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사람, 피가 차가운 사람, 쌀쌀 맞은 사람, 냉소적인 사람. 우리는 어떤 대상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온도에 비유할 때 차가움을 꺼내오곤 한다. 연구자라는 사람을 온도에 빗대야 한다면 차가운 쪽에 가까울 거라 생각했다. 연구 대상을 왜곡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치밀하게 분석하고 멋대로 상상하며 결론 내리지 않으려면, 잘 벼린 칼날 같은 태도가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박희성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 예상보다 그가 앞으로 누벼야 할 이론의 바다가 훨씬 넓다는 걸 알게 됐다. 길고 긴 항해 내내 차가울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미지근함에 대해 생각했다. 열정으로 시작해 결코 차게 식지 않는 사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를 보온병처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긴 여정에도 지치지 않고 포기를 생각하지 않는 그 적정한 온도에 대해서.
어제는 뭐했나요?
밀린 논문을 썼어요. 학기 중에는 강의를 비롯해 다양한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전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라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지 못해요. 조금 미뤄오다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밀린 논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연구교수(이하 교수)에게 논문은 일종의 과제 같은 존재인가 봐요.
논문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죠. 승진이 목적인 사람도 있고 개인적인 연구 욕심이 있는 사람도 있고요. 전 생산물이 없는 연구자는 본분을 잊은 거라 생각하거든요. 자기반성을 섞어 조금이라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생업이 있다 보니 순수하게 학자로서 공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연구비 펀딩을 받은 경우, 페이퍼 형태의 최종 제출물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어요.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그런 과제 중 하나이고요.
‘연구자’ 하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이른 아침 일어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요. 실제로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생활을 하나요.
반성하게 되네요. 저 역시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에요. 전 오히려 밤에 집중이 잘되는 스타일이라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편입니다.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커피는 자주 마셔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환경과조경 홈페이지에 박희성을 검색해봤어요. 촘촘하진 않더라도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대략적으로 그려보기 좋은 아카이브거든요. 그런데 뜻밖의 결과에 눈이 갔어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옥외공간 조성 설계공모’, ‘한국도로공사 본사 이전사옥 건립 설계경기’, ‘사상광장로 명품가로공원 조성 기본계획 현상설계공모’ 참가자 명단에 교수님 이름이 있더군요. 처음부터 교수님을 연구자로서 만났기에,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중 두 개 공모는 우리엔디자인펌 연구소장으로서 함께한 공모더군요.
2000년대 초 조경설계사무소가 기업부설연구소를 많이 열었었어요. 설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의도이기도 했고, 정부에서 세제 혜택을 주기도 했죠. 강연주 소장(우리엔디자인펌)은 연구 집단과의 교류에도 관심이 많았고, 기존 설계 방식에서 벗어나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역량을 다지겠다는 의지가 있는 분이었어요. 2006년 우리엔디자인펌 조경설계연구소가 만들어졌고, 기존 조직이 연구소와 설계소로 나누어졌죠(“설계사무소 소장으로 산다는 것, 그 냉정과 열정 사이”, 『환경과조경』 2016년 5월호 참고). 그즈음이 당ㆍ송대 산수원림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로, 조경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미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를 하다 보니 점점 조경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나는 기분이었죠. 기회가 되면 조경설계를 알아보고 싶었는데, 마침 우리엔디자인펌의 조경설계연구소가 제게 기회를 줬어요. 1년 반 정도 머물렀으니 긴시간은 아니었지만 많은 설계공모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알찬 시간을 보냈어요.
