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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자격을 논할 자격
  • 환경과조경 2025년 3월호

과제

심사는 일종의 대의(代議) 과정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은 대체로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단순화하자면, 공공의 장소가 복무할 대상은 시민 일반이고 전문 집단은 그들의 대의자로 선출되어 계획안에 대한 심사를 수행하는 것이나, 현실에서는 그 사이에 수많은 간극이 존재한다.

 

시민 사회가 충분히 배양되지 않았던 과거 한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설계공모는 주로 국가를 표상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심사위원의 역할 또한 그러한 목표로 수렴되었다. 지금과 같이 작고 일상적인 공공의 영역까지 디자인 경합을 통해 계획하는 것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시작된 일이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의 전면적 시행에 따라 점차 늘어난 설계공모는 2019년 시행 의무 기준액을 설계비 2억원에서 1억원으로 하향 조정하면서 그 시행 건수가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다. 과거에는 그 공간들을 향유할 시민들에 앞서 행정의 편의와 기관장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발주 기관 내부에서 심사위원이 위촉되기도 했으나 그러한 경향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가격 입찰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좋은 품질의 설계안으로 공공의 공간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 사회와 행정 및 전문가 집단에게는 그만큼의 설계공모 심사를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소화해 내야한다는 벅찬 과제가 부여됐다.

 

제도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은 최근 몇 년간 개정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심사와 관련된 조항에 개정이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빈번하게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의 심사에서 여러 문제와 한계가 발견됐다는 걸 말해준다. 가장 최근의 변화는 2023년 4월 개정안(국토교통부고시 제2023-180호)으로, 1)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한 가능(설계비 20억 이상일 경우), 2)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 의무화, 3) 심사 횟수 총량제 등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각주 1)

 

이 중 2번 항목은 지난 2017년 8월 개정된 평가사유서, 투표 및 채점 내역 등 심사 자료 전반에 대한 공개 규정을 더욱 확장한 것으로, 현재의 기술적 환경에서 고려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도입한 것이다. 평가 자료 공개는 투명성 및 심사의 질적 수준 제고 등 여러 긍정적 효과를 의도하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오히려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실망스러운 심사의 이면이었다. 빈칸 또는 ‘의견 없음’으로 기재된 평가사유서들이 SNS에 공유되며 그 부실과 무성의함이 공분을 산 것이다. 개정 2년 후 조달청은 평가사유서의 최소 분량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평가 내역의 내실화가 어느 정도까지 개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내역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남아 있으며 공개를 강제하거나 사유서의 수준을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높이게 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과 수단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 자료에 대한 판단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서 공개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좁게는 응모자에게 피드백 용도로 제공된다면, 굳이 누구나 접근 가능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함축적으로 작성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 일반에게 대의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평가사유서는 함량 미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의 도입은 이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의자로서 전문가는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에게 어떤 계획안이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나, 그런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평가 내역과 마찬가지로 실시간 중계를 수행하지 않는 다수의 공모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강제하거나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뾰족한 방법을 지금으로선 찾기 어렵다.

 

환경과조경 443(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장영호,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안’, 4월 1일 시행”, 「건축사신문」 2023년 3월 30일.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설계경기 기록원인 스코어러(www.scorer.co.k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건축 디자인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으며,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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