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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
기록 작업
  • 박승진
  • 환경과조경 2024년 7월

골든 레코드

“안녕하세요?” 한국인 신순희 씨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 짧은 인사말이 담긴 골든 레코드는 지금도 지구로부터 200억km 이상 떨어진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 1977년 8월 발사된 보이저호는 예정된 임무인 태양계 탐사를 마치고도 47년째 현역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비행 중 조우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에 지구의 문명을 알리는 것. 이 12인치 크기의 레코드판 이름은 지구의 소리(The Sound of Earth). 지구의 자연과 문명, 과학 기술, 문학 작품,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이미지와 소리 정보가 담겼고, 한국어를 포함한 55개국의 언어로 녹음된 인사말이 함께 실렸다. 알루미늄 보호 케이스에 재생기가 함께 보관되었는데 10억 년 이상의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실제로 이 레코드가 외계 생명체에 전달될 가능성보다는, 다가올 인류 멸망에 대비해서 지구의 마지막 기록을 영원히 남기는 것에 더 주목했다고 한다. 잊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책상 서랍

서랍은 늘 닫혀 있다. 무언가를 넣을 때 잠깐 열릴 뿐 대부분은 닫혀 있다. 서랍 속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층 혹은 3층으로 된 서랍을 나름 용도를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잡동사니가 쌓이고 분류도 엉망이 된다. 그래서 서랍은 작은 창고가 되기 쉽다.

 

창고는 보관이라는 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선별하고 버리는 작업을 동반하는데, 가끔 이 창고 정리가 위로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오래된 물건은 잊힌 기억들을 소환한다. 고장 나 멈춰진 손목시계, 닳아서 해진 지갑, 수십 년 전의 학생증, 쓰다만 메모장, 희미해진 영수증, 잘려진 비행기 탑승권, 정체불명의 U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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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노트는 가장 직관적인 설계 메모 도구다. 개략적인 콘셉트 스케치, 디테일 아이디어, 기억해야 할 텍스트까지 시간 순서대로 그리고, 쓴다.

 

 

그리고 지우기

설계 작업의 대부분은 생각을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공간은 실존하고, 구현된 실체로 의미를 갖는다. 설계는 가상의 공간에서 진행된다. 빠르게 그리고 지울 수 있다. 지워지지 않는 펜과 잘 지워지는 연필의 궁합은 중요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신속히 구분하는 행위는 설계 전략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우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버려지는 종이의 무게도 증가한다. 살아남은 종이는 기록물의 지위를 획득한다. 책상 위에 놓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어제까지는 이면지였는데 오늘부터는 기록물이라니.

 

종이 드로잉의 힘은 강력하다. 생각이 실체적으로 구현된다. 대충, 빠르게, 정확히, 모호하게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려진 펜의 운행 궤적을 잘 보고 있으면 그린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도 한다.

 

종이 드로잉은 일종의 미니어처다. 높이 값을 생략한 모형이다. 고유의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며 질감의 상상이 가능하다. 시선을 바꿈으로써 간단히 투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줌인과 줌아웃도 손쉽다. 무엇보다 종이 드로잉은 대체할 수 없는 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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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드로잉은 쌓여가는 기록물이다. 디지털로 이미지를 저장하기도 하지만 원본은 크기와 무게를 갖고 있어서 그 자체로 성과물이고 결과물이다.

 

일 또는 일상

집안에서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걷는다. 팔을 움직여 허공을 휘젓는다. 급기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초기 설계안은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결코,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과 일상은 태생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일은 일상의 일부분이다. 설계 작업자들한테는 더욱 그러하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정하고, 메모하고, 검색한다. 어떤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또 대상지를 답사한다.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자료를 탐색한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걷다가, 운전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상은 총체적인 설계 과정이다.

 

기록의 환경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손안의 스마트 기기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메모가 편리해졌고 검색도 빠르다. 손쉽게 이미지를 캡처하고,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다. 위치와 시간 정보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다. 이미지의 변형과 편집, 공유가 자유롭다. 음성과 영상 같은 동적 정보를 실감 나게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는 우리 생활 대부분에 필수가 되었고, 설계 작업자들은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기록하고 있고 또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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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원본은 카메라나 스캐너 같은 디지털 장치를 통해 ‘저장’되었다가 다시 책이라는 형식으로 편집되고 출력된다. 기록은 책뿐 아니라 다양한 시각 미디어로 재생산된다.