조경 연구자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연구원, 교수뿐인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연구자는 설계공모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조경설계연구소에 들어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연구자가 설계에 참여한다고 해서 프랙티스를 기반으로 하는 교수처럼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죠. 1~2년 정도의 시간으로 설계가가 되지도 못할뿐더러, 저의 부족함은 채울 순 있어도 연구자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조언도 있었고요. 맞는 말이었어요. 당연히 제가 선을 그리고 도면을 만드는 설계를 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어요. 대신 설계의 큰 콘셉트를 만드는 일을 했죠. 대상지를 분석해 공간 설계를 끌고 나갈 기본 방향을 만들고, 틀이 갖춰지면 작은 세부 요소를 구체화하고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연구자로서 공부해온 이론들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제가 제안한 콘셉트가 설계에 반영되는 걸 보며 공간을 바라보는 맥락과 해석하는 방식이 조경의 관점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안심했어요. 설계공모뿐 아니라 일반 연구 용역도 진행했고, 관광 같은 다른 분야와 협업하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어요. 다른 직원이 연구소가 세워지기 전보다 설계하며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안심했습니다.
우리엔디자인펌을 떠나서는 바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입사한 지 일 년 반쯤 지나니 생각이 복잡해지더라고요. 과연 이곳에 발붙일 수 있을지, 또 회사 경영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보통의 직장인들이 다 할 법한 고민들이었어요. 때마침 서울학연구소에서 조경을 전공한 연구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사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는지는 모르고 들어왔는데, 완전히 새로운 판이더라고요.
조경학과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어떤 미래를 꿈꿨었나요. 자신에게 연구자의 소질이 있다는 걸 언제 깨달았는지 궁금합니다.
참 오래된 이야기네요. 큰 뜻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건 아닙니다. 학부 졸업 시기가 다가오니까 막막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공부는 했는데 조경에 대해 뭘 아나 싶고, 졸업작품을 만들면서는 사람이 실제 사용할 공간이 될 선을 이렇게 가벼운 고민만으로 그려도 되나 망설여졌어요. 조경설계를 하려면 내가 어떤 공간을 지향하는지 조금의 가닥이라도 잡은 상태여야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대로 무작정 취업하게 된다면 또렷한 지향점 없이 흘러갈 테고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돌이켜보니 이상한데, 당시 설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이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울대학교 조경미학연구실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막상 연구에 발을 들이니 이론 분야는 바다와 같이 넓고,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워낙 많더라고요. 어떤 일을 할 때 제가 더 즐거운지 생각해봤더니 책을 볼 때 마음이 더 편안하더라고요. 그렇게 연구자의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석사논문 주제가 ‘한중 정원과 문인, 자연미’였죠. 지금까지도 동아시아 조경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고요. 긴 시간 하나의 분야를 계속 연구하면 지치지는 않나요.
점점 진전하는 느낌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이 연구를 마치고 보니 저 부분을 더 연구해야겠구나 하는 식으로요. 지루할 틈이 없어요. 조경이라는 학문 자체가 하나의 색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다방면을 살펴야 하거든요. 학위 논문을 쓸 때 절 고민에 빠트린 건 조경이 순수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 학문이라는 점이었어요. 그에 반해 전 미학, 즉 이론을 공부했으니 어디까지 발을 담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예컨대 정약용의 자연관을 공부하고 싶으면 그 사람의 학문 세계와 시학,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아야 하죠. 그런데 마냥 이론만 들여다보고 있을 순 없어요. 조경은 실체가 있는 공간이니까요. 이론에서 빠져나와 공간을 구체화해야 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론과 공간 사이를 잘 드나드는 기준을 세우는 게 참 어려웠어요. 어떤 공간을 만든 사람의 특징을 개인 성향으로 볼 것인지, 사회문화적 영향과 당시의 철학, 경제적인 부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지도 고민해야 하죠. 덕분에 다양한 사료를 살펴야 하고 다양한 연구 방식을 써야 하죠. 지루하고 지난한 연구의 나날을 이런 변주로 극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많은 주제 중 하필 동아시아 정원에 관심 갖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학부 시절 안계복 교수님(대구가톨릭대학교)의 동양조경사 수업을 굉장히 재미있게 들었어요. 당시 동양 조경을 공부할 수 있는 교재가 적었는데, 윤국병의 『조경사』(일조각, 1978)라는 오래된 활자본 책이 있어요. 체감 상 내용의 30퍼센트 이상 한자로 쓰여 있었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책인데, 시험공부를 한다고 한자를 일일이 다 찾아보며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열심이었죠. 동서양의 조경사를 다 아우르는 책이었고 정말 잘 쓴 책이었어요. 그때부터 이미 동아시아 정원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대학원에 입학해 서양 미학 공부도 했지만 짧은 학습 시간 때문인지 내용에 충분히 공감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공부를 하면 하겠지만 체화하기는 쉽지 않겠다 싶었죠. 오래 연구할 주제라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근하기보다 내가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경 연구자의 일에 대해 “짧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 여 년 전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공간을 상상하는 일”(“언제나 지금만 같길 바라”, 2021년 4월호)이라 표현했었죠. 자료 분석과 연구의 차이가 있다면, 논거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하느냐의 여부인것 같아요. 그 상상력의 정도가 중요할 텐데 어떤 기준으로 접근하나요.
