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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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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친환경 파리 올림픽
이번 8월호 배송이 끝날 때쯤 적지 않은 독자들은 밤낮을 바꿔가며 올림픽 경기 중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것 같다. 2024년 파리 올림픽(7월 26일~8월 11일)과 패럴림픽(8월 28일~9월 8일)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친환경 올림픽’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의 절반 수준으로 탄소 배출량을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건축, 도시, 조경계가 가장 눈여겨볼 점은 10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열리는 올림픽이지만 신축 경기장이 거의 없다는 것. 경기장의 95%가 기존 시설 재활용이거나 임시 건물이다. 신축 건물은 선수촌과 수영 센터 정도다.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파리 북부 생드니 지역에 저탄소 기술로 새로 지은 이 건물들은 올림픽이 끝나면 청년층과 스타트업이 입주하는 주상복합 건물로 쓰이면서 도시 재생에 활용될 예정이다. 파리 시내와 인근 지역의 랜드마크와 명소 10여 곳이 임시 경기장으로 탈바꿈했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상드마르스 광장이 비치발리볼과 장애인 축구 경기장으로 변신했다. 도시의 척추인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사이클 경기가, 도시의 혈관인 센 강에서는 남녀 철인3종 수영 경기가 펼쳐진다. 1900년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이었던 그랑팔레는 태권도와 펜싱 경기장으로 쓴다. 서양 조경사의 정점인 베르사유 궁원에서는 근대5종과 승마 경기가 열린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 광장은 양궁과 육상 종목에 쓰인다.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가 깊게 쌓인 도심 한복판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이번에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브레이크댄스를 비롯해 스케이트보드, 3대3 농구 등 역동적인 경기가 펼쳐진다. 소장 욕구를 샘솟게 하는 파리 올림픽 공식 포스터(일러스트레이터 위고 가토니 작)는 도시의 광장과 공원을 올림픽 경기장으로 재활용한 파리발 도시 혁신을 생생히 보여준다. 파리 올림픽의 에어컨 퇴출은 개막 몇 달 전부터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선수촌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건물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공기 순환을 촉진하고 차가운 지하수를 이용해 냉각 시스템을 가동하는 방식을 택했다. 폭염에 따른 경기력 저하를 우려한 일부 국가의 반발로, 결국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는 각국이 필요한 경우 자체 비용으로 휴대용 에어컨을 주문할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건설, 교통과 운송, 식음, 운영 등 여러 방면에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친환경 올림픽이라는 목표가 구체적으로 실천되었다. 새로 지은 건물 옥상에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대회 운영에 필요한 전력은 풍력과 태양광으로 만든 재생 에너지로만 충당한다. 플라스틱 사용을 철저히 제한한다. 경기장에 페트병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선수와 관중 모두 재사용 가능한 병과 컵을 써야 한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산 식재료를 80% 이상 사용하며, 반경 250㎞ 안에서 기른 제철 식재료의 비율을 25% 이상으로 유지한다. 대부분의 경기장이 반경 10㎞ 이내에 있고 선수촌에서 30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참가 선수와 입장권을 소지한 관중은 지하철을 비롯한 모든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친환경 올림픽’의 기치를 내건 파리 올림픽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혁신적 도시 실험의 현장인 셈이다. 이번 호 특집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은 지난 7월 3일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국립현대미술관 서울, 4월 5일~9월 22일) 연계 학술행사로 열린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의 발제와 대담 내용을 다시 엮은 것이다. 많은 독자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 지면이 되기를, 그리고 ‘2024년 정영선 현상’에 대한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풍경 감각] 아침에는 파스타를 생각한다
모닝콜이 울리고 있다. 눈을 감고 돌아눕는다. 해야 할 일 목록이 머릿속에서 차락 펼쳐지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다. 써야 하는 글과 그려야 하는 그림. 잘하고 싶은데 쉽게 풀리지 않아 걱정이네. 이제 수영장에 갈 시간인데, 그냥 오늘만 쉴까. 화분에 물을 줄 때가 되었던가. 조금만 이따가 확인해 봐도 별일 없겠지.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서 꽃구경한 지도 꽤 되었네. 즐거운 일 뭐 없나? 파스타를 떠올린다. 오늘은 어떤 파스타를 만들까. 꼬불꼬불 뭉쳐 있는 페투치네나 소면처럼 가느다란 엔젤헤어를 쓰는 레시피를 찾아볼까. 레몬과 생크림이 떨어졌으니 마트에 다녀와야겠구나. 선드라이 토마토랑 안초비를 넣으면 요리가 근사해진다고 하던데. 마트 간 김에 구경하자. 오늘은 어제보다 맛있으면 좋겠다. 가장 맛있는 레시피는 기억해 뒀다가 친구들이 작업실에 놀러 오면 만들어 줘야지. 아니다. 좋아하는 파스타가 뭐냐고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지난 7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다원공간에서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가 개최됐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연계 학술행사로 마련된 이 심포지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한국조경가협회와 본지가 협력해 진행했다. 행사는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 ‘정영선과의 대화’의 세 개 세션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세션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에서는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와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가 정영선에 대한 학술적 비평의 텍스트 두 편을 발제했다. 두 번째 세션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에는 협업 파트너, 사제지간 등 정영선과 다양하게 관계 맺은 6인의 발제자를 초대했다. 이들은 정영선이 설계한 장소를 조명하며 그의 설계 태도, 철학, 작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세션 ‘정영선과의 대화’에서는 정영선이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와 함께 대담을 나누고,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의 발제와 대담을 지면에 글의 형태로 기록한다. 교차하고 비껴가는 여러 시선이 오늘날 조경설계에서 정영선이 갖는 가치를 새롭게 그려주기를 기대하며, 지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세션의 구분을 없앴다. 이번 학술행사를 촉발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오는 9월 22일까지 진행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태도가 경관이 될 때: 정영선의 조경_배정한 유산의 창조, 정영선이 만든 한국 조경설계의 변곡점_김아연 맥시멈과 미니멈_박승진 협업의 유산을 읽다_전은정 땅을 읽는 법을 배우다_이호영 선유도공원이 건네는 위로_조용준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과 디올 성수, 미래 세대의 수용_김선미 한국 조경 가치의 시각화, 아모레퍼시픽 본사_백규리 정영선과의 대화: 식물과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_정영선, 조경진, 배형민 정영선을 읽는 시간_글 최영준 2024년 여름, 우리는 정영선의 조경이 일반인에게 하나의 문화적 코드가 된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일 평균 1,300명의 관람자가 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있고, 공중파 미디어 콘텐츠는 물론 아이들의 채널에서도 땅에 시를 쓰는 할머니가 인기다. 그 인기와 인지의 바탕이 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이라는 커리어의 특수성과 소탈한 성품에서 기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중이 가장 크게 놀란 순간은 아마 그가 설계하거나 기획을 이끈 일의 목록을 마주쳤을 때일 것이다. 많은 이가 일상적으로 방문하던 장소들이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많은 것을 담아낸 땅들이란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 장소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학술행사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 기획의 시작점이었다. 그가 만든 여러 땅들의 작업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전통과 동시대성을 모두 품는 광폭의 시대정신, 국토를 다루는 공공과 기업 및 개인을 포괄하는 클라이언트의 다채로움, 작은 뜰에서 초대형 공원까지 다채로운 규모. 다양한 관련 분야와 협업해 온 두꺼운 포트폴리오는 다채로운 독자의 목소리로 들어볼 가치가 있는 현대 조경의 역사이자 흥미로운 독해의 대상이다.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는 첫 순서인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는 지난 50년 동안 조경가의 길을 걸어오며 땅과 관계 맺어 온 그녀의 인생과 지사地史를 관통해 줄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마땅했다. 전시 도록에도 수록된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의 글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이야기와 변곡점이 된 주요 작업 세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정영선을 조망한다. 경관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경관이 되었다는 해석은 정영선을 아는 데서 이해하는 단계로 이끌어 준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는 직접 조경 작업을 하는 현역 동료로서의 시선과 정영선이 한국 조경 분야에 드리우는 명과 암을 동시에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한국 조경의 여러 변곡점을 짚으며 이어간 그의 발제는 정영선의 조경이 왜 가장 평범한 혁명일 수 있는지 피부에 와 닿도록 설명해준다. 두 번째 세션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에는 정영선이 만든 땅의 너른 스펙트럼을 담아줄 다채로운 성격의 발제자를 초대하고, 각자 한 장소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담아줄 것을 부탁했다. 다각도의 시선으로 작업을 읽기 위해, 정영선의 작업과 서로 다른 관계성을 갖는 세 그룹을 설정했다. 첫 그룹으로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이란 조경 작업의 울타리에서 정영선과 함께 협업하고 사제 및 조력 관계를 맺었던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 전은정 소장(조경포레)을 초청했다. 서안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와 근거리에서 정영선과 직접 상호 작용하며 배우고 호흡했던 조경 유산에 대해 들려준다. 다음으론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의 작업을 관찰하고 경험하며 성장했고 현재 자신의 작업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동시대 조경가 이호영 소장(HLD)과 조용준 소장(CA조경기술사사무소)을 섭외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영선의 조경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력과 자극,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도한 경험을 듣고 싶었다. 이호영 소장은 서안에서 실무를 시작했으나, 정영선과 직접적인 협업의 기회가 적었기에 ‘어깨너머 스스로 배운’ 정영선 조경에 대한 연구 기록과 그것이 본인의 작업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직접적 접점이 없었던 조용준 소장은 ‘원거리에서 관찰한’ 정영선의 조경을 선유도공원 평면의 모사를 통해 탐독한다. 세 번째 그룹에는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조경에 입문한 이들이자 조경계에서 각자의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김선미 부장(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과 백규리 매니저(현대엔지니어링 건축조경팀)를 초대했다. ‘다음 세대의 해석과 수용’이라 이름 붙인 이 그룹이 정영선이 만든 땅의 공동 생산자나 후속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 어떻게 정영선의 조경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태도와 호흡으로 청자에게 전달하는지를 담는 것도 의미있다고 보았다. 정영선이 작업을 통해 제시한 지속가능성과 한국성에 대한 정신과 그 해석을두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순서는 이번 전시의 작가인 정영선과의 직접 대화를 나누는 ‘정영선과의 대화’로 구성했다. 대화의 시작을 열고, 작가에게 주요한 질문을 던질 대담자로서 정영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와 대학원에서 사제관계이기도 했던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를 섭외했다. 최종 순서로 객석에서 질문을 받고 대답을 듣는 시간은 필자가 진행하며 마무리했다. 정영선의 작업과 다양한 접점을 갖는 여러 세대의 후배 조경가와 이론가의 생각을 하나로 엮는 이 기획은 정영선의 조경이 텍스트로서 얼마나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지에 대한 기획이었다. 모두가 그의 작업과 삶으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받았고, 그에 대한 유의미한 반추와 정리, 해석과 기록을 들려주었다. 학술행사가 끝나고 며칠 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많은 조경인에게 텍스트가 된 정영선의 조경이 있었는데, 과연 조경가 정영선에게 텍스트는 무엇이었을까. 교과 과정도 미완이었을 1세대에게는 무엇이 기초가 되는 텍스트이자 레퍼런스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 산천의 자연, (그녀가 정원이라 칭하는) 국토 경관’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과수원이 펼쳐져 있던 들판과 뒷산, 국토의 원형이 남아있던 개발 시대 이전 한국 땅의 본 모양새는 그가 땅에 작업을 하는 영감의 원천이자 근간이 되는 텍스트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참고할 정보와 이미지가 홍수인 시대, 원 경관의 흔적이 자본의 지우개로 소실되는 시대를 사는 우리 세대에게 조경가 정영선이 만든 땅의 고유성은 우리의 시각과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태도가 경관이 될 때: 정영선의 조경
조경가 정영선과 한국 조경 50년 1941년생 정영선은 1973년 신설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에 1기로 입학하면서 조경과 연을 맺는다. 1인당 국민소득 320불에 불과하던 시절, 근대화와 국토 개발의 급류 속에서 한국가 통치자의 강력한 주도로 서구의 전문 직능이자 학문 분과인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 전격 수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비서실 내에 조경비서관까지 임명했고(1972년), 제도권 조경은 불과 3년 만에 학제(1973년 학과 신설), 공공기관(1974년 한국조경공사 설립), 자격제도(1975년 조경기술사 시행)를 갖추게 된다.(각주 1) 이 이례적인 상황 속에서 시작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정영선의 조경 인생은 한국 조경 50년사의 궤적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 자신의 회고처럼, 그의 조경은 “오늘 우리 조경계가 안고 있는 고뇌”였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끝없는 갈등을 헤쳐 나온 우리 조경인들의 삶 그 자체”(각주 2)였다. 조경가 정영선을 통해 우리는 한국 조경의 50년 성장사와 그 명암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영선의 조경은 곧 한국 현대 조경이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지점에서 구별된다. 그는 주로 공공 발주 물량과 건설 시장 여건에 의존해 온 한국 조경계 전반의 불안정한 조건을 독자적 조경론과 경관 미학, 창의적 조경 실천을 통해 돌파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2023년 세계조경가협회(IFLA)는 정영선에게 제15대 제프리 젤리코상(Sir Geoffrey Jellicoe Award)을 수여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정영선은 한국에서 조경설계를 개척하고 선도했을 뿐 아니라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 개념을 한국의 대지와 경관에 맞게 ‘번역’해냈다. 그는 청계천 복원, 선유도공원 등 다수의 독보적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도시를 화해시키고 자연의 과정과 건조 환경을 통합하며 과거의 산업 흔적을 존중해 설계의 한 부분으로 포섭하는 최근의 세계적 경향을 예견하고 실천했다. 동시대 조경의 핵심인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사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작업에 내재해 있었다.”(각주 3) 이처럼 여러 걸음 앞서가며 새 지평을 연 정영선의 이론과 실천은 그 개인의 작품과 문화적 역량에 대한 조명과 인정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전문 직능으로서 조경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영선의 조경은 한국 조경 50년사에 대한 예리한 비평이기도 하다. 진화와 세 개의 변곡점 정영선의 손을 거친 조경 작품은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개인과 기업의 정원, 도시 가로와 광장, 근린공원, 기념공원, 생태공원,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 선형 공원, 묘역, 병원, 오피스, 상업시설, 복합문화공간, 공동주택 단지, 공장, 캠퍼스, 종교 시설과 단지, 테마파크, 리조트 등 그가 다룬 프로젝트의 유형은 조경 업역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 자체를 예시한다. 작업의 양과 유형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조경 이론과 실천이 계속 진화해 왔다는 점이다. 그 진화의 함수에서 변곡점이 된 세 가지 작업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1970년대의 정치 지형과 사회 상황과 결부된 한국 조경 태동기의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배정한, “근대의 굴레, 녹색의 이면: 한국 조경의 근대성과 박정희의 조경관”,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 나무도시, 2011, pp.152~181. 2. 정영선, “조경과의 조우, 그리고 나를 있게 한 소중한 것들”, 『환경과조경』 1998년 6월호, p.30. 3.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 “Landscape Architect Youngsun Jung from South Korea is the 2023 Recipient of the Sir Geoffrey Jellocoe Award”, www.iflaworld.com/sgja-2023-winner, 2023. 배정한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며, 본지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조경 이론과 설계, 조경 미학과 비평의 접면을 확장해왔다. 대표 저서로 『공원의 위로』,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이 있으며, 『경관이 만드는 도시』와 『라지 파크』를 번역했다.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 『용산공원』,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 『공원을 읽다』, 『서울도시계획사』 등 이십여 권의 책을 기획하고 동학들과 함께 썼으며, ‘용산공원’ 종합기본계획 등 다수의 대형 공원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유산의 창조, 정영선이 만든 한국 조경설계의 변곡점
