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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케이프] 신라 선덕여왕
  • 고정희
  • 환경과조경 2025년 2월호

두 번째 이야기: 신라 선덕여왕(각주 1)

사실 모험하는 기분이었다. 한국 여인들의 이야기도 함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 선덕여왕이었다. 아마도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선덕여왕’(2009)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드라마를 보기 전 선덕여왕에 대한 내 지식은 첨성대와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다 선덕여왕 드라마를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뭐야, 저게 다 신라의 이야기라고?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을 부추긴 근거가 있을 것이므로 검색해 가며 봤다.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한국사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데, 내 지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간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해 온 역사학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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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 왕도 건설의 축 대왕암에서 선덕여왕릉, 반월성, 첨성대에서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동지 일출선과 선도산에서 안압지로 연결되는 동서축이 교차하는 지점에 첨성대가 위치한다. 첨성대가 왕도 건설의 구심점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림 출처: 정기호, “경관에 개재된 내용과 형식의 해석: 석굴암 조영을 통하여 본 석굴형식과 신라의 동향문화성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 지』 19(2), 1991, p.25.

 

 

조사 중 정기호 교수(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퇴임)가 쓴 첨성대에 관한 논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경주 선도산에서 비롯해 동서로 뻗는 축과 동지 일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첨성대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석굴암과 경주의 축조물들은 극히 계획적으로 앉혀졌으며, 특히 첨성대는 국가 체계 수립 과정에서 왕도 건설의 의도적인 축 설정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석했다.(각주 2) 첨단의 도시계획이다. 정기호 교수를 통해 선덕여왕 이야기의 진정한 실마리를 찾았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신라의 왕도 건설은 언제 시작됐고 어떤 이념 하에 계획됐으며 선덕여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질문의 가닥이 잡혀갔다.

 

암탉이 울었다?

그리고 펼쳐 든 책이 하필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이었다.(각주 3) 알다시피 신라의 사기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영규는 『삼국사기』 등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처럼 신라왕조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엮어 펴냈다. 그중 제27대 “선덕왕실록”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객관적 서술 사이사이에 저자의 주관적 해석이 내비쳤다. 선덕여왕을 시름시름 앓기나 하던 무능한 여왕으로 묘사했다. 우선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선덕왕과 신라 내정의 혼란”이라고 부제를 붙인 것부터 수상쩍었다.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당했다는 것은 오랜 적대 관계였던 백제의 젊은 의자왕이 막강한 기세로 공격해 여러 성을 빼앗겼고 고구려와의 협상도 순조롭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백제의 침공도, 고구려와의 관계도 선덕여왕이 여자였다는 사실과는 무관했다. 그럼에도 당태종이 “너희들 은 여자를 왕으로 모셔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당하고 있다”고 시비를 걸어 온 것에 박영규라는 21세기의 인물이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감히 우리의 왕을 두고 도발을 서슴지 않은 당태종을 비판하고 꾸짖어야 마땅했다. 천사백 년 전에 죽은 당태종이 아직도 무서웠거나 아니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김부식은 사료(각주 4)에 바탕을 두고 삼국사기를 매우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덕(여)왕 편에서도 그는 학자의 객관성을 지켜 “선덕왕이 즉위했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등 여러 고서의 내용을 착실히 옮겨 적었다.

 