상상보다는 가설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상정하고 연구를 시작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주장과 색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선배와 선생님이 항상 내 것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해줬어요. 무조건 내가 맞다는 생각을 경계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펼친 상상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지, 견강부회해서 편견에 휩싸여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되묻는 훈련을 많이 하려했어요.
제가 연구하는 시대는 크게 전근대 사회와 서구 문명과 교류가 이루어졌던 근현대로 나뉘어요. 전근대 시기의 연구는 미의 인식, 즉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며 아름다움을 느꼈으며 무엇을 추구했는지,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등을 살펴 동아시아 문인의 보편적인 미의식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글이라는 사료를 통해 인물의 성정과 사고 체계를 짐작하고, 이를 기반으로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지향했는지 추론이 가능하죠. 하지만 공간의 생김새나 정원의 조성 방법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반면 근현대 시기는 좀 더 과학적인 가설을 세워 상상해볼 수 있죠. 실체가 있고 자료도 많아서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 있거든요. 근현대는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근간이기도 해서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연구는 지식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그 대상을 치밀하고 깊이 있게 조사하는 일이고, 그 점 때문에 자칫 지루할 것 같다는 인상을 남겨요. 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지금껏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머리가 번뜩하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컨대 가설이 좀처럼 참인지 진짜인지 증명되지 않고, 어렴풋이 답은 알 거 같지만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진이든, 회화든, 글이든 사료가 등장하며 의문점이 단숨에 풀릴 때가 있어요. 해결의 열쇠가 갑작스러운 등장 같지만, 대부분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끝에 보상처럼 따라와 준 것 같아요. 연구자는 스스로 세운 가설이 증명되는 순간의 짜릿한 감동을 잊을 수 없는데, 연구를 지속하는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 느끼는 건데 시대는 끊임없이 변해도 인간의 본성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연구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했던 생각과 고민, 그리고 성숙해가는 과정이 지금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우리와 똑같이 꽃 보며 즐거워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으며 설레어했던 모습을 발견하면 시공간을 뛰어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학생들에게도 그 시절이 결코 별천지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타인의 삶처럼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공감대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던스케이프’(2022년 1월호~2023년 12월호) 연재를 통해 철도와 가로 같은 인프라에서 출발해 가로, 공원, 정원, 옥상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도시 풍경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관심을 확인했어요. 원림, 양화소록, 장안성 등 본래 연구하던 시대와는 훌쩍 떨어진 근현대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근대 시기의 미학과 자연관만 계속 공부하다 보니 막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연구만 계속할 게 아니라 연구자로서 동시대 조경도 다뤄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요. 동아시아 정원이 마이너한 연구 분야라 외로웠던 점도 한몫을 한 것 같네요. 때마침 서울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조경 연구자는 저 혼자였고 건축과 역사전공을 한 연구자가 대부분이었어요. 서울학연구소가 학제간 연구를 지향하는 집단이라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함께할 기회가 생겼죠.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미학과 철학을 다뤄온 제 입장에서 건축과 역사 분야의 연구법은 과학적이고 철저한 논증을 기반으로 한 명징함 그 자체였어요. 흥미로워서 온갖 세미나에 참석하고 그들이 사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법들을 공부했죠. 이곳에 몸담은 김에 새로운 연구를 해볼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방법론만 습득할 게 아니라 연구 대상 자체를 확장하려고 보니 조경 분야가 근현대를 그저 암흑기로 치부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도시사적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던 시기고, 다른 분야에서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그 빈칸을 채워보자 하는 마음으로 근현대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학제 연구라는 개념이 제겐 좀 모호하게 느껴져요.
