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유산의 창조, 정영선이 만든 한국 조경설계의 변곡점
  • 환경과조경 2024년 8월

유산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혹은 현 세대가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물적·문화적 자산이다. 자산(asset)이 유산(heritage)이 되기 위해서는 세대를 초월하는 전승(pass on)이 필요하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이 국토 근대화를 보정해 온 푸른 유산으로 남을 것인가 혹은 대한민국 조경 1세대의 예외적 사례로 기억될 것인가는 다음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 그의 작업이 현재를 성찰하는 준거가 될 때, 그리고 내일을 상상하는 영감의 샘으로 작동할 때,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유산은 창조된다. 이 전승의 과정에서 우리의 설계 현실을 반성하며 질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여덟 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조경 디자인의 특수성

“샛강에서 디자인한 곳이 어디예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어느 도시 전문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하 샛강)에 가본 적이 있는데 너무 자연스럽다며 디자인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했다. 인간적 쓸모를 만드는 근대적 의미의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샛강은 잘 보존된 하천 풍경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주차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들려는 서울시의 계획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정영선의 회고가 떠오른다. 그는 개발이라는 도시적 욕망과 인간적 질서의 외삽을 거부하고 하천에 내재된 자연 형성 과정의 조건을 만드는 일을 디자인의 이름으로 관철했다. 새로운 것, 인공적인 것, 수직적인 것, 눈에 띄는 것을 만드는 개발 시대의 디자인 관행 속에서, 원래의 것을 지키고 폭력적 개입에 저항하는 일 자체가 디자인의 과업이 될 수 있음을 샛강은 증명하고 있다. 자기완결성을 포기하고 ‘연결’과 ‘관계’를 통해 총체성을 만들고 자신을 낮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역설을 통해 디자인으로서 조경설계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자. 폭력적인 개발 드라이브와 발주처의 명령에 디자이너 개인이 맞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용역자이기에 앞서 전문가라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디자인적 완성도는 어디에서 올까. 자신만의 매니페스토와 화려한 컴퓨터 조형에 취한 설계에 몰입하고 있진 않은지. 디자이너들의 자아도취적 발언과 시각적 포장의 재생산 관행, 인스타그래머블 풍경 만들기와 포토 스폿의 난무 역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샛강은 우리에게 조경 디자인의 고유한, 그래서 동시대에 더더욱 생경한 역할과 방향을 제시한다.

 

KAY01.JPG
여의도샛강생태공원 Ⓒtravel oriented/flikr

 

조경이라는 이름

“나는 조경이라는 말이 싫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모두 정영선의 말이다. 사석에서 그는 경치를 ‘만든다’라는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을 애초에 잘못 붙였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공적으로 그는 조경의 가치와 역할을 ‘한편의 시’에 비유하며 울림을 준다. 그에게 조경은 애증이 서려 있는 단어다. TV 속 유재석의 입에서 ‘조경가’라는 단어가 발음될 때 조경은 새로운 뉘앙스를 갖는다. 정영선의 업적은 모두 조경가라는 직능명을 붙이고 이뤄낸 성과다. 그는 “후배 세대가 조경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며 늘 우리 분야의 가치와 조경설계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격려한다. 그는 조경가의 사회적 위상을 새로운 레벨로 올려놓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게 만들어준, 조경의 살아 있는 정의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경가는 누구인가. 누가 조경가의 자격을 정하는가. 건축사와 같은 전문 설계 자격 제도를 법적으로 가지지 못한 우리 분야에서 조경가는 오랫동안 자격 여부에 상관없이 스스로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는 열린 단어였다. 단 한번의 공모전 당선으로 작가의 호칭을 획득하는 시대에 20~30년 넘게 설계 일을 해도 여전히 업자인 수많은 전문가에게는 어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한국 조경 50년에도 조경이라는 이름에 대한 부끄러움과 불편함이 스며 있다. 대학 학과 명칭에서 조경이 사라지기도 하고, 대학마다 경쟁력 강화와 입시 경쟁률 제고를 이유로 조경학과의 명칭을 없애거나 변경하기도 한다. 일련의 논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이에도 찬반의 입장이 선명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각주 1) 이름에 앞서 우리는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에 대한 성찰에 게을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성과 지역성

“나 옛날 살던 동네 같아요.” 학생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영화 ‘땅에 쓰는 시’에 나오는 정영선의 양평 정원을 두고 나온 얘기다. 부모님이 살던 시골집도 양평 정원처럼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개집과 심드렁한 흙 마당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어린 눈에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들풀이 나부꼈

다. 왜 많은 사람이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자신만의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릴까. 정영선 작품의한국성을 희원과 같은 전통 정원에만 한정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영선은 원 경관을번역하고 재창조한다. 그의 창조 안에는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억으로서 자연이 내재되어 있다. 늘 보던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재구성하는 정영선의 설계 방법은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이며,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에 한국적이다. 그의 작품은 기억과 장소 애착 환기 장치trigger로서 풍경의 힘을 보여준다. 그가 구현하는 한국성은 조형 요소가 아닌 경험과 기억의 원형이며, 그가 다루는 과거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내포하는, 옛것의 창의성과 창발성을 실현하는 시제다.

