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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기록하다
기록 작업
  • 이수학
  • 환경과조경 2024년 7월

시작하다

처음부터 그것이 그리 되리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 ‘한국정원 톺아보기’와 2000년 ‘조경공방나무’ 두 개의 누리집을 꾸리면서 두 해 정도 지났을 때 이것을 묶어 책을 내면어떠한가 생각했다. 책 말미에 밝혔지만,(각주 1)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굳게 가다듬어 정하는’ 다짐의 의미로 만든 것이었다. 세상에 내어놓는 작업이 쌓이고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때 묶어 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해 보자는 심산으로 만든 책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허공을 향한 날 선 비판과 자의식만 가득한 책이 됐지만, 그때 책을 묶으면서 앞으로 오 년에 한 권씩, 조경, 그중에서도 설계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자 했다. 지금 보면 가당찮은 얘기였지만 그 취한 말醉言(취언)이 개인적인 기록의 시작이었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기록의 한자를 살펴보면 마음 다듬어 쓰다 혹은 마음에 새기다의 ‘기(記)’와 중요한 일을 퍼 올려금속에 적다의 ‘록(錄)’을 합친 낱말이다.(각주 2) 그래서 다시 풀어보면 ‘수만 가닥의 말 중에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말을 지워지지 않는 금속에 새기듯 남겨 둔다’는 뜻이 된다. 뜻풀이를 들여다보면 기록을 위해 ‘내용’과 ‘방법’에 앞선 두 개의 전제 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을 담아 둘 것인가 하는 내용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와 어딘가에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새기는 ‘실천 행위’를 전제로 한다.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지향점과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새기다’라는 실천 행위는 꾸준한 마음과 부지런한 몸을 바탕으로 한다.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했던 그 책은 자신을 향해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는 행위였다. 그 기준은 앞으로 던져질 수많은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이고, 질문과 질문 사이의 간극이 큰 성긴 그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근 질문은 촘촘해지고 또한 정치(精緻)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미로 같은 누리집에 남겨진 기록 혹은 질문은 이십여 년 시간의 중첩이 만든 착시다. 모두 육백여든한 쪽의 기록을 환산해 보면 달에 두 쪽 정도 글이나 그림을 남긴 것이 꾸준함은 인정하겠지만 부지런하다 할 수 없다. 꾸준함도 2021년부터 두 해 넘게 온전히 작파(作破)했다가 작년에 조금 보수 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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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벌 그림을 묶은 두루마리, 2024년 5월 14일

 

 

왜 기록하는가

작년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가 던진 네 개의 질문에 답하면서 ‘누리집의 시작은 조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고 얘기했다.(각주 3) 1999년, 척박한 조경 문화의 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주리라 기다리지 말고 비판의 칼을 너 자신에게 돌려서 너부터 시작해라. 그 시작이 한국정원 톺아보기에 있는 ‘창덕궁 후원 산책하기’(각주 4)다.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각주 5)라는 짧은 글(小考)을 쓰고 이전에 답사하며 찍어둔 사진으로 산책하듯이 웹을 어슬렁거리자고 만들었다. 그때 후원은 부용지와 연경당이 있는 애련지 주변만 개방하고 나머지 구간은 허가받아야 들어 갈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기록의 대가들이 살던 조선시대와 만났다. ‘궁궐지宮闕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만나고 ‘동궐도東闕圖’라 불리는 그림을 만났다. 당시와 달리 많이 변형되었지만, 땅에 각인된 후원의 흔적 사이를 걸으며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그곳은 오백 년 동안 짓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바뀌는 일상과 사건의 교직交織을 마주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그림과 글, 땅 위의 기록으로 인해 가능했다. 짧은 글에서 얘기했듯이 기록이 하나의 텍스트로 읽히고 각각의 텍스트는 상호 교차하면서 해석적 순환을 이룰 때 우리는 좀 더 풍부한 시선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이때 과거는 지나간 망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의식의 형태로 현존하는 감각적 인식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하나의 이유다.


 

환경과조경 435(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태도는 설계설명서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지만 조경에 대해 특히 그 중에서도 설계에 대한 최저생계비가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수학, 『태도_조경 | 행위 | 반성 | 시작』, 녹색나무, 2002, p.177.

2. “記(기)는 言(언)+己(기)가 합쳐진 형성 한자로 ‘己’는 실가닥을 가지런히 하는 실패의 형상으로 말을 다듬어 쓰다, 마음 새기다의 뜻을 나타나고, 錄(록)은 金(금)+록의 형성 한자로 ‘록’은 물을 퍼 올리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퍼 올려서 금속에 적다의 뜻을 나타낸다.” 민중서림 편집국 편, 『한한대자전』, 민중서림, 1998, pp.1900, 2134.

3. 이수학, “네 개의 질문에 답하다”,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 2024, pp.90~95.

4. www.ateliernamoo.xyz/jongwon_koreangarden/huwon/index.html

5. 이수학,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28(1), 2000, pp.92~108.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트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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