실제로 쉽지 않은 연구 방법이에요. 연구자끼리 모이면 서로 뇌 구조가 다르다는 농담을 자주해요. 처음에는 갈등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서로 연구를 전개하는 방법과 훈련 받아온 연구 방법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우선 큰 주제가 있으면 계속해서 토론을 해요. 예를 들어 한양도성이 주제라면, 각자 한양도성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이야기하는 거죠. 구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도성을 만드는 인물과 제도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다 보면 결코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만나는 순간이 있죠.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고 맥락이 읽히게 되면 환경과 사람 사이에 다양한 인과 관계가 가설로 만들어집니다. 연구 결과를 텍스트에 의지해 설명하던 인문계 연구자는 지도나 도면 하나로 표현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요. 현상을 시각화하면 텍스트로는 볼 수 없던 경향을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공계 연구자는 글의 행간을 읽는 훈련을 통해 보이지 않던 현상을 파악하는 경험을 합니다. 사료의 수집이나 활용법, 자료를 객관적으로 해독하는 기술도 배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사고력을 확장하는 게 학제간 연구의 장점이죠.
연구하며 다양한 사료를 볼 텐데, 마음을 빼앗기는 사료 유형이 있을 것 같아요.
시각적 자료,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비문헌 자료가 아무래도 매력적이죠. 본인이 세운 가설에 몰입하다 보면 문헌 자료를 곡해할 여지가 많아요. 즉 비약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조경처럼 공간을 다루고 실체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학문에서는 회화, 사진, 엽서, 지도 같은 시각 자료가 왜곡이 덜한 정보를 제공하죠.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시각 자료에는 상상 이상의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데, 자칫하면 중요한 정보를 놓치기 십상이에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던 정보가 나중에 갑자기 보이는 경우도 많거든요. 따라서 넓고 깊게 반복적으로 살펴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회화 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의 회화는 관념을 표현한 부분이 많고, 원근법을 생략하고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과 다를 거라는 인식이 많아요. 그런데 경험한 바로는 회화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스케일이 왜곡되거나 함축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지만, 중요한 정보는 모두 담겨 있어요.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죠.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자의 의도가 하나하나 읽혀서 너무 재미있어요.
옛 사료를 많이 접하는 연구자의 경우 특정 물건을 수집하기도 하던데요.
열정적인 연구자들은 이베이 같은 경매 사이트에서 사료를 사 모으기도 하는데 저는 평범한 편입니다. 원체 제공되는 자료가 많은 시대잖아요. 학위논문을 쓸 당시만 해도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아서 자료 확보 능력이 연구 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 시절의 노력이 허무할 정도로 다양한 자료가 공개되어 있죠. 그래서 오히려 수집보다는 그 자료를 어떤 실로 꿸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모두에게 제공된 백 가지 정보 중 어떤 현상을 골라 어떤 물음에 답할지 틀을 짜는 게 연구자의 역량이죠.
참, 학위 논문을 쓰던 시절 중국 조경사 연구를 위해 칭화대학교와 베이징대학교를 다녔었죠. 그곳의 생활은 어땠나요.