선덕여왕이 즉위 16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는 것까지 다 쓰고 나서 마지막에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신라의 여왕에 대한 사론’이라는 단락을 첨부해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여자를 받들어 세워서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에는 파리한 돼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경계하지 않을 만한 일이겠는가!”(각주 5) 암탉도 모자라서 돼지까지 등장시켰다. 심해도 정말 심했다. 이쯤 되면 유교적 사고 때문이라 하기도 어렵다. 여자 남자를 떠나 국왕을 이런 식으로 디스(디스리스펙트의 준말)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에도 분명 어긋난다. 그런데 신라의 여왕 세 명 중에서 유독 선덕여왕만 비판했다. 세 여왕 중 맏이니 대표로 욕을 먹으라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세 여왕 중에서 선덕여왕만 여러 사료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선덕여왕이 그저 여자 임금, 암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성조황고라는 칭호까지 받은 선덕여왕의 치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면 혹시라도 고려에 여왕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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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선덕여왕의 모습을 담아냈다는 설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21세기의 작가 박영규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무덤 자리를 정했다고 설명하며 그것도 “좋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했다.(각주 6) “아니 왜?” 읽다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소리다. 박영규는 왜 좋게만 볼 일은 아닌지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9층 목탑 건립 등 무리한 공사를 강행한 것은 반정 세력에게 빌미만 제공한 꼴이어서 선덕여왕을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반정 세력, 즉 비담파가 반역을 꾀한 이유가 무리한 건설 프로젝트나 도탄에 빠진 민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어서”라고 했다는데,(각주 7) 그렇다면 선덕여왕 즉위 직후에 반정을 도모하지 않고 왜 16년 동안 잘 있다가 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반란을 일으켰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왕이 후사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후사가 없던 선덕여왕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견하고 사촌 여동생 승만(진덕여왕)에게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유지를 내렸을 것이다. 그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보고 은근히 기대했을 것이며 그것이 틀어지자 반란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여자 임금”은 이미 운명을 다 한 선덕여왕이 아니라 진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선덕여왕의 치세에는 이의가 없었으나 다음 왕은 내가 해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며, 김유신, 김춘추 등 여왕파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김유신이 반란을 진압했다고 하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시 선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과 안정적인 삼각구도를 이루며 통치했고 신라의 미래를 길게 내다봤던 것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 분황사, 영묘사 등 많은 사찰을 건립했는데 이는 왕의 불심이 너무나도 두터운 나머지 무리한 사찰 건설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신라만의 독특한 호국신앙에 근거한 장기적인 왕도 건설의 청사진이 있었으며(각주 8) 여왕은 실천의 주축을 이루었다. 왕도 건설의 청사진이란 곧 ‘불국토’의 구현이었다. 정원도시, 생태도시 등을 표방하는 것이 21세기적 도시설계의 이념이라면, 7세기 신라에는 불국토의 구현이라는 뚜렷한 이념이 있었다. 거대 담론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선덕여왕 즉위 시점의 주변 정세를 보면 사실 사면초가와 같아 호국이 절대적 과제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 서로 타국으로 이해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다. 당과의 관계도 복잡했고 백제와 친한 일본도 신라의 해안을 수시로 범했다. 아직은 세력이 작았던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기르고 한편으로는 줄타기 식의 아슬아슬한 외교 정책에 의존해야 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외교를, 김유신에게 군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나라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즉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온 힘으로 맡아냈다. 신라인들이 과연 선덕여왕이 갑옷을 입고 전장에 뛰어들어 외세의 침입을 몸소 막는 것을 바랐을까? 아닐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볼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당시에는 정치, 외교, 군사 외에도 종교가 국가적 핵심 사안이었다. 고대의 왕이 제사장 혹은 무왕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에게는 호국의 책임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불교적 호국의 상징적 존재였다. 신라인들이 호국을 오로지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종교에 더 크게 기댔다는 사실은 수많은 능과 사찰과 불탑의 존재,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입증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첨성대다.

 