유산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혹은 현 세대가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물적·문화적 자산이다. 자산(asset)이 유산(heritage)이 되기 위해서는 세대를 초월하는 전승(pass on)이 필요하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이 국토 근대화를 보정해 온 푸른 유산으로 남을 것인가 혹은 대한민국 조경 1세대의 예외적 사례로 기억될 것인가는 다음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 그의 작업이 현재를 성찰하는 준거가 될 때, 그리고 내일을 상상하는 영감의 샘으로 작동할 때,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유산은 창조된다. 이 전승의 과정에서 우리의 설계 현실을 반성하며 질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여덟 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조경 디자인의 특수성 “샛강에서 디자인한 곳이 어디예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어느 도시 전문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하 샛강)에 가본 적이 있는데 너무 자연스럽다며 디자인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했다. 인간적 쓸모를 만드는 근대적 의미의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샛강은 잘 보존된 하천 풍경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주차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들려는 서울시의 계획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정영선의 회고가 떠오른다. 그는 개발이라는 도시적 욕망과 인간적 질서의 외삽을 거부하고 하천에 내재된 자연 형성 과정의 조건을 만드는 일을 디자인의 이름으로 관철했다. 새로운 것, 인공적인 것, 수직적인 것, 눈에 띄는 것을 만드는 개발 시대의 디자인 관행 속에서, 원래의 것을 지키고 폭력적 개입에 저항하는 일 자체가 디자인의 과업이 될 수 있음을 샛강은 증명하고 있다. 자기완결성을 포기하고 ‘연결’과 ‘관계’를 통해 총체성을 만들고 자신을 낮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역설을 통해 디자인으로서 조경설계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자. 폭력적인 개발 드라이브와 발주처의 명령에 디자이너 개인이 맞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용역자이기에 앞서 전문가라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디자인적 완성도는 어디에서 올까. 자신만의 매니페스토와 화려한 컴퓨터 조형에 취한 설계에 몰입하고 있진 않은지. 디자이너들의 자아도취적 발언과 시각적 포장의 재생산 관행, 인스타그래머블 풍경 만들기와 포토 스폿의 난무 역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샛강은 우리에게 조경 디자인의 고유한, 그래서 동시대에 더더욱 생경한 역할과 방향을 제시한다. 조경이라는 이름 “나는 조경이라는 말이 싫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모두 정영선의 말이다. 사석에서 그는 경치를 ‘만든다’라는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을 애초에 잘못 붙였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공적으로 그는 조경의 가치와 역할을 ‘한편의 시’에 비유하며 울림을 준다. 그에게 조경은 애증이 서려 있는 단어다. TV 속 유재석의 입에서 ‘조경가’라는 단어가 발음될 때 조경은 새로운 뉘앙스를 갖는다. 정영선의 업적은 모두 조경가라는 직능명을 붙이고 이뤄낸 성과다. 그는 “후배 세대가 조경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며 늘 우리 분야의 가치와 조경설계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격려한다. 그는 조경가의 사회적 위상을 새로운 레벨로 올려놓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게 만들어준, 조경의 살아 있는 정의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경가는 누구인가. 누가 조경가의 자격을 정하는가. 건축사와 같은 전문 설계 자격 제도를 법적으로 가지지 못한 우리 분야에서 조경가는 오랫동안 자격 여부에 상관없이 스스로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는 열린 단어였다. 단 한번의 공모전 당선으로 작가의 호칭을 획득하는 시대에 20~30년 넘게 설계 일을 해도 여전히 업자인 수많은 전문가에게는 어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한국 조경 50년에도 조경이라는 이름에 대한 부끄러움과 불편함이 스며 있다. 대학 학과 명칭에서 조경이 사라지기도 하고, 대학마다 경쟁력 강화와 입시 경쟁률 제고를 이유로 조경학과의 명칭을 없애거나 변경하기도 한다. 일련의 논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이에도 찬반의 입장이 선명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각주 1)이름에 앞서 우리는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에 대한 성찰에 게을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성과 지역성 “나 옛날 살던 동네 같아요.” 학생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영화 ‘땅에 쓰는 시’에 나오는 정영선의 양평 정원을 두고 나온 얘기다. 부모님이 살던 시골집도 양평 정원처럼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개집과 심드렁한 흙 마당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어린 눈에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들풀이 나부꼈 다. 왜 많은 사람이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자신만의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릴까. 정영선 작품의한국성을 희원과 같은 전통 정원에만 한정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영선은 원 경관을번역하고 재창조한다. 그의 창조 안에는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억으로서 자연이 내재되어 있다. 늘 보던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재구성하는 정영선의 설계 방법은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이며,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에 한국적이다. 그의 작품은 기억과 장소 애착 환기 장치trigger로서 풍경의 힘을 보여준다. 그가 구현하는 한국성은 조형 요소가 아닌 경험과 기억의 원형이며, 그가 다루는 과거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내포하는, 옛것의 창의성과 창발성을 실현하는 시제다. 우리가 전통을 다루는 관행을 돌아보자. 전통은 형식적으로 재생산되고 많은 경우 공간 작명에 그치는 예스러운 것 그 이상이 아니다. 레트로 감성이라는 표제어로 과거는 상품 가치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옛것은 새롭지 않으면 가차 없이 폐기된다. 새롭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무한 브랜드 경쟁 시대에 느린 시간성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조경이, 지속적으로 폐기되고 갱신되는 패스트 디자인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새삼 물어본다. 시그니처 식재 “어? 여기 정 선생님이 하셨나?” 십수 년 전, 김해 클레이아크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잠시 봉하마을을 거닐다가 나의 동료가 무심코 뱉은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 길가에 병아리꽃나무가 있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정원 열풍으로 이름 외우기도 벅찬 식물이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니 병아리꽃나무가 무슨 대수냐 싶지만, 그때만 해도 흔히 쓰는 조경수의 종류는 손에 꼽을 만큼 빈약했다. 정영선의 손이 닿은 곳에는 일반적으로 쓰지 않은 한국 자생종이 어김없이 심겼다. 이름도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이스라지, 미나리아재비, 노루오줌, 노루귀, 팥꽃나무, 꼬리풀 등. 식물 하나하나가 시의 언어다.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자생 식물을 조경설계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측면과 더불어 비싼 소나무와 몇몇 수종에 의지하던 관행적 식재 설계를 거부해 몸값에 따른 식물의 위계를 당당하게 해체했다는 점이다.(각주 2)그의 식재 디자인 어휘는 자연을 공부해서 얻은 그만의 사전에서 비롯된다. 어느 시인은 사전을 통틀어 여기에 쓸 수 있는 단어는 꼭 하나라고 얘기했다. 정영선의 사전에는 바로 그 장소에 필요한 우리 식물이라는 단어들이 채곡채곡 쟁여져 있다. 아름다움의 근원 “눈물겹게 아름다워요.” 정영선의 손을 거친 장소는 특유의 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서식처에 기반을 둔 건강한 생태계의 내재적 아름다움은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서는 또 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한다. 정영선의 작업은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다루는 형식 미학에서 생태 미학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은 기후 위기 시대 우리 주변에 창궐하는 예쁘기만 한 자연의 모사품들 이면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들은 지속가능한가. 정영선의 작품은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경관에 몰입하는 주관적 체험을 전제로 한다. 그는 풍경을 중첩시켜 단위 공간의 제한된 경계를 확장하고 깊이감을 형성한다. 경계의 디자인으로 철저하게 주변을 차단하거나 열고 중첩시켜 경관의 깊이와 몰입감을 준다. 그 아름다움은 시각적·표면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험적·윤리적인 미적 태도를 형성한다. 윤리와 미학이 결합하고 의미와 아름다움이 합쳐진다. 최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정원과 정원박람회 현상에서 대경관은 실종됐다. 국가정원과 정원박람회 후보지는 대체로 하천 부지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남은 큰 빈 땅이 그곳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종 정원 행정이 하천의 하천다움, 강의 원 풍경을 얼마나 숙고해 추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예쁜 것만 살아남는 시대, 소비재로서 자연은 찰나적 풍경 이미지로 끊임없이(재)생산된다. 기후 위기 시대, 자연에 대한 위기의식이 결여된 자연의 상품화가 엄청난 예산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현실 앞에 우리는 침묵할 수 있는가. 공공 프로젝트의 도전 “공공이 해도 이럴 수 있다니.” 선유도공원은 대한민국 공원 디자인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가의 전폭적 지지와 현장 설계와 감리가 가능했던 예외적 상황이 크게 기여한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유도공원을 공공 발주 프로젝트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대표성은 동일한 범주의 다른 사례와의 유사성을 가져야 하는데 선유도공원은 일반적인 공원 만들기 관행에서 이질성이 훨씬 크다. 오히려 발주부터 시공까지의 공공 프로젝트 전 과정에 있어 프로세스의 변칙에 가까운 예외적 사례다. 우리는 왜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절차를 만드는 일에 인색하고, 예외적인 스타의 도래만 기다리는가. 한국 조경은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하고 정착해왔다. 그 가운데 정영선은조경을 통한 사회적·지구적 책무를 자임해왔으며, 제도의 공백을 메운 설계가의 헌신과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이는 전문적 설계자 자격, 공정한 발주 방식, 현장 감리 제도가 없는 현실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가 주도의 사업이 넘쳐나던 풍요의 시대는 품질에 대한 치열함과내부 성찰 능력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설계의 기획-발주-심의-시공-감리 전반의 제도적 기반의 취약성은 또 다른 정영선의 탄생으로 메꿀 수 없는 근본적 한계다. 또한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작품 만들기에 대한 비판적·비평적 담론과 실천이 희박한 현실 역시 우리가 서있는 취약한지반이다. 작가로서 조경가 “조경가가 꼭 호미를 들어야 되나요?” 학생들과 토론하다 보면 꼭 등장하는 질문이다. 호미는 정원 가꾸기 전통이 훨씬 오래된 서구권에 역수출될 정도로 가드닝의 핵심 도구다. 이 시대 호미는 무엇을의미하는가. 누구나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호미라는 도구의 보편성은 조경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아이러니하게 정영선의 호미는 현장 감독 권력을 가진 자의 도구이며, 완성도에 대한 전문가적 집착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에게 호미가 상징하는 것은 땅과의 교감, 관찰의 방식, 직업 윤리와 책임감이다. 박승진은 이를 “작가적 태도로서 직접하기”라고 불렀다..(각주 3)직접하기는 경험적 지식을 축적한다. 실천적 학문으로서 조경은 이론과 개념을 구현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를 통해 진화한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과 연구 성과는 합리성과 첨단성을 보장하지만, 직접하기를 통한 검증은 나 몰라라 한다. 대중에게 호미는 조경의 강력한 아이콘이자 상징으로 작동한다. 많은 후배 디자이너 역시 호미를 들지 않으면 작가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 반면 강력한 호미의 대중적 상징성은 조경의 정의와 조경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꽃 심는 상징적 행위에 제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치열한 첨단 경쟁 사회에서 조경의 지향성이 아날로그 감성에 고착되는 것을 경계한다면, 우리의 직접하기와 현장성은 어떻게 진화해야 할 것인가. 이 또한 중요한 개인적, 나아가 시대적 고민거리다. 국토의 총체성과 정원 “국토는 하나의 정원입니다.” 정영선이 즐겨 하는 이야기다. 나는 이 아름다운 문장이 수많은 행정가들에게 왜곡된 영감을 줄 수 있음을 걱정한다. 정영선의 개별 프로젝트에는 국토 경관의 아름다움과 총체성이 관통하고 있다. 그는 성종상과의 대화.(각주 4)에서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쓰레기를 치우고 땅을 다듬어야” 함을 강조하며, 꽃을 심기 전 땅에 대한 밑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에게 정원은 “잠시 빌려 쓰는 땅에 대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원 사업에는 정원의 본질, 지구적 위기 의식, 국토 가꾸기의 철학이 상실되어 있다. 정원도시는 장식과 행사 중심으로 추진되는 지자체장의 정치 매니페스토가 되어가고 있고, 행정으으로서가드닝은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하며 초기 효과에 골몰하고 있다. 흙이 보이지 않도록 빡빡하게 심으라는 어느 지자체의 지침은, 식물이 성장하며 고유의 형상과 건강한 생육을 위해 밀도를 낮춰 심는 자연주의 정원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국토는 하나의 정원”이라는 말이 국토의 정원 테마파크화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할 때다. 자산에서 유산으로 영화 ‘땅에 쓰는 시’에서 정영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번 경관을 잘못 건드려놓으면 되돌리는 데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요. 국토의 바다는 바다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 …… 샛강은 샛강답고, 한강은 한강답고, 큰 강은 큰 강답고, 동네 산은 동네 산답고, 시골은 시골답고, 아파트는 아파트답게…….” 정영선의 작업은 대한민국 조경 50년의 중요한 질적 전환을 가져오는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지점 이후의 경로는 그의 몫이 아니다. 변곡점 그 자체는 상승도 하강도 아니다. 그가 만든 풍부한 자산과 변화를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유산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이 현재를 성찰하는 준거가 될 때, 그리고 내일을 상상하는 영감의 샘으로 작동할 때,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우리 안에서 유산은 창조된다. **각주 정리 1. 2022년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월간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의 논의와 이를 발전시켜 게재한 『환경과조경』 2022년 7월호 특집 ‘조경, 그 이름을 묻다’를 참고. 2. 박승진은 정원학 심포지엄 기고문 “열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영선의 정원미학”(2014)에서 정영선은 “정원 식물의 서열화”를 깨고 그의 작업 속 모든 정원 식물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다고 해석했다. 3. 박승진, “열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영선의 정원미학”, 제2회 정원학 심포지엄 기고문, 2014. 4. 정영선, 성종상, “정원 대담: 우리 시대 한국인의 삶과 정원”,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도서출판 한숲, 2021.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제주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 경관 개선사업 설계팀의 디자인 감독을 맡았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 한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맥시멈과 미니멈