정약용 선생과 다산초당원을 주제로 논문을 쓴 이후에도, 한국정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이 절 따라다녔어요. 사실 정약용은 매너리즘에 빠진 당시의 성리학을 비판하고 조선이 주체가 되어 유학을 바로 세우려고 했던 학자이니, 공부하고 나면 또렷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물음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정약용도 지금의 성리학은 너무 왜곡되었으니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공맹 사상으로 회귀하더라고요. 결국 한국정원의 고유성은 중국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건가 고민하다 보니 중국을 공부하면 한국과 차별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른 거죠. 치기 어린 마음으로 덤벼든 겁니다.
걱정이 많았지만 운이 좋게도 중국에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어요. 말도 잘 못하는 애가 중국 정원을 공부하겠다고 와 있으니 교수와 동기들이 어여삐 여겨 준 거죠. 개인적으로 중국이라는 대륙에 얼마나 많은 정원 이론이 연구되고 있을지 기대했는데, 의외로 제가 한국에서 책으로 접한 내용들 이상의 새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있었을 당시에는 그들도 우리만큼 자신들의 정원에 대해 잘 모르더군요. 문화대혁명 이후 학문 체계가 중화사상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어요. 우리 게 최고라는 생각 아래에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나올 리 없죠. 오히려 바깥에서 여러 가지 시선으로 해석한 연구의 다양성이 더 풍부했고 흥미진진했어요.
대신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얻은 게 많습니다. 정원이나 자연환경을 묘사한 회화 작품을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거든요. 예컨대 왕유라는 당나라 시인이 노모를 모시려고 만든 망천별업이라는 거대한 정원이 있어요. 수레바퀴 망(輞) 에 내 천川을 쓰는데, 해석하면 물이 수레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휘돌아가는 모양으로 흐르는 장소가 별업의 배경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림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찾아가보니 회화에서 보던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더라고요. 천년이 훌쩍 지난 곳이니 거의 남아있는 게 없었지만, 회화에 묘사된 자연의 분위기와 스케일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어요.
한번은 백거이의 여산초당으로 알려진 곳을 찾아갔는데, 글과 경관이 너무 안 맞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의아했지만 그곳에서는 모두 맞다고 하니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요. 오히려 다른 장소에 들렀다가 그곳 매표소 직원에게 지나가는 식으로 물어봤는데, 마침 지나던 내국인이 제 질문을 듣고는 본인이 알고 있다며 장소를 알려주었어요. 얼결에 얻은 정보라 확신은 없었지만, 알려진 장소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큼은 확실했기에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에 산길을 한참 올라갔더니, 백거이 시문에 묘사된 북향로봉 아래에 자리 잡은 여산초당이 거짓말처럼 드러났어요. 어두워지고 있어서 사진을 충분히 찍을 수 없는 아쉬움이 컸지만, 그때 느꼈던 전율과 감동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비로소 글쓴이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어요. 지금은 제대로 된 곳으로 안내가 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당‧송대 산수원림 연구를 마쳤을 때 한 인터뷰에서 “중국과 한국 정원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싶다”(“禪과 정원조성 관계 연구한 ‘공학박사’ 박희성씨”, 「불교신문」 2006년 9월 6일)고 말했죠. 이후 진전이 있었나요.
나름대로 해야 할 연구들을 정리해두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래도 실천한 것 중 하나는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명말청초의 문인 문진형이 쓴 『장물지』를 분석해 초화류를 감상하는 방법과 그 지향점이 어떻게 다른지 미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연구예요. 사실 강희안과 문진형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어서 비교가 가능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두 인물은 각각 중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이기 때문에 식물에 대한 태도와 감성의 차이는 확연히 다른 것을 확인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다시 연구를 재개하고 싶습니다.
한국정원의 정체성 확립은 조경 분야의 오랜 과제입니다. 정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한국정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이어갈 수 있고요. 국가공원과 더불어 국가정원이 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정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여요.