 

우리가 전통을 다루는 관행을 돌아보자. 전통은 형식적으로 재생산되고 많은 경우 공간 작명에 그치는 예스러운 것 그 이상이 아니다. 레트로 감성이라는 표제어로 과거는 상품 가치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옛것은 새롭지 않으면 가차 없이 폐기된다. 새롭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무한 브랜드 경쟁 시대에 느린 시간성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조경이, 지속적으로 폐기되고 갱신되는 패스트 디자인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새삼 물어본다.

 

[크기변환][포맷변환]김아연 1.jpg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약용 식물 전시 영역 스케치, 트레이싱지에 연필, 색연필, 펜, 41.8×29.5cm, 2019 Ⓒ조경설계 서안

 

시그니처 식재

“어? 여기 정 선생님이 하셨나?” 십수 년 전, 김해 클레이아크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잠시 봉하마을을 거닐다가 나의 동료가 무심코 뱉은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 길가에 병아리꽃나무가 있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정원 열풍으로 이름 외우기도 벅찬 식물이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니 병아리꽃나무가 무슨 대수냐 싶지만, 그때만 해도 흔히 쓰는 조경수의 종류는 손에 꼽을 만큼 빈약했다. 정영선의 손이 닿은 곳에는 일반적으로 쓰지 않은 한국 자생종이 어김없이 심겼다. 이름도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이스라지, 미나리아재비, 노루오줌, 노루귀, 팥꽃나무, 꼬리풀 등. 식물 하나하나가 시의 언어다.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자생 식물을 조경설계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측면과 더불어 비싼 소나무와 몇몇 수종에 의지하던 관행적 식재 설계를 거부해 몸값에 따른 식물의 위계를 당당하게 해체했다는 점이다.(각주 2) 그의 식재 디자인 어휘는 자연을 공부해서 얻은 그만의 사전에서 비롯된다. 어느 시인은 사전을 통틀어 여기에 쓸 수 있는 단어는 꼭 하나라고 얘기했다. 정영선의 사전에는 바로 그 장소에 필요한 우리 식물이라는 단어들이 채곡채곡 쟁여져 있다.

 

아름다움의 근원

“눈물겹게 아름다워요.” 정영선의 손을 거친 장소는 특유의 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서식처에 기반을 둔 건강한 생태계의 내재적 아름다움은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서는 또 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한다. 정영선의 작업은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다루는 형식 미학에서 생태 미학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은 기후 위기 시대 우리 주변에 창궐하는 예쁘기만 한 자연의 모사품들 이면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들은 지속가능한가. 정영선의 작품은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경관에 몰입하는 주관적 체험을 전제로 한다. 그는 풍경을 중첩시켜 단위 공간의 제한된 경계를 확장하고 깊이감을 형성한다. 경계의 디자인으로 철저하게 주변을 차단하거나 열고 중첩시켜 경관의 깊이와 몰입감을 준다. 그 아름다움은 시각적·표면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험적·윤리적인 미적 태도를 형성한다. 윤리와 미학이 결합하고 의미와 아름다움이 합쳐진다.

 

최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정원과 정원박람회 현상에서 대경관은 실종됐다. 국가정원과 정원박람회 후보지는 대체로 하천 부지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남은 큰 빈 땅이 그곳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종 정원 행정이 하천의 하천다움, 강의 원 풍경을 얼마나 숙고해 추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예쁜 것만 살아남는 시대, 소비재로서 자연은 찰나적 풍경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기후 위기 시대, 자연에 대한 위기의식이 결여된 자연의 상품화가 엄청난 예산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현실 앞에 우리는 침묵할 수 있는가.

 

공공 프로젝트의 도전

“공공이 해도 이럴 수 있다니.” 선유도공원은 대한민국 공원 디자인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가의 전폭적 지지와 현장 설계와 감리가 가능했던 예외적 상황이 크게 기여한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유도공원을 공공 발주 프로젝트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표성은 동일한 범주의 다른 사례와의 유사성을 가져야 하는데 선유도공원은 일반적인 공원 만들기 관행에서 이질성이 훨씬 크다. 오히려 발주부터 시공까지의 공공 프로젝트 전 과정에 있어 프로세스의 변칙에 가까운 예외적 사례다.

