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가 부모를 보고 웃는다. 아이 머릿속에 있는 감정 컨트롤 본부에 입장한 첫 감정은 기쁨이(joy). 기쁨이가 본부에 들어온 지 33초 만에 감정이 바뀐다. 슬픔이(sad)가 감정 컨트롤 버튼을 누르며 등장한다. 기쁨이와 슬픔이에 뒤이어 소심이(fear), 까칠이(disgust), 버럭이(anger)가 본부에 입장한다. 감정 컨트롤 본부의 리더는 기쁨이. 기쁨이는 다섯 개의 핵심 기억 구슬 색깔이 기쁨의 상징색인 노란 색으로 유지될 수 있게 노력한다. 이 구슬들은 아이의 성격을 형성해 주는 다섯 섬(엉뚱 섬, 하키 섬, 정직섬, 우정 섬, 가족 섬)과도 연결되어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2015)의 주인공 소녀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 이야기다. 영화는 라일리 아빠가 직장을 옮기면서 정든 도시를 떠나 새 도시에 정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사 간 집과 도시, 전학 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찰나, 기쁨이와 슬픔이가 장기 기억 파이프에 빨려 들어가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사라지게 된다. 라일리는 감정 조절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이 정도 배경 지식을 갖추고 나면 영화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할 수도 있다. 위기를 이겨내면서 싸웠던 주인공들이 화해하고, 왜 갈등이 빚어졌는지 깨닫게 되는 디즈니 영화 특유의 클리셰. 맞다, 이 영화도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라일리의 이야기가 나도 겪은 과정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내 머릿속에도 열일하고 있는 감정 컨트롤 본부와 장기 기억 저장소, 꿈 제작소, 기억 처리반이 있을 것 같다고 상상하게 해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쁨이는 기쁨만이 라일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힘들다고 솔직하게 울 수 있게 도와주는 슬픔이와 함께 모든 감정이 라일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노란색으로만 칠해졌던 핵심 기억 구슬은 여러 감정의 색이 섞이고 무너졌던 성격 섬은 더 단단해진다. 새로운 도시와 학교에 적응한 라일리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 것 같던 영화는 새로운 막을 예고한다.
13살이 된 라일리는 우수상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하고 친구들에게 친절하며, 여전히 아이스하키도 잘하고 키가 훌쩍 컸다. 그녀의 성격 섬 중 가족 섬은 다른 섬에 비해 많이 작아졌고 우정 섬이 매우 커졌다.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모인 여러 신념이 만든 ‘난 좋은 사람이야’ 자아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를 도와주고,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자아는 ‘인사이드 아웃 2’(2024)의 새로운 장치다. 2015년에 개봉한 시즌 1에 이어 9년 만에 개봉한 시즌 2. 시즌 2는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의 자아 정착기를 담았다.
사춘기에 들어선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 이유 모를 사이렌이 울리고 기존 감정들에게 예고도 없이 새 단장이 시작된다. 그렇게 등장한 새 감정들, 불안이(anxiety), 당황이(embarrassment), 따분이(ennui), 부럽이(envy). 네 개 감정이 더 추가됐고, 감정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라일리의 감정이 요동친다.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라일리는 불안이 가득한 자아에 지배되면서 ‘난 아직 부족해(I’m not good enough)’란 말이 반복해서 들리고, 불안이의 컨트롤 제어가 안 된다. 폭주하는 불안이를 막은 건 기쁨이의 한 마디. “라일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냐, 이제 라일리를 놔줘(You don't get to choose who Riley is. You need to let her go).” 불안이의 폭풍이 잠재워지고 부정과 긍정이 섞인 여러 자아가 형성된다. 감정들은 자아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라일리 본인이라는 걸 깨달으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 중간에 나온 라일리 부모의 감정 컨트롤 본부 리더는 버럭이와 슬픔이. 부모도 라일리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감정 컨트롤러가 기쁨이에서 버럭이와 슬픔이로 바뀐 듯하다. (요즘) 나의 감정 컨트롤 본부의 리더는 불안이다.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기 직전이라 불안이가 리더가 된 것 같다. 소문 무성한 30대의 여정을 견뎌낼 체력이 있는가, 아픈 곳은 없는가, 이 정도의 통장 잔고와 관리면 잘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잘 걸어온건지 등등 불안이 가득한 연말이다. 그래도 이 지면만 채우면 이번 달 잡지도 마감이다. 마감해서 신난 기쁨이와 싱숭생숭한 불안이가 감정 컨트롤 버튼을 동시에 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