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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공간
  • 환경과조경 2009년 4월
축구화, 슬리퍼, 쪼리, 스니커즈. 작은 신발에서 큰 신발까지 사이즈도 다양하고, 디자인도 다양하고, 당연히 색상도 다양했다. “조금 오래되고 낡고 더러웠지만”, 내가 신을 것은 아니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친구의 신발 상자는 보물 상자가 아니었을까.

그 지저분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였을까? “장가가면 버려야 겠지”라며 민망한 듯 뚜껑을 덮는 친구를 보면서,  ‘그럴거면 왜 그런 짓을 하니’라는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그 이상의 궁금증을 가져 보지는 못한 듯 하다.

그 친구의 괴상한 취미

신발은 모두 버렸다고 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와 새집 냄새가 나는 아파트에서 알콩달콩 재밌게 살고 있다며 안부를 전했다. 하지만,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있는 신창동 집에 가면, 일기장이며, 편지며, 영화 티켓이며, 버리지 않고 쌓아둔 시간의 흔적들이 너무 많아서, 모두 버리겠다는 어머니와 가끔 실갱이를 벌이기도 한단다. 나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취미라고 강변했다. 어쨌든 그 괴상한 취미 덕택에 우리에게는 이야기거리가 남지 않았는가.

그 조경가의 괴상한 설계

선유도에 가면, 기존 정수장의 “오래되고 낡고 조금 더러운” 철제와 콘크리트 벽체 등의 황폐한 시설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정수장 시설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새로운 벽돌과 나무, 첨단 디자인의 시설물들을 도입하여 아주 발랄한 공원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선유도는 운이 조금 나빴다. 조금 괴상한 취미를 가진 조경가들은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낡아 보이는 공원 안에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밤이 되면 연인들이 찾아 들었다. 또한 조경분야는 공원을 주제로 하는 전례없는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얻게 되었다.

기억은 머릿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유도는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12월에 폐쇄된 뒤 서울시에서 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개장이 되기 전까지, 그곳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거의 버려진 공간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에겐 그곳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선유도가 공원이 되어 돌아 왔을 때, 지난 시간의 흔적들은 신기하게도 공원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으며, 그 어떤 공간보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설계가의 의도와 노력대로 “역사적 맥락”의 표현이 물리적으로 잘 나타났다는 찬사를 받았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상도 받았고, 전문가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일등공원으로 손꼽아 주는 호사도 누리고 있다.

울퉁불퉁한 생살처럼 드러난 콘크리트 벽과 기둥, 지워지지 않는 물의 얼룩과 녹슨 자국이 전해 주는 것은 쓸모 없어 폐기된 산업의 잔재가 아니라 재료 자체의 물성이다. 그 물성은 또한 시간의 흔적을 가감 없이 노출시킨다. 노출된 물성과 그것에 녹아있는 시간의 이야기는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의 산업 재료와 새로운 방식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은 식물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문화와 함께 거주해 온 자연의 역동성을 물질적으로 전하고 있다. 직각 방향으로 공원을 가로지르며 선 한강전시관 앞의 녹색기둥의 정원은 물성의 노출을 통해 시간을 성찰하고 자연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반성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 정수지 위의 콘크리트 상판을 걷어내고 기둥만을 남겨 조성한 녹색기둥의 정원. 위층에서 산책하며 조감하면 일정 간격으로 늘어선 콘크리트 기둥의 조합이 마치 의도된 조각 작품처럼 경험되지만, 램프를 따라 아래층에 내려가 부감의 형식으로 콘크리트 기둥을 대면하면 이곳에 남겨진 시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둥 하단부를 따라 감겨 올라가기 시작한 식물은 콘크리트와 식물은 지극히 이질적이라는 선입관을 비웃으며 자연의 문화성을 잔잔히 웅변한다.
-배정한, 「시간의 정원, 발견의 디자인 : 선유도공원이 전하는 말」, 환경과 조경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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