학생들에게 한국정원을 가르쳐야 하는 때가 오면, 우선 우리는 한국의 정원을 잘 알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을 먼저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정원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조선에 국한되어 있어요. 조선은 관념적 사고를 추구하는 사회였고, 조형적 창작물을 만들기보다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였죠. 이러한 조선이 단일 왕조로 무려 500여 년을 지속했어요. 규범과 질서를 강조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정원이 끼어들 여건도 아니었죠. 여러 연구자가 이야기하는 조선의 수려한 산수가 특별한 정원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데 영향을 미쳤다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사회적‧경제적 여건 때문에 고도로 훈련된 정원 기술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조선의 색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현재 실체가 남아 있는 건 대부분은 조선의 정원이고 북한 소재의 역사정원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죠. 훨씬 더 화려하고 정교할 거라고 짐작되는 고려, 백제, 신라의 정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조선의 정원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중국의 3대 누정 중 하나인 등왕각에 간 적이 있어요. 당나라 때 만든 거대한 누정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게 신기했는데,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더라고요. 여러 층에 마련된 사료를 보며 기존의 등왕각은 이미 불에 타 소실됐고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등왕각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송나라 때는 송나라 양식으로, 명나라 때는 명나라 양식으로 지었더라고요. 그 시대의 가장 최고의 누각이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당시의 건축술로 최선을 다해 재설계한 거죠. 대신 과거의 누정이 어떠했는지 기록하고요.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산은 철저하게 고증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통을 토대로 자유로운 해석과 실험을 시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성을 실험함에 있어, 실패와 망작에도 너그러울 필요가 있어요. 전통을 경직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변하지 않는 전통이 있겠지만 삶의 방식과 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기 마련입니다. 시대성은 동시대의 취미와 실천이 잘 축적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니, 많은 시도와 실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모방보다 자유로운 재해석의 실험을 시도해야 후손들이 이 시대의 정원을 보며 한국의 정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산림청이 진행한 K-가든 사업에 참여한 이유도 한국정원을 재해석하는 방향을 좀 더 유연하게 정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건축의 경우, 1960~1970년대에 거푸집을 정교하게 만들어 콘크리트로 목조 건물의 형상을 만드는 실험을 했었어요. 어린이 놀이터의 많은 놀이 기구도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던 시대였죠. 세종문화회관은 한옥의 기능과 구조, 형식을 근대 건축술로 재해석한 작품인데, 오늘날 재해석의 모범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실험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한옥을 현대화하는 많은 기술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이제는 정교한 거푸집을 만드는 기술자를 찾기 힘들어졌죠. 우리에게는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어요. 우리가 많은 것을 박탈당한 것도 사실이지만, 식민지와 무관하게 동아시아에 서구의 문물이 들어와 기존의 문화와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기도 했던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변화를 주도한 주체가 아니었고 수동적으로 문물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여 내재화하는 시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암흑기, 공백기로만 보지 않고 근대로의 전이 과정으로 바라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선조들의 고민과 태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고 숨은 가치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은 정원을 가꾸려는 마음과 정원을 즐기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고도의 정원술은 없었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구릉 많은 지형을 어떻게 이용할지, 배수 체계를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할지, 주어진 자연 요소를 어떻게 극대화해 감상할지 등을 고민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정원 콘셉트를 잡고 자연과 인공 사이에서 정원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어 누릴 수 없던 조선의 경직된 분위기는 정교하게 정원을 즐기고 가꾸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어요.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마음껏 드러낼 수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곰곰이, 여러 번 살펴볼 때 비로소 의도가 읽히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조선의 정원이 뒤떨어진다고 치부할 수는 없고 조선이라는 시대를 알고 공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정원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기보다, 시대의 배경과 맥락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시경관연구회 보라’ 활동을 이어가고 있죠. 홈페이지를 보니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조경학 전공자 중심의 자율 연구 집단. 도시, 경관, 역사, 이론의 키워드에 관심을 둔 조경 전공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장이다”라고 소개되어 있어요. 자율 연구 집단은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나요.