 

도큐멘테이션

디지털 방식의 기록물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적 사고가 필요하다. 체계적인 정리 방식을 요구한다. 창고에 쓸어 담기와 같은 아날로그적 행동은 훗날 기록물을 다시 불어올 때 험난한 과정이 수반된다. 드로잉 원본은 보관 자체가 의미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디지털 자료들은 나열된 숫자에 불과하다.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은 저장된 디지털 이미지를 책이라는 실체로 묶어내는 작업이었다. 이제 기록물은 3가지 형태로 남게 되었다. 드로잉 원본과 디지털 이미지, 그리고 책. 

 

책을 디자인하는 것은 공간을 설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건은 공간을 점유하는 실체다. 크기, 무게, 부피, 질감을 갖는다. 디자인은 각각의 디멘션을 정의하는 것이다. 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순전히 작업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가로 120mm, 세로 170mm, 두께 45mm는 공간 설계의 성과물이다. 효율적인 출판 규격을 벗어날 것, 크기에 비해 두께감이 있을 것, 책등의 제본 형식은 기록물임을 암시할 것, 몇 가지 설계 원칙을 더해 표지는 모호할 것, 직관적이지 않을 것. 책을 위한 평면도와 입면도, 투시도와 스케치, 스터디 모형과 실물 목업 작업이 이어졌다.

 

이미지들은 일과 일상을 넘나든다.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작업하면서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미지들이다. 해상도가 좋지 않아도, 일부가 잘려 나가도 괜찮다. 어떤 순간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설계 작업을 마치고, 서문에 이렇게 썼다.

 

“작업은 늘 조심스럽고 늘 흥미진진하다. 모든 작업은 땅 위에 구축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좌뇌와 우뇌, 양팔과 양손 그리고 두 다리의 끊임없는 구동을 요구한다. 긴장과 이완의 지속적인 반복, 불안과 안도의 이상한 동거, 진척과 되새김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행은 설계 작업자의 숙명이다. 여기에 더해 상습적 좌충우돌과 치명적 시행착오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찢어진 메모지에, 혹은 값비싼 몰스킨에, 옐로 페이퍼의 구겨진 한 모서리에도 그 흔적은 남는다. 이제는 휴대 장치가 만들어내는 고해상도 이미지까지 가세하므로 기록들은 차고 넘친다. 십 년의 작업 기록,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으나, 모든 기록을 담을 수는 없었다. 500여장의 이미지를 따로 모아 묶는다. 작업과 일상은 뒤섞이기 마련이다. 구분하지 않았다. 친절하지 않다는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정리라는 행위는 가끔 무의미한 과장과 무책임한 소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대신 책의 말미에 기록된 이미지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설계의 부산물 혹은 기록물

공간 설계의 종착지는 현장이다. 지구 위도와 경도, 고도의 교차점에 무언가를 만든다. 현장은 가시적이며 입체적이다. 모든 생각과 고민, 대화는 이 특정 지점을 향해 당당하게 출발하지만 모두 무사히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록은 남는다.

 

설계 작업은 많은 부산물을 남긴다. 부산물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맞는다. 버려지거나 남거나, 정연한 형태로 제본된 결과물은 수많은 부산물의 결과다.

 

남겨진 기록물은 아카이브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설계의 결과물이 도착한 종착지가 전혀 다른 목적지였을 때, 보존된 아카이브는 작업의 원형이 된다. 현장의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예측 불가의 좋음보다는 생각보다 더 나빠질 확률이 다소 높다. 결과에 승복했을 때, 살아남은 기록물은 위안이 된다.

 

가끔, 서랍을 열어보거나 모여진 디자인 노트, 쌓아 놓은 드로잉 더미를 들춰본다. 해지거나 변색된 물건들, 번진 잉크 자국, 쓰다가 멈춘 연필의 필적, 아직 끈기가 남아 있는 테이프 흔적.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 또는 별표. 누구에게는 의미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설계 작업자에게는 생생한 삶의 증언이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인 서안에서 설계 실무를 했다. 워커힐호텔, 서울아산병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7년에 현재의 사무실을 열어 풀무원 물의 정원, 남해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 강릉 시마크호텔, 아모레퍼시픽의 기술연구원 및 오산 뷰티캠퍼스,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통의동 브릭웰정원, 대구 미래농원(mrnw) 등을 설계했다. 2018년에 10년의 작업 기록집 『도큐멘테이션』, 2021년에 글 모음집 『텍스트_북』을 독립출판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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