇴수구에 맞는 구멍을 뚫어내고 포장면과 일체화 된 놀이로 양각한 연꽃잎을 새겨 넣기로 했습니다. 마침 의뢰인의 정원엔 고풍스런 석등 몇 개가 있었고 그 형태는 교묘한 이중성으로 존재하였습니다. 비오는 날 레인체인을 타고 흐르는 낙수물이 연꽃잎을 따라 타고 흘러 들어가는 퇴수구의 모습은 비가 오지 않아도 비오는 날이면 더 궁금해지는 비오는 날의 풍경이 될 수 있습니다.
조경 디자인을 하면서 커다란 흐름은 엮어나가고 이어나가 그림을 그려나가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우리들의 눈높이나 발끝 앞의 풍경은 소홀한 것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커다란 흐름도 중요하지만 작은 디테일도 소중히 여기는 습관과 여러번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 듯 싶습니다.
내 앞마당, 길거리 광장 안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의 존재도 소중하지만 보도블럭 틈 그늘진 곳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개미자리의 흰풀꽃을 소중히 여길 줄도 알아야겠지요. 보도블럭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개미자리’의 아주 작은 흰꽃이나 무성한 풀섶 속에 보랏빛 웃음을 감추고 있는 깨알보다 작은 꽃을 피우는 ‘꽃마리’를 보신 적은 있나요.

한겨울, 봄을 기다리는 한 알의 씨앗을 생각하며
얼마 전 어느 학생에게 그의 미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고프다고 대답했습니다. 조경설계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지금 힘들더라도 그래도 참고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라고 하고 싶습니다. 먼 훗날 가서 다른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다음세대, 조경을 사랑하는 세대에 작은 밑거름이 되었다는 자긍심을 느껴 보십시요.
많은 날 연무에 끼여 보이지 않던 북한산이 비갠 후 눈에 확 들어오듯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자태를 드러낸 북한산을 보듯, 어쩌다 그런 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날들의 희열을 느끼는 그런 세상을 기대하며...
우리들의 앞날은 당신들이 희망입니다.


김정수 Kim, Jeong Su
(주)환경디자인 아르떼 대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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