보라는 조경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연구 집단입니다. 연구는 설계와 달라서 홀로 작업하는 내성이 필요합니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부터는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데, 학위 수여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허탈감과 고독함이 크게 다가오죠. 연구자라면 당연히 감내해야 할 감정이지만 가끔 그 현실을 자각하며 복합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연대할 수도 있지만 기회가 많지 않죠.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는 박사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이런저런 기회로 알게 되었고 함께 도모할 일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였어요. 연구의 바탕과 관심 분야가 제각각이라 걱정했는데, 조경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서로 의견도 주고받고 흥미로운 많은 대화가 오가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가지게 됐습니다. 연구의 길을 잃었을 때나 혹은 연구의 의지를 상실할 때면 서로 용기를 주고 의지를 다지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도 해요.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한 서울시 도시공원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조경계에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리게 된 성과까지 덤으로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지금은 각자의 연구를 지속하면서 어떤 프로젝트를 새롭게 시작해 볼지 구상 중입니다.
일부러 느슨하게 이어가는 활동이기도 해요. 마음 맞는 연구자들의 사교 모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책무가 주어지는 순간부터 부담스러워질 테고, 서로가 가진 일의 양을 비교하는 등 미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선 크든 작든 이 활동이 끊이지 않도록 이어가자는 암묵적인 규약 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풀다보니 참 여러 주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자칫하면 중심을 잃을 정도로요. 지금 박희성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인가요.
황기원 교수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은 늘 학자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공부해서는 안 되고, 후학을 양성하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요즘 들어 그 말을 자주 되새깁니다. 우선 동아시아 국가의 정원술을 우월의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꾸준하게 가지려고 합니다. 결국은 한국정원의 고유성을 알리고 가치 발굴, 보존 관리, 활용을 하는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대 주택정원 연구도 이어가고 싶어요. 대다수의 근대 정원이 개인 소유라 방문이 어렵고 공간의 변형이 많아 어려움이 있는데, 동서양 문화의 교류와 혼종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한국조경의 흐름과도 연결 지점이 있을 것 같고요. 최근에는 김정화 교수(네바다주립대학교)의 제안으로 길지혜 박사와 함께 잔디 경관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공원에서 흔히 보게 된 잔디밭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근대의 대표 경관으로 인식되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덤에서나 볼 수 있던 잔디의 경관이 어떻게 근대 정원과 공원에 꼭 두어야 하는 필수 공간으로 변화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미국과의 연결고리가 확인되어서, 잔디의 교류와 전파의 과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한국의 들잔디가 미국에 수출되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연구할 예정입니다. 전근대, 근대를 막론하고 한국에 국한된 연구를 하기보다 교류와 영향을 함께 보려는 태도를 견지하려 해요.
마지막으로 한국조경학회 학술부회장을 맡았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학술 주제를 발굴해 내용을 공유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조경이 다루어야 하는 과제가 참 많아요. 나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주제도 조경 분야 안에 있다면 사실 나와 연동되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거든요. 조경인이라면 공감대를 형성해 함께 고민해야 할 다양한 주제를 다룰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참여를 견인해 일찍부터 조경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요.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의 한 꼭지를 맡게 되어(“언제나 지금만 같길 바라”) 과월호를 통해 1세대 조경가의 활동을 한꺼번에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분들이 제도적, 환경적으로 지금보다 더 열악한 여건에서 조경의 역할과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걸 다시 깨달았죠. 그렇게 마련된 토대 위에서 우리는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 토대를 더 단단히 다지고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데, 자신의 몫을 다하는 데만 충실한 면이 있어요. 조경이라는 분야가 어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논의하는 자리도 부족했고요. 오히려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관에 대해, 도시 외부 공간에 대해, 역사 유산의 주변부 관리와 운영에 대해 조경이 정말 잘 해내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변화하는 시대와 관계망 속에서 조경이라는 분야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토론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학술분과가 해냈으면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의 협조가 필요할 거예요. 조경학회의 다른 분과를 비롯해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함께 협력해 세미나를 꾸려보고 싶어요. 이 자리를 빌려 많은 관심과 의견을 부탁드린다는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