설계는 생각을 도면 위에 그리는 행위다. 머릿속 이미지를 시각화해 명확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 반복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도면 위에 그려진 이미지는 다시 생각을 구동하게 만들고, 조정된 형태로 도면 위에 반영된다. 이러한 작업에서 설계자는 희열을 맛보기도 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려진 도면은, 나름 완성된 도면은, 실제로 구현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최종의 결과물이며 설계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난 창작물이다. 생각은 어떻게 정리되는가 설계의 단초는 다양하다. 건조한 문구로 채워진 과업지시서일 수도 있고, 열정적인 건축주와의 토론 결과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결론은 ‘잘 만들어 주세요.’ 그 순간 공은 이제 설계자에게 넘어온다. 답사하고 조사한다. 초기의 생각들은 간단한 스케치로 남겨진다.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설계자의 의지가 투사된다. 욕심이 의지로 착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디에서 보았음 직한 멋진 이미지를 구현해 보고 싶은 생각에 도면은 점점 과감해진다. 과도해진다. 생각이 정리될 즈음에는 엇나간 선들도 함께 소거되어야 하나, 끝까지 살아남아서 설계자를 괴롭힌다. 땅에 집중하자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다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미사여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집착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왜 만들고자 할까, 이 땅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없어도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땅에 집중하자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다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미사여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집착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왜 만들고자 할까, 이 땅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없어도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2007년 서울아산병원. 조경 공간이 구현될장소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했다. 한쪽에는 거대한 병원 건축물이, 반대편에는 방대한 주차장이 있다. 바닥은 지하 주차장 상부, 길이 300m와 폭 60m. 웬만한 공원 규모에 버금간다. 아픈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직원까지 하루 유동 인구가 4만 명쯤 된다고 했다. 밀도 높은 숲이 필요했다. 나무는 최대한 조밀하게, 높은 키로 건물을 가릴 수 있기를. 환자들이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는 넘치더라도 많게, 나무 아래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많게, 오래 앉아도 불편하지 않은 벤치를 충분하게, 풀과 꽃과 나비를 많이 만날 수 있게, 물가를 걷는 즐거움을, 물소리는 듣는 재미를, 어디 한적한 곳에 숨어서 미어지는 가슴을 달랠 수 있기를. 정영선의 생각은 분명했다.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콘크리트의 건조함밖에 없는 장소는, 완전히 다른 것들로 채워질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병원이었다. 설계자의 과욕이 표현될 공간은 없었다. 형태는 기능에 충실해야 했고, 디자인적 제스처는 배제되었다. 준공 후 15년 차, 숲은 높게 자랐고 여전히 환자들로 넘쳐난다. ‘맥시멈(maximum)’은 땅에 집중한 결과였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2008년 뉴욕 주 원불교 원다르마센터.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파크웨이를 따라 두 시간 쯤을 달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저 멀리 애팔래치아 산맥이 보이는 낮은 구릉의 대상지. 땅은 아름다웠다. 남겨진 숲, 완만한 구릉을 따라 흐르는 넓은 초지, 그림 같이 자라난 야생 사과나무, 언제 비가 왔는지 아직 습지로 남아 있는 낮은 계곡.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몰려오니 금방 후드득 비가 내린다. 그러다가 언제 개었는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진다. 여기는 원래이런 곳이라고 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의 변화무쌍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땅. 건축가는 이곳에 명상을 위한 집 몇 채를 설계하고 있었다. 한국의 시골집을 닮은 구조라고했다. 규모는 소박했고, 배치는 자연스러웠다. 땅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 미주 원불교에서 추진하는 명상 공간을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 ‘조경’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여기에 무엇을 더한다는 말인가. 땅을 깎고 담을 올리며, 나무를 심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형도를 분석하고, 스터디 모형을 만들고, 답사한 자료들을 모았다. 이쯤 되면 설계자의 노트는 이런저런 스케치로 채워지고 있어야 하나, 여전히 빈 종이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결론은 의외로 명쾌하고 단순했다. 조경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걷기 명상을 위한 길을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길은 굽이굽이 흐른다, 충분히 좁게 만든다, 한눈에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지형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미니멈(minimum)’ 디자인의 전략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설계는 도면집 두께로 판단되지 않는다. 생각은 땅을 이해하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 필요한 것들은 충분히 담겨야 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과감히 배제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맥시멈이든 미니멈이든 정영선의 작업은 늘 땅에 집중한다. 그가 그의 작업을 ‘땅에 쓰는 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에서 실무를 했다. 2007년 지금의 사무실을 열었다. 조경건축가로서 푸른 별 지구,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 자연과 도시와 정원, 평범한 일상의 사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서안에 재직하면서 정영선과 함께 워커힐 마스터플랜, 삼성전자 30주년 기념공원, 서울아산병원 등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후 loci를 운영하면서 뉴욕 원다르마센터,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과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강릉 시마크호텔, 남해 사우스케이프 등 여러 작업을 함께 했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협업의 유산을 읽다
정영선의 ‘서양조경사’ 강의는 당시 대학교 3학년 조경학도들에게 서양 정원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어 주었다. 4학년이 되자 한국 정원을 하나라도 더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는지 지금도 들어가기 힘든 성락원 복원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1987년 가을, 전국 학생졸업작품전에 대학별로 출품해 경복궁역에서 전시와 심사가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자리가 모자라 한 작품이 걸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 팀만 남겨져 발을 동동 구르다 마침 어둡고 구석진 자리를 발견하고 근처 목공소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작품을 걸게 되었다. 우연히 이 과정을 지켜보던 심사위원 정영선은 보통의 작품과는 달리 재개발 계획에 관한 설계와 모형을 들고 나온 우리 팀에게 가장 잘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이후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의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고, 졸업한 뒤에는 그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자연스레 환경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방학 중에는 서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정영선은 나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와 함께한 여러 프로젝트 중 의미 있는 두 개의 마스터플랜과 비영리 재단과 협업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선유도공원 설계공모 1999년 10월 말 선유정수장의 공원화 설계공모가 열렸고, 나는 설계공모 PM을 맡게 되었다. 대상지를 처음 만났을 때, 유학 시절 논문 주제였던 ‘장소의 기억-베르시 공원Le Parc de Bercy’이 떠올랐다. 파리 시가 오랜 기간 조사 및 연구 후 공원의 성격을 결정해 설계공모를 열었던 베르시 공원과는 달리, 선유도공원 설계공모에 주어진 시간과 자료는 몹시 빈약했다. 장소성 보전을 위해 기존 정수장 시설을 존치하거나 재활용하라는 지침이 따로 없었듯이 건축 도면은 제공되지 않았다. 선유도는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신선이 노니는 섬처럼 아름다운 선유봉이었다는 것, 과거 섬 안에 큰 절과 유명한 약수가 있었다는 것을 지역 역사에서 찾으면서 물과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료를 찾으면서 정수장 지하실에서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가 설계한 묵은 도면집을 찾아냈고, 직원 허락 하에 개별 건축 도면을 복사할 수 있었다. 복사해 온 건축 도면을 누더기처럼 이어 붙이고 다시 도면화해 현황 모형을 만들어 보니 현장에서 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공간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정수장의 핵심 시설인 하부 공간에 주목했고 정수 공간의 흔적을 일부 남김으로써 장소의 기억을 회생시키면서 물과 수생 식물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부여하였다. 정영선은 젊은이들과의 협업에 포용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었다. 당선 후 부분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마스터플랜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그의 강한 의지로 지켜지고 실현되었다. 당시 산업 시설의 재활용에 대한 시선이 지금 같지 않아 어려움도 있었다. 취수 펌프장 건물 구조는 마치 수변에 다리를 걸친 정자를 떠올리게 해 정자에서 조망을 즐겼던 선조들의 풍류를 재현하는 의미에서 선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유도의 낭만적 장소성을 되살리고 한강 너머로 마주하고 있는 망원정과 함께 장소의 기억을 이어주는 상징적 공간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선 후 서울시 심의에서 어느 시의원이 선유정을 지적하며 진짜 한국 전통 정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원안을 관철하지 못했다며 정영선은 심의를 나오자마자 너무 속상한 나머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화한 적도 있다. 그는 건축가와의 협업을 자주 강조했다. 실제로 공모전 팀 구성에 건축가가 포함된 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유도공원은 당선 후 건축과의 협업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비슷한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는 건축가와의 작업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다. 이때의 교훈을 깊이 새겨 프로젝트의 규모와 상관없이 건축가와의 협업이 필요하다면 초반부터 같이 작업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전은정은 조경포레 소장이다.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거쳐 파리 라빌레뜨 국립건축대학/국립고등사회과학대학원 협동박사과정 ‘정원, 경관, 지역’의 D.E.A.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2004년 사무실을 열었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사단법인 도코모 모코리아 이사로 활동했다. 김해 수릉원, 동경주재 주일한국대사관, 강릉 라카이 샌드파인 리조트 조경설계 등을 수행했다. 용산공원 국제공모에서 서안과 협업해 3등에 당선된 바 있다. 틈틈이 설계와 시공을 병행,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등 다수의 개인 정원을 작업했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땅을 읽는 법을 배우다
정영선의 작품과 철학은 오늘날 한국 조경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많은 후배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첫 직장인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에서 6년 가까이 일했지만, 직접 만나며 일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스케치와 도면, 보고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잠시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시 정영선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과 배움을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담담한 설계를 그리며 배우다 정영선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있다. 어디까지가 그가 만든 경관이고 어디서부터가 원래 있던 자연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당시 그는 한국 조경의 특성을 ‘담담함’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검이불루 화이불치’로 설명한다. 이러한 철학은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항상 나의 설계가 ‘담담함’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씩 생각해보며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2007년, 광교호수공원 설계공모 당시 하루종일 대상지를 돌아다니며 숲과 수변의 경관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장에서 들은 내용을 그때 그때 받아 적었다가 나중에 노트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버드나무 가지가 밝으니 이른 봄에 아름답다”, “어두운 골짜기에 일찍 싹을 틔우는 귀룽나무를 심으면 좋겠다”, “흥덕지구 아파트를 가리기 위해 키 큰 상수리나무를 심자”, “호수 물가로 물풀을 심고, 축축한 들판에는 돌배나무가 좋겠다” 등 정영선은 현장에서 경관 계획의 큰 골격을 잡아갔다. 그는 내게 각 장소의 경관을 꼼꼼히 기록하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을 가르쳐 주었다. 정영선의 세심한 관찰과 분석은 내가 경관을 크게 보고 지역에 맞게 계획을 세우는 방법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이호영은 조경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설계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HLD 대표로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HLD 설립 전에는 조경설계 서안, AECOM, office ma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8년 제1회 젊은 조경가 상을 수상했고, 한국조경협회 부회장, 한국조경가협회 위원장, 서울시 공공조경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선유도공원이 건네는 위로
