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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협업의 유산을 읽다
  • 전은정
  • 환경과조경 2024년 8월

정영선의 ‘서양조경사’ 강의는 당시 대학교 3학년 조경학도들에게 서양 정원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어 주었다. 4학년이 되자 한국 정원을 하나라도 더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는지 지금도 들어가기 힘든 성락원 복원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1987년 가을, 전국 학생졸업작품전에 대학별로 출품해 경복궁역에서 전시와 심사가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자리가 모자라 한 작품이 걸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 팀만 남겨져 발을 동동 구르다 마침 어둡고 구석진 자리를 발견하고 근처 목공소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작품을 걸게 되었다. 

 

우연히 이 과정을 지켜보던 심사위원 정영선은 보통의 작품과는 달리 재개발 계획에 관한 설계와 모형을 들고 나온 우리 팀에게 가장 잘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이후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의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고, 졸업한 뒤에는 그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자연스레 환경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방학 중에는 서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정영선은 나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와 함께한 여러 프로젝트 중 의미 있는 두 개의 마스터플랜과 비영리 재단과 협업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선유도공원 설계공모

1999년 10월 말 선유정수장의 공원화 설계공모가 열렸고, 나는 설계공모 PM을 맡게 되었다. 대상지를 처음 만났을 때, 유학 시절 논문 주제였던 ‘장소의 기억-베르시 공원Le Parc de Bercy’이 떠올랐다. 파리 시가 오랜 기간 조사 및 연구 후 공원의 성격을 결정해 설계공모를 열었던 베르시 공원과는 달리, 선유도공원 설계공모에 주어진 시간과 자료는 몹시 빈약했다. 장소성 보전을 위해 기존 정수장 시설을 존치하거나 재활용하라는 지침이 따로 없었듯이 건축 도면은 제공되지 않았다. 선유도는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신선이 노니는 섬처럼 아름다운 선유봉이었다는 것, 과거 섬 안에 큰 절과 유명한 약수가 있었다는 것을 지역 역사에서 찾으면서 물과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료를 찾으면서 정수장 지하실에서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가 설계한 묵은 도면집을 찾아냈고, 직원 허락 하에 개별 건축 도면을 복사할 수 있었다. 복사해 온 건축 도면을 누더기처럼 이어 붙이고 다시 도면화해 현황 모형을 만들어 보니 현장에서 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공간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정수장의 핵심 시설인 하부 공간에 주목했고 정수 공간의 흔적을 일부 남김으로써 장소의 기억을 회생시키면서 물과 수생 식물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부여하였다.

 

정영선은 젊은이들과의 협업에 포용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었다. 당선 후 부분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마스터플랜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그의 강한 의지로 지켜지고 실현되었다. 당시 산업 시설의 재활용에 대한 시선이 지금 같지 않아 어려움도 있었다. 취수 펌프장 건물 구조는 마치 수변에 다리를 걸친 정자를 떠올리게 해 정자에서 조망을 즐겼던 선조들의 풍류를 재현하는 의미에서 선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유도의 낭만적 장소성을 되살리고 한강 너머로 마주하고 있는 망원정과 함께 장소의 기억을 이어주는 상징적 공간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선 후 서울시 심의에서 어느 시의원이 선유정을 지적하며 진짜 한국 전통 정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원안을 관철하지 못했다며 정영선은 심의를 나오자마자 너무 속상한 나머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화한 적도 있다.

 

그는 건축가와의 협업을 자주 강조했다. 실제로 공모전 팀 구성에 건축가가 포함된 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유도공원은 당선 후 건축과의 협업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비슷한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는 건축가와의 작업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다. 이때의 교훈을 깊이 새겨 프로젝트의 규모와 상관없이 건축가와의 협업이 필요하다면 초반부터 같이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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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공원 설계공모 당선안 마스터플랜

 

 

환경과조경 436(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전은정은 조경포레 소장이다.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거쳐 파리 라빌레뜨 국립건축대학/국립고등사회과학대학원 협동박사과정 ‘정원, 경관, 지역’의 D.E.A.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2004년 사무실을 열었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사단법인 도코모 모코리아 이사로 활동했다. 김해 수릉원, 동경주재 주일한국대사관, 강릉 라카이 샌드파인 리조트 조경설계 등을 수행했다. 용산공원 국제공모에서 서안과 협업해 3등에 당선된 바 있다. 틈틈이 설계와 시공을 병행,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등 다수의 개인 정원을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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