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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맥시멈과 미니멈
  • 박승진
  • 환경과조경 2024년 8월

설계는 생각을 도면 위에 그리는 행위다. 머릿속 이미지를 시각화해 명확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 반복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도면 위에 그려진 이미지는 다시 생각을 구동하게 만들고, 조정된 형태로 도면 위에 반영된다. 이러한 작업에서 설계자는 희열을 맛보기도 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려진 도면은, 나름 완성된 도면은, 실제로 구현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최종의 결과물이며 설계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난 창작물이다.

 

생각은 어떻게 정리되는가

설계의 단초는 다양하다. 건조한 문구로 채워진 과업지시서일 수도 있고, 열정적인 건축주와의 토론 결과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결론은 ‘잘 만들어 주세요.’ 그 순간 공은 이제 설계자에게 넘어온다. 답사하고 조사한다. 초기의 생각들은 간단한 스케치로 남겨진다.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설계자의 의지가 투사된다. 욕심이 의지로 착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디에서 보았음 직한 멋진 이미지를 구현해 보고 싶은 생각에 도면은 점점 과감해진다. 과도해진다. 생각이 정리될 즈음에는 엇나간 선들도 함께 소거되어야 하나, 끝까지 살아남아서 설계자를 괴롭힌다.

 

땅에 집중하자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다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미사여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집착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왜 만들고자 할까, 이 땅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없어도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park 1.JPG
커다란 숲 아래 조경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있다. 밀도 높은 수목, 다양한 폭의 산책로, 많은 휴식 공간들, 편안한 벤치, 수공간, 분수, 빈틈없는 지피 식물. 삭막한 주변 환경의 열악함 위에 가장 풍성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이 필요했다.

 

땅에 집중하자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다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미사여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집착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왜 만들고자 할까, 이 땅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없어도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2007년 서울아산병원. 조경 공간이 구현될장소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했다. 한쪽에는 거대한 병원 건축물이, 반대편에는 방대한 주차장이 있다. 바닥은 지하 주차장 상부, 길이 300m와 폭 60m. 웬만한 공원 규모에 버금간다. 아픈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직원까지 하루 유동 인구가 4만 명쯤 된다고 했다.


밀도 높은 숲이 필요했다. 나무는 최대한 조밀하게, 높은 키로 건물을 가릴 수 있기를. 환자들이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는 넘치더라도 많게, 나무 아래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많게, 오래 앉아도 불편하지 않은 벤치를 충분하게, 풀과 꽃과 나비를 많이 만날 수 있게, 물가를 걷는 즐거움을, 물소리는 듣는 재미를, 어디 한적한 곳에 숨어서 미어지는 가슴을 달랠 수 있기를. 정영선의 생각은 분명했다.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콘크리트의 건조함밖에 없는 장소는, 완전히 다른 것들로 채워질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병원이었다. 설계자의 과욕이 표현될 공간은 없었다. 형태는 기능에 충실해야 했고, 디자인적 제스처는 배제되었다. 준공 후 15년 차, 숲은 높게 자랐고 여전히 환자들로 넘쳐난다. ‘맥시멈(maximum)’은 땅에 집중한 결과였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2008년 뉴욕 주 원불교 원다르마센터.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파크웨이를 따라 두 시간 쯤을 달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저 멀리 애팔래치아 산맥이 보이는 낮은 구릉의 대상지. 땅은 아름다웠다. 남겨진 숲, 완만한 구릉을 따라 흐르는 넓은 초지, 그림 같이 자라난 야생 사과나무, 언제 비가 왔는지 아직 습지로 남아 있는 낮은 계곡.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몰려오니 금방 후드득 비가 내린다. 그러다가 언제 개었는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진다. 여기는 원래이런 곳이라고 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의 변화무쌍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땅.


건축가는 이곳에 명상을 위한 집 몇 채를 설계하고 있었다. 한국의 시골집을 닮은 구조라고했다. 규모는 소박했고, 배치는 자연스러웠다. 땅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 미주 원불교에서 추진하는 명상 공간을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 ‘조경’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여기에 무엇을 더한다는 말인가. 땅을 깎고 담을 올리며, 나무를 심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형도를 분석하고, 스터디 모형을 만들고, 답사한 자료들을 모았다. 이쯤 되면 설계자의 노트는 이런저런 스케치로 채워지고 있어야 하나, 여전히 빈 종이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결론은 의외로 명쾌하고 단순했다. 조경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걷기 명상을 위한 길을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길은 굽이굽이 흐른다, 충분히 좁게 만든다, 한눈에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지형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미니멈(minimum)’ 디자인의 전략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설계는 도면집 두께로 판단되지 않는다. 생각은 땅을 이해하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 필요한 것들은 충분히 담겨야 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과감히 배제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맥시멈이든 미니멈이든 정영선의 작업은 늘 땅에 집중한다. 그가 그의 작업을 ‘땅에 쓰는 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에서 실무를 했다. 2007년 지금의 사무실을 열었다. 조경건축가로서 푸른 별 지구,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 자연과 도시와 정원, 평범한 일상의 사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서안에 재직하면서 정영선과 함께 워커힐 마스터플랜, 삼성전자 30주년 기념공원, 서울아산병원 등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후 loci를 운영하면서 뉴욕 원다르마센터,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과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강릉 시마크호텔, 남해 사우스케이프 등 여러 작업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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