 

우리는 왜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절차를 만드는 일에 인색하고, 예외적인 스타의 도래만 기다리는가. 한국 조경은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하고 정착해왔다. 그 가운데 정영선은 조경을 통한 사회적·지구적 책무를 자임해왔으며, 제도의 공백을 메운 설계가의 헌신과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이는 전문적 설계자 자격, 공정한 발주 방식, 현장 감리 제도가 없는 현실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가 주도의 사업이 넘쳐나던 풍요의 시대는 품질에 대한 치열함과 내부 성찰 능력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설계의 기획-발주-심의-시공-감리 전반의 제도적 기반의 취약성은 또 다른 정영선의 탄생으로 메꿀 수 없는 근본적 한계다. 또한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작품 만들기에 대한 비판적·비평적 담론과 실천이 희박한 현실 역시 우리가 서있는 취약한지반이다.

 

작가로서 조경가

“조경가가 꼭 호미를 들어야 되나요?” 학생들과 토론하다 보면 꼭 등장하는 질문이다. 호미는 정원 가꾸기 전통이 훨씬 오래된 서구권에 역수출될 정도로 가드닝의 핵심 도구다. 이 시대 호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나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호미라는 도구의 보편성은 조경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아이러니하게 정영선의 호미는 현장 감독 권력을 가진 자의 도구이며, 완성도에 대한 전문가적 집착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에게 호미가 상징하는 것은 땅과의 교감, 관찰의 방식, 직업 윤리와 책임감이다. 박승진은 이를 “작가적 태도로서 직접하기”라고 불렀다..(각주 3)직접하기는 경험적 지식을 축적한다. 실천적 학문으로서 조경은 이론과 개념을 구현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를 통해 진화한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과 연구 성과는 합리성과 첨단성을 보장하지만, 직접하기를 통한 검증은 나 몰라라 한다. 대중에게 호미는 조경의 강력한 아이콘이자 상징으로 작동한다. 많은 후배 디자이너 역시 호미를 들지 않으면 작가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

 

반면 강력한 호미의 대중적 상징성은 조경의 정의와 조경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꽃 심는 상징적 행위에 제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치열한 첨단 경쟁 사회에서 조경의 지향성이 아날로그 감성에 고착되는 것을 경계한다면, 우리의 직접하기와 현장성은 어떻게 진화해야 할 것인가. 이 또한 중요한 개인적, 나아가 시대적 고민거리다.

 

국토의 총체성과 정원

“국토는 하나의 정원입니다.” 정영선이 즐겨 하는 이야기다. 나는 이 아름다운 문장이 수많은 행정가들에게 왜곡된 영감을 줄 수 있음을 걱정한다. 정영선의 개별 프로젝트에는 국토 경관의 아름다움과 총체성이 관통하고 있다. 그는 성종상과의 대화.(각주 4)에서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쓰레기를 치우고 땅을 다듬어야” 함을 강조하며, 꽃을 심기 전 땅에 대한 밑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에게 정원은 “잠시 빌려 쓰는 땅에 대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원 사업에는 정원의 본질, 지구적 위기 의식, 국토 가꾸기의 철학이 상실되어 있다. 정원도시는 장식과 행사 중심으로 추진되는 지자체장의 정치 매니페스토가 되어가고 있고, 행정으으로서 가드닝은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하며 초기 효과에 골몰하고 있다. 흙이 보이지 않도록 빡빡하게 심으라는 어느 지자체의 지침은, 식물이 성장하며 고유의 형상과 건강한 생육을 위해 밀도를 낮춰 심는 자연주의 정원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국토는 하나의 정원”이라는 말이 국토의 정원 테마파크화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할 때다.

 

[크기변환]KAY03.jpg
선유도공원 Ⓒ김아연

 

자산에서 유산으로

영화 ‘땅에 쓰는 시’에서 정영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번 경관을 잘못 건드려놓으면 되돌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요. 국토의 바다는 바다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 …… 샛강은 샛강답고, 한강은 한강답고, 큰 강은 큰 강답고, 동네 산은 동네 산답고, 시골은 시골답고, 아파트는 아파트답게…….”

 

정영선의 작업은 대한민국 조경 50년의 중요한 질적 전환을 가져오는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지점 이후의 경로는 그의 몫이 아니다. 변곡점 그 자체는 상승도 하강도 아니다. 그가 만든 풍부한 자산과 변화를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유산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이 현재를 성찰하는 준거가 될 때, 그리고 내일을 상상하는 영감의 샘으로 작동할 때,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우리 안에서 유산은 창조된다. 

 

**각주 정리

1. 2022년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월간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의 논의와 이를 발전시켜 게재한 『환경과조경』 2022년 7월호 특집 ‘조경, 그 이름을 묻다’를 참고.

2. 박승진은 정원학 심포지엄 기고문 “열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영선의 정원미학”(2014)에서 정영선은 “정원 식물의 서열화”를 깨고 그의 작업 속 모든 정원 식물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다고 해석했다.

3. 박승진, “열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영선의 정원미학”, 제2회 정원학 심포지엄 기고문, 2014.

4. 정영선, 성종상, “정원 대담: 우리 시대 한국인의 삶과 정원”,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도서출판 한숲, 2021.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제주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 경관 개선사업 설계팀의 디자인 감독을 맡았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 한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