선유도공원에는 배려와 풍부함 그리고 정제된 느낌의 분위기가 흐른다. 기존 시설과 새로운 건축물 그리고 이를 둘러싼 조경 사이에 주고 받는 일종의 상호 교류가 있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건축가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의 『분위기』(2013)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건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아홉 가지 특징(건축의 몸, 물질의 양립성, 공간의 소리, 공간의 온도, 주변의 사물, 안정과 유혹 사이, 내부와 외부의 긴장, 친밀함의 수준, 사물을 비추는 빛)을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 춤토어의 설계는 건축과 그 주변 환경의 관계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이는 공백의 시간을 잇고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들을 포용하는 정영선의 철학 ‘조경가는 연결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땅을 읽는 정영선의 태도를 보면, 대상지에서부터 영감을 찾으며 면밀히 분석하고 관찰해 설계한다. 새로운 형태의 공간 골격을 만들어 내기보다 땅의 분위기를 읽어내어 그 땅에 필요한 것들을 주변과 관계 지으며 형태를 만든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독특한 분위기를 선유도공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공원 개장 이후 여러 번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공된 공원 배치도를 모사(模寫)했다. 선을 따라 그리는 행위 속에서 공간의 골격을 상상해가며 설계 의도와 분위기를 읽어 나갔다. 이 과정을 통해 선유도공원의 해석을 위한 여섯 가지 틀(공간의 골격, 전이 공간, 절제된 요소들, 빛과 소리, 호기심과 관찰, 위로)을 세웠다.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뤄지는데, 순차적 인과 관계로 설명하면서 선유도공원의 정제된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지난 20년간 작은 스케일의 공공 정원부터 큰 스케일의 도시계획까지 다양한 국내외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국립새만금 수목원, 세운상가 녹지축 조성계획, KT 디지코 도시숲, 더 글라스 호텔정원, 나주 빛가람호수공원 등이 있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과 디올 성수, 미래 세대의 수용
경기도 오산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2019)과 서울시 성동구의 디올 성수(2022)는 조경가 정영선의 손길로 탄생한 공간이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에는 동백과 장미 등 아모레퍼시픽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식물들이 심겨 있고 삼지구엽초, 깽깽이풀 등이 포근하게 땅을 덮고 있다. 디올 성수에서도 데자뷔가 일어난다. 세계적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각주 1)가 사랑했던 장미와 라벤더로 분명히 프랑스 정원을 표현했는데, 모란과 작약, 잔잔한 한국 풀들이 어우러져 한국 정원 느낌이 난다. 단순히 둘을 합친 게 아니라 화학적 성분마저 풀어헤쳐 만들어낸 듯한 제3의 결과물이다. 짜깁기가 아닌 재편집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창조이자 혁신이다. 아모레퍼시픽과 크리스챤 디올, 두 브랜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창업가의 철학과 헤리티지가 녹아든 경영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서성환(1924~2003) 선대 회장이 1960년 첫 프랑스 방문 길에 들렀던 남프랑스 그라스의 라벤더 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세운 회사다. 프랑스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어머니가 가꾸는 장미 정원에서 자란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는 1951년 그라스의 성 ‘샤토 드 라 콜 누아르(Château de la Colle Noire)’를 사들여 세상을 뜰 때까지 향수 원료 식물을 재배했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조향사였던 그에게 식물은 영감의 원천이자 브랜드의 철학이었다. 둘째, 전통을 혁신해 미래 세대와 만난다는 점이다. 고 서성환 회장은 세계 각국에 있는 차 문화가 왜 우리에겐 없을까 안타까워하며 제주에 다원(茶園)을 일궜다. 요즘 제주 오설록을 찾는 미래 세대는 정영선이 곶자왈을 구현한 정원을 보며 녹차라테를 마시고 견고하게 스토리텔링된 녹차 성분의 화장품을 산다. 루이비통 모에헤네시(LVMH)에 편입된 크리스챤 디올의 행보도 전략적이다. 글로벌 도시들을 돌면서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전시회를 열고, 미래 세대의 왕래가 잦은 핫플 지역에 매장을 낸다. 디올 성수도 그 전략 중 하나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우리에게 익숙한 브랜드인 ‘크리스챤 디올’은 미국 영어 표기법에 따라 적었고, 설립자인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적었다. 김선미는 2023년부터 동아일보에서 ‘김선미의 시크릿가든’을 연재하고 있다.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 뉴센테니얼본부 크리에이티브랩 팀장, 편집국 문화부와 산업부 차장 등을 거쳐 현재는 콘텐츠기획본부 부장이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가볼 만한 24개의 정원을 소개한 『정원의 위로』(민음사, 2024)를 펴냈다. 산림교육전문가(숲 해설가)이자 현재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과정에 있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한국 조경 가치의 시각화, 아모레퍼시픽 본사
조경, 그게 뭐 하는 건데 조경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자주 듣던 말은 “나무 심는 일 아니야?” 혹은 “이 나무 이름이 뭐야?” 였다. 여러 공종이 늘 협업하는 건설사에서 조경직으로 근무하니 이제 조경이 나무 심는 일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안다. 하지만 여전히 건축 외 남은 공간을 담당하는 업무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늘 하는 고민은 1) 다른 공종과 협업하면서도 조경이 돋보이는 디자인과 구현 방법, 2) 조경이 건축 외관을 더욱 풍부해 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되면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고 건물과 상생하게 하는 방법이다. 고민에 대한 답을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이하 아모레퍼시픽)에서 찾았다. 대청마루에서 보는 풍경 아모레퍼시픽 지상층 조경은 밖에선 건축을 보고 안에선 조경을 보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만든다. 독특한 루버 디자인의 백색 건물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조경에 감탄하며 자연스럽게 이끌려 걸어가면 바깥과 건물을 연결하며 자연스러운 전이 공간 역할을 하는 지상층 숲을 만나게 된다. 숲을 지나 필로티 하부에 서면 방금까지 봤던 도시 풍경이 잊히고 전혀 다른 공간에 온 듯하다. 이 풍경은 선조들이 휴식을 즐겼던 대청마루와 닮았다. 기둥들은 대들보가 되고 넓은 필로티 하부는 대청마루가 된다. 건물 하부에서 차가 달리는 도로가 바로 보였다면 이런 경험을 전혀 할 수 없고 그저 현대적 회랑으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건물 내부에서도 할 수 있다. 건물의 모든 창에서 외부 조경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통 조경의 개념인 차경을 떠올리게 한다. 창의 위치와 크기, 건물 내부에서 보이는 풍경과의 거리를 고려한 식재 디자인이 건물 안으로 조경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조경은 이용자와 건축물의 관계를 맺어주며 이 공간을 지속해서 이용하도록 유도한다. 외부에서 본 숲이 건물과 외부를 분리시키며 자연 속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면, 내부의 창을 통해 보이는 조경은 나만을 위한 정원이 되며 이용자를 머무르게 하고 건축과 더 소통하게 하는 연결사 역할을 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백규리는 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학과 졸업 후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설계를 배웠다. 현재는 현대엔지니어링에서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는 디자인지니어(design+engineer)다. 조경인에게 감동과 경험을 주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조경이 발길 닿는 모든 공간을 만진다는 점을 돋보이게 하는 데 관심이 크다.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식물과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제3자가 바라본 정영선의 이야기를 다룬 세션 1, 2가 끝나자 무대 위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놓였다. 이제 주인공이 직접 마이크를 쥘 시간. 세션 3 ‘정영선과의 대화’는 정영선과 두 명의 손님을 초대했다. 중앙 자리에는 정영선, 왼편에는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설계학과)의 자리가 마련됐다. 대담 진행을 맡은 이지회 학예연구사(국립현대미술관)는 조경진이 이번 전시와 어떻게 연을 맺게 되었는지 소개했다. “조경진 교수에게 이번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연보를 의뢰했다. 정영선의 삶과 작업의 역사, 한국 조경사, 그리고 세계 환경 관련 이슈의 연대기 작성을 이끌어주며 이번 전시회의 시공간적 맥락을 짚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오른편 자리에는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가 앉았다. 배형민은 정영선의 작품 중 하나인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개관을 기념하며 출간한 『아모레퍼시픽의 건축』의 저자다. 그는 이지회와 함께 황금사자상을 받은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준비한 바 있는데, 이지회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베니스비엔날레의 기억을 자주 떠올렸다. 오늘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대담의 시작을 알렸다. 세 사람 사이의 대화는 느릿하고 은은하게 오갔다. 조경 철학을 파헤치거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신, 오랜 세월 묵혀 둔 작업 뒤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내는 식이었다. 대담 뒤에는 청중에게 질문을 받아 답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중 몇 가지를 뽑아 간단히 소개한다. 사우스케이프, 바위를 쪼아 만든 조경가의 조각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포스터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식물도, 탁 트인 경관도 아닌 거대한 바위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단면이 돋보이는 이 바위는 남해 사우스케이프의 암각 동산이다.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사우스케이프 설계 의뢰를 받아 처음 클라이언트 내외를 만나러 가던 날, 마당에 있는 억새풀과 들풀을 뜯어 가지고 들어갔어요. 대상지가 본래의 경관이 아름다운 남해인 만큼 이런 우리의 풀들이 보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직접 뽑은 억새풀과 들풀을 보여주며 말하니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대상지에 커다란 바위산이 있었는데, 숙박 시설과 주요 홀, 휴식 공간이 이 바위산을 빙 두르고 있었습니다. 건축 공사를 진행하며 이 바위를 없애보려고 했지만, 깨다 지쳤는지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 바위가 너무 좋더라고요.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다듬어, 주변을 두른 건축물의 다른 고유 기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물과 꽃을 더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절 믿어준 건지 알아서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날부터 한 제자와 함께 호미와 망치를 들고 몇 날 며칠에 걸쳐 바위를 손으로 다듬었습니다. 이 바위는 조경가가 만든 조각인 셈입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및 문화시설 국제설계공모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및 문화시설 국제설계공모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강은 도시와 아주 가까이 있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한강의 콘크리트 둔치가 물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보게 만든다면, 한강을 크게 둘러 달리는 고속도로는 도시와 강을 나누는 거대한 물리적 장벽으로 작동한다. 한강과 신반포로 사이를 평행하게 달리는 올림픽대로도 마찬가지다. 올림픽대로는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88 서울올림픽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올림픽경기장이 잠실벌에 위치한 서울종합운동장으로 확정되면서 경기장으로의 접근성을 높일 도로가 필요해졌고, 이는 단순한 도로 정비를 넘어 대도시 도로 정비 개념인 도시고속도로 건설 추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올림픽대로가 건설된 뒤 줄곧 단절되어 있던 신반포로와 한강이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공중 녹지로 연결될 예정이다. 지난 4월 서울시는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및 문화시설 국제설계공모’(2단계, 1단계 공모는 2월에 진행)를 공고했다. 대상지는 반포주공1단지 1‧2‧4지구 재건축 사업의 기부채납 부지로, 동쪽에는 아크로리버타워를, 서쪽에는 반포주공1단지를 두고 있다. 신반포로에서 출발한 길고 가는 땅이 서래섬을 마주보고 있는 한강변에 도착하며 탁 트인 사각형으로 넓어져 말풍선 같은 형태를 띤다. 계획 범위는 문화공원 2와 그 내부의 문화시설, 근린공원 A, B로 구성되는데, 이때 문화공원 2의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획 범위를 나타내는 지도 속 문화공원 2는 올림픽대로를 과감히 덮고 있다. 즉, 도로 위에 떠 있는 공중 공원인 셈이다. 서울시는 이를 ‘최초의 덮개공원’이라 표현하고 있다. 지침은 공모의 지향점을 다섯 개로 정리했다. 첫째, 자연과 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인프라를 구축한다. 남측 신반포로와 북측 한강 수변을 연결하는 보행 인프라를 제시하고, 한강과의 입체적인 연계를 꾀해야 한다. 더불어 생태 영역 간의 매개 공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둘째, 한강변 도시고속화도로 상부에 설치되는 최초의 공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 입체 공원,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수평 공원, 대규모 공중 공원이라는 키워드가 함께 제시됐다. 셋째, 반포지구 공동 주택 단지와의 조화와 상생을 꾀해야 한다. 인근 단지의 주민과 서울 시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공공 공간임을 염두에 두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넷째, 장소의 기억을 담은 복합 문화 공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지침은 대상지의 문화시설에 한강변 주거사를 전시하는 공간이자 문화와 예술을 담도록 지시했다. 이때 대상지에는 존치된 반포주공1단지 108동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자유롭고 창의적인 제안을 요구했으며, 보존 정도 및 철거 여부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다섯째, 공원과 문화시설이 민간의 기부채납 시설임을 인식하고 민간과 공공의 협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공공 공간의 완성도와 디자인 혁신을 꾀하며, 설계자·조합·공공 상호 협력과 조화로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공모는 2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에서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6개팀을 선정하고, 4월부터 선정된 6개팀을 대상으로 2단계 설계공모를 진행했다. 6월 4일, 200여 명의 시민과 전문 심사위원단이 참석한 2차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개최해 최종 순위를 가렸다. 당선작으로 건축사사무소 리옹 팀의 ‘다층의 문화 공원’이 선정됐다. 당선작은 자연 지반을 최대한 살려 너른 들판 같은 풍경을 만들고, 다층 구조의 정원과 오솔길, 산책로를 통해 한강까지 자연스럽게 걸어서 갈 수 있게 한 점이 특징이다. 맨발 걷기, 숲 놀이터, 목초지 등 다양한 생태 경험 공간과 풀, 들꽃, 나무의 섬세한 식재를 통해 사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시공성과 안전성도 우수해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도 좋은 안으로 평가됐다. 심사위원단은 “상부 공간을 생태 공원으로 확장한 형태로 향후 덮개공원의 모델이 될 수 있고, 실현 가능성과 설계 유연성에서 독창성이 돋보였”으며 “기존 주거 흔적을 상징적으로 재해석해 의미를 갖게 한 점도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9월 개최 예정인 반포주공1단지(1‧2‧4주구) 조합 총회 의결 절차를 거쳐 최종 설계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조합 총회 의결 이후 당선팀은 기본설계를 진행하게 된다. 실시설계는 조합이 별도로 선정한 업체가 맡게 되는데, 당선 팀과 함께 디자인과 실무를 보완하며 사업의 완성도를 높여갈 예정이다. 다음은 심사위원이 중요시 여긴 다섯 가지 관점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첫 번째, 도시와 한강과의 연결은 도시 구조의 개선을 수반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한강 덮개공원의 공간적 성격을 중요하게 봤는데, 자연을 닮은 공원과 활동 중심적인 공원을 두고 토론한 결과 전자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했다. 다시 첫 번째와 두 번째 가치에 대해 비교 토론한 바, 도시와 한강의 연결보다는 공원이 담고 있는 성격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단순히 한강과 도시가 연결됐다는 점보다 덮개공원의 공간적 성격에 더 집중해 평가했다. 세 번째, 문화시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덮개공원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공원을 활성화시키는 데 얼마만큼 기여하는가도 평가 기준이었다. 