첨성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한 조선의 시인들

첨성대는 천문을 관찰하는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천문대치고는 그 형태가 기이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라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 적어도 네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기능에 관한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우선,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였다는 설이 주도한다.(각주 9) 그러나 천문을 관찰하 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게 설계됐다는 의견도 대두되었다.(각주 10) 그러므로 다른 기능도 있을 것이라 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저 별을 관찰하는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각주 11) 즉 천상열차분야지도 등의 별자리 지도를 땅에 투영해 주요 시설을 각 별 자리에 배치했는데, 그 중심에 첨성대를 앉혔다는 해석이다. 정기호의 교차축 이론에 천문의 관점에서 새로운 레이어를 얹은 것이다. 고대의 천문 의존도를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젠더적 해석도 있다. 호리병 같은 형태와 상부에 얹은 사각형의 틀이 우물을 닮았고 그것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라의 “토착적 여신신앙에 뿌리를 둔 성스런 건축물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각주 12) 즉, 첨성대는 선덕여왕을 직접적으로 상징한다는 논지다. 같은 여성으로 서 여성을 성적 특성에 제한하는 것은 자승자박이라 마땅치 않은 해석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첨성대가 ‘도리천’으로 가는 통로라는 기상천외한 설이다.(각주 13) 불교의 세계관을 보면 우주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위의 하늘을 일컬어 도리천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덕여왕 자신이 바로 그 도리천에 자신을 장사 지내라고 지시한 바 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다. 선덕여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짐이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지시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라고 했다.”(각주 14) 지금 선덕여왕 능이 바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여왕의 혼이 49일 만에 능에서 일어나 첨 성대를 올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고 도리천으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첨성대는 수미산이 되는 셈이다. 여왕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 신화가 부럽지 않은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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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고대에는 천문을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대만 하나 쌓으면 족했는데 굳이 이렇게 독특한 형태의 탑을 지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그 의미와 기능이 해독되고 있으며 그 작업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세월을 이기고 조선 중후기까지 면면히 전해져 내려왔다는 사 실이다. 서거정(1420~1488), 김세렴(1593~1646), 조수삼(1762~1849), 김매순(1776~1849) 등 조선의 여러 시인이 첨성대에 다녀와서 지은 시들이 남아 전해진다. 예를 들어 서거정은 첨성대 아래에서 신라 시대의 춤과 노래로 선덕여왕의 영혼을 위로했더니 도리천을 갔다 오는 꿈을 꾸었다는 글을 남겼다. 19세기 중엽에는 조수삼이 첨성대 계단을 오르면 계단이 끝나면서 허공의 층계가 이어진다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각주 15)  어떻게 된 일인가. 이들은 모두 유학자였지만 동시에 시인으로 명성이 높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첨성대가 하늘로 가는 길이라 노래하고 있다. 네 시인의 연혁을 보 면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동무해서 같이 놀러 갔다가 취기에 지은 시가 아니다. 서거정과 김매순 사이에 삼백 년 이상의 세월이 놓여 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첨성대 축조의 의미가 정말 그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적어도 19세기 중엽까지 하늘로 가는 계단이라는 첨성대의 의미가 전승됐다는 뜻이다. 그 뒤 시대적 격변 속에서 잊혔다가 여 러 사람의 끈질긴 탐구로 다시 발견되었다.(각주 16)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태어난 선덕여왕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누구였기에 그를 위해 하늘로 가는 통로를 만들어 주었을까? 이제 안함이라는 고승이 등장할 차례다.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법사는 지장도, 원광도 아니고 안함이었던 것 같다.(각주 17) 다소 비밀에 싸인 것 같은 이 인물은 진평왕 대에 중국에서 신라로 밀교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딸인 덕만이 왕위를 계승해야 할 근거를 제시 했다. 즉, 덕만이 사실은 길상천녀의 화신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길상천녀는 복덕을 주는 여신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하늘의 옷을 입고 보관을 썼으며 왼손에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여신이 신라에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덕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첨성대 축 조 역시 안함이 발원했다고 한다. 여왕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해 준 셈이다. 믿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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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3년에 세운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님의 절’이라는 뜻으로 여왕의 절이라 해도 좋겠다. 특히 특이한 형태의 모전석탑이 아름다운데, 기록에 9층탑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본래 9층이었을 확률이 크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가 다시 쌓을 때 3층에 지붕을 얹은 형상으로 마무리했다.Ⓒ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안함은 상당히 신통한 도사였다고 전해지는데, 기왕 반쯤 신화에 발을 담근 김에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 보자. 신라 불국토 건설의 이념이 안함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신라의 지도층에서 지지하 지 않았다면 구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국토가 원래 신라 땅에 있었다고 하는데 “에이 뭔 소리” 라고 할 귀족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선덕여왕을 세운 것은 신의 한수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길상천녀라니 자신의 신화를 만든 것은 고대 이집트의 핫셉수트 여왕과 같지만 남장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안함은 선덕여왕 재위 8년에 입적했다. 구름을 타고 서쪽 하늘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어 쨌거나 신라인들은 여왕을 길상천녀로 알고 나라를 지켜줄 거라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고, 여왕은 불국토 청사진에 따라 분황사와 영묘사를 세우고 황룡사 구층목탑을 완성했다. 자신의 무덤 자 리를 정하고 그 아래 사천왕사 설립을 지시한 뒤 세상을 떠났다. 후대의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뜻에 따라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하며 자신을 동해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지를 남겼다. 옥녀 봉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무덤도 같은 축선상에 있다. 결국 선덕여왕, 김유신, 김춘추, 문무왕 모두 불국토 건설 계획을 공유하고 이를 빈틈없이 구현해 나간 하나의 팀이었던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결속력과 깊은 신뢰에서 나당전쟁에서 이길 힘을 얻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까닭에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나당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 지 까딱하면 나라 전체가 먹혀버렸을 수 있어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하다. 신라가 이긴 것이 요행이었을까 아니면 천운이었을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하늘의 별자리에 따라 주요 시설을 세운다거나 불국토의 건설 같은 것이 무척 생소할 수 있다. 처음 불국토설을 들었을 때 피식 웃었었음을 고백한다. 도시계획과 조경의 이념은 크게 달라졌으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국토 보호의 염원은 예나 지금 이나 다르지 않다. 

