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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풍경은 없다(2)
  • 환경과조경 2009년 3월
빠이(Pai), 하이(Hyperlink, Hybrid 그리고 Hi)의 장소성

국인이 ‘멍’ 때리는, 유토빠이

빠이는 유토빠이(UtoPai)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치앙마이의 한국인 민박집에서 만난 한 배낭여행자는 빠이의 홍보대사를 자처해, 만나는 모든 이에게 ‘빠이 방문’을 권했다. “ 그곳의 무엇이 좋으냐?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요즘 말로 ‘멍 때리는 곳’이라고 간단히 정의한다. 다른 말로 하면 휴식하는 곳,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곳, 빈둥거리는 곳, 그냥 죽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영어로는 ‘killing time’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별 이유 없이 길을 서성이고 강가에 누워 책을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그렇게 각종 인종이 멍 때리기를 하는 곳이 빠이, 유토빠이다.

돌면서 ‘Hi’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무엇보다 즐기는 일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20분이면 충분한 마을의 길을 맴도는 것이다. 네모난 마을의 처음과 끝이 따로 없이 연결되어 있는 길을 그냥 맴도는 것이다. 길을 맴돌면서 길거리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점심도 먹고, 좌판 물건을 구경하고 잠깐 잠깐 길에서 펼쳐지는 공연도 구경하고. 돌 때마다 다른 노점상이 나타나고 다른 이벤트가 있어 맴도는 것이 지루하지 않다.

계속 맴을 돌다보니 보는 이들을 계속 보지 않을 수 없다. 영어로 ‘하이(Hi!)’ 태국어로 ‘싸왔디 캅(카)!’. 그러면서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통성명도 하게 된다. “또 만났네”, “그런데 너는 얼마나 빠이에 있을 거야?”, “다음 여행지는 어딘데?” 물론 “Where are you from?”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관계가 더 발전되면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늘은 뭘 하면서 하루를 보냈어?”, “어제는 왜 안 보였는데? 궁금했잖아”, 어떤 이는 맴을 돌다 친해진 노점상의 옆에 주저앉아 장사를 돕기도 한다. 이곳을 안내하는 많은 정보들이 ‘프렌드리(friendly)’를 자랑거리로 내세우는데, 그럴 만도 하다. 겔Jan Gehl은 우연한 만남이 거듭되다보면, 눈인사를 하게 되고 그러다 친구가 되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의 이론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2008년 봄, 우연히 찾은 빠이의 매력에 빠져 네 달에 한 번씩은 찾고, 올 때 마다 보름 이상은 머문다는 한국 여자 분은 길에서 만난 미국인에게 “언제 다시 왔어?”라고 정말 ‘프렌드리’하게 인사를 한다. 그들은 이웃이다. 혼자 여행을 하는 이들은 모두가 이방인인 이곳에서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이를 만나고 다정함을 느끼고 소속감을 갖는다. 모두가 혼자이기 때문에 섞이는 것이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틀 머물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어 2주일, 2주일만 머물겠다는 계획을 바꾸어 2개월, 2개월만 머물겠다는 계획을 바꾸어 2년. 그리고 그냥 주저앉기도 하면서 빠이오니어(paioneer)가 된다. 프랑스인, 미국인, 영국인이 아니라 파리지앵, 뉴욕커, 런더너이듯이 말이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그냥 그 장소의 일원으로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도 멍 때리면서.

이퍼링크(Hyperlink)는 하이브리드(Hybird)를 부르고

신기하지 않은가? 수많은 발길이 잠깐 멈추어 이곳을, 이곳의 오묘한 장소성을,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그것도 산속 오지에다 말이다. 하이퍼링크의 시대이기에 가능한 하이브리드의 장소성이라고 감히 정의해본다. 인터넷과 로밍한 전화와 ATM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을 또 세계 각지로 하이퍼링크 시킨다. 이들이 묻혀온 다양한 문화는 ‘Hi’를 매개체 삼아 서로 뒤섞여 빠이를 만들었다.

근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비평적 지리학자 마세이(Doreen Massey, 2003, The conceptualization of place(in place in the world))의 “이 세상 어디에도 원주민은 없다”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글로벌 시대의 장소와 장소성이라는 시대적 화두에, 뿌리내림이나 고착성과 같은 장소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 방식에서 벗어나 흐름, 이동, 연결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답한다. 또 최정민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2008, 현대 조경에서의 한국성에 관한 연구)에서 한국성이라는 것도 어떤 운명적인 자연이나 전통이 아니라 발견적이고, 생성적이고 전략적인 것이라면서 열린 태도를 강조했는데 ‘한국성’을 ‘빠이성’이라고 치환해보면 그의 진의가 보다 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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