네 번째, 프로젝트의 공사비의 제약과 한계가 예상되기에 규모가 축소됐을 경우, 원래의 안이 가진 가치와 잠재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 논의했다. 시공성과 경제성도 함께 고려했고 공사비 때문에 규모가 축소될 상황을 상정했다. 그때 원래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 평가 요소로 작용했다. 다섯 번째, 한강 덮개공원이 서울에서 처음 시도하는 사업인 만큼 올림픽대로의 상부가 공원으로 계속 확장되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였다. 이러한 점에서 당선작은 향후 덮개공원이 긍정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사업을 통해 올림픽대로 상부가 공원으로 전환되는 데 시민의 호응이 따르고, 또한 그 사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길 희망한다. 당선작다층의 문화 공원_건축사사무소 리옹+로칼디자인(LOKALDESIGN)+신혜원(모나시대학교 교수)+스튜디오 풀칸 조경(studio Vulkan Landschaftsarchitektur) 2등작 경계 없는 전시공원_조병수건축연구소+지 오터슨 스튜디오(Ji Otterson Studio)+트랜솔라 클리마 엔지니어링(Transsolar Klima Engineering)+휘트비 우드 밀스(Whitby Wood Mills)+에이치이에이(HEA) 3등작 반포 생태 놀이동산_스뇌헤타(Snøhetta)+슐라이히 베르게르만 파트너(Schlaich Bergermann Partner)+뷰로 하폴드(Buro Happold International Hong Kong) 한강의 풍경, 기억의 유산_건축공방건축사사무소+건축공방+스튜디오 아케위(Studio Akkerhuis)+로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츠(LOLA Landscape Architects) 더 플로우(The Flow)_펜타토닉 LLC(Pentatonic LLC)+엠아이엔건축사사무소+조경설계해랑 패스트스케이프 앤드 슬로스케이프(Fastscape & Slowscape)_엠엠케이플러스건축사사무소+맹필수(서울대학교)+스트레인지 워크스 스튜디오(Strange Works Studio)+이머전트 스튜디오(Emergent Studio)+터레인 워크(Terrain Work)+CA조경기술사사무소+유신+센구조연구소+한정민(연세대학교) 주최 서울시 미래공간기획관 발주 반푸주공1단지(1‧2‧4주구)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 위치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901번지 일원 공모 방식 2단계 국제설계공모 설계 범위 계획 및 기본설계 계획 범위 및 면적 문화공원2, 문화공원2 내 문화시설, 근린공원 A, B A 한강연결공원: 신반포로에서 반포 한강지구까지 연결하는 공원으로 아래를 모두 포함 ① 문화공원2(덮개공원 포함) 문화공원2 전체 구역 면적 45,209m2 중, 35,209m2 이하로 계획 제안 덮개공원은 구역 면적 20,000m2 중, 10,000m2 이하로 계획 ② 한강과의 연결을 위해 필요한 주변 공원 근린공원 A: 3,452.2m2 근린공원 B: 1,401m2 B. 문화시설: 기준 연면적 3,300m2 이하로 계획 설계용역비 약 4,900백만원(부가세 별도) 덮개공원 및 문화시설 설계비: 약 47억(부가세 별도) 문화공원 2 외 기타공원: 약 2억(부가세 별도) 기부채납 설치비 덮개시설 및 문화시설 설치비: 108,622백만원(부가세 별도) 문화공원2 설치비: 약 5,000백만원 보상금 당선작(1점): 기본 및 중간설계 우선협상권 2등작(1점): 1억5천만원 3등작(4점): 1억원 운영위원 윤승현(중앙대학교 교수, 운영위원장) 김세진(지요건축) 윤혁경(에이엔유건축) 이상민(현대건설) 천장환(경희대학교 교수) 남정현(서울시 공동주택지원과장) 김창규(서울시 미래공간기획관) 이유국(서울시 미래한강본부 시설부장) 심사위원 김용미(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심사위원장) 김광수(건축사사무소 커튼홀 대표) 김세진(지요건축사사무소 대표) 남성택(한양대학교 교수) 마이클 스픽스(시러큐스대학교 교수)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 은상준(현대건설) 이상은(국토연구원 건설·민간투자·자원연구센터장) 천장환(경희대학교 교수) 황경주(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정현태(뉴욕공과대학교 교수) 최영준(서울대학교 교수)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서울시, 수상 팀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다층의 문화 공원
긴 세월 동안 한강은 수많은 층위를 남겼다. 각각의 층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도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한강에서 한강공원, 올림픽대로, 반포주공1단지까지 연결되는 다양한 층위는 한강과 주거지 사이의 독특한 흐름을 만들었다. 새로 생기는 덮개공원과 공공 문화시설이라는 층위, 그리고 재개발될 아파트의 새로운 단층은 기존의 흐름을 연결하고 확장한다. 우리는 한강에 새로 생겨날 ‘다층의 땅을 바라보는 시선’에 집중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후 위기에 전면적으로 대응하는 도시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각이 필요하다. 기후 변화 시대에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지, 현시점에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계획하고 대응해야 할지 자문하며 다섯 가지 지향점을 제안한다. 다섯 가지 지향점 도시와 자연의 복합: 반포지구는 다양한 자연 요소와 인공 사물이 어우러진 곳이다. 사유지와 공유지라는 성격이 다른 영역이 공존하고 있고, 한강공원 같은 열린 시민 공간이 존재한다. 반포지구의 다양한 요소들을 공존하게 한다면 이곳을 자생력과 공존의 힘을 갖는 복합 서식지로 조성할 수 있다. 새로운 한강공원은 인간의 문화와 자연의 다양한 생물체를 연결하는 유연한 공간이 될 것이다. 다층적 땅, 생태: 땅의 본질인 자연 지반을 최대한 보존해 다양한 생명체와 사람이 공존할 수 있게 한다. 한강공원~들:판~내리:정원 108~수풀원~사이:정원으로 이어지는 자연 지반의 층위는 길과 자연 요소, 경관을 하나로 이어준다. 다층의 땅 위에서 자연 지반과 인공 지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생하고 공생하게 될 것이다. 통합: 덮개공원은 휴식과 레저 공간이자 새로운 한강의 경관을 제공해 준다. 빗물이 스며드는 정원과 더불어 자연 환기가 가능한 덮개공원과 완충 녹지는 도시와 자연을 매개하고 미세 먼지 저감을 위한 도시 숲이며 도시 열섬 완화를 위한 기반 시설로 기능한다. 협력하는 시민: 다양한 전문가가 협력하는 프로젝트의 설계자는 계획뿐 아니라 조력자와 중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의 디자인 윤리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깊은 연결을 촉진하며 두 존재의 웰빙을 향상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단단한 구조물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 관계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디자인에 접근했다. 땅을 존중하고 자연이 번성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시각적 흥미와 더불어 자연에 잠재된 회복력을 이끌어내 지속가능한 생태계, 생물 다양성을 품은 경관을 만들고자 한다. 기억을 담은 복합 문화 공간: 반포주공1단지의 108동은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담고 있다. 홀로 남은 108동은 서울 미래 유산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담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이다. 108동은 반포지구의 정체성으로서 미래와 현재가 상호작용하는 시민의 장소가 되어 문화와 자연을 연결시킨다. 사이:정원 높이가 다른 아크로리버파크(동쪽)와 디에이치클래스트(서쪽) 사이에 사이:정원을 만들어 두 단지를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공원 경계부 양쪽에 밀도 높은 숲을 조성해 외부로부터 시야를 차단해 프라이버시를 확보한다. 정원 중심부는 주민 텃밭으로 활용되는 작은 텃밭을 품고 있는데, 이곳은 만남의 장소이자 소통 장소 역할을 한다. 빗물을 모으는 빗물 저금통은 마을 텃밭 이용자와 시민정원사들이 사용할 수 있다. 농막의 역할을하는 파빌리온은 휴식 공간이자 농기구를 저장하는 공간이다. 사이:정원을 지나 신반포로에서 시작해 한강으로 향하는 메타세쿼이아 숲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각 단지의 진입구와 이어진 주요 산책로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며 숲 라운지를 만들어낸다. 오솔길은 포켓 녹지와 텃밭, 주변 공공 단지를 연결한다. 사이:텃밭 기존 근린공원A의 일부분을 텃밭 정원으로 활용한다.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다층의 자연 친화적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한다. 빗물을 담는 물 그릇인 텃밭 정원은 생명력 있는 토양 환경을 되살려 미생물과 농작물이 자라나는 건강한 땅을 만들어낸다. 숲:정원 숲:정원은 올림픽대로변에 있는 기존 완충 녹지 흐름을 이어간다. 공원 동쪽에 위치한 숲:정원은 가장자리에 식재가 밀집되어 있고 중앙으로 갈수록 나무의 밀도가 낮아져 분위기가 밝아진다. 빽빽하게 나무가 심긴 이곳은 도심의 피난처다. 정원에는 숲속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작은 산책로가 있다. 황토길은 맨발로 걸으며 주민들이 편하게 자연을 느낄 수 있으며, 산책로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른 정원들과 연결된다. 신반포로에서 사이:정원으로 이어지는 주요 공원 산책로는 숲속으로 스며들며, 장애인도 다닐 수 있는 완만한 경사의 곡선 길은 아크로리버파크 단지로 이어진다. 나무가 우거진 숲:정원은 물리적인 개입이 아닌 친환경적 요소로, 언덕과 나무를 통해 올림픽대로의 소음과 먼지를 차단한다. 숲:정원의 중심부이자 가장 높은 곳에는 108동 건물과 내리:정원의 입구가 위치하며, 한강으로 향하는 산책로의 진입 역할을 한다. 내리:정원 108 뼈대만 남은 108동을 공원 일부로 활용한다. 부분적으로 남겨진 108동은 3개의 서로 다른 층을 이어주는 수직 축의 중심이 된다. 신반포로에서 이어지는 공원 산책로는 완만한 경사를 통해 1층에 도달하며, 이는 아파트 단지의 진출입로와 같은 높이다. 산책로와 단지 출입로가 만나는 위치에 숲 광장을 조성한다. 108동 둘레의 폭을 3m 더 넓혀 선큰 정원을 조성한다. 정원은 문화시설이 위치한 지하층에 채광과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지하층에는 주거 역사 전시장과 108 카페, 화장실 등 이용객을 위한 문화시설을 만든다. 108동의 기존 계단을 이용해 지하층과 연결하고, 동쪽에는 108동 외벽 입면과 5층까지의 주요 구조를 존치해 엘리베이터를 통해 공원 이용객들이 자유롭게 지하층과 덮개공원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108동 수직 동선인 엘리베이터와 브리지는 한강으로 접근하는 최단 거리를 만든다. 덮개공원, 들:판 올림픽대로 상부에는 덮개공원, 들:판을 조성한다. 한강 전망을 가리지 않도록 낮은 높이의 그라스 정원을 계획했다. 들:판의 가장자리에는 안전을 위해 나무를 식재하고 이를 위해 토심을 상대적으로 깊게 확보했다. 들판의 중심부는 목초지로 구성하고, 나무와 바위로 그늘이 드리우는 쉼터로 조성한다. 덮개공원은 건조 지역과 습한 지역, 탁 트인 초지와 조밀한 관목 등 대비되는 특성을 가진다. 공원 산책로는 들:판 위 브리지로 연결되며, 들:판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지는 동선이다. 보조 동선으로 마련된 자갈길은 목초지 중심을 지난다. 비가 올 때 오목한 지형을 따라 가운데로 빗물이 모이면서 건천을 만들어 낸다. 이 지점에 북쪽의 한강과 남쪽의 공원을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쉼터와 휴식 플랫폼들을 배치한다. 엘리베이터, 계단, 경사로의 세 가지 방법으로 덮개공원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덮개공원과 한강공원을 엮는다. 들:판 나들목 반포한강공원과 사래섬, 들:판의 교차점에 위치한 들:판 나들목은 들:판의 주요 수직 동선과 연결되고 한강과의 높이 차를 극복한다. 한강 진입 공간이자 한강변, 서래섬, 들:판 세 녹지대의 중간 지점인 나들목은 다양한 이용자와 프로그램을 수용한다. 한강변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 차량 통행로에 접한 개방형 광장은 바닥 포장으로 주변과 구분하고, 들:판의 도착 지점이 자연스럽게 반포한강공원의 일부로 편입되도록 한다. 기존 올림픽대로 하부를 통과하는 반포안내센터 나들목, 서래섬 나들목 사이에 위치한 들:판 나들목은 녹지를 통해 한강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나들목 유형을 제시한다.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경계 없는 전시 공원
덮개공원의 환경 설계적 측면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의 덮개공원은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는 올림픽대로 상부에 조성되는 공원이다. 바람이 센 강변 환경과 극한의 날씨에 대한 대비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사계절 내내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야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공원 테두리에 스크린을 제안한다. 바람과 환경 시뮬레이션 자료를 기반으로 스크린의 각도와 통기성을 조절했다. 이는 강한 겨울 바람과 뜨거운 태양, 비와 눈으로부터 방문객을 보호한다. 동시에 스크린은 하부 고속도로의 통행을 고려한 안전 장치의 기능을 겸한다. 공원 방문객들의 안전을 확보할 뿐 아니라 하부 고속도로에 위험한 파편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먼지 또한 스크린에 의해 차단되어 도심 한복판에서 자연과 한강이 조화롭게 경험될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다. 지속가능한 공원으로써의 잠재성 지속가능성과 기후 회복탄력성은 중요한 설계 지향점이다. 궁극적으로 태양 에너지 발전, 지열 에너지, 풍력 분석을 통한 탄소중립을 달성하고자 한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쾌적한 야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쿨링 플라자(증발 냉각 광장), 차양 구조물 등을 설계했다. 미술관 건물과 공원에는 태양광 패널과 녹화 지붕과 같이 환경적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했다. 이러한 디자인 원칙들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지속가능한 공원으로써의 잠재력을 탐구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반포 생태 놀이동산
한강변 모래 범람원의 메아리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와 한강의 관계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땅과 물의 경계를 형성했던 모래 범람원은 가족들이 여가 시간을 보내며 재미와 놀이의 추억을 키우는 동시에 생태계가 번성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이 문지방(threshold)은 사라졌다. 더불어 고속화도로가 건설되면서 수변과는 더욱 단절되며 서식지는 파편화됐다. 우리는 물리적 환경을 다시 연결할 뿐만 아니라 현재 휴면 중인 땅의 활기를 되살리는 구상을 제안한다. 물을 땅으로, 숲을 바깥으로 이끌어낸다. 이로써 조성된 도시 생활과 주변 환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경관은 자연이 도시의 활기와 함께 번성하는 교향곡을 만들어 낸다. 역동적인 한강공원을 따라 우아하게 놓여, 번화한 올림픽대로 위에 펼쳐진 공원은 주변 지역과 강변을 하나로 통합하고 반포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생명선이 될 것이다. 생태와 문화 두 가지 차원에서 대상지의 본질에 기여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웠다. 우선 생태학적 차원에서 홍수에 대응할 수 있고 자정 능력을 갖춘 생태계를 조성해 회복탄력성을 높이고자 했다. 대상지의 여러 요소와 조화롭게 공존하며 번성하는 서식지는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게 도움이 된다. 또한 이곳의 온도, 습도, 바람, 소리, 일사량 등의 미기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생 식물이 다시 자라게 한다. 이렇게 형성된 미기후의 상호작용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환경을 만들고, 더욱 풍부한 경험을 위한 교육 요소로도 작동한다. ‘놀이동산’은 최초의 인공 공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뿐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움을 위한 촉매라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놀이를 장려함으로써 모든 세대가 함께 모여 시간을 공유하며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곤충, 야생 동물, 심지어 로봇을 포함한 비인간 거주자도 포용하는 공동체를 조성한다. 놀이동산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위한 다목적 플랫폼을 제공한다. 또한 다층 구조를 통해 매혹적인 자연, 매력적인 광장, 원형 극장, 놀이 구역, 교육 요소 및 실내 문화 시설 등 다양한 공간 경험의조화로운 혼합을 보여준다. 계절에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이 설계안은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한강의 풍경, 기억의 유산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다 흐릿하게 남아 있는 1960년대 한강의 흑백 사진은 옛 경관을 그리워하게 한다. 우리의 계획은 한강의 풍경을 단절의 풍경이 아닌 치유의 풍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과 같이 유연하게 잔잔히 흐르면서 수평적으로 퍼지는 덮개의 모습은 하늘과 산, 주변의 도시를 차별 없이 끌어안는 도시의 배경이 되어준다. 치수와 교통에만 집중했던 계획을 넘어 물을 품는 삶에 대한 계획을 제안한다. 이는 잊힌 풍경을 되살리고 생태적 회복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이루어가는 첫 여정이 될 것이다. 인위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한강의 풍경을 표현하고자 했다. 대동여지도를 통해 서울에서 산과 물의 중요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강은 도시의 가치를 높이는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서울을 둘러싼 산들은 자연적 방벽이자 도시의 경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산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만들고, 이러한 자연 요소는 도시설계와 조경의 핵심 고려 사항이 되었으며,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한 지속가능한 도시 계획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새로운 연결 한강공원은 한강과의 단절을 완화하고, 시민에게 여가와 휴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도로로 인한 물리적 단절은 남아있어 한강과 도시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어렵다. 