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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코펜하겐,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 관계의 도시
  • 환경과조경 2025년 2월호

2025년 1월은 한 해를 새로 시작하는 설렘과 들뜬 기분이 전혀 없는 달이었다. 세간에 떠도는 ‘계엄성 수면 장애’나 ‘내란성 집중력 저하’ 같은 신조어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절, 2월호를 여는 이 지면을 마감 직전까지 도통 채울 수 없었다. 편집부 기자들과 표지 후보안을 놓고 토론을 벌여 최종 선택을 하고 난 뒤, 에디토리얼 글감이 전혀 안 떠오른다고 한참 투정을 부렸다. 금민수 기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관계도시 어떠세요?” 연말에 나온 신간 『관계도시』(돌베개, 2024)를 다뤄보라는 뜻이었다.

 

어, 금 기자는 출간 한 달이 채 안 된 책을 내가 이미 읽은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어느 소셜미디어에 ‘이달의 책’으로 추천한 걸 본 걸까? 아무튼 체한 것처럼 꽉 막혔던 마음이 갑자기 뚫렸다. 그래, 답이 없을 땐 책이지. 그래, 책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요즘, 모처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은 책을 그냥 넘길 순 없지.


사나흘씩 세 번 방문한 게 전부지만, 다양성이 공존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대명사 코펜하겐은 언젠가 꼭 살아보고 싶은 도시로 내 버킷 리스트에 진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으로는 쉽게 풀기 어려운 의문이 하나둘 아니었다. 도시 대부분이 고밀한 저층 공동주택 일색인데 어떻게 세련된 도시 경관이 가능한 걸까? 도심 한복판의 강가에서 자유롭게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풍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산업 시설이 점유했던 항구와 수변이 어떻게 시민들의 여유로운 여가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도심에 주차장이 거의 없고 우버조차 없는 도시가 이 시대에 정말 가능한 걸까? 시민 50퍼센트가 자전거로 등하교하고 출퇴근하는 모빌리티 혁명이 어떻게 성공했을까?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거나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게 낯선 풍경이 아닌 비결은 무엇일까? 

 

일간지 주말판 한구석에 실린 『관계도시』의 출간 소식을 발견하고 서점으로 바로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의 겉모습만 경험했던 여행자의 궁금증이 단번에 해소됐다. 코펜하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박희찬이 쓴 『관계도시』는 정보 중심의 도시 안내서도 아니고, 이론 위주의 도시설계 해설서도 아니다. 이 책은 코펜하겐의 도시 정체성과 매력이 다른 도시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기보다는 ‘왜’ 다른지 드러내면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저자가 찾아낸 ‘왜’의 핵심은 책 제목에 강하게 박혀 있는 단어, ‘관계’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자 사람과 집단의 관계이며, 사람과 이념의 관계이자 사람과 도시의 관계다. 복합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관계의 성격을 명쾌하게 요약하는 말은 아마도 책의 부제인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일 테다. 즉 저자는 코펜하겐을 관통하는 도시성의 핵심을 ‘익명의 도시에서 조금은 덜 외롭고 모르는 타인과 이따금 연대하며 공동체의 삶에도 참여하는 일상의 관계’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도시의 일상과 주거 문화에 깊이 배어 있는데, 그 분위기를 대변하는 단어가 책의 첫 챕터에 나오는 ‘휘게(hygge)’다. 휘게는 덴마크어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이라고 한다. 휘게에 해당하는 말을 찾자면 편안함(coziness) 정도겠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뜻이다. 공간의 분위기는 물론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인 휘게는 덴마크 특유의 가구 디자인, 건축, 도시, 경관을 관통한다.

 

코펜하겐 특유의 공동주택 문화와 경관은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 관계”와 ‘휘게’의 공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생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협동조합주택과 사회주택, 오랜 전통을 가진 저층형 공동주택인 레케후스(rækkehus)(줄 지어 있는 집), 다용도 중정을 공유하는 집합주택 등에 관한 저자의 밀도 있는 설명과 섬세한 해석이 ‘관계도시’ 코펜하겐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이해하게 해준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자율 도시 ‘크리스티아나’의 존재가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거쳐 허용되었는지, 도시 확장 계획인 ‘핑거플랜’이 어떻게 도시에 자연을 제공하고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였는지 등 정독해야 할 부분이 차고 넘치지만, 스포일러를 염려해 소개를 아껴둔다. 단 하나의 문장만 뽑으라는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다면, 나의 선택은 책 표지 사진의 캡션이라 할 만한 다음 문장이다. “코펜하겐 하버는 사람들이 여름철 휘게를 함께 누리는 거대한 ‘공동의 거실’이다”(84쪽).


본지가 주최한 2024년 ‘조경비평상’의 가작 수상작 “몰링하는 도시생활자”를 이번 호 지면에 싣는다. 기록을 뒤져보니 수상자 권정삼은 2007년 조경비평상에 평문을 제출한 적이 있다. 17년 만에 다시 조경비평가의 등용문에 도전한 수상자에게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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