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신라 선덕여왕(각주 1)
사실 모험하는 기분이었다. 한국 여인들의 이야기도 함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 선덕여왕이었다. 아마도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선덕여왕’(2009)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드라마를 보기 전 선덕여왕에 대한 내 지식은 첨성대와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다 선덕여왕 드라마를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뭐야, 저게 다 신라의 이야기라고?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을 부추긴 근거가 있을 것이므로 검색해 가며 봤다.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한국사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데, 내 지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간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해 온 역사학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조사 중 정기호 교수(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퇴임)가 쓴 첨성대에 관한 논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경주 선도산에서 비롯해 동서로 뻗는 축과 동지 일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첨성대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석굴암과 경주의 축조물들은 극히 계획적으로 앉혀졌으며, 특히 첨성대는 국가 체계 수립 과정에서 왕도 건설의 의도적인 축 설정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석했다.(각주 2) 첨단의 도시계획이다. 정기호 교수를 통해 선덕여왕 이야기의 진정한 실마리를 찾았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신라의 왕도 건설은 언제 시작됐고 어떤 이념 하에 계획됐으며 선덕여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질문의 가닥이 잡혀갔다.
암탉이 울었다?
그리고 펼쳐 든 책이 하필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이었다.(각주 3) 알다시피 신라의 사기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영규는 『삼국사기』 등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처럼 신라왕조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엮어 펴냈다. 그중 제27대 “선덕왕실록”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객관적 서술 사이사이에 저자의 주관적 해석이 내비쳤다. 선덕여왕을 시름시름 앓기나 하던 무능한 여왕으로 묘사했다. 우선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선덕왕과 신라 내정의 혼란”이라고 부제를 붙인 것부터 수상쩍었다.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당했다는 것은 오랜 적대 관계였던 백제의 젊은 의자왕이 막강한 기세로 공격해 여러 성을 빼앗겼고 고구려와의 협상도 순조롭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백제의 침공도, 고구려와의 관계도 선덕여왕이 여자였다는 사실과는 무관했다. 그럼에도 당태종이 “너희들 은 여자를 왕으로 모셔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당하고 있다”고 시비를 걸어 온 것에 박영규라는 21세기의 인물이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감히 우리의 왕을 두고 도발을 서슴지 않은 당태종을 비판하고 꾸짖어야 마땅했다. 천사백 년 전에 죽은 당태종이 아직도 무서웠거나 아니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김부식은 사료(각주 4)에 바탕을 두고 삼국사기를 매우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덕(여)왕 편에서도 그는 학자의 객관성을 지켜 “선덕왕이 즉위했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등 여러 고서의 내용을 착실히 옮겨 적었다.
선덕여왕이 즉위 16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는 것까지 다 쓰고 나서 마지막에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신라의 여왕에 대한 사론’이라는 단락을 첨부해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여자를 받들어 세워서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에는 파리한 돼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경계하지 않을 만한 일이겠는가!”(각주 5) 암탉도 모자라서 돼지까지 등장시켰다. 심해도 정말 심했다. 이쯤 되면 유교적 사고 때문이라 하기도 어렵다. 여자 남자를 떠나 국왕을 이런 식으로 디스(디스리스펙트의 준말)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에도 분명 어긋난다. 그런데 신라의 여왕 세 명 중에서 유독 선덕여왕만 비판했다. 세 여왕 중 맏이니 대표로 욕을 먹으라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세 여왕 중에서 선덕여왕만 여러 사료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선덕여왕이 그저 여자 임금, 암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성조황고라는 칭호까지 받은 선덕여왕의 치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면 혹시라도 고려에 여왕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을까?
21세기의 작가 박영규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무덤 자리를 정했다고 설명하며 그것도 “좋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했다.(각주 6) “아니 왜?” 읽다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소리다. 박영규는 왜 좋게만 볼 일은 아닌지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9층 목탑 건립 등 무리한 공사를 강행한 것은 반정 세력에게 빌미만 제공한 꼴이어서 선덕여왕을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반정 세력, 즉 비담파가 반역을 꾀한 이유가 무리한 건설 프로젝트나 도탄에 빠진 민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어서”라고 했다는데,(각주 7) 그렇다면 선덕여왕 즉위 직후에 반정을 도모하지 않고 왜 16년 동안 잘 있다가 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반란을 일으켰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왕이 후사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후사가 없던 선덕여왕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견하고 사촌 여동생 승만(진덕여왕)에게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유지를 내렸을 것이다. 그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보고 은근히 기대했을 것이며 그것이 틀어지자 반란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여자 임금”은 이미 운명을 다 한 선덕여왕이 아니라 진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선덕여왕의 치세에는 이의가 없었으나 다음 왕은 내가 해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며, 김유신, 김춘추 등 여왕파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김유신이 반란을 진압했다고 하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시 선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과 안정적인 삼각구도를 이루며 통치했고 신라의 미래를 길게 내다봤던 것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 분황사, 영묘사 등 많은 사찰을 건립했는데 이는 왕의 불심이 너무나도 두터운 나머지 무리한 사찰 건설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신라만의 독특한 호국신앙에 근거한 장기적인 왕도 건설의 청사진이 있었으며(각주 8) 여왕은 실천의 주축을 이루었다. 왕도 건설의 청사진이란 곧 ‘불국토’의 구현이었다. 정원도시, 생태도시 등을 표방하는 것이 21세기적 도시설계의 이념이라면, 7세기 신라에는 불국토의 구현이라는 뚜렷한 이념이 있었다. 거대 담론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선덕여왕 즉위 시점의 주변 정세를 보면 사실 사면초가와 같아 호국이 절대적 과제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 서로 타국으로 이해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다. 당과의 관계도 복잡했고 백제와 친한 일본도 신라의 해안을 수시로 범했다. 아직은 세력이 작았던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기르고 한편으로는 줄타기 식의 아슬아슬한 외교 정책에 의존해야 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외교를, 김유신에게 군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나라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즉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온 힘으로 맡아냈다. 신라인들이 과연 선덕여왕이 갑옷을 입고 전장에 뛰어들어 외세의 침입을 몸소 막는 것을 바랐을까? 아닐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볼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당시에는 정치, 외교, 군사 외에도 종교가 국가적 핵심 사안이었다. 고대의 왕이 제사장 혹은 무왕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에게는 호국의 책임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불교적 호국의 상징적 존재였다. 신라인들이 호국을 오로지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종교에 더 크게 기댔다는 사실은 수많은 능과 사찰과 불탑의 존재,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입증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첨성대다.
* 환경과조경 442호(2025년 2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는 선덕왕으로 나타나지만, 모든 이들이 선덕여왕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에 따르기로 한다.
2. 정기호, “경관에 개재된 내용과 형식의 해석: 석굴암 조영을 통하여 본 석굴형식과 신라의 동향문화성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19(2), 1991, pp.23~31.
3.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1.
4. 김부식이 참고했다는 고서 대부분이 분실되고 없다는데 어떤 경위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5.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선덕왕, 신라의 여왕에 대한 사론.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480
6. 3번 책, p.293.
7.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신라본기, 선덕왕 본기.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010
8. 이에 관해서는 정기호 교수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