이는 도시 개발과 자연 보존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을 시사한다. ‘한강의 풍경, 기억의 유산’은 활기찬 공공 공간과 서울한강공원의 새로운 연결성을 상징하는 디자인을 목표로 한다. 기존 지역의 마스터플랜에 통합될 수 있는 이상적인 볼륨과 레이아웃을 연구했다. 수차례의 스터디를 통해 유연성과 지속가능성이 높고, 탄소 집약도가 낮으며, 공간적으로 흥미로운 부드러운 덮개를 구상했다. 이 덮개는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도시 매트릭스를 대지까지 확장하며 배치되어, 반포지구와 한강공원의 중심축에 완벽하게 들어선다. 이러한 중심적 위치는 보행 방향에서 오는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랜드마크로 정의된다. 덮개는 3면에서 도시를 자유롭게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상하부의 특별한 프로그램이 마스터플랜을 완성한다. 이를 통해 기존 도시와 한강공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새로운 차원의 도시 경험을 제공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한다. 덮개공원 덮개공원은 잊힌 한강 풍경을 담은 조경 공간으로,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릉은 방문객을 자연스럽게 한강으로 이끄는 동선 역할을 해 공원을 더욱 매력적이고 탐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덮개는 반포로쪽 경사로와 한강공원쪽 경사로를 주축으로 큰 축을 형성한다. 또한 동측과 서측 지하 통로와 연결되는 가로를 형성해 보행 친화적 환경을 제공하며, 도시와 한강공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보행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동선을 만들어낸다. 덮개공원으로 진입하는 두 개의 주요 동선을 완만한 경사로로 설계해 유모차 사용자, 노약자 등 다양한 이용자가 무리 없이 이동할 수 있다. 보행자의 안전과 쾌적한 보행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올림픽대로 인접 부분에 식재 마운딩을 적용해 차량 소음을 차단한다. 식재 마운딩에 심은 다양한 나무와 관목은 소음 차단 효과를 극대화할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든다. 더불어 안전 난간을 설치해 보행자와 도로 사이에 물리적 경계를 만들었다. 덕분에 보행자들은 안전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이동할 수 있다. 덮개공원 도입부의 얇은 띠 모양의 대지를 숲공원으로 조성한다. 숲공원은 세 개의 주거 단지와 맞닿아 있다. 이때 반포주공1단지와 접하는 부분에 충분한 완충 녹지를 조성해 주거 프라이버시를 확보한다. 시민들의 이동로는 주거 단지 레벨(21m)보다 7m 낮은 14m 레벨에 위치해 시각적 프라이버시 침해를 방지한다. 또한 주거 유닛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경관을 가리지 않도록 덮개 의 최대 높이와 거리를 설정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더 플로우
오랜 세월 퇴적과 침식을 통해 형성된 한강의 물줄기에서 영감을 받아 강과 도시, 사람들의 흐름이 융합되는 역동적인 서사를 만드는 것을 설계 목표로 삼았다. 한강연결공원은 단순한 랜드마크가 아닌, 한강과 서울의 다양한 흐름을 엮어내는 살아 숨 쉬는 합류점이어야 한다. 새로운 연결공원을 통해 올림픽대로로 인해 단절된 강과 도시의 관계를 회복하여 강이 도시로 부드럽게 흘러오도록 돕고자 했다. 이 흐름 속에 자연과 도시 경관이 자연스럽게 혼합되며 지속가능한 환경이 조성되고, 방문객과 자연을 연결한다. 상승하는 표면과 새로운 강의 흐름 단순히 강으로 확장된 도시공원을 만드는 걸 넘어서 강부터 도시까지 이르는 레벨이 서서히 높아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표면을 만들고자 했다. 연결과 흐름을 주안점으로 두며 자연과 도시 경관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게 하고, 강과 도시 사이의 이동과 상호 작용을 촉진하는 전이 공간을 계획했다. 또한 강과 도시의 조화를 중심으로 디자인적 통일성을 만들고자 했다. 도시는 깔때기를 연상시키는 도로와 다리를 통해 물길을 가로지르며 한강이란 자연에 침범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침범을 역전시켜 강이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게 하고자 했다. 기존의 한강과 신반포로를 잇는 좁은 도로에 놓은 전형적인 브리지 디자인에서 벗어난 깔때기 형태의 연결공원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강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과 도시를 잇는 삼각주 강의 축과 도시의 축이 수직으로 충돌하고 있기에 서로 방해 받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도시 인프라스트럭처를 만들어야 했다. 강과 도시의 축을 자연스레 잇는 삼각주 형태의 연결공원은 지형, 수경 시설, 포장, 계절의 변화 등 여러 켜를 통해 풍부한 경험을 선사한다. 삼각형의 양변을 구부린 형태의 삼각주 디자인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경사로를 만들고 시공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단절의 상징이었던 반포주공1단지 108동은 철거 후 수경 공간으로 조성해 연결과 화합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 새로운 도시 인프라로 단절되었던 강의 흐름을 조경 공간과 엮어 주변 환경과의 연결을 꾀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 패스트스케이프 앤드 슬로스케이프
과거의 한강은 서울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자연 하천으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서울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수용하기 위해 시작된 여의도, 이촌 등 택지 개발과 수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방, 올림픽대로 등 서울을 동서로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건설이 한강변을 따라 진행되며 도시와 단절됐다.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고 서울과 한강을 연결하기 위해 지하 또는 공중에 설치된 나들목, 한강 다리 엘리베이터/계단, 보행교 등은 도로와 제방을 수직으로 통과한다. 한강으로 향하는 이 선형의 장치들은 이동을 제외한 특별한 행위나 경험을 수용하기 어렵다. 반포지구 한강연결공원은 도시와 한강을 선형으로 연결하는 기존 방식을 넘어 평면으로 연결하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평면적 연결에 더해 한강을 향해 빠르게 종적으로 연결되는 보행로 ‘패스트스케이프(fastscape)’와 한강과 횡적으로 마주한 다양한 장소를 담아 느리게 연결되는 공원 ‘슬로스케이프(slowscape)’를 입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한강의 다양한 레벨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순환하는 새로운 입체 네트워크 공원을 제안한다. 도시와 한강을 잇는 공공 보행 네트워크 새로운 공원은 도시의 모든 방향에서 편안한 경사로로 연결되는 열린 공원이 된다. 한강과 서울을 다양한 레벨에서 종과 횡으로 다채롭게 경험하는 장소로서 산책, 휴식, 놀이, 옥외 행사와 같은 다양한 경험과 행위를 제공한다. 반포주공1단지 108동을 부분적으로 보존해 한국 주거 역사 전시관으로 치환하는 문화센터는 외부 공간과 다양한 방향과 레벨에서 연결되어 공원으로 통합되며 공원의 커뮤니티 문화 활동의 중심이 된다. 기존 반포주공1단지에 존재하던 도시의 맥락을 계승 및 발전시킬 수 있는 공공 보행로를 계획했다. 대상지에 접하는 두 개의 공공 보행로를 다양한 속도(fast&slow), 방식(램프, 계단, 엘리베이터), 레벨(공중, 나들목)을 통해 한강으로 연결하며 자연스럽게 동서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입체적인 공공 보행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또한 사람의 흐름뿐 아니라 녹지의 흐름, 물의 흐름을 잇고 한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공중에 담아낸다. 이를 통해 한강의 장소성을 확장해 도시로 연결하는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낸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씨앗숲 깊은 자연과의 조우
씨앗숲 정원은 청주시가 개최한 2024 청주 가드닝페스티벌의 기업참여정원으로 조성된 공공 정원이다. 후원사인 현대백화점그룹은 시민단체 생명의숲과 진행 중인 도시숲운동 후원 사업의 일환으로 이 정원이 조성되길 희망했다. 이는 정원의 개념과 방향 설정에 있어 기본 배경이 됐다. 혼재된 시간의 감흥, 동부창고 대상지인 청주의 동부창고는 2014년 리노베이션을 통해 옛 연초제조창의 담뱃잎 보관 창고를 다양한 문화 및 예술 이벤트와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시민 참여 거점 공간으로 변화시킨 포스트-인더스트리얼 공간이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기존 창고 건물들이 간직한 시간의 흔적과 그 안을 새롭게 채운 다양한 예술적·문화적 체험, 혼재된 시간의 감흥이 주는 장소의 감동이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아쉬움을 느꼈다. 남겨진 창고의 흔적은 이 대지에 쌓인 엄청난 시간의 켜 중 지극히 단편적인 인간의 흔적이 아닌가. 그저 몇 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 땅은 우암산 자락의 숲과 계곡이 무심천까지 연결되었던 깊은 자연이 숨 쉬던 곳이었다. 숲의 관점에서 이 대상지가 가장 빛난 시절은 오히려 창고가 지어지기 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 원생의 숲이 울창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혹시 이곳 어딘가 콘크리트 포장 아래 깊은 자연의 씨앗이 유적처럼 남아 있진 않을까. 보도블록 틈새에서 블록을 들썩하고 들어 올리며 자라나는 잡초처럼, 인간의 손이 닿기 전 원형의 자연이었을 도시 표면 아래 어딘가에 숲의 씨앗이 움틀 날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씨앗숲은 이러한 상상에서 비롯됐다. 나아가 가드닝페스티벌의 취지를 담아 정원 문화 및 도시숲이 동부창고를 시작으로 더 많은 도시로 확산되어 그 싹을 틔우길 바라는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시간이 융합된 비밀의 정원 콘크리트로 뒤덮인 대상지 아래 깊은 곳에 숨죽이고 있던, 원생의 자연을 간직한 숲의 씨앗이 작은 물줄기를 만나 커다란 콘크리트 바닥을 툭하고 깨고 나오는 상상적 연출을 통해, 작지만 커다란 자연의 힘을 표현했다. 동부창고 자체가 간직한 시간의 층위에 창고가 들어서기 전 우암산 자락의 계곡 숲이었던 깊은 자연의 기억을 더하고자 했다. 다양한 습지 및 초지 식재,넓은 콘크리트 패널, 창고와 배수로 등 숲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경관 요소들은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경관이 된다. 공간은 두 개 영역으로 나뉜다. 정원의 입구부는 도시의 콘크리트를 깨고 나온 씨앗숲이 오래 간직해 온 원형의 깊은 자연을 표현한 공간이다. 오래된 숲을 상징하는 키 큰 메타세쿼이아와 원초적 습지 경관을 통해 나이 든 깊은 숲의 경관을 연출하고, 미스트로 자연의 경외적 신비감을 더했다. 땅 아래로부터 솟아난 깊은 자연에 의해 대지를 덮고 있었던 커다란 콘크리트 패널들이 들썩인 모습으로 자연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정원의 상징적 조형물을 표현했다. 안쪽 계수나무와 신나무로 만든 낮은 숲 공간은 리노베이션된 동부창고의 외부 공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시간의 층위의 요소들이 자연을 통해 하나의 경관으로 융합되며 성장하는 숲의 정원이다. 포근하게 위요된 숲 안에 스툴 벤치를 배치해 편안한 휴게 및 산책 공간을 계획했다. 씨앗숲의 근원이 되는 샘물 바위와 좁은 계류는 작지만 큰 변화를 만드는 자연의 숨겨진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정원의 명상 요소가 된다. 식재 계획 도시와 대비되는 자연을 표현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러나 이 작은 정원을 공간에 내재된 시간의 켜와 연결하고 원초성을 표현하는 것은 씨앗숲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우암산의 능선이 보이는 씨앗숲이 터져나온 지점의 바닥에는 자연의 욕망을, 적벽돌의 학교를 배경 삼아 단정한 계수나무 수관을 이루는 심장저心臟底의 잎사귀의 나부낌을, 생명에 무감각한 도시로부터는 숲을 보호하는 망토군락林緣을 담아냈다. 식재의 외관은 크게 네 개로 나뉜다. ① 크고 작은 나무 무리와 여러 질감의 양치류, 숲 숙근초, ② 큰 나무의 얼기설기한 골격과 수로 사이의 드문 하층, ③ 목본-덤불형 관목-아관목-키 큰 숙근초-낮은 숙근초의 명확한 층위, ④ 1번과 3번의 식재 구조를 연결하는 열식과 매스형 초본층. 우선 들썩들썩한 콘크리트 패널부에는 큰 어른 같은 메타세쿼이아가 자리한다. 바늘잎같이 섬세하게 갈라진 잎이며 솔방울을 매단 그러나 낙엽이 지는, 침엽수와 활엽수의 진화 사이에 탄생한 것 같은 이 나무의 기근이 나와 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어린 물철쭉은 갈라진 콘크리트 패널 틈에서 줄기를 뻗는다. 패널 하부에 숨겨진 공간에는 홍지네고사리, 관중 등 양치류, 천남성을 심었다. 오목한 지형 측면 돌무더기 사이로 돌단풍, 바닥에는 양탄자를 만들어 줄 미나리아재비 군락, 산뚝사초, 긴 덩굴로 무리를 만드는 구와산바위취, 육지(건조지)로 올라오면서 등장하는 중간 볼륨의 키 작은 노루오줌, 털머위, 조금 늦은 봄의 레오코줌 ‘그레이브타이 자이언트’, 자란, 섬노루귀와 같은 자생숙근초를 혼식했다. 실제 숲과는 다르지만 숲의 욕망과 생명의 조각을 단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충분한 공중 습도와 유기질의 부재를 보완하고자 토양 개량을 병행했다. 콘크리트 바닥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수로에는 이테아 ‘헨리스 가닛’, 꼬랑사초 등을 드문드문 배치했다.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순백의 단정한 한라백당, 중간 키의 노루오줌, 적당한 군거를 이룰 무늬둥굴레, 호스타 등과 함께 그 사이로 잔잔한 초봄의 군무를 만드는 매화헐떡이풀 ‘닌자’를 계획했다. 병풍처럼 늘어선 좁고 길쭉한 녹지에는 계수나무와 신나무의 열식, 그 하부에 몰리니아 ‘무어헥세’, 무늬북사초, 개맥문동 매스 사이로 라일락 ‘아그네스 스미스’, 알구타조팝나무를 점점이 배치했다. 수평적 매스 사이로 돌출되는 숙근초, 쥐오줌풀 무리, 참나리 등을 심어 자연 발생적 느낌을 강조했다. 씨앗숲의 계절은 봄과 여름에 잔잔하게 개화하는 화관목과 숙근초, 단풍의 그라데이션이 기대되는 목본으로 구성된다. 화려한 꽃은 없지만 잎의 형태가, 식물의 생활형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공공 정원이다. 임의의 군락이 본래의 습성대로 살아가는 과정을 이 정원에서 지켜보며 동부창고의 하나의 외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완성도를 위한 협업 몇년 전부터 봄이면 수많은 지역별 정원박람회뿐 아니라 지자체별로 집중된 정원 공사로 인해 정원 전문 시공사 선정이 쉽지 않게 됐다. 정원의 주 상징 요소인 기울어진 대형 콘크리트 패널들은 공사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디자인 2주, 실시설계 2주, 공사 기간 4주로 처음부터 짧게 잡힌 일정은 치명적이었다. 공사는 힘든 과정이었고 공사비마저 상당히 초과되었다. 하지만 안기수 대표(공간시공 에이원)의 시공과 이양희 대표(스튜디오 천변만화)의 식재 등 다양한 협업과 도움 덕분에 높은 완성도를 갖출 수 있다. 함께 일하는 내내 그들의 추진력과 직업 의식에 감탄했다. 글 김현민 스튜디오일공일 대표 이양희 스튜디오 천변만화 대표 정원설계 및 디자인 감리 스튜디오일공일(김현민, 이현옥, 이세희, 김선우, 박지원, 김아현) 정원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 식재 계획 및 시공 스튜디오 천변만화(이양희) 콘크리트 시공 아름다운길 미스트 분수 및 수경 시설 시공 그린비스(주형재) 후원 현대백화점그룹, 생명의숲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덕벌로 30 동부창고 일원 면적 약 250m2 완공 2024. 5. 사진 안상순, 스튜디오일공일 스튜디오일공일(STUDIO101)의 ‘101’은 100 다음의 새롭게 시작하는 ‘1’을 의미한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곧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통해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바탕으로 작업하고 있는 실천적 조경설계사무소다. 정원, 오피스, 공원, 주거 특화설계, 리조트 및 테마파크 등 실제 시공으로 이어지는 공공과 민간 영역의 다양한 외부 공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북서부 풍경] 도시-지역을 위한 지도책
‘도시-지역을 위한 지도책(Atlas For a City-Region)’은 2020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 사이 초국경지역의 미래와 그 형태, 한계 등을 조사한 후원 연구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질문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첫째, 초국경지역이 아일랜드 북서부 지역에 존재하는가? 둘째, 만약 존재한다면 어떻게 지도에 그릴 것인가? 셋째, 인구 이동과 기후 변화의 장기적 영향, 그리고 브렉시트의 영향을 고려했을 때 향후 200년 그 지역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18개월에 걸친 연구 프로젝트는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다. 같은 주제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세미나도 병행됐다. 초국경지역의 증거들은 일상적으로 초국경적 활동이 관측되는 아일랜드 북서부 지역의 농장과 마을, 공동체에서 현지 조사를 통해 수집됐다. 또한 우리는 지역의 미래 형태를 알려줄 수 있는 요소인 풍경 속 땅 무늬를 관찰했다. 현지 조사의 결론 중 하나는 새로운 국경을 그리는 것이 아닌 국경을 넘나드는 일상적 흐름(벡터)을 포함하는 지도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경을 선이 아니라 풍경으로 이해하면 아일랜드 북서부 지역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있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글(2024년 6월호)에서는 아일랜드 북서부에 초국경지역이 존재하는지를 다뤘다. 이를 위해 현지 조사를 기반으로 초국경지역의 존재 증거를 15권의 책으로 정리했고, 이 증거들은 지도에는 없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묶인 공간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글에서는 나머지 두 질문을 다룬다. 초국경지역을 어떻게 지도에 그릴 수 있을까? 향후 200년간 그 지역은 어떻게 발전할까?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는 하버드 GSD 조경학과 교수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조경의 내러티브와 그 실체를 탐구하고 풀어낸다. 그는 경관 현지 조사(landscape fieldwork)라고 부르는 현장 중심 연구 방법을 통해 복합 경관에서 사람과 환경을 핵심 요소로 다룬다. 이 연재의 번역을 맡은 강준호는 하버드 GSD를 졸업한 뒤 도허티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건축가와 정원사로 일하며 조경과 건축의 접점을 찾고 있다.