 

빛 공해로 인해 밤을 상실한 현대인으로서는 당시 신라의 밤하늘에 별이 어느 정도 총총하게 빛났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어두워지면 바로 머리 위 하늘에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려졌을 것이다. 매일 밤 손에 잡힐 듯, 쏟아져 내릴 듯 가까이에서 빛나는 그 별자리들은 그 시대의 일상이었다. 그들의 운행에 따라 절기가 바뀌고 오곡이 무르익고 사람이 나고 죽는다는 믿음은 너무 당연했다. 게다가 별자리는 지금 지적측량기만큼이나 정확하게 방위를 알려줬다. 그러므로 경주의 유적지들이 별자리의 재현이라는 사실은 전혀 허황하지 않다. 


올해도 동지 새벽에 대왕암에 떠오르는 해가 선덕여왕릉을 지나 첨성대 위로 쏟아지고 옥녀봉 에 있는 김유신묘에 이를 것이다. 빛은 거기서 머물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태백을 달 려 백두산까지 가지 않을까? 옛 호국의 영웅들은 아직도 서로를 신뢰하며 묵묵히 한반도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금의 나라 형편을 보면 그들의 혼을 불러 기도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부디 이 땅의 지도자들로 다시 태어나 주소서. 


**각주 정리

1.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는 선덕왕으로 나타나지만, 모든 이들이 선덕여왕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에 따르기로 한다.

2. 정기호, “경관에 개재된 내용과 형식의 해석: 석굴암 조영을 통하여 본 석굴형식과 신라의 동향문화성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19(2), 1991, pp.23~31.

3.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1.

4. 김부식이 참고했다는 고서 대부분이 분실되고 없다는데 어떤 경위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5.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선덕왕, 신라의 여왕에 대한 사론.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480

6. 3번 책, p.293.

7.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신라본기, 선덕왕 본기.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010

8. 이에 관해서는 정기호 교수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9. 천문학자 박상범은 첨성대를 현존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 정의했 다. 박상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김영사, 2002, p.79.

10. 1960년대 중반 전상운이 최초로 첨성대가 천문 관측에 적당한 구 조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서금석, “천문대로서의 첨성대 이 설에 관한 재론”, 『한국고대사연구』 86, 2017, p.152.

11. ‘첨성대 별기’, 울산MBC 다큐멘터리, 2009.

12. 김명숙, “첨성대, 여신 상이자 신전”, 『한국여성학』 32(3), 2016, p.139.

13. 장활식, “첨성대 축조 발원자”, 『신라문화』 49, 2017, p.57.

14. 일연, 『삼국유사』, 권1 제1기이, 선덕왕 지기삼사. 

15. 13번 글. 

16. 부산대학교 장활식 교수는 십 수 년을 첨성대 연구에 바쳤으며 건 축가, 사학자, 천문학자와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확인해냈다. 

17. 국사편찬위원회, 『해동고승전』, 권 제2 유통1-2 , 석안함 편. db.history.go.kr/id/hg_002r_0060_0040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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