구름 먹고 바람 마시던 곳, 소쇄원
관념의 힘 2006년 베를린에 서울정원이 들어선 이후 한국 정원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유럽 정원은 물론이고 중국 정원, 일본 정원과도 다르면서 더 이해하고 싶다고 한다. 단지 그 이유뿐만 아니라 서양 조경과 정원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것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양 문화권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사유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차이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관념의 힘과 유럽인들의 실증적 본능이다. 유럽인은 무엇이든 눈으로 보아야 하고, 만지고 느껴야 비로소 그 ‘존재’를 믿는다. 자연에 있는 것은 모조리 가져다 식물원이나 정원에 심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영국의 저명한 정원 디자이너이자 저술가인 페넬로페 홉하우스(Penelope Hobhouse)는 매일 들어가 일해야 하지 않는 정원은 정원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들에게 베를린 서울정원 툇마루에 앉아 빈 마당이나 먼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이따금 이들의 실물(實物) 집착증이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한국 정원엔 어떤 나무가 자라고 어떤 꽃이 피는지 잔뜩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다소 도발적으로 “사유(思惟)만으로도 정원이 성립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때 물음표로 가득한 청중의 표정을 보니 조금 미안했다. 그래서 윤선도의 오우가를 들려주며 물, 돌,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빛이면 족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원 개념에는 성리학이나 도가적 자연관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유럽 정원처럼 식물, 시설물, 조형물을 채우고 배합하고 조합하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예상한 대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식의 대화를 하다 보면 같은 지구상에 살지만 서로 얼마나 다른지 재삼 확인하게 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지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 MDL
젊은이의 패기 호기로운 시작 작년 이맘때쯤 PWP(Peter Walker and Partners)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피터 워커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진을 보았다. 나이를 찾아보니 1932년생 91세, 오랜 세월을 버티며 조경 현업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는 그와 비교하면 아직 엠디엘은 걸음마를 뗀 수준의 어린아이일 뿐이다. 조경가 정영선의 전시를 보고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살짝 소원해졌던 조경과의 관계에 다시 불꽃이 튄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회사를 시작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펜을, 마우스를, 호미를 든다. 엠디엘은 겁 없는 20대의 패기로 무장한 1인 기업으로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창업 지원과 1인 기업 열풍이 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감이 생겨났다. 설계안을 가지고 그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당히 조경가 세 글자를 명함에 새기고, 인도 허왕후 기념공원 설계공모(2016)에 출품하면서 조경계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조경계 선배들과 경쟁해서 3등의 성적을 거두면서 어깨가 더 올라갔다. 건방지게도 이 정도면 경쟁할 만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하지만, 스물다섯 살의 호기로움이 조경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니 그걸로 부끄러움은 덮을 수 있지 않을까. 느슨한 네트워크,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어린 나이에 겁 없이 회사를 차린 후폭풍일까. 경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인허가, 대관 업무 등 경험과 대처 능력이 필요한 영역에서의 부족함은 쉽게 메꾸기 어려운 부분이다. 호기롭게 회사를 차렸는데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고 했던가. 대학원 시절부터 봐왔던 스튜디오테라의 네트워크 구조에 영감을 받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뭉치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현재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조경작업소 이룸(계획), 수수플랜(설계), 드오르(정원), 시대조경(공간), 스튜디오테라(협력), 경남종합조경(시공)이 함께하며 서로의 부족함과 빈틈을 채워 나간다. 따로 또 같이 뭉쳤다 흩어지며 주어진 공간에 다양한 시도를 해나간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 조경을 하고 있지만, 설계와 시공으로 업역을 한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세상만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새로운 사업과 기술, 방향에 대해 언제나 고민하고 쉽게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늘 조경의 업역이 교육, 계획, 설계, 시공, 재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조경 분야의 확장, 자연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2016년 창업진흥원 프로그램으로 식물 재배기 사업을 구상한 적이 있다. 비록 실체화에는 실패했지만,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조경설계 바깥의 분야로도 세계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한정된 공간과 재료를 다루는 조경 분야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엠디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일을 도모하는 중이다. 그중 하나는 식물 구독 서비스인 ‘더초록’과 한국판 랜드진(Landezine) 조경 플랫폼 ‘엘에이-베이스(La-base)’다. 신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조경 분야에서는 아직 생소한 라이다LiDAR 센서, 360도 카메라를 이용한 맵핑을 통해 대상지를 보는 다양한 방법을 도입하고, AR과 VR을 활용해 설계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등 신기술의 도입에 힘쓰고 있다. 설계자가 재미있으면 클라이언트도 재미있다 우리가 설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재미와 즐거움이다. 대상지를 머릿속으로 체험하고 상상하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은 설계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 아닐까. 계획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누가 더 재미있는 공간을 상상하는지 신입부터 소장까지 경쟁한다. 설계안을 그리고 있는 직원 뒤로 가서 꼰대처럼 묻기도 한다. ‘너는 이 공간이 재미있니?’ 계획하는 사람이 공간을 계획하면서 재미를 느낀다면 그 안은 그 누가 봐도 즐겁고 재미있는 공간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즐거운 과정에서 즐거운 결과물이 나오고, 이는 프레젠테이션 과정에서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설계안은 지금도 즐거움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불나방 정신 수많은 공모, 우리만의 것을 한다. 회사의 시작이 공모이기도 했고, 이름난 설계사무소가 아니다 보니 일을 수주할 수 있는 방법은 공모가 가장 적합했다. 이름을 가리고 어떤 설계안이 가장 대상지에 부합하는지 가려내는 설계공모는 쟁쟁한 선배들과 계급장 떼고 붙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빛을 보면 환각에 이끌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정말 수많은 공모와 제안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생산 작업이 고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즐거운 생각을 대중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만으로 늘 설레고 즐겁다.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는 엠디엘 설계안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공간이 주는 묵직함, 한강에 필요한 스케일과 공간감에 대해 고민했다. 자연과 인공의 레이어가 공존하는 환경의 조성에 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기술사사무소 이수, 스튜디오테라와 함께 큰 이견 없이 협업을 진행하며 앞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는설계안의 높은 가능성을 보았다. 여울공원 전시온실(식물원) 건립사업 설계공모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 원칙을 바탕으로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 건축사사무소, 요앞 건축사사무소와 협업했다. 공간의 구조가 자연스러운 대류를 발생시키고 그에 따른 온도와 습도가 형성되는 것을 계획의 방향성으로 잡았다. 공간적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환경에 맞춰 식생대를 조성한 온실을 제안했다. 동부간선도로 지하차도 상부공간 기획 디자인 공모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공간 상부 공원에 서울 아레나 파크를 제안했다. 크고 작은 공간, 운동, 놀이, 문화, 정원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아레나들이 모여 공원을 형성하는 코딩에 의한 공원 조성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2등에 그쳤지만 그 가능성을 타 공원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직원들과 함께 계획하면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의 프로젝트 청량리 4구역 가로공원 청량리 4구역 기부채납 공원 중 가로공원 부분의 제안 공모 당선으로 작업한 작품이다. 청량리에 새롭게 조성되는 랜드마크인 65층 주상복합아파트의 앞마당 같은 공간으로, 하루의 일조량이 낮은 대상지 특성을 설계안에 녹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처음에 제안한 캐노피 워크와 일부 시설이 BF 심의로 인해 삭제됐고 인허가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곧 개방을 앞두고 있다. 공간와디즈 크라우드 펀딩의 대표 주자인 와디즈의 첫 오프라인 스토어 외부 공간 설계를 맡아 진행했다. 성수동의 옛 건물 마당 공간을 법정 주차 공간, 다양하게 교류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소, 활동적 체험형 행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풀어냈다. 현재는 누적 방문객 30만 명이 넘는 성수동의 핫플레이스로, 제품 및 콘텐츠 홍보 행사, 팝업의 성지가 됐다. 영도 마리노 오토캠핑장 차를 타고 지나가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부산항대교. 그 교각 하부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도시와 바다의 경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캠핑장을 조성했다. 초기의 원형 순환 동선과 캠프 사이트에 변화가 있어 아쉽지만 부산 시민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에게 한번쯤 가봐야 하는 캠핑장으로 소개되고 있어 뿌듯하다. 부경대학교 백경광장 부경대학교는 숲과 보행로, 차량 통행로로 이용되던 학교의 유휴 공간을 보행 전용 광장 겸 휴식과 소통, 지역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넓은 광장을 원하는 학교의 의지와 소나무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절충해 설계안을 만들었다. 봉래산 헬기장 실외정원 우리가 설계한 프로젝트 중 최초로 상을 받은 공간이다. 부산 영도구의 봉래산 헬기장을 정원화하는 프로젝트로, 영도구 천혜의 바다 경관과 봉래산의 숲 경관을 아울러 경험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산지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계획에 어려움을 겪던 직원들이 데크 상세도를 그리며 김수희의 ‘멍에’를 하루 종일 틀었던 즐거운 기억이 남아 있다. 성장과 확장 엠디엘은 이제 10년 차를 바라보고 있다. 하다가 망하면 취업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회사지만 이제는 망하거나 약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가득하다. 피터 워커를 보면 아직 우리에게는 60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거나 무한한 시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성장하고 확장하며 세계관을 구축해 나갈지 궁금해진다. 자연을 표현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땅을 벗어나 우주의 공간으로 자연을 확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엠디엘(MDL)은 조경을 포함한 세상만사에 관심을 둔 젊은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다. 설계자가 계획하는 과정이 즐거우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용한다고 믿는다. 자연 앞에서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유지하고 하나하나 배워 나가며,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선 유행이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혁신적인 것을 산출하고 도입하며 자연을 표현하고자 한다.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천이었으나 천이 아니고 천인 그곳
에피소드 1. 2006년 7월의 폭우 용감한 어린이는 용감한 청소년으로 자랐다. 신도시를 뒤로 하고 이사 간 곳은 양재와 과천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무려 세 번째 중학교. 교복이 예쁘다는 이유로(각주 1) 학교를 고르고 나서 후회막심하게 양재천과 시민의 숲을 따라 왕복 한 시간이 걸리는 등하교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교 입학 사이. 드디어 입시와 결별하고 귀국해 여유를 즐기고 있던 여름 어느 날, ‘비 내리는 양재천을 걷자’는 마음으로 우비를 입고 집을 나섰다. 걸어가는 길에 빗줄기가 강해진다고 느꼈지만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설마 문제가 생기겠나 하며 온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즐겼다(고등학생 시절 우산 없이 비를 맞고 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더욱 그랬던 듯하다). 양재천을 따라 과천 방향으로 한 30m 걸었을까, 수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꿀렁꿀렁.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고 곧바로 발길을 되돌려 귀가를 서둘렀다. 건넜던 징검다리는 이미 물에 잠겨있었다. 수초의 높이가 줄어든 듯 착시가 일어났다. 영국 고전 드라마 ‘닥터후(Docotor Who)’에 나오는 우는 천사(The Weeping Angel)(각주 2) 마냥 눈 깜짝하는 순간 수면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내 인생 첫 수해를 직면했다. 도망이다, 도망. 공원이 된 하천 1997년 양재천은 탄천과 함께 ‘하천종합공원’으로 새롭게 (재)등장했다. 강남구 구간을 시작으로 서초구와 과천시가 합세하면서 약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대규모 하천 공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가장 나중에 진행된 과천시 구간의 양재천 복원 사업은 2003년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타당성 검토 용역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2005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착공됐고, 2006년 말 준공이 완료됐다.(각주 3)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여러 변화가 진행됐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곳이 많으니 공원에 완료란 단어가 있을까 싶다. 다시 말해 2000년 초반까지 양재천에 지금과 비슷한 ‘공원’의 형태가 확연하게 드러난 지역은 강남구와 서초구였다. 과천시 구간 양재천 주변은 본격적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이었고, 이쪽의 양재천은 ‘공원’보다는 아직 ‘천변길’이란 단어가 더 어울렸다. 오히려 화훼 판매를 위한 비닐하우스와 소규모 농사가 이루어지는 복합 농업 경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남구부터 서초구를 지나 천변을 따라 걸어오면 하나둘씩, 그러다 갑자기 떼로, 비닐하우스의 둥그런 천장이 자유롭게 자라난 가로수 위로 드러났다. 당시 양재천은 도회적 아파트 경관부터 농업 경관까지 도시다움과 시골다움이 스르륵 연결되는 경계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레몬색 니트 조끼는 15세 소녀의 심금을 울렸다. 2. ‘우는 천사’는 닥터후 시리즈에 등장하는 독특한 설정의 포식자 종족으로, 긴 방영 기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이 시리즈에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호러 외계인이다. 양자적 방어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으로, 살아 있는 생물에게 관찰 당할 때는 몸이 석상이나 관찰되지 않을 때는 사냥을 시작한다. 3. 이양주, “양재천을 더욱 건강하게”, 『과천 지역연구』, 수원경기개발연구원, 2007, p.130.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있다. @jin.everywhere
용산 너나들이 놀이터
서울시는 2021년부터 권역별 거점형 어린이 놀이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단편적 놀이 시설로 구성된 놀이터에서 탈피해, 아이들의 창의성을 향상하고 폭넓은 활동을 유도하는 놀이터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6년간 추진해 성공을 거둔 ‘창의 어린이 놀이터 재조성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26년까지 시내 5개 권역에 1개소씩 거점형 놀이터를 조성할 계획으로, 현재 광나루한강공원(2022년)과 보라매공원(2024년)의 놀이터가 완공됐다. 지난 4월 공고된 ‘도심권 용산가족공원 거점형 어린이 놀이터 조성 설계공모’는 도심권 어린이 놀이터의 특색있고 독창적인 우수 설계안을 발굴하고자 진행됐다. 잔디 광장 옆에 자리한 기존 놀이터와 주변 유휴 공간(약 3,700m2)을 대상지로 제시했다. 공모 지침은 공원의 기존 이용 행태를 존중하고, 놀이 시설이 서로 연계되어 확장성을 갖는 놀이터 설계안을 요구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모험 및 체험 활동을 수용할 뿐 아니라, 보호자를 비롯한 인근 시민이 휴식과 산책 등 다양한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복합 여가 공간을 제시해야 했다. 김수연(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 김현민(스튜디오일공일 엘앤씨), 민병욱(경희대학교 교수), 유송영(현대건설), 이남진(바이런), 진승범(이우환경디자인), 최혜영(성균관대학교 교수)의 심사 결과, 당선작은 유엘디조경설계사무소의 ‘용산 너나들이 놀이터’가 차치했다. 입상작에는 지엘에이디자인의 ‘용산가족공원 상상나래’와 조경설계호원의 ‘용산놀이마을’이, 가작에는 해율조경설계사무소의 ‘놀이의 거미줄’과 스케이프나인의 ‘벙커(Bunker 185)’가 선정됐다. 이 중 당선작을 간략히 소개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대유평공원 2단계
지난 5월 대유평공원 2단계 조성이 완료됐다. 대상지는 조선시대엔 정조가 설치한 국영농장 ‘대유둔전’으로 활용됐고, 1960년대에는 연초제조창이 들어서며 근대 산업화의 터전이 됐던 곳이다. 하지만 2003년 담배공장 폐쇄 후 20여 년간 도심을 단절시키는 장애물로 전락했다. 수원시는 이러한 대상지를 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2017년 해당 부지에 대한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면서 초기 단계부터 부지 중심에 공원을 두었다. 덕분에 대규모 공동주택단지와 대형 상업 시설이 자리 잡은 부지 가운데에 누구나 이용 가능한 대규모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에이치이에이(HEA)가 설계한 대유평공원은 2021년 10월 말 1단계 준공(『환경과조경』 2022년 8월호)을 완료하고, 지난 5월 17일 2단계 조성을 마쳤다. 시대 변화에 따라 막히고 단절됐던 대유평이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된 것이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기웃거리는 편집자] 영선 업고 튀어
비가 많이 자주 오는 요즘이다. 비를 보면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다.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 아이유의 ‘레인 드롭(Rain drop)’, 태연의 ‘레인(Rain)’. 최근엔 이 노래들을 제치고 이클립스의 ‘소나기’가 비 오는 날 플레이리스트 꼭대기를 차지했다. 정작 노래 가사엔 ‘비’란 단어가 다섯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나의 애착 곡들을 제칠 수 있던 이유는 이 노래의 배경 때문이다. 최근 선풍적 인기를 이끈 ‘선재 업고 튀어’의 ost다. 드라마 애청자로서 소나기를 듣고 있으면 비를 맞고 있는 류선재에게 노란 우산을 씌어주는 임솔이 생각나며, (나의 추억인 마냥) 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류선재 역할을 맡은 변우석의 피지컬, 서로만 바라보는 두 주인공의 서사,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섬세한 연출 등 다양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타임 슬립이다. 유명 아티스트 류선재의 죽음으로 절망했던 열성 팬 임솔이 최애인 류선재를 살리기 위해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2008년으로 돌아간다. 타임슬립 연도가 2008년인 점이 드라마를 보게 했다. 나에겐 2008년은 이마를 뒤덮은 풀뱅 앞머리와 머리카락 끝이 귀와 닿을 정도의 C컬로 말린 풍성한 버섯 머리가 유행하던 학창시절이다. 그네 의자에 앉아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던 생크림을 바른 식빵을 먹기 위해 갔던 캔모아 카페,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화려한 자막과 효과로 편집한 UCC 등. 그 당시 내가 직접 가던 장소와 했던 것들이 드라마에 나오니 반갑기 짝이 없었다. 시대 배경이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두 주인공의 반전 같은 사랑 이야기가 드라마에 과몰입하게 만들었다(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바람에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이 이야기는 2회 엔딩부터가 진짜다).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면서 타임 슬립이란 장르를 언제 알게 된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처음은 2012년에 방영한 ‘옥탑방 왕세자’다.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의 왕세자 이각과 신하 3인방이 세자빈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중 현대로 타임 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조선시대 사람이 현대 신문물에 적응하는 과정이 재미있고, 과거의 관계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드라마를 통해 타임 슬립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고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 혼자만의 타임 슬립 붐이 일었고 타임 슬립 드라마와 영화는 다 챙겨 봤다. 타임 슬립 영화, 드라마를 보면 타임 슬립으로 과거와 미래 중 어디로 갈지 고민하곤 한다. 둘 다 가고 싶어 고르기 어렵지만 과거에 마음이 더 기운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개발되지 않은 땅을 사 한탕 크게 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최근 어느 할머니의 말로 인해 속물적 이유 말고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의 주인공인 조경가 정영선이다. 전시 연계 학술행사인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에서 진행된 ‘정영선과의 대화’는 정영선이 날것의 대상지를 마주한 그때 그 당시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특히 포스터 한가운데를 차지한 바위가 상상력을 키웠다. 이 바위는 남해 사우스케이프의 암각 동산으로, 정영선은 암각 동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이 바위를 없애보려고 했지만, 깨다 지쳤는지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 바위가 너무 좋더라고요. 보자마자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다듬어, 주변을 두른 건축물의 다른 고유 기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물과 꽃을 더”(44쪽)해 만들었다고 했다. 이를 들으면서 정영선이 마주했던 다듬지 않은 바위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이때로 타임 슬립해 정영선 옆에 서서 그와 똑같은 시선으로 바위를 보며 그의 고민의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을 뿐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대상지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긴 게 정영선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더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기후가 정말 위기구나를 실감하는 요즘이라서 날것의 자연을 만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이가 선재를 살리기 위해 선재를 업고 튄 것처럼, 자연을 구하기 위해 (정)영선을 업고 튀어야 할 수도.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기대만큼이나 걱정되는 마음도 컸다는 걸 고백한다. 어떤 변명을 해봐도 자격지심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말이다. 조경이 나무 심는 일로 인식되지 않길,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는 식물을 무기로 공간을 치장하는 일로 여겨지기를 않길,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보이길. 정영선이 식물을 손수 심고 작은 정원을 가꾸며 기뻐하는 소박한 할머니처럼 비춰지기보다 그의 작업 영역이 전 국토 곳곳에 퍼져 있는 모든 공공 공간이라는 점이 드러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꾸 표제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땅에 쓰는 시’. 이 낭만적인 수사들을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꾸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감성에 치우친 표현이 아닐까 하고 들여다봤더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경학과에 입학한 뒤 들은 첫 수업에서 조경의 정의를 배웠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유용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한 종합 예술 과학.” 아름답고 유용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형성하는 일은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한 일일 것이다. 시는 운율, 울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언어의 특성을 이용해 문학 작품 중에서도 회화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장르이니 종합 예술이라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제 해결되지 않은 건 ‘과학’이다. 깨닫고 나니 생명, 자연, 식물, 지구, 기후 위기 같이 사람들에게 더 닿기 쉬운 어휘에 밀려 설계, 계획, 마스터플랜, 도면 등 과정을 담은 단어들이 저 먼 곳으로 밀려나면 어떡하나 시키지 않은 우려가 시작됐다. 늘 그렇듯 사서하는 걱정을 떨치기가 더 어렵기 마련이다. 조경의 목표와 결과는 잘 설명된 셈이다. 결국 조경의 작업 과정을 이야기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배정한은 “많은 언론 기사와 인터뷰는 정영선의 조경을 ‘땅에 쓰는 시’로 비유하곤 한다. …… 그러나 ‘시’라는 어휘가 연상시키는 감상적인 의미가 그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작업을 낭만적인 영역에 가둬버릴 위험도 있다”고 말한다. 이어 정영선의 여러 말을 인용하며 “그가 말하는 시는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태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정리하며 “정영선의 작업을 정영선 고유의 경관으로 만드는 것은 부지의 조건과 맥락을 세심하게 독해하고 섬세하게 연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땅에 쓰는 시’로 비유되기도 하는 그의 태도는 ‘관계’ 혹은 ‘관계 맺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22쪽) 이를 통해, 시라는 단어가 조경의 결과물이 아닌 그 과정에 집중했기에 선택된 단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정영선의 작업을 시라 일컫기보다 작업 태도와 그 과정을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김아연은 정영선 조경 속 “식물 하나하나가 시의 언어”이며,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특유의 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25쪽) 정영선의 작품은 단순한 형식을 다루는 것을 넘어 서식처에 기반을 둔 생태계를 품은 생태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 본래 자연이었던 것과 설계한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김아연의 말처럼 “정영선의 작품은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정영선 조경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영선은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깊은 울림이 뜻하는 바는 김아연이 말한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와 결이 같을 것이다. 스스로자自, 그러할 연(然)이라는 한자에서 볼 수 있듯 자연스러움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아모레퍼시픽사옥과 같이 ‘보이는 정원’(각주 1)도 있다. 하지만 대상지의 규모가 커질수록, 생태계의 원리를 더 깊이 따르고 그 흐름이 진짜 자연을 향해 흐를수록, 정영선의 작업처럼 자연과의 경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면 조경은 더욱 보이지 않게 될 확률이 높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조경을 잘해서 사람들이 절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아도 또 듣고 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조경 작업 이야기를 하는 것. 피곤하고 고되지만 그 방법뿐이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조경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이다.(각주 2) **각주 정리 1. 이명준, “비평: 정원섬, 보이는 정원”, 『환경과조경』 2018년 8월호, p.30. “조경이 ‘보이지 않는다(invisible)’고 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 설계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하여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예술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생태적 성능을 지닌 경관을 만들기 위한 조경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 랜드폼을 디자인하는 실험이 빈번하지 않은 국내에서 아직 조경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인식적으로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조경은 좀 더 보일(visible)필요가 있다.” 2. 김경주의 시 ‘드라이아이스’의 한 구절.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낭만은 그런 것이다/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PRODUCT] 삼원색처럼 다채로운 쉼터, 써클 트리오 퍼걸러
하나의 퍼걸러 안에서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건의 휴게 시설 전문 브랜드 ‘푸르너스(Prunus)’는 다양한 이용자의 행태를 고려하며 자연을 비롯한 외부 공간과의 조화를 꾀하는 휴게 시설을 제작한다. 써클 트리오(Circle Trio) 퍼걸러(이하 써클 트리오)는 부산의 한국과학영재학교 단지 내 오작공원에 조성한 대형 조합 퍼걸러다. 학생 기숙사인 직녀관과 견우관 사이 오작공원 중심부에 위치한 써클 트리오는 학생과 교직원의 창의적 활동과 휴식, 친목 도모를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조성됐다. 써클 트리오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박스 형태 건축물의 단조로운 경관을 상쇄할 수 있는 원형의 셸터로 디자인됐다. 크기가 다른 3개(대, 중, 소)의 원형 퍼걸러를 삼원색 다이어그램처럼 배치했다. 각 공간에는 학생과 교직원의 다양한 휴식과 학습 행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가든 테이블, 평상, 바 테이블 등 다양한 휴게 시설물을 설치했다. 또한 퍼걸러 지붕의 높낮이를 다르게 해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봤을 때 지붕 선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했다. TEL. 031-943-6